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을 팝니다 - 담배 산업에서 지구 온난화까지 기업의 용병이 된 과학자들
나오미 오레스케스 외 지음, 유강은 옮김 / 미지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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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연가로서 요즘의 세태는 참으로 곤혹스럽다.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아니, 거의 탄압이라 부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담배를 피울 공간이 줄어들어도 항변할 수 없다. 그건 간접 흡연이 타인에게 심대한 건강상의 위해를 끼칠 수 있다는 과학적인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명확한 결과에 따라 흡연행위를 공공장소에서 제한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사실을 알고도 이의를 제기한다는 건 나의 쾌락을 위해 타인에게 공공연하게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사표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접흡연 자체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이 명확한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인과관계가 없다면...또는 매우 부족하다면.... 흡연자인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 아마도 흡연을 제한하는 정부의 방침에 대놓고 반대하거나 암묵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타인에 대한 죄책감도 경감될 것이다.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과장되게 주장하는 것일 뿐이지 실제 피해를 주는지 알 수 없는데 오버한다고 되려 화를 낼 것이다.

 

이 작은 사례에서 나오듯이 명확한 결과가 나와있는 과학적 사실들을 비틀고 왜곡해서 과학적 확증이 부족하다고 주장하거나 명확한 인과관계가 결여되었다고 주장함으로서 긴급하게 대처해야 할 사안을 논쟁이 필요해서 더욱 더 조사가 필요한 사안으로 만들어 국가의 정책적 개입을 저지하거나 국가의 정책을 강화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맨하턴 프로젝트를 통해 과학적 업적을 쌓고 국가의 과학 행정업무를 처리하다 다국적 기업의 후원에 따라 사설 연구기관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과학자들이다.

 

이들이 영향을 미치는 분야는 다양하다. 담배산업, 미국의 핵억제 정책인 스타워즈 정책, 산성비에 대한 사안, 지구 온난화에 대한 사안 등등... 이들은 초기에 논란이 되었다가 점차 과학적 결과물들이 누적이 되어 현실적으로 대처가 필요한 사안들마다 개입하여 논점을 흐리고 결과물의 근거가 완전치 않다는 주장을 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곤 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바로 '과학'이다.

 

이 책은 이렇게 기업의 용병이 되어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과학자의 양심을 저버리고 교묘한 궤변으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님에도 기업의 후원으로 사설 연구소를 차리고 언론과 홍보회사를 끼고 대대적인 반과학적 선전을 수행한다. 그 목표는 기업의 이윤을 침해하는 정부의 규제를 막아내고 기업의 이윤을 지켜내기 위해서 이다. 더 근본적으로 자유시장의 근본적 질서을 막아내기 위한 전투의 최선전의 용병으로서 활약하는 것이다.

 

왜 한때 저명한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구축한 인물들이 과학을 부정하는 행위까지 저지르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런 행위들이 사회적으로 용인받고 스며들게 되었을까?

 

이 책에서 분석하기를 첫째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언론의 기계적 균형에 있다고 본다. 언론은 소수의 의견이라도 그 의견에 대한 표현을 존중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진 일이 아니라면 소수의 의견에 대한 표현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소수의 의견이라도 사태가 명확하게 밝혀져 인정받지 못하는 의견까지 존중해야 할 것인가에 있다. 오리려 소수 의견 존중은 사회적 소수자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힘이 없을 경우에 언론의 공공성을 위해 배려해야 하는 원칙일 뿐이다. 그러나 기업의 후원을 받고 있는 이들은 소수의견자들이라 보기보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밝혀진 사안에 대한 거의 개인적 의견에 불과한 경우였다. 이것을 언론이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책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기업의 후원을 받는 이들에 대한 언론의 대접은 동일하게 기업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언론 환경의 영향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익저긴 논조를 싣는 언론들은 이들의 의견을 의도적으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었다.

