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피서라곤 겨우 극장을 기웃거렸던 여름이지만... '설국열차'를 보면서 행복했다.
여기 저기서 영화에 대한 논란도 많고 호불호도 많이 갈리지만, 순전히 나의 관점에서 보면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논란이 되는 만큼 좋은 영화다.
혹자는 '더 테러'와 비교하면서 제작비 대비 영화의 완성도 및 수익성을 따지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두 영화 모두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고 주제가 틀리며, '더 테러'가 제목에 비해 한국적인 정서가 강하다면 '설국열차'는 좀더 거시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단선적인 비교는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관객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힘은 같다고 할까?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글들에 묻혀버릴 하나의 글이나, '설국열차'를 봤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각자의 관점에서 '설국열차'를 해석했듯이 나도 그 해석의 한자락을 남기고 싶었다.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빙하기를 불렀다는 전제 자체로 이미 이 영화는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가정한다. 그건 현재의 어떠한 노력도 자연과 인간의 불화를 해소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고립화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추위로 얼어죽고, 마지막 희망은 거대한 열차 속에 생존하는 것 뿐이다. '설국열차'는 인간의 생존의 터전이 되었고 바로 인간이 영위했던 사회를 그대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기차의 엔진이 존재하는 첫째칸과 비참하게 연명해야 하는 마지막 칸의 대비는 그대로 지금의 사회를 반영하는 듯 하다. 인간 사회에서 계급의 구분은 지속되었고 지구가 빙하기에 들어서 멸망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 구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계급이 사라지지 않는 사회에서 투쟁은 당연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억압이 있는 곳에는 그 억압을 끊어낼 싸움이 존재할 수 밖에 없으니까? 문제는 그 계급투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있다. '설국열차'가 나에게 던지는 첫번째 질문이다.
당연히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란 당위를 이야기 하기 전에 부딪쳐야 하는 것이 바로 '질서', '규율', '위치'의 문제다. 어느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지녀야할 규율과 질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규율과 질서는 사회의 안정이라는 가치를 실현할 수단이 될 것이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규율과 질서인 것인가? 여기서 계급투쟁은 일어 날 수 밖에 없다. 한계급의 안정을 위한 규율과 질서는 다른 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가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꼬리칸에 있는 사람들은 앞칸에 있는 사람들이 주입하는 규율과 질서를 따를 수 없었다. 그것을 따르는건 인간이 되는 걸 포기하는 일이었으므로.... 인간이 되기 위해 그 따위 규율과 질서를 만든 지배자를 제거해야 했다. 그 지배자는 이 열차를 만든 윌포드이고 이 열차에서 신처럼 존재한다.
꼬리칸의 사람들을 지휘하여 열차를 장악하려는 커티스와 커티스의 반란을 알면서도 용인하는 윌포드의 싸움은 어차피 설국열차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음을 전제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나에게 던지는 두번째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영화 마지막까지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하나의 혁명이 권력을 차지하고 새로운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순환의 모습은 보수주의자들이 혁명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주된 모습이었다. 진보라고 하지만 결국 피의 순환 속에 실질적인 진보가 아닌 퇴보로 규정하는 혁명에 대한 체질적 거부와 무용성에 대한 이야기는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는 순간 그 위력을 발휘한다.
폐쇄된 사회에서 적절한 인구를 조절하면서 열차를 이끌고 가야 한다면, 적당한 반란(전쟁)을 통한 인구의 조절과 그에 상응하는 질서의 유지는 필연적이다. 이러한 질서를 거부하면 전체가 죽을 수 있다는 윌포드의 주장에 커티스는 잠시 흔들린다. 다만 낡은 부품을 대체할 아동노동의 참상을 보고 윌포드의 제안을 거부하는데... 보수적 이론의 맹점은 휴머니티가 없기 때문이란걸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그럼에도 사실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영화내내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송강호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그건 폐쇄된 사회의 바깥을 상상하는 유일한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깥에 나가면 모두 죽는다는 신화는 신화일 뿐이다. 물론 바깥에 나가서 죽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나가야 하며 그 도전을 멈추지 않는 다면 폐쇄된 사회에서 모두 죽을 뿐이다. 이 체제를 유일한 체제로 만드는 것은 그 폐쇄성에 갇혀버린 상상력의 제한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한계를 유일하게 돌파해 내는 역할을 송강호에게 맡겼다는 점에서 봉감독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주연보다 더 화려한 조연의 등장이다.
마지막으로 과연 미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의 문제... 결국 현재의 사람들은 아니다라는 이야기...열차에서 태어나 땅과 흙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새로운 세대를 이끌어 갈것이란 마지막 설정은 뭔가 찡하다. 이 디스토피아적인 영화의 마지막 희망의 장면에서도 지금 영화를 보는 너희들은 아니라고 냉정하게 잘라 이야기 하는 듯하다. 어쩌면 지금의 세대는 정말 새로운 세대에게 길을 열어주고 사라져야 하는 세대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지금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무언가를 양보할 생각이 없는 세대라는 점이 가슴 아프다.
여기 까지다 그리고 난 '설국열차'를 '자본주의'의 비유로 읽었고,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암울 할 수 박에 없다는 이야기로 읽었다. 물론 도식적이고 상상력이 빈곤한 독해일지 모르겠다. 어쩌겠나.... 일상에 치여 이리저리 헤매면서도 이러한 일상이 새롭게 조직되는 미래는 지금의 체제가 아니었음을 간절히 바라는 내 눈에는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