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엔젤 - 스탈린의 비밀노트,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빚쟁이다. 방과 거실의 책장을 빼곡하게 메운 책들을 볼 때마다 난 내가 빚쟁이란 걸 실감한다. 저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을꼬...하는 고민도 빛깔 좋고 탐스런 신간이 나오기가 무섭게 금세 잊혀진다.




작년에 로버트 해리스의 <폼페이>를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구입했다. 뿌듯해하며 책장에 꽂아뒀는데 미처 읽기도 전에 그의 새 작품이 나왔다. 이름하여 <아크엔젤>...‘스탈린의 비밀 노트’란 부제 옆에 구소련기의 상징이 붉게 그려져있다. 게다가 책의 크기나 두께가....상당하다. 이쯤되면 살짝 기가 죽는다. 스탈린?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게 뭐지? 이럴수가...없다!! 낭패다.




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마지막 부분이었는데 스탈린의 사망소식에 구소련의 국민들이 울부짖으며 그의 주검을 보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하고 그 엄청난 인파 속에 주인공이 이리저리 밀려다니던 모습이 제목도 내용도 생각나지 않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작년에 읽었던 조정래의 <오 하느님>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우리 쏘련 사람들은 두가지 죄를 졌어요. 포로가 된 것만도 조국의 배신자가 된 것인데...소련에 가면 무슨 처벌을 받을지 몰라요. 스탈린은 아주 무시무시하고 용서가 없는 사람이오.”




그나마 기억하는 것조차 정반대의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스탈린! 그의 어떤 점이 저자로 하여금 20세기 역사에 있어 히틀러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게 했을까. 궁금하다. 알고 싶다. 그의 비밀노트가 답을 알려줄까?




“아주 오래전 일이었어...”하고 모스크바의 한 호텔방에서 노인이 얘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은 파푸 라파바, 구소련 공산당 정치국 소속 고위관리의 경비병이었는데 스탈린이 죽기 직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사학자 플루크 켈소에게 털어놓는다. 문제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검은색 유포지 노트’를 스탈린의 금고에서 빼돌려 어딘가에 파묻었다고. 그리고는 갑자기 사라진다. 그때부터 켈소는 어딘가에 숨겨진 스탈린의 비밀 노트를 찾아 동분서주하고 우여곡절 끝에 라파바의 숙소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가 끔찍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면서 켈소는 비밀경찰과 구소련 비밀 조직에 쫓기게 된다. 결국 라파바가 딸에게 남긴 편지 속의 단서를 계기로 스탈린의 비밀노트를 찾게 되는데...




구소련, 러시아.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땅에서 스탈린의 비밀노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손에 땀을 쥘 정도였다. 마치 엄청난 제작비를 투자한 블록버스터 첩보영화를 보는 듯했다고 할까.




물론 러시아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초반엔 애를 먹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스키’로 끝나는 러시아 특유의 긴 이름이 어찌나 헛갈리는지 몇 번이나 앞부분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하지만 3/1정도 지나면서부터 눈에 익으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비롯한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구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러시아 곳곳을 잠식해가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람들의 생활이 얼마나 극도로 궁핍해졌는지, 그로 인해 차라리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가 나았다고 그리워하는 이도 있다는 걸 저자 로버트 해리스는 철저하게 피폐해진 모스크바의 분위기와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새로운 러시아죠. 원하는 건 뭐든지 살 수 있어요.” “돈을 벌고 싶으면 위험을 무릅써라. 하룻밤에 3백, 일주일에 3일만 해도 9백 달러입니다...평균 연봉의 일곱 배인가요?” - 오브라이언. 153, 155쪽.




“20세기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은 히틀러가 아닌 스탈린입니다....히틀러와 달리, 스탈린은 아직 죽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탈린이 히틀러와 달리 일회용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 플루크 켈소. 192~193쪽.




계산은 모두 달러로 했다. 신용카드는 너무 많은 흔적을 남기므로...게다가 은행을 믿지도 않았다. 연금술을 부리는 도둑놈들, 소중한 달러를 빼앗아 루블로 만들고, 금을 비금속으로 만들어버리는 몹쓸 놈들이다. - 지나이다. 292쪽.




요즘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 많이 출간되고 있는데, 그런 책을 읽고 나면 항상 궁금했다. ‘과연 여기서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이번에 공산혁명의 완성자이자 공포정치의 대명사, 스탈린과 그의 부활을 꿈꾸는 음모에 대한 이야기 <아크엔젤>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지, 어딘가에서 제 2의 스탈린이 부활하고 있는건 아닐까,.저자는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하는 의문이 남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바로 로버트 해리스를 만났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배경인 소설이라 막연히 삭막하고 냉혹한데다 잔뜩 경직된 사람들의 얘기가 아닐까 했는데, 순전히 억측이었다. 다소 억지스런 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내용 구성이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힘이 대단했다. 500페이지의 두꺼운 책이 그야말로 술술 넘어갔다. 왠지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상황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폼페이>를 비롯한 그의 다른 작품도 만나고 싶다. 대박이다.




“한 국가에 역사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역사란 사회를 지탱해주는 토양이란 말이야. 우리 역사는 이미 도난당해서, 불명예스럽게도 적들에 의해 난도질되고 더렵혀졌지. 이젠 민족혼까지 빼앗기고 만 셈이지만.” 블라디미르 마만도프.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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