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점심을 먹으면서 이수정,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을 들었다. 그간 안들었던 회차가 많아서 뭘 들을까 고민하고 목록을 살펴보다가 강박증에 대한 언급이 있길래 그걸 듣게 되었다. 내가 원작을 읽기도 했고 영화로도 보았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대한 얘기였다.
극중 남자주인공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봐야만 응원하는 축구팀이 이긴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자연스레 징크스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징크스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거였다. 나는 내가 가진 강박증을 알고 있고 그래서 들었던건데, 징크스와 연결되어 있다니. 이건 당연하겠구나, 들으면서 생각했다. 징크스도 강박도 모두 불안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제대로 될 것 같지 않다는, 이것이 안될지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그 불안은 어떤 불안인지에 대해 다르겠지만 징크스가 강박을 불러오는 것은 필연적으로 느껴졌다. 많은 징크스는 더 큰 강박이 아닐까.
전에도 얘기한 적 있지만 내게도 징크스가 있다. 좀 여러개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타인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가족에게도 애인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물론이다. 내 징크스를 내가 입밖으로 내는 순간 '뭐 그런 생각을 해' 하고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고 혹은 '야, 그런 생각하지마, 이겨버려' 쉽게 얘기하는 걸 듣게 될까봐 저어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아버지보다 내가 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내 징크스에 다른 '사람'이 포함되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사람은 내 뜻대로 안되는데, 내가 내 징크스 때문에 타인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일을 한다는 건, 생각만해도 너무 끔찍하기 때문이다. 너가 있어야만 축구가 이겨, 하고 자꾸 너를 내 축구관람에 부르는 일은, 상대에게는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 상대가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응해주지 않을 뿐더러, 상대의 징크스가 아닌데 나의 징크스 때문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민폐가 아닌가 말이다. 내가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나는 그래서 내 징크스를 말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선한 마음에 내 징크스를 계속 생각하고 배려해줄까봐. 그렇게 되면 나의 징크스는 당신의 징크스가 될까봐. 누군가 나의 징크스에 끼어드는 순간 폐가 되는 것이 나는 두렵다. 그리고 이 징크스와, 강박이, 불안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니. 나는 내 불안을 알고 그러므로 이것을 어떻게는 내 식으로 알고 견뎌내고 혹은 극복하고 싶다. 그렇게 몇 번이나 책을 읽어보려고 하지만 어제 같은 경우도 졸음이 찾아왔다.

그러니까 위의 사진이 어제 내가 잠들기 전 침대 위 풍경이다. 저 책들을 다 읽겠다고, 일요일 밤이니까, 낮잠도 잤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밤을 새며 이 책들을 읽겠다! 하고 다 꺼내온 것이다. 나여.. 밥통.. 그러나 현실은 아니 에르노의 책을 몇 장 읽지도 못하고 졸음이 찾아와서.. 열시 무렵 자버렸다는 것. 아, 저 책들은 오늘 아침에도 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책들아, 미안.. 내가 꼭 읽어줄게. 흑흑 ㅜㅜ
내 문제를 내가 알고 내가 극복하겠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토요일에는 아가 조카를 보러 다녀왔다. 이번에 가니 아가 조카는 또 훌쩍 자라서는, 아아, 낯가림이 심해졌다 ㅠㅠ 엄마와 나를 보고는 통곡을 하는데.. 흑흑 아가야, 나 이주전에도 봤잖아, 왜... 왜.... ㅜㅜ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더이상 우리를 보고 울지 않았고, 그래서 이제 올케에게 편하게 밥을 먹으라고, 편하게 잠을 자라고, 우리가 봐주겠다고 하고 아가를 보는데, 아가는 어느 정도 잘 놀다가 갑자기 내 얼굴을 보고 나랑 눈을 맞추더니 또 울기 시작했다. 아가야... ㅠㅠ
제아빠와 제엄마가 옆에 있을 때에만 고모를 보고 웃어주는거니? 흑흑 ㅜㅜ
저녁 무렵에는 아가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아가에게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게 해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남동생이 사는 아파트 단지 바로 뒤에 산이 있어서 초록초록한 나무들을 집을 나서자마자 볼 수 있었는데, 그래 아가야 이렇게 바깥 바람을 쐬렴, 하면서 유모차를 밀어주었고, 얼마 안가 짜증을 내길래 남동생이 아기띠를 하고 안아주었다. 제아빠에게 안겨서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빠 손을 꼭 잡는데, 아, 너무 예뻤다. 가만 있어봐, 멈춰봐, 나 이거 남기고 싶어, 하고 나는 사진을 찍었다.

