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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평점 :
제대로
된 고민을 언제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만 살아온 것 같다. 아니 소소한 고민에 묻혀 인생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은 고민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과 고민을 함으로써 삶을 통과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고민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인류사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아니다. 강상중 교수가 분석한대로
고민의 힘은 인간의 역사가 근대로 진입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이다. 중세를 넘어선 근대는 개인과 공동체가
분화되기 시작한 시기이며, 모든 것이 신의 질서로 설명되던 조화롭고 통합된 시대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선언과 더불어 개인이
독립적으로 분화하는 시대이기에 이전과 다른 시대가 도래되었다. 더불어 개인의 불안과 좌절이 스며들어
온 시대이기도 하다.
사상적으로는
인간이 중심이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대세가 된 시대가 근대이다. 그리고 그러한 근대는 매우
격변하는 시기였으며 그 시기로부터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민을 가져다 주었다. 강상중
교수가 보기에 현재는 초기 자본주의 발흥기와는 분명 틀리지만 그 근저에 존재하는 고민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렇기에 100년 전 인물인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를 통해 이
시대의 고민을 진단해 나간다.
재일 한국인으로
최초로 동경대 정교수가 되었던 강상중 교수는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고민을 안고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고민하는 힘’에
대하여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차별을 받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생활을
해왔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고민을 철저하게 수행하였기에 이 정도의 지위에 오르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내공이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더불어 그의 청춘을 때로는 따스하게 안아주고 때로는 치열하게 채찍질 했을
두 사람의 그의 고민에 많은 단서와 해결점을 주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위치도 절묘하다. 베버는 사회학자로서 사회와 인간에 대한 분석적인고 과학적인 시각을 주고 나쓰메 소세키는
작가로 강상중 교수에게 통합적이고 구체적인 생활에 대한 시각을 주었던 듯 하다. 이 책에서는 베버의
분석과 소세키의 종합적인 면이 상호교호하며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 형식에서 사회학적인 논증과 현실의
배경에 대한 상황적인(소설적인) 실례가 덧붙여짐으로 인해
매우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중요한 단어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자아’, ‘돈’, ‘지식’, ‘청춘’, ‘믿음’, ‘일’, ‘사랑’, ‘죽음’, ‘노년’.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생을 통해 한번은 부딪쳐야 할 거대한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 주제들의 근저에는 ‘자유’와 ‘불안’의 문제가 놓여있다. 자유롭기에 불안한 것이 근대의 특징이다. 자유롭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 자유를 누리면서 가져온 것이 바로 실존적 불안이었다. 각자의 자유가 무한하게 보장되는 그런 사회는 무엇인가 하나로 통합하기 쉽지 않고 서로 교통하기 쉽지 않은 사회다. 그렇기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은 곧 자아의 확립의 문제이다. 자아는 자기 중심주의와 다르다. 가장 커다란 차이는 타인의 인정여부이다. 타인과 교호하지 않고 자신의
성채에 굳게 갇혀 지내는 사람은 건강한 자아를 가질 수 없다. 이미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서부터 근대의
고립적 인간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시작되었다. 각자의 사고와 생각이 가장 중요한 시대에서 자신의 자아를
구축하는데 서로에 대한 교집합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는 여전히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강상중
교수의 처방은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인정에 의한 산물’이라
정의하면서 해결한다.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타자와 연결하고 싶을 때, 즉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고 싶을
때 해야 할 일은 진지함을 견지하는 일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타자와 마주하는 것. 그것이 자기중심적인 개인이 아닌 올바른 자아를 확립하는 개인으로 서기 위한 돌파구가 된다는 점이다.
돈이 세계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혹 돈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해도 사람들 앞에서 돈이 전부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점점 더 돈이 전부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추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돈으로 살 수 없는 무궁한 가치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없다.
돈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노동의 보상’과 같은
의미를 떠나 ‘돈’으로 독립하게 되면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원래는 ‘돈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닌’ 사람들도 점점 ‘돈을 위해 일하게 ‘되고 점점 원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돈을 위해 돈이 도는’상태로 변하며, 결국에는 ‘돈이
돌면 돌수록 돈이 늘어나게’된다.