 

둘째로 자본의 힘이 그만큼 강하다는 얘기다. 담배회사나 정유회사는 자신의 의도와 일치하는 과학자들과 손잡고 막대한 자금을 투여하여 사설연구소를 만들고 그것을 기반하여 기존의 과학적 성과를 부정하는 선전을 시행했다. 연구소의 논문으로, 신문의 칼럼으로, 소책자의 발간으로... 막대한 물량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방어를 해온 셈이다. 물론 그 주장들은 과학적 검증을 받지도 않았고 기존 성과물을 왜곡하거나 자신이 유리한 부분만 짜집기한 과학이라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덴마크의 정치학자 비외른 롬보르의 '회의적 환경주의자:세계의 실재상태를 평가한다'는 책은 통계를 잘못 사용한 교과서적인 사례로 비판을 받고 있다. 2002년 저명한 과학자 네명이 '사이언티픽 아메리카'에 기고한 글에서 롬보르가 사용한 수학이 어떻게 현실을 오도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덴마크에서는 이 책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으며, 롬보르는 과학적으로 정직하지 못하다고 비난을 받았다. 결국 덴마크 과학기술혁신부는 롬보르에게 과학적으로 부정직한 행동을 했다고 물을수 없다고 결정했다. '회의적 환경주의자'가 과학저서임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P479 

 

이들은 심지어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DDT의 환경영향을 고발한 레이첼카슨이 무해한 DDT를 음해하여 말라리아의 창궐을 용인하여 제3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히틀러보다 더한 학살자로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버젓하게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대한 불신을 퍼트린다. 그 근본정신은 '자유시장'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에 있다. 그러나 이들이 공격하는 산성비 문제나 온난화 문제는 자유시장의 작동이 외부로 비용을 전가하는 전형적인 사례이고 실제로 '자유시장'의 실패를 증명하는 사례들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시장의 외부비용을 지적하는 환경주의자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로 몰아 붙이고 과학적 사실을 이념적 공포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거기에는 '개인적 자유에 대한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환경주의자들이 미학적 환경보호에 머물지 않고 환경보호를 위해 규제적인 방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규제에 반대하고 시장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자유를 보호하는 행동이라 여기고,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반과학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시스템을 수정하거나 파괴할 수 밖에 없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과학적으로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오히려 위기를 과장하여 자유시장을 파괴하려는 환경주의자의 음모론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명확한 무엇인가를 증명한다는 편견이 이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인정하게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은 무엇인가를 명학하게 증명하기 보다는 있는 그댈의 사실을 밝히고 그것이 동료들에게 검증받고 확증할 수 있는 사실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 사실에 기반하여 대책을 세우는 것이지 모든 것이 명증해야 과학적인 사실은 아닐터이다.

 

결국 자본과 언론과 이데올로기가 결합하여 과학적 결과물을 무위로 만들고 인류가 시급하게 대처해야 할 문제를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하고 위기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이 땅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황우석 사건과 사대강의 진실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아니라고 말한 사실이 어떻게 왜곡되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환경을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일각일 뿐이다. 황우석의 연구도 자본적 이익이라고 포장되었고 사대강 개발도 환경의 보호라는 명분으로 건설자본의 이윤을 보장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결국 과학과 자본과 언론과 국가의 연결고리 속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경험적으로 깨닫게 해준다는데 있지 않을까? 주로 미국의 사례들이 나오지만 매우 흥미진진하며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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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08-2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을 누를 수 밖에 없는 리뷰이네요^^

머큐리 2013-08-22 21:52   좋아요 0 | URL
^^;;
 

본의 아닌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름이다. 날씨도 덥고 시원하게 스릴러 영화 한 편 보겟다고 한다면 이 영화가 나쁘지는 않을 듯 하다. 도시의 빈집... 그 빈집 속에서 숨어사는 사람들... 숨어사는 만큼 비밀도 많고 공포스러운 일도 많다. 더구나 요즘처럼 안전에 대한 강박적인 관념을 지닌 사회에서는 더 섬찟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이 영화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집? 소외? 혐오? 안전 강박증?

 

난 혐오라고 생각한다. 혐오... 무엇인지 모르지만 꺼림칙하면서 배척하게 만드는 감정.

영화의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지만 영화속의 부차적인 캐릭터 중에는 떠돌이들, 부랑자들이 보여진다. 그들은 낯설고 위험한 무엇으로 그려지고 일상에서 일탈된 존재인 그들의 모습은 자연스런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일상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꺼려함이 느껴지도록 배치된다.

 

상대적으로 주인공은 고층의 깨끗한 아파트, 고급승용차, 좋은 옷... 그리고 강박적인 신경증을 가지고 있다. 그릇 하나 하나 깨끗하게 닦여 있어야 하고, 진열해 놓은 물건들은 위치와 각도가 정확하게 맞아야 한다. 그의 삶은 질서정연하며 청결하다. 그러나 실종된 형은 허름하고 곧 재개발 될 아파트에 살고 있다... 물론 실종된 상태이지만....