아 너무 예쁘지 않나요, 여러분... 흑흑.
요즘 저렇게 꽉 쥐고 꼬집기도 하는데, 나도 내 팔을 내어주니 꽉 쥐면서 꼬집더라. 아팠지만 너무 좋았어서, 그래그래 더 꼬집으렴, 했다. 저렇게 무언가 꽉 쥐는 저 생명력을 너무 사랑한다.
아가가 낯가림을 해서 서운한가, 라고 집에 돌아와 곰곰 생각했는데, 아가가 잘 놀다가 갑자기 나의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 서운하기 보다는 또 너무 예쁜거다. 팔불출 고모라서 그럴 수도 있는것이지만, 그러니까 아가가 나를 보고 울었다는 게, 놀다가 어? 이 사람은 누구야? 하고 울었다는 게 너무 예쁜거다. 자라고 있구나, 이제 아빠 엄마, 늘 제곁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는구나, 싶어서 그게 그렇게나 좋은 거다. 낯설다고 우는 조카 보고 와서도 또 그게 너무 예쁜 나란 사람...
조카1은 얼마전에 최근 베스트셀러인 달러구트 꿈백화점을 읽고 너무 좋았다고 했다. 지난주에 울집에 와 나랑 서점에 가서는 판타지 코너에 가보자며 판타지 코너 책들을 구경했고, 그렇게 조앤 롤링의 책 한권을 읽고 싶다며 고르길래 내가 사주었다. 조카는 계속해서 코너를 보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을 집어들고 이건 뭐지? 했는데,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이 여성학 코너가 아니라 판타지 코너에 놓여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애트우드도 판타지를 쓰지! 나는 이미 몇 권의 책을 준비해두고 있지!
조카가 좋아하는 해리 포터나 꿈백화점(이건 안읽어봄)은 내 취향이 아니어서 읽다 말거나 읽을 생각이 없기는 했지만, 조카가왜 판타지를 좋아할까, 왜 나랑 취향이 다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판타지 코너에 놓인 애트우드의 책을 들었다 놓는 걸 보는 순간, 아아, 우리가 언젠가는 기어코 만나겠구나, 했다. 애트우드가 우리를 만나게 해주겠구나, 애트우드는 우리의 접점이 되겠구나, 하면서 짜릿해졌다. 어쩌면 조카는 이 시기가 지나면 판타지를 멀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어쩌면 계속계속 판타지를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되든 언젠가는 우리는 애트우드로 만나겠어!
그러자 너무 좋았다. 우리의 접점이 애트우드일 수 있다는 거. 그게 너무 좋은 거다. 다른 작가도 아니고 애트우드라니!
사두고 안읽은 애트우드의 책들을 좀 많이 읽어줘야겠다. 언제? 몰라..
누구나 그렇겠지만 가끔 과거의 어떤 일들이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뭐가 계기가 된건지 모르겠지만 불쑥 떠오르는 과거들 때문에 즐거워서 웃기도 하지만 쪽팔려서 머리를 쥐어 뜯기도 하고 어떤 건 너무 싫은 기억이라서 내가 내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기도 한다. 그 때 그 짓은 너무 못된 짓이었어, 왜 그런 짓을 했어,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과거의 어느 한 때 어린 시절이어도 그 기억이 내게 있는게 싫은 거다. 그렇게 나쁜 기억에 사로 잡히면 거기에서 나오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찾아본다. 내 손으로 가만히 내 가슴을 쓸면서 괜찮다고, 나빴지만, 앞으로 더 착하게 살자고 다독이기도 하고, 불안을 잠재운다고 해서 요즘엔 마그네슘도 먹고 있다. (그런데 마그네슘 먹으면 변비 생기나요?) 마그네슘이 실제로 불안감을 잡아주고 안정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플라시보 효과가 큰 사람이라 불안하구나, 마그네슘 먹자, 하는 거다.
엄마와 남동생네 집에 다녀오며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그래서 이런 대화를 했다.
"엄마 가끔은 아주 아이때로 돌아가고 싶어. 그래서 다시 살아보고 싶어."