100년전의 자본주의 초기시절 산업자본주의에서 출발한 자본의 운동은 이제 국제적 금융자본주의가 중심이 된 시대로 변화되었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변화를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시대의 추세는 이미 그 추가 기울어진 상태다. 시대의 흐름에서 모든 가치는
변하는데 ‘돈’만이 ‘불변’의 가치를 지닌 일종의 기호로서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작해야
돈이지만 그래도 돈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말이 쉽지만 그것을 생활에서 구현하는 일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역시
고민해야 돌파할 수 있는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정보화
시대에 많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알 수 있다는 현실의 조건과 상관없이 과연 알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우선적으로 ‘알고 있다’와
‘사고한다’는 다르다는 것,
정보와 지성은 같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인간의
지성은 학식과 교양이라는 요소에 더해 협조성과 도덕관이란 요건을 갖춘 종합적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근대적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한쪽 면만을 발달시키고 주지화 시켰다고 막스 베버는 주장했다. 이성중심, 인간중심의 지식의 발달은 도구적 합리성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처참한 전쟁의 상혼을 남기기도 했다. 따라서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닌 조화롭고 종합적인 지성의 획득을 과제로 한다. 과학이 그 행위의 긍극적이고 본래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이
우위에 있고 서구가 지식으로 세계를 제패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아는 것이 힘’인 세상이다. 그럼에도
아는 것을 넘어서 사고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사고를 떠나서 인류가 품고 가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다 보기 정말 청춘이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우리 사회가 일본을 쫓아 간다고 하지만 이런
것까지 비슷할 줄은 몰랐다. 이미 헤이세이 불황에 접어든 일본의 청년들이 갖는 경제적 어려움이 현재
우리사회의 청년의 고난과 비슷하다는 점도 그렇고 어느덧 청춘은 발랄한 출발점이라기 보다 빛 바랜 회색의 우울함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해답이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하다’ 아마 젊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강상중 교수에게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던 되지 않든 ‘알고 싶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같은 것을 솔직하게 따른 것이다.
인간이
성장하는 것은 원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강상중 교수는 극단적으로 원숙함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말한다. ‘표층적으로 원숙한 것’과 ‘청춘적으로 원숙한 것’이 그것이다.
청춘적으로 원숙한 것이란 고민을 깊이 있게 하는 것이다. 결국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고민의 힘은 사람을 젊게 만든다. 그래서 강상중 교수는 수많은 여성
독자들로부터 미중년이란 칭호를 받고 있는 것일까?
믿음의
문제는 내면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보인다. ‘믿는다’는
행위는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사물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근대적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현대는
믿음과 종교가 개인의 자유에 맡겨져 있다. 예전에는 종교도 공동체가 믿고 있는 종교를 따르면 되었다. 그렇지만 과학과 합리주의의 발전은 이전 종교를 대부분 미신으로 몰아 경계 밖으로 몰아내어 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과학과 합리주의적 이성이 이전의 종교가 했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가
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무엇인가 의존할 것을 찾게 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의 대상조차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결정해야 된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러저러한
점을 떠나 강상중 교수는 궁극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믿는다’가 아니라 ‘자기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 내린다. 따라서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밀고 나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계를 알고
있으며 그것이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어쩌랴 그것이 인간이 처해진 존재 조건이고
고민하는 힘은 바로 이러한 전제조건을 타파하기 위해 인간이 최소한으로 견지해야 할 태도인 것을..
정말 무엇을
위해 일하는 것일까? 돈이 많다면 일하지 않을까? 일상에
지치고 업무에 지친 사람들이 일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양가적일 듯 하다. 당장 때려치워야 할 고난 혹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나 수단.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올바른 규칙을 지키고 일체의 낭비도 없이 노동하는 의미조차 잊고 사회속에서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발전했다고 서술한
바 있다. 그러나 분업화에 따른 개별화는 일하는 사람을 단편적으로 만드는 현상이 심화되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 사회에서
일자리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왜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에 사람들은 무력해질까? 강상중 교수는 일을 통해서 비로서 ‘거기에 있어도 좋다’는 인정을 받기 때문이라 말한다. 결국 사람이 왜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타자로부터의 배려’ 그리고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며, ‘자기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자체도 본래적이지 않은 감정이다. 아마 근대에 들어서서 일부일처제에 근거한 낭만적 로맨스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근대적 의미의 ‘사랑’이란 개념이 생겼다고 한다.
