패싱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조용한 집안에 전화벨이 울린다. 아이가 자고 있어서 얼른 수화기를 들어야 하는데도 왠지 받기 싫어질 때가 있다. 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날 알지도 못하면서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전화...“안녕하세요. 사모님, 여기 부동산투자 회산데요. 좋은 투자정보 알려드리려고...” 둘째, 내 이름 석 자만 아는 경우, “안녕하세요. @@@님. 저희 &&&를 이용해주셔서 감사드리구요. 회원님 같은 우수회원님들에게 감사의 마음 전하기 위해 이번에 특별히 ##를...” 솔직히 이 두 전화는 별 거 아니다. 무시하고 끊어버리면 되니까. 문제는 세 번째 경우다. ‘한동안 뜸~했었지. 웬일일까 궁금했었지~’ 이 노래가 생각날 정도로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 썩 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앞의 경우처럼 싹 무시할 수도 없다. 근데 그 친구가 대뜸 집에 오겠단다. 오겠다는 사람 막을 수 없을뿐더러 오랜만에 친구들 얘기 좀 들어볼까...하는 마음에 초대를 한다. 하지만 결국엔 후회를 한다. 내가 왜 오라고 했던고...ㅠㅠ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가까이 만난 적 없던 그들은 친구와 실컷 수다를 떨고 싶은, 내 소망을 아주 가뿐히 넘긴다. “그래, 그냥 집에 있는거야? 아무 일도 안하고? 남편이 뭐라 안해?” “요즘 세상에 집에서 살림만 하는 주부가 어딨니? 이런 저런 사정이야 있겠지만 알고 보면 그게 다 무능력하다는 증거야” 그리곤 자신의 방문목적을 드러낸다. ‘이거 써보면 정말 좋다’는 판매에서부터 ‘나랑 같이 일하자’는 다단계사업, ‘이것 하나는 준비를 해두라’는 보험에 이르기까지...난데없이 등장해선 평화(?)로이 살고 있는 날 휘저어놓기 일쑤다. 그래서 내게 한동안 뜸...했던 친구의 전화는 경계대상 1순위다.




<패싱>의 주인공 아이린은 자신 앞으로 온 편지를 받고 한참 망설인다. 발신인은 없지만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데다 내용 역시 어떨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읽어보기 싫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편지를 읽고 만다. 두려움을 느끼며 아주 천천히 봉투를 자르고 접힌 편지를 꺼낸다.




‘패싱’. 백인 행세하기란 설명이 작은 글씨로 쓰인 이 책은 아이린이 옛 동창생이었던 클레어의 편지를 받고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을 떠올리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짧은 부분에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와 사건들이 숨어있는 듯하다.




그건 네 잘못이야, 아이린. 적어도 어느 정도는. 왜냐하면 내가 그때 시카고에서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난 지금 이 끔찍하고 황당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테니까. - 18쪽.




팔월, 태양이 무자비하게 이글거리던 날, 방문차 시카고에 있던 아이린은 시원한 바람을 찾아 호텔 옥상 카페를 찾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클레어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흑인의 출입이 금지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두 명의 여성. 백인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그녀들은 백인처럼 보일뿐 흑인의 피가 흐르는 흑백혼혈이다. 12년만에 만난 둘은 백인 행세, 패싱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구나 클레어의 남편이 ‘내 가족에 검둥이는 절대 안된다’는 백인우월주의자라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아이린 자신은 물론 클레어 역시 흑백혼혈이란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그리고 2년 후, 클레어가 뉴욕으로 찾아오면서 아이린과 클레어는 다시 만나게 된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화려하고 매력적인 외모와 밝고 쾌활한 성격을 부러워하는 반면에 그녀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생활방식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리는 건 않을까 막연히 불안해하는데...




“내가 전혀 너와 같지 않다는 걸 넌 못 알아차렸니? 그래,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난 어떤 일도 하고 누구든지 상처 입히고 어떤 것도 던져버려. 정말이야 르네, 난 위험해” -152쪽.




이 소설의 화자는 아이린이다. 하지만 또 한명의 주인공인 클레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본질을 숨겨야했던 클레어. 어린 시절 친구였던 아이린과의 만남을 계기로 그동안 자신이 외면해왔던 흑인들의 세계에서 마음의 위안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지만...




아이린과 클레어, 서로를 동경하고 질투하다 결국 치명적인 결말을 맞는 그들의 얘기를 담은 이 소설은 무척 빨리 읽혀진다. 200쪽을 조금 넘긴 소설의 길이 때문일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저자의 탁월한 심리묘사가 독자로 하여금 책에 몰입하게 만드는 듯하다. 특히 후반에 클레어를 질투하면서도 그녀의 비밀을 차마 밝히지 못하는 아이린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흑백혼혈인의 자기 정체성과 그들간의 갈등,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다룬 소설 <패싱>. 저자인 넬라 라슨은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이자 대표작인 이 작품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룬 흑인들에게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지만 집필활동을 접었다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라이브의 여왕으로 불리는 어느 흑인혼혈 여가수의 얘기가 생각난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아기가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 빌고 또 빌었다고 한다. “제발, 제발....아기가 절 닮지 않게 해주세요.”하고. 자신의 몸에 깃든 또 하나의 생명, 그 아기가 자신을 행여 닮을까봐 매일 불안에 떨었다는 얘기를 무심코 흘렸었는데...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아이린과 클레어, 그녀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먼 나라의 얘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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