 

실종된 형이 살고 있는 주거지를 살피다가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된다. 아파트인 집들이 연결되어 있고 아파트 출입문 현관마다 이상한 표식이 낙서처럼 표시되어 잇다. 사라진 형은 이 건물 어딘가에 살고 있어 보인다.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형이 자신에게 악감을 갖고 있음을 안 주인공... 위협은 사실상 가족을 향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실질적인 위협이 시작된다.

 

영화는 곧 철거될 듯한 아파트와 새로 지은 고급아파트를 대비하고 각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익숙한 공포를 조장하는 듯하다. 그들의 무질서함과 지저분함 무언가 냄새가 날 듯한 더러움이 주인공의 강박관념과 충돌하며 전반적인 혐오감을 가중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혐오감은 어느덧 공포로 전환된다. 저... 사람들이 나를 공격한다면... 그리고 내가 가진 자리를 빼앗는 다면....

 

'설국열차'는 꼬리칸에서 사람을 잡아먹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봉기한다. 그 봉기에는 설명할 수 있는 정당함과 정의를 가지기에 폭력이 낯설지 않다. 오히려 탄압하는 자에 맞서는 더 커다란 폭력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숨바꼭질'에서는 꼬리칸의 인간들이 얼마나 더럽고 무식하며 위협적인 사람들인지 앞칸의 사람들 시각에서 그려지고 있다. 스스로 안전을 지키기 위해 그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노골적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살고 있는 경계안으로 들이지 않고 그들을 피해 다니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준다.

 

두 세계과 충돌하면서 공포가 형성된다. 충돌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원시적이고 투박하다. 그 만큼 잔인하다.

 

혐오스런 감정은 어디서 부터 발흥하는가?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건 주인공이 버젓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그가 가진 환경과 강박은 어린시절 형을 배신한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 배신의 결과가 강박증이라면..... 혐오는 자신의 배신을 지우려는 감정은 아닐런지...

타인에 대한 혐오를 공포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보수적이다.... 그러나 그 혐오감의 진정한 탐색이 어디 있는지를 묻고 있다면 이 영화는 다른 메시지를 던져준다. 너는 타인의 입장에 대하여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가? 물론 이 질문은 나의 상상일 뿐이다.

 

뭐...영화보는데....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할 거 무엇있겠나.. 극장은 시원하고 영화는 스릴이 넘쳐 소름끼친다... 여름이면 이것으로 만족해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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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시간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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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이란 영화로 다나베 세이코를 알게되었다. 원작이 단편이라는데 놀랐고 그 단편집에 포함된 단편소설들이 왠지 모르게 끈적이면서도 쿨한 것에 놀랐다.

여성의 성과 섹슈얼리티...라는 주제에 대한 모호한 의미들이 난무 하면서 이 작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단편집의 소설들이 이제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시점에서 세이코의 장편을 골라든다.

난 이 소설이 또 다른 단편집이라고 생각했고 작가외에는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골라든 책이라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책을 읽었던 터이고 그 책을 통한 일본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규정과 섹슈얼리티의 변화를 나름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결혼과 사랑과 일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여성이라는 주제는 꽤 친숙햇다.

 

문제는 친숙함이 곧 앎으로 이어지지 않는 다는 사실.

페미니즘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곤혹스러움은 내가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이해가 한계를 가진다는 점이다. 또한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권력에 문제의식이 약하고 페미니즘의 주장에 대해 매우 공격적으로 느끼는 면도 있다는 점... 즉 너무 약자인 남자를 몰아 붙인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긴 예전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서평을 쓰는 기자들이 집으로 가져가지 않은 책이란 말이 있었다. 집에 있는 옆지기가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불안해서 그랬다나 뭐라나...

 

이 소설에서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딜레마가 그대로 드러난다. 일부일처제 안에서 남편의 소유물로 전락한 듯한 자신의 처지와 사랑과 결혼제도가 양립하기 힘든 사실들.... 그 속에서 결혼전에 꿈꾸던 자신의 미래상이 어느 덧 사라지고 남편의 통제속에 인간관계마저 왜곡되고 통제되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

 

또 다시 문제는 그러한 여성의 내밀한 독백과 남성에 대한 평가들을 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있다.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아님 내심 공감하고 있을까? 공감하면서도 인정하기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나?