"다 부질없는 말이지. 그럴 수 없으니까."
"응 그런데 어릴 때로 돌아가면 나쁜 짓 안하고 못된 짓 안하고 후회없는 삶을 다시 살아보고 싶어."
"아마 다른 식의 후회할 일이 생길거야, 다시 살아도."
그래, 그렇겠지, 어떤 잘못을,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인지하는 잘못을 피할 수 있었을지언정, 다른 잘못들을 내가 살면서 저질렀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은 착하게 살자, 착해지자, 라고 내가 나한테 말한다. 꼭 선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어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지는 말면서 살아가자고 생각한다. 누구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살지는 못해도 아픔을 주면서 살지는 말자.
물론 나는 그 누구보다 내 자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가않다. 살아가면서 내렸던 결정들은 궁극적으로 나를 덜 아프게 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데 그게 정말 덜 아픈 선택이었나?' 묻게 됐다. 다시 묻고 또 물어도 이 결정을 내렸겠지만, 그런데 이래서 내가 덜 아팠던건가? 더 아팠던 건 아닌가?
친구들과 영어책 읽는 것에 대해 오늘 아침에도 얘기했다. 왜 우리는 이렇게나 계속 읽고 싶어하는 걸까. 원서를 읽는 것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나에게 번역서를 읽는 것보다 몇 배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일이다. 그러니 원서를 읽지 않는다면 나는 그 시간에 몇 권의 번역서를 더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꾸 원서 읽기에 욕심을 내는가.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욕망이 없다면 노력도 없을 것이고, 그런 삶은 그저 물에 물탄듯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친구들과 나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왜 우리 실력은 빨리 늘지 않는걸까 계속 고민하고 이야기하면서 또 할당된 양을 읽고자 한다. 나는 이것으로도 좋다. 실력이 언제 향상될지는 모르지만, 과연 향상될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계속 공부하고자 하는 친구들이 옆에 있고, 그래서 그걸 같이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비록 나는 그중 실력이 가장 떨어지지만, 그래도 계속 같이 한다는 게 힘이 된다. 무엇보다 내가 무언가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좋고.
영어권 나라에서 사는 남자랑 말레이시아 갔을 때, 모든 대화를 대부분 그에게 하도록 두었던 것에 대해 나는 몇년째 계속 생각한다. 다른 친구들하고 갔을 때는 문법이고 뭐고 생각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하는데 두려움이 없었는데, 영어권 나라에 사는 남자라서 위축됐었다. 문법이나 단어가 제멋대로 나오는 것이 나를 부끄럽게 할 것 같아서 입 열기를 주저했었다. 결국 영어를 잘하는 그가 모든 대화를 했지만, 그 시간이 두고두고 나에게 부끄러움과 수치로 남아 있다. 내가 잘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텐데. 최소한 틀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라도 없었다면..
내가 영어를 잘한다면 아마 그렇게 후회할 일은 또 없겠지.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내가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1.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
2. 영어권 나라에 사는 남자랑 안사귄다.
역시 문제를 파악하면 해결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는 자랑스런 나인 것이다.
가끔 효녀 모드가 되어 아빠랑 영화를 보는데, 아빠랑 같이 재미있게 볼만한 게 뭐가 있을까 하다가 이 영화를 선택했다. 넷플에 있는 영화였다. 주연에 브리 라슨 있길래, 오, 킹콩이 나오는데 브리 라슨? 도대체 무슨 영화지? 하면서도 어떤 의심 같은 게 1도 없었다. 브리 라슨이, 새뮤얼 잭슨이, 무려 킹콩 영화에 막 나왔을까? 그런데 아니 무슨 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 스포일러 팡팡 터져요.
여기 킹콩만 나오는 게 아니고 킹콩만한 거미, 킹콩만한 메뚜기, 킹콩만한 문어.... 가 나온다.
오
마이
갓
이쯤하겠다. 하아-
아니, 그런데 톰 히들스턴.. 나는 토르에서 보고 영 별로였는데, 이 영화에서 평상복 입은 용병인데... 되게 멋있네요 잉?

운동.. 하시나봐요...
크, 원래 어제 자기 전에는 브리저튼과 여성의 욕망에 대해 페이퍼 쓰려고 했었는데 거기에 대해 한마디도 못하고 페이퍼가 길어졌네. 그렇다면 그거슨 다음으로... 씨 유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