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물고기가 한 사람을 바라보는 오후 시인동네 시인선 15
안이삭 지음 / 시인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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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시인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은 나에게 의미가 되었다’고 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와 사물들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본다면 내게 커다란 의미가 된다. 그것들은 보잘것없는 한낱 미물일지라도 세상 모든 만물과 같이 숨 쉬며 삶의 새로운 의미와 영역을 만들어 나간다. 안이삭 시인은 집에서, 길에서, 자연에서 지나치거나 소멸할 수 있는 미물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여한다. 시인의 시는 세상 만물과 같이 숨 쉬며 삶의 새로운 의미와 영역을 보여준다.

 

 


너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야겠다
징검다리 건너다가
물억새 그늘 흔드는 작은 소요
반갑다, 피라미!

 

 

이쯤에서 가만히 서 있으마!
새끼손가락만 한 몸 구석구석 새겨진 팽팽한 경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고
어미의 어미 또 그 어미의 어미가 가르쳤구나

 

 

이 넓은 우주
홀씨 하얗게 날리는 봄날
한 물고기가 한 사람을 바라보는 오후

 

 

나지막이
내 이름을 일러주었다

 

 

(‘통성명’, 24쪽)

 


미물을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홀씨 하얗게 날리는 봄날’에 새끼손가락만 한 피라미의 눈에는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거대한 생명체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도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같은 종족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도 넓은 우주 속에 살기 위해 헤엄치는 한낱 미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래서 시인은 오만함을 벗고 진지한 사색을 시도한다.

 

 


여자가 가진 것은
하얀 벽에 기대어둔 햇빛뿐이다

 

 

처음 보았을 때 여자는
벽에 기대 앉아
햇빛의 털을 고르고 있었다
두 번째 보았을 땐
햇빛의 갈비뼈를 퉁기고
햇빛의 발바닥을 핥아주고 있었다
세 번짼 오래된 햇빛을 꺼내어
때 묻은 소매로 닦고 있었다

 

 

여자는 자주 웃는다
자주 웃으며 이야기한다
반짝이는 나뭇잎에 귀를 문지르는 여자의 말상대는
햇빛이다

 

 

오늘도 여자는 길 위에 있다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나
누가 겁 없이
건들거리며 여자의 거처를 침범했나
날카롭고 무거운 노랫소리가
곧장 여자의 무릎으로 떨어져 꽂힌다

 

 

세실카페 모퉁이 저 끝에서
흥분한 바람이 펄럭이고 있고
1억 5천만 킬로미터를 달려온 햇빛은
마침내 여자의 머리카락에 닿아
"괜찮다, 괜찮다" 미끄러지고 있다

 

 

(‘세살카페 옆 고양이’, 18쪽)

 


사람이건 미물이건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추구한다. 괴로움을 따르고 즐거움을 배척하는 존재란 없다. 행복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요, 바람이다. 인생의 목적이 바로 행복이다. 누구든 행복한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원하고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괴로움이 없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괴로운 일이 없다면 즐겁고 행복한 일이 계속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락한 삶을 침범하는 고통이라는 손님을 맞아들여야 한다. 불청객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고 보내는 것도 힘들지만, 힘들고 힘든 것 역시 살아있음의 자각이다. 행복은 어느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이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하는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 피부와 마음에 닿은 저 포근한 햇빛마저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넘칠까봐
늘 위태로웠지
몇 개의 뼈와 가죽 안쪽에서
오랫동안 찰랑거리던 것
가끔씩 햇빛에 널어
꾸덕꾸덕 말라가는 것도 같았지만
잠깐 잦아들 뿐 다시 찰랑거리곤 했지
바람이 급하게 구름을 몰아가는 동안
개울물 독경 소리 흘러가는 동안
내 귀가 듣지 못하는 말 있었는지
들고 있던 것들 그만 내려놓고 싶어지네
낮아지고 낮아져서 그만
이마를 바닥에 대고 말았는데
주머니 속에서 때를 놓친 씨앗 한 알
오랫동안 잊고 지낸 작은 물고기
이런 하찮은 것들이 흘러나오데
돌멩이 적시며 개울로 스며들데

 

 

(‘새벽, 대흥사’, 43쪽)

 

 
대자연 앞에서는 인간도 어쩔 수 없는 미물, 산다는 것이 그렇게 덧없고 무상한데 코딱지만 한 달팽이 뿔 위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蝸牛角上之爭). 끝없는 욕망으로 인한 타락으로 인간의 고결한 품성이 사라진 지 오래며, 오히려 미물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과연 인간은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을까. 자연의 맥박이 뛰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겸손한 마음을 얻는다. 미물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깊은 성찰이 재료가 된 시는 옳기도 하고, 숭고하다. 미물의 세계에도 그들의 숭고함이 있고 성스러운 행위가 엄연하게 존재한다. 내 손에 꾹 쥐고 있는 욕심 덩어리를 내려놓고, 낮은 데를 굽어보면 아름다운 자연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미물이 살아있다는 증거, 즉 우리 역시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좋은 신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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