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세습에 열중하는가 - 재벌의 세습경영과 한국경제의 미래
유재용 지음 / 나남출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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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려워지고 정권의 임기 끝이 저만치 보이기 시작하면 레임 덕(lame duck) 현상이 일어난다. 레임 덕은 임기 말 대통령의 권력이 약화하는 현상을 뜻한다. 대통령의 지도력이 약해지면서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을 다리를 저는 오리의 모습에 빗댔다. 이때 재벌과 보수 야당은 공세의 고삐를 조이기 시작한다. 전경련, 자유기업원 등 산하단체는 물론이려니와 우파 학자들까지 총동원하여 정부의 기업정책을 비판한다. 일부 보수 언론까지 여기에 가세하여 마치 정부가 재벌을 억압하여 우리 경제가 정부 잘못되고 있는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

 

그들은 정권 교체를 위해 현실의 왜곡도 마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경유착을 알고도 묵인하는 재벌 중심 자본주의를 종식하고 우리나라에 올바른 시장경제가 정착되도록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좌파 또는 종북 세력으로 매도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못 하는 일이 없다. 과거에 그랬듯이 말이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1997년. 재벌의 연쇄도산으로 역사 이래 최대의 경제 위기를 맞았다. 부실 재벌의 처리 비용으로 이미 백조 원이 넘게 들었고 앞으로 더 들어야 할 돈과 이자 비용까지 고려하면 이백조 원은 넘을 터인데, 이 모두가 우리 같은 서민들이 갚아야 할 빚이 되었다. 이런 천문학적인 규모의 빚을 국민에게 떠넘긴 장본인들이 바로 재벌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남의 돈을 내 돈인 양 물 쓰듯 쓰면서 수익성을 무시한 채 화려한 외형확장에만 탐닉했다. 돈을 못 벌어 이자를 갚기 힘들면 돈을 더 꾸면 되었다. 회계장부를 조작하여 돈을 많이 버는 양 꾸미면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제대로 한번 살려보자는 것이 재벌개혁이다. 재벌의 성적표를 제대로 매겨 시장에 보여주자는 것이다. 각종 비리에 연루되거나 경제 성장을 위해 제대로 된 노력을 하지 않은 재벌에 책임을 묻자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국가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것이 있었기에 그 국가들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다.

 

《우리는 왜 세습에 열중하는가》는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더디게 하는 세습 경영을 비판한다. 여기까지 보면 너무 당연한 얘기로 들린다. 하지만 책 제목의 주어에 주목하시라.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 ‘우리’는 중의적이다. 불공정한 세습 경영을 고집하는 우리나라 재벌과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들을 가리킬 수 있고, 이러한 심각한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대중을 뜻하기도 한다. 멜로드라마의 진부한 단골 소재 중 하나가 ‘백마 탄 왕자’처럼 등장하는 재벌 2세이다. 그들은 부모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차기 경영인이면서도 자신이 소유한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을 좋아한다. 대중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설정임을 알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에 열광한다. 세습 경영이 부작용이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영인의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에 소극적이다. 경제가 잘못되면 먼저 대통령 탓으로 돌린다. 물론 대통령의 리더십과 관료주의는 비판 대상이다. 그런데 재벌 3, 4세들이 선친의 기업을 물려받아 경영하면서 경제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있는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중소기업 등에 빨대를 꽂은 재벌 3, 4세들을 보라. 이게 경제 발전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개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전근대적인 세습 경영이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친 재벌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경영 방식을 ‘기업 상속’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기업 상속은 장점이 많다. 기업이 보유한 핵심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발전시키고, 기업경영의 영속성을 제고할 수 있다. 그런데 친족 관계로 맺어진 경영인들이 기업 상속을 위해 분식회계 · 정경유착 등 무리한 시도를 했다면 그들의 경영 능력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과연 그들은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감 있는 경영 비전이 있어서 기업 상속을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기업’ 그 자체를 지키고 싶은 것일까. 후자의 목표를 위한 거라면 문제가 있다. 기업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를 깎는 요인 중 하나다. 그런데 친 재벌 경제학자들은 기업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 그리고 비판마저 ‘반 기업 정서’를 부추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재벌을 만든 고인들은 남다른 도전과 창의성으로 기업을 일궈낸 공로로 생전에도 재계 지도자로 추앙을 받았다. 이 땅에 자동차와 중화학공업을 뿌리내리고 반도체 · 전자 등 첨단산업을 태동시킨 혜안은 경영학의 사례연구와 분석과제로 손색이 없다. 그들의 경영 방식도 한계가 있고 비판 대상이 되지만, 국익과 경제 성장을 위해 노력했으므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재벌 1세들에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경영권 세습을 당연하게 여긴 점이다. 그들의 후손은 리더십 검증을 받지 않은 채 기업을 이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재벌 1세들의 공로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말한다. 재벌 1세가 워낙 능력이 뛰어나니 당연히 그들의 후손들도 기업을 잘 이끌어나가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면 정말 좋은 일이다. 하지만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 경영인의 외모는 유전될 수 있어도 자질과 능력은 절대로 유전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사실만 알아도 세습 경영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왜 세습에 열중하는가》는 적폐 청산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정경유착의 명맥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지 아주 쉽게 설명한다. 기자 출신인 저자는 권력과 부만 대물림되는 세습 경영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씩 알려준다. 재벌 3, 4세의 역량에 대한 공정한 검증이나 평가가 없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후광에 의지해 정치권력과 자본 권력의 중심에 선다. 세습 경영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부의 편중 현상을 심화시켜 서민들을 시름에 빠지게 하고, 부정부패에 따른 기회비용은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 세습주의(저자는 어쩔 수 없이 ‘세습자본주의’라고 썼는데, 저자 말대로 ‘세습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는지 딜레마다)가 근절되지 않으면 ‘흙 수저론’ 논쟁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흙 수저’ 청년이 경영인이 될 수 있는 공정한 경쟁 기회가 박탈된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 재벌이 저지른 크고 작은 사건들을 보면서 점차 분노에 무감각해지고,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면서 짜증 섞인 혼잣말을 되뇐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먹고 살기 힘든 원인을 대통령에게 찾는다. 그러면서 경제를 확실히 살릴 만한 대통령 후보감이 누군지 살펴본다. 이런 와중에 재벌 책임론은 잊힌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재벌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세습과 비리를 시도한다.

 

이제 재벌 문제를 논할 때 ‘우리는 왜 세습에 무관심하는가’에 먼저 초점을 맞춘 다음 ‘그들이 왜 세습에 열중하는지’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만의 자본주의(세습주의)’에 적극적으로 분노하고 타파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저항하는 시민들의 힘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경험이 수없이 많다. 우리는 정권 교체를 이끈 결정적인 동력이 된 저항 의식과 결집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런 우리가 재벌 세습주의를 근절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 Trivia

 

 

* 우리나라에서 유독 세습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로 능력에 대한 평등적 인식을 꼽았다. 그렇다. 능력에 대한 존중의식이 있다면 사실 세습은 가능하지 않다. (234쪽)

 

 

→ 재벌 3, 4세의 능력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능력에 대한 평등적 인식과 거리가 멀다. 저자는 재벌에 속하지 않은 전문 경영인의 능력을 존중하는 인식이 형성되어야 세습주의를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입장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능력에 대한 평등적 인식의 부재’라고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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