막스 베버는
본래의 의미가 박탈되고 수수께끼가 된 근대합리주의 속에서 종교를 예외로 한다면 ‘성애와 예술’이 손때가 타지 않은 유일한 ‘최후의 처녀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직 사랑은 철저하게 분석되지 않고 신화적
영역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뜻일까?
근대적
자유는 사랑마저도 황폐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선택하는
사랑은 언제나 대체 가능한 사랑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사랑은 결국 에고이즘이란 주장도 타당하지만
사랑의 지속성과 상호작용을 생각하면 너무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
사랑은
어떤 개인과 어떤 개인 사이에 전개되는 ‘끊임없는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에 한쪽이 행동을 취하고 상대가 거기에 응하려고 할 때 그 순간마다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며, 그런
의지가 있는 한 사랑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상중 교수는 말한다. 사랑은 계속 변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 순간 둘 사이에 물음이 있고 서로 그 물음에 대해 반응 할 의지가 있는가 이다.
이렇게
항상 결단하는 사랑이 유지되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가 있다. 좀 더 고민해 볼 문제이다. 어쩌면 사랑은 필연적으로 둘이 만나서 둘의 자유를 서로에게 부과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느 하나에게 헌신한다는 의미에서의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살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회.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무어라 딱히 비난하기도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신념 같은 형이상학적 죽음의 선택이던, 생활고와 같이 형이하학적인 죽음이던 죽음에 대해 뭐라 만류할 논리는 딱히 없는 듯하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삶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절대적 고립에서 벗어나 타인과 연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 인생에 대한 의미를 궁구하고 그 의미를 타인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럼에도
자발적 선택으로 택하는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이 어려운 문제에서 결국 마음이 가는 대로 의미를 찾느냐의
문제가 제기 된다. 삶이 의미 없다면 죽음도 의미 없다. 죽음이
의미가 있으려면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강상중 교수의 말은 무엇보다 삶에 대한 애착이 보여진다.
고령화
시대라는 말은 이제 익숙한 말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예전부터 있었던 말이고 우리사회도 최근에 가장 많이
분석되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환갑부터 시작이라는 말이 있듯이 제2의
인생설계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노년 하면
떠오르는 것은 육체적 쇠락과 사고력의 저하 그리고 분별력이 있어 ‘원숙’한 지혜를 갖는 다는 것이다. 현대의 노인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육체적인 쇠락은 더뎌지고 있다. 하지만 분별력 있는 원숙한 지혜를
기대하긴 힘들다.
노령화
인구가 많다는 것은 사회에 새로운 주역이 등장했다는 의미다. 이런 세력이 앞으로의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지 모르지만 이 사회가 가지는 가치를 교란시킬 정도의 세력으로 될 것은 분명하다.
두려움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두 번째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면서 이 사회에 뭔가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노년의 새로운 임무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고민하는 힘’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잠정적인 느낌은 ‘살아가는 힘’이
바로 고민하는 힘인 것 같다. 강상중 교수는 고민하는 인간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 근대 이후 무섭게 변하는 현대 사회는 이미 인간이 그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여기에 근원적인 불안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무엇인가 빠르게
변화고 있는데 거기에 의존할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 기존의 가치들은 빠르게 소멸하고 새로운
가치들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간은 실존적인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불투명함이 사람들을 불안으로 내 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민의 힘이 필요해진다. 이러한 불안을 이겨내고 자아를 유지하며 타인과 함께 공존하는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진지하게 타인과 소통하고 자유가 가지는 가치를 누리면서도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을 이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하는 힘이 살아가는 힘이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