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의 탄생 - 그림으로 보는 우주론, 한국어판 복간본
스기우라 고헤이 지음, 송태욱 옮김 / 안그라픽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기우라 고헤이(杉浦康平)는 우리나라에도 개인전을 연 적이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책 디자이너다. 그는 아시아 문화권의 도상(圖像)을 주제로 한 수많은 전시 기획과 전시 활동을 해왔다. 올해 초에 재출간된 스기우라의 책 《형태의 탄생》은 그가 만든 디자인에 녹아들었던 아시아적 시각 문화와 시각 언어를 ‘형태’라는 주제로 설명한 책이다.

 

책의 부제는 ‘그림으로 보는 우주론’이다. 부제 때문인지 《형태의 탄생》이 우주과학 분야(…‥)의 책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책의 부제에 있는 우주론은 천문학의 영역에 있는 학문의 하위 분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철학에 기반을 두어 우주 만물의 생성 원인과 구조를 설명하는 사상이다. 고대인들은 하늘과 땅(지구), 태양, 달 등 우주 만물이 인간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신령스러운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를테면 일상의 밤하늘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별을 볼 수 있었던 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늘과 긴밀히 결속돼 있다 생각했다. 그들에게 하늘은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존재였다. 달은 모양에 따라 조류를 바꿨고, 태양은 별과 함께 계절을 바꿨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 계절을 따랐다. 계절에 따라 나타나는 비와 바람, 천둥과 같은 기상 현상에 고대인들은 울고 웃었다. 하늘이 인간의 영혼과 사회를 규정한다고 생각했던 고대인들은 하늘과의 긴밀한 관계를 자신들의 일상에 담았다. 달력, 별자리표와 책력, 신화, 의례, 춤, 무덤 등에 고대인들이 생각한 하늘이 담겼다.

 

책 제목에 있는 ‘형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태’를 일본어로 하면 가타치(かたち)로 읽는다. 가타치는 사물의 외형을 결정하는 고정된 규범(틀)을 뜻하는 ‘가타(かた)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생명력)을 뜻하는 ‘치(ち)가 합쳐진 단어다. 스기우라는 사물의 고정된 틀에 생명력이 더해지면 ‘형태’가 탄생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도상에 숨어있는 ‘생명력이 넘치는 형태’를 발굴한다. 그가 도상에서 발견한 ‘형태’에는 고대인들의 우주론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고대인들은 ‘형태’를 통해 우주론과 세계관을 구축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형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문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반영했다. 고대인들은 문자에 자연의 이치를 새겨 넣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기우라도 고대 아시아인들의 우주관을 반영한 디자인을 만들었다.

 

《형태의 탄생》의 장점은 풍부한 도판이다. 동양 사상, 문화, 종교에 문외한이더라도 서양 도상에 볼 수 없는 동양 도상만의 매력을 느끼고 싶은 독자라면 도판만 골라 보면 된다. 다만 흑백 도판의 수가 천연색 도판의 수보다 적다. 책의 판형은 크지 않은 편인데도 정가가 비싸다(4만 7000원). 완전 천연색 도판으로 채워졌으면 현재 정가보다 더 비싼 금액이 나왔을 것이다. 복간판에는 구판에 없는 내용이 새로 추가되었는데, 일본 최고의 독서가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가 쓴 서평이 수록되어 있다.

 

한 권의 책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말이 있듯이 《형태의 탄생》은 광범위한 고대인들의 우주가 들어 있다. 스기우라는 자신이 만든 책을 살아 숨 쉬는 ‘작은 존재’라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살아 있는 책의 표지는 ‘인간의 얼굴’이다. 그는 책이라는 틀(가타)에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뿐만 아니라 생명력(치)까지도 불어넣는다. 직업적인 이유가 아니고선 밤하늘을 볼 일이 드문 오늘날 우리에겐 그만큼 우주의 원대함과 광활함을 느껴볼 기회가 적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밤하늘을 많이 보는 편도 아니고, 책도 보지 않는다. 우주가 들어 있는 책마저 보지 않는 현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생기 있는 호기심은 사라져 간다. 결국 우리 인생에 남아있는 형태는 세상을 딱딱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틀’이다. 국경 너머 바깥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관심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또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에)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혹시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