 

사적인 생활에 대한 이야기... 그 속에 담긴 일말의 진실과 여성이 바라보는 남성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이 과연 많은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인지에 대한 의문점... 등이 난마처럼 뒤섞여 읽는 내내 혼돈스러웠다.

 

사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잡글을 쓰는대신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 대한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이 감성적인 소설을 읽고 느낌을 이해하려는 것 보다 나에게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여성... 남성인 나로서는 사춘기 시절의 열망했던 소녀에서 지금의 옆지기 까지... 알 수없는 미스테리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구조에 따른 남성만들기로 인한 것이라고 그 장벽을 넘어 여성을 이해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감이 안온다.

 

그래도.... 남성연대여... 니들의 주장은 너무 허접하고 찌찔하다는 거.... 혹시 남성연대 분이 이 글을 읽고 동일한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면... 아... 정말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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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8-1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큐리님, 너무 오랜만이세요~ ^^
더운 여름 잘 지내시나요?

전여,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으면서 진짜 이해가 안 가는거예요.
그건 남자의 눈으로나 가능한 줄거리다, 어떤 여자가 희생 다 해가면서 시댁을 두개,
남편을 두명 모시냐.... 이런 생각에 전혀 공감을 못 했답니다. 큭큭.

어쩔 수 없는 한계같아요. 각자 입장이 다른거,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은 한다는거... 노력만. ㅋ

머큐리 2013-08-15 18:30   좋아요 0 | URL
마고님도 더운날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가요? ㅎㅎ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시고 시댁에 의문을 가지신거 보니 역시 관점이 다른네요..
남자인 저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독점하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지가 정말 의문이었거든요...

역시 남녀의 관점은 어디가 틀려도 틀린 모양이에요...ㅎㅎ
 

테러라.... 9.11 이후 테라라는 단어는 거의 공포스러운 단어가 되었다.

일상의 안전을 침해하고 무고한 생명을 가차없이 빼앗아 버리는 테러는 그 자체로 범죄시 하고 죄악시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의 구조적 결함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테러 더 라이브'라는 영화는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치안이 잘되어 있어 한밤중까지 술에 취해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대한민국에서 채택하기는 참 껄끄러운 소재를 긴박감 넘치는 하정우의 일인연기로 영화 끝까지 긴장감있게 펼쳐 보인 착한 영화다.

 

워낙 허리우드의 테러영화를 많이 보았기에 테러가 상징하는 압도적 폭력은 잘 보이지 않고 테러가 끼치는 심리적 갈등 요소를 주된 네러티브로 삼은 것은 틈새시장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영리한 방법이었다. 거창한 그림없이도 테러의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했다는 점에서도 착한 영화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시청율에 매여 테러에 대한 경고보다 방송국의 이익을 위해 고분분투하시는 미디어 제국의 속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착한 영화다.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자본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자본의 전사가 가장 많은 이윤을 획득하고 상층으로 진입하는 이 승자독식의 사회의 우화로 읽는 다면 무리한 설정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해드셋 폭탄 등... 무리한 설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비판적으로 보면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시비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긴박한 스토리보다 이 영화가 나에게 던져준 것은 '정당한 항의'와 '억울한 자의 목소리' 였다.

 

