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책을 읽는다" 는 이야기는 이제 거의 보편적인 '진리'
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난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 말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대학시절, 학과 친구였던 L은 그야말로 독서하기 딱 좋은 환경에서 자란 복(?)받은 친구
였다. 다만, 어린시절 부터 책하고 너무 친하게 살아서 그런지 '책'을 그리 신성하게 생각
하지 않았고 '독서'에 어떤 가치를 추구하지 않았다고 할까?
그에게 책은 늘상 있는 풍경이었고, 집안을 좁게 만드는 불편한 그 무엇 이상도 이하도 아니
었던 것 같다.  

그 시절 잠깐 들려본 그의 집은 서재에서 거실까지 촘촘하게 책장으로 둘러져 있었고, 책장에
자리잡지 못한 책들은 모든 틈새에 적당하게 자리잡혀 있었다. 구석구석을 책이 점령하고 있
었던 것이다. 집에서 책이라곤 참고서와 뽀대나는 세로쓰기의 한국문학전집, 몇몇 수필집과
추리소설이 있던 나의 환경에 비하면 그야말로 도서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그런 환경이
었다. 더구나 듣도 보도 못한 인문 사회과학 서적이 즐비하였으니... 한참 그 쪽에 관심이 가는
피 끓는 청춘이 보기에는 노다지 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건 나의 관점일 뿐이었고, L의 태도는 집안의 책들은 자기 아버지의 책들일 뿐이고
자신의 책이 아닌 이상 별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 친구도 같이 공부하면서 자신
의 집에 책이 있어도 따로 자기 책을 사는 편인데...자기 책 둘데도 없이 책만 많다고 짜증
아닌 짜증을 내는 것 아닌가? 더구나 책 좀 읽고 있으면 아버지가 읽는 책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무식하다고" 혼을 낸다고 하면서 집에서 책읽는 것이 짜증 난다는 것이다...흠.  
더구나 좁은 집에 자신이 읽지도 않는 책들에게 빼앗긴 공간에 대해서 불평하는 친구를 보며
책자랑도 참 지랄같이 한다고 생각했다.  

'잰틀 매드니스'를 읽다 보면 정말 책에 미친 사람들이 얼마나 과도하게 책에 대해 집착하는
가에 대한 무수한 사례들이  나온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죽고나면 그 사람이 일생동안 모은
장서들은 후손들에게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가 된다는 것이고, 대부분 대학 도서관에 통채로
넘어 가거나, 서적상들에게 조각조각 팔려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너무 책들이 많아 정리하는데만 몇년이 걸리는 콜렉션들도 있다. 후손들 입장에서 책에 미쳐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살면서 후손에게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람이 결국 남겨준 건 책이고
이거라도 팔아서 유산으로 쓴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결국 매니아에게 소중하다고 다른 사람에게 소중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
에게 책은 정말 애물단지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이 점에서 나는 부모들이 책을 '적당하게' 좋아해야지 광적으로 좋아하다간 애들이 책을 가까이
하기는 커녕 책과 더 담을 쌓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책 읽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책을 읽는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편견일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고 나의 후대가 좋아한다는 법도 없고, 어쩌면 책 자체가 일상에서
별 의미없이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책을 사가지고 집에 들어가는 일이 점점 눈치 보이는 일이 되었다. 책을 가져다
놓는 행위가 떳떳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으니 나도 참 중증은 중증이다.
"제발 읽을 책만 사라"는 말에는 변명할 여지도 없다. 그럼에도 탐나는 책 (왜 별별 책들이
다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지...) 들이 나오면 난 여지없이 질러대거나 구입하지 못하면 안타
까워하니.... 그러니 책을 읽는 것보다 사는게 많고.... 정말 더 이상 책을 사지 않아도 한 2년
은 읽을 책이 없어서 고민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토요일 숨책가서 또 참지 못하고 확~ 질러버렸다.
그리고 책을 찿아 오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아~ 이 병은 어찌 고친단 말이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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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9-28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이 맞습니다. -_- 한달에 몇번을 주문하는지...

머큐리 2009-09-28 18:41   좋아요 0 | URL
그나마 이 서재와서 바슷한 분들이 많아서 좀 위안이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로 집단 취급할 것 같아요...ㅠㅠ

무해한모리군 2009-09-28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 아직 못가지고 가셨군요..
얼마전에 저의 토지전집은 어머니께 천대받아 창고에서 빗물에 젖은 채로 발견되었답니다.
네.... 가족들이 싫어해요 ㅠ.ㅠ

머큐리 2009-09-28 22:27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ㅠㅠ

순오기 2009-09-28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 사는거 많이 자제했습니다.ㅋㅋ
어릴때 책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되는 거지, 자녀의 독서에 대해 지나친 강요나 비판은 곤란할 듯...

머큐리 2009-09-28 22:27   좋아요 0 | URL
알려주고 싶은데...아무래도 부모 욕심이 자꾸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아요.. --;

비연 2009-09-28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달에 두번으로 제한했습니다...;;;;; 안 그랬다간 곧 파산..삐요삐요~
신용카드 청구서를 보면 아름답게도 '알라딘'으로 도배가 되어 있죠..
후배는 진드기 나온다고 책 많이 사는 저를 질색합니다. 책살 때마다 얘기하죠...
"진드기 더 나오겠군요.." ㅡㅜ

머큐리 2009-09-28 22:26   좋아요 0 | URL
알라딘으로 도배된 신용카드에 교통비만...흑

비로그인 2009-09-2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있는 글입니다. 머큐리님
음.. 저도 일종의 책 마니아인데요, 내 아이들 넷 중에 셋은 열심히 책을 읽습니다.
맨 나중 아이는 만화책과 과학책만 봅니다.
일종의 편식이므로 인문쪽으로는 무식하지요.
이 아이보며 누나들과 나는 종종 웃습니다. 이런이런! 하하
말에 무식한 태가 납니다. 그래도 봐주는 편이지요.
머리에 쓸데없는 지식이 없는, 그 만큼 건강하거든요.
책이 때때로 약일 수도, 독일 수도 있겠다 합니다.


딸기 2009-09-29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트랙백쓸까 하다가... 귀찮아서 걍 추천만 누르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