금융, 정치, 언론의 중심지인 여의로로 통하는 마포대교가 폭탄테러를 당한다. 테러범의 요구는 금전적인 것도 있었지만, 과거 마포대교 보수공사를 하던 인부들의 사고... 산재사고에 대한 억울함을 국가가 사과하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사과하면 테러는 중지할 것이라 한다. 여기서 문제는 국가가 과연 사과할 것인가에 있다. 이 영화의 긴박함은 바로 국가가 결코 사과하지 않으리라는 뻔한 결말에서 발생하게 된다. 숨어있는 국가를 대신해 테러범과 마주하는 윤영하(하정우)의 고분분투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테러는 이중적인 속성을 지녔다. 테러라고 규탄하는 행위는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선전하는 기회이거나 해방투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장점이자 한국적인 면은 바로 소외되고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금까지 묻혀왔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만일 어떤 거창한 이념이나 정치투쟁을 그렸다면 난 실망했을 것이다. (물론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소박하고 열심히 살지만 그 삶에 대한 정당한 보답을 받기 힘든 사람들... 누구도 이들에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저 인생의 패배자로 여기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마지막까지 보살펴야 할 국가마저 이들을 내팽겨쳤을때 이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테러는 국가에게 이중적인 과제를 던져준다. 자신이 보호해야 할 국민들의 생명이나 재산을 파괴함으로 국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오로지 국가만 행사할 수 있는 폭력을 국가가 아닌 개인이나 단체가 행사함으로 국가의 질서를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테러를 용납할 수 없다. 용납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기반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테러의 원천은 사실상 국가의 신화로 부터 발생한다. 국가는 자신이 보호하는 국민들에게 공평하고 정의롭게 대해야 한다. 이러한 신화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 국가는 테러의 위협으로 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오히려 국민이 양도한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국가의 존립을 지켜야 한다. 국가로 부터 안전해야 할 국민이 국가로부터 위협을 받는 역전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건 국가가 전체 국민의 의사보다 계급적 도구로 사용되기에 그렇다. 그러나 국가를 지배하는 계급은 국가를 중립적인 도구로 포장하고 자신의 이득과 이해를 관철시킨다. 여기서 소외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묻혀 버린다. 여기에 묻힌 목소리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목소리를 내는 방법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테러도 그 중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어쩌면 비용대비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은 테러일테다. 시청광장에서 아무리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해도 아마 테러 한 방이 가지는 위력을 가지긴 힘들거다. 물론 민주주의 속에서 폭력을 배제하고 합리적인고 지루한 절차가 보다 올바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토대가 됨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당장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소수로 몰린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테러의 기원은 국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 비정규직이 1000만이 가까워 오고 있다. 영화평을 잘 읽어보지 않았지만, 억울하게 사고로 죽은 노동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테러를 요구하는 범인의 행태에 대해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국가가 가지는 폭력성을 이 영화는 잘 잡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용산참사에서 드러났듯이 과연 테러는 누가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국가가 가진 공권력의 그림자만 벗기면 국가 역시 국민들에게 심대한 테러를 저지르는 주체가 되지 않을까?

 

오늘 현대차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해 철탑위에서 296일 동안 농성하던 노동자가 건강악화로 내려왔다. 이들이 농성하던 중에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 박정식 사무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또 어떤가? 이 땅에 무수한 노동자들이 자본의 탈법과 불법을 용인하고 있는 국가로 인해 죽음으로 몰려가고 있다.

 

영화의 구성이나 내러티브도 좋았지만... 테러의 기반이 된 소재가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에 더 공감이 갔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무거운 마음으로 극장문을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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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피서라곤 겨우 극장을 기웃거렸던 여름이지만... '설국열차'를 보면서 행복했다.

여기 저기서 영화에 대한 논란도 많고 호불호도 많이 갈리지만, 순전히 나의 관점에서 보면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논란이 되는 만큼 좋은 영화다.

혹자는 '더 테러'와 비교하면서 제작비 대비 영화의 완성도 및 수익성을 따지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두 영화 모두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고 주제가 틀리며, '더 테러'가 제목에 비해 한국적인 정서가 강하다면 '설국열차'는 좀더 거시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단선적인 비교는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관객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힘은 같다고 할까?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글들에 묻혀버릴 하나의 글이나, '설국열차'를 봤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각자의 관점에서 '설국열차'를 해석했듯이 나도 그 해석의 한자락을 남기고 싶었다.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빙하기를 불렀다는 전제 자체로 이미 이 영화는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가정한다. 그건 현재의 어떠한 노력도 자연과 인간의 불화를 해소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고립화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추위로 얼어죽고, 마지막 희망은 거대한 열차 속에 생존하는 것 뿐이다. '설국열차'는 인간의 생존의 터전이 되었고 바로 인간이 영위했던 사회를 그대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기차의 엔진이 존재하는 첫째칸과 비참하게 연명해야 하는 마지막 칸의 대비는 그대로 지금의 사회를 반영하는 듯 하다. 인간 사회에서 계급의 구분은 지속되었고 지구가 빙하기에 들어서 멸망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 구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계급이 사라지지 않는 사회에서 투쟁은 당연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억압이 있는 곳에는 그 억압을 끊어낼 싸움이 존재할 수 밖에 없으니까? 문제는 그 계급투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있다. '설국열차'가 나에게 던지는 첫번째 질문이다.

 

당연히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란 당위를 이야기 하기 전에 부딪쳐야 하는 것이 바로 '질서', '규율', '위치'의 문제다. 어느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지녀야할 규율과 질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규율과 질서는 사회의 안정이라는 가치를 실현할 수단이 될 것이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규율과 질서인 것인가? 여기서 계급투쟁은 일어 날 수 밖에 없다. 한계급의 안정을 위한 규율과 질서는 다른 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가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꼬리칸에 있는 사람들은 앞칸에 있는 사람들이 주입하는 규율과 질서를 따를 수 없었다. 그것을 따르는건 인간이 되는 걸 포기하는 일이었으므로.... 인간이 되기 위해 그 따위 규율과 질서를 만든 지배자를 제거해야 했다. 그 지배자는 이 열차를 만든 윌포드이고 이 열차에서 신처럼 존재한다.

 

꼬리칸의 사람들을 지휘하여 열차를 장악하려는 커티스와 커티스의 반란을 알면서도 용인하는 윌포드의 싸움은 어차피 설국열차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음을 전제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나에게 던지는 두번째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영화 마지막까지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하나의 혁명이 권력을 차지하고 새로운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순환의 모습은 보수주의자들이 혁명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주된 모습이었다. 진보라고 하지만 결국 피의 순환 속에 실질적인 진보가 아닌 퇴보로 규정하는 혁명에 대한 체질적 거부와 무용성에 대한 이야기는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는 순간 그 위력을 발휘한다.

 

폐쇄된 사회에서 적절한 인구를 조절하면서 열차를 이끌고 가야 한다면, 적당한 반란(전쟁)을 통한 인구의 조절과 그에 상응하는 질서의 유지는 필연적이다. 이러한 질서를 거부하면 전체가 죽을 수 있다는 윌포드의 주장에 커티스는 잠시 흔들린다. 다만 낡은 부품을 대체할 아동노동의 참상을 보고 윌포드의 제안을 거부하는데... 보수적 이론의 맹점은 휴머니티가 없기 때문이란걸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그럼에도 사실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영화내내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송강호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그건 폐쇄된 사회의 바깥을 상상하는 유일한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깥에 나가면 모두 죽는다는 신화는 신화일 뿐이다. 물론 바깥에 나가서 죽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나가야 하며 그 도전을 멈추지 않는 다면 폐쇄된 사회에서 모두 죽을 뿐이다. 이 체제를 유일한 체제로 만드는 것은 그 폐쇄성에 갇혀버린 상상력의 제한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한계를 유일하게 돌파해 내는 역할을 송강호에게 맡겼다는 점에서 봉감독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주연보다 더 화려한 조연의 등장이다.

 

마지막으로 과연 미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의 문제... 결국 현재의 사람들은 아니다라는 이야기...열차에서 태어나 땅과 흙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새로운 세대를 이끌어 갈것이란 마지막 설정은 뭔가 찡하다. 이 디스토피아적인 영화의 마지막 희망의 장면에서도 지금 영화를 보는 너희들은 아니라고 냉정하게 잘라 이야기 하는 듯하다. 어쩌면 지금의 세대는 정말 새로운 세대에게 길을 열어주고 사라져야 하는 세대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지금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무언가를 양보할 생각이 없는 세대라는 점이 가슴 아프다.

 

여기 까지다 그리고 난 '설국열차'를 '자본주의'의 비유로 읽었고,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암울 할 수 박에 없다는 이야기로 읽었다. 물론 도식적이고 상상력이 빈곤한 독해일지 모르겠다. 어쩌겠나.... 일상에 치여 이리저리 헤매면서도 이러한 일상이 새롭게 조직되는 미래는 지금의 체제가 아니었음을 간절히 바라는 내 눈에는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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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08-0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오늘 보고 왔습니다. 전 매우 재밌게 봤어요. 머큐리님처럼 저도 열차내 체계를 자본주의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봉준호와 고아성은 영화에 녹아들지 못한 캐릭터같아 많이 아쉬웠다는..
머류리님의 설국열차 감상 잘 봤습니당~~^^

머큐리 2013-08-08 19:39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워낙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영화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