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 살 조카는 일주일에 두 번, 발레를 배우러 다닌다. 유치원이 끝난 뒤에 바로 발레학원으로 가는데,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발레를 무척 좋아한다. 발레 가는 시간을 기다린다. 며칠전에는 유치원에서 발에 작은 화상을 입었다. 아프냐고 물어보니 따끔했다 라고 답했는데, 병원에 가보니 별다른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되고 밴드만 붙이라고 했다. 아주 작은 부상이라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고, 제엄마는 조카에게 '오늘은 발레 학원 쉬자'라고 말했단다. 그런데 조카는 굳이 발레를 가겠다면서 '발 쓰는 동작은 안할게' 라고 했단다. 하는수없이 여동생은 발레 학원에 제 딸을 내려주면서, 발 쓰는 동작 하지마, 라고 다시 얘기했다는데, 조카는 안하겠다면서 '앉아서 구경이라도 하고 싶어'라고 했다는 거다. 와- 이 아이는.. 뭐지? 놀랍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발레에 열중하게 만들었을까? 이 아이는 어쩌다 이렇게 발레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단순히 욕심이 많아 배우는 것을 잘하고 싶다는 걸까, 아니면 정말 발레 자체에 큰 매력을 느낀걸까, 아니면 순간의 재미인걸까? 내 경우에도 어릴 적에 피아노를 배우면서 되게 열심히 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게 한 때였던 거다.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니까 학원 가기도 싫고 피아노 치기도 싫었었어.. 이 아이도 그런 걸까? 아니면..정말 발레가 좋고 소질이 있는걸까? 친척중에 누구도 발레나 무용 춤에 관심도 흥미도 없고 직업도 없는데, 어떻게 이 아이는 저 혼자서 우뚝, 발레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어쩌면.....내가, 배우질 않아서 그렇지, 발레에 소질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칠 살, 이 작은 아이의 발레에 대한 열정이 새삼 신기하다. 놀랍다. 집에 와서도 틈만 나면 발레 연습을 한단다. 게다가 네 살 동생까지 불러서 따라하라고 한단다. 이 아이는......뭐지? 뭘까? 앞으로 자라서 무엇이 될까??????????????? 나의 미래 못지않게 이 아이의 미래가 궁금하다. 아이가 자라는 걸 지켜보는 일은 너무나 흥미진진하다. 또한, 매순간이 감동이다.








어제는 문득 '귀여움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귀염귀염 받고 싶다, 라는 생각. 그러고보니 나는 살면서 누군가 나를 귀여워해준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 거다. 예뻐해줬지...(응?)

외모도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고 성격도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고..집에서도 장녀 였었고, 언제나 어딜 가도 좀 쎈 캐릭터라 해야하나, 심지어 알바나 회사에 입사했을 때도, 당시엔 직급이 '막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여움 받는 막내라기 보다는 듬직한 막내 스타일이었달까... 한 번은, 첫직장에서 사장이 뭔가 되게 고민이 있어서 한숨을 푹푹 쉬니까 팀장이 '중역들 불러서 오늘 같이 술마실까요?' 물었었는데, 그때 사장이 '중역들하고 마시느니 락방이랑 둘이 마시는 게 낫겠다'라는 얘길 한 적도 있었더랬다. 나는...뭘까? 그래서 어제는 하루종일 귀여움 받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렸다. 그리고 저녁에 술을 마시러 가서 남자1에게 귀여움을 받아본 적이 없다, 라는 얘기를 하니, 연애할 때 남자친구들한테 귀여움 받지 않았냐고 묻는거다. 그 물음을 듣고 곰곰 생각해보니..나는...애인들한테 귀여움 받는 스타일이 아니라 애인들을 귀여워해주는 스타일이었어..내가 애인을 귀여워했다..... 아..나에게는 귀여움이 결핍되어 있어. 귀여움 받고 싶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나는 앞으로도 귀여움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은 거다. 내가 이 나이에, 이 직급에, 이 성격에.... 누구한테 어떤 귀여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아!

며칠전에 여동생이 나 귀여워해줬다!!!

통화중에 자꾸 웃길래 '왜 자꾸 웃어?' 물으니 '언니 너무 귀여워서' 이랬던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생각났어! 날 귀여워해줬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내가 그 말 듣고 너무 좋아서 '내가 귀여워 니 아들이 귀여워?' 라고 물어서 여동생이 빵터졌었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에겐 귀여움이 결핍되어 있어...

귀여움 받고 싶다... 앞으로도 가능성 없는 일.

갑자기 락스티의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It must have been love but it's over now.


그것은 사랑이었이죠, 끝나버렸지만... 

나의 귀여움도...끝나버렸죠. 타올랐던 적도 없이... 




어제는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오, 또 예쁨이 터지는 거다. 예쁨이 폭발했어! 깜짝 놀랄 정도로 예뻐서 '오늘도 예쁨이 폭발했군' 생각했는데, 그러다보니 일전에 나와 므흣한 관계였던 남자가 '너 술취한 거 예쁘네' 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말에 나는 '니가 취해서 나를 예쁘게 보는 거지' 했었더랬는데, 지금와 생각해보니 내가 취하니까 예쁜 게 맞는 것 같다. 나는 알콜이 들어가면 예쁨력이 상승하는 듯. 이런 생각을 하고 잠을 자서인지 꿈을 꿨는데, 꿈에서 내가 길을 걷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서 너무 예쁘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에서 너처럼 예쁜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라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것은 취중 꿈이련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움은 없지만 예쁨이 있으니까 남은 생도 열심히 살아보자.



라고 쓰고 끝낼라고 했는데,



아니, 방금전에 거래처 분 오랜만에 오셨는데 날 보더니 '젊어지셨어요!' 한다. 아니 뭐야 이놈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참나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늙었었냐, 뭐가 젊어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또 아침부터 빡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체 날 어떻게 봤길래 젊어졌다는거냣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인생은 뭐냐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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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6-1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레는 오래하면 좋다고 하대요. 특히 성장기 어린이들한테요.
스트레칭이 되서 키크는 것에도 도움이 되고 자세 교정도 되구요.
저희 집의 어떤 어린이도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7년을 했어요. 으흠.....
공연 가면 동작 보고 말합니다. 엄마, 제게 뭐야~~ (이건 뭐야~~~ 불어임^^)
다락방님 예쁜 조카는 다락방님을 닮아서 발레를 좋아하는 거 아닐까요. ㅎㅎ
우아하고, 아름다운 발레 동작에 반한 거예요. 사실 아이들이 유연해서 유리하기도 하구요.

넘 욕심내지 말자구요.
다락방님은 예쁨을 담당하기로 했잖아요. 귀여움은 둘째 조카한테 양보하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6-06-10 10:26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조카가 발레를 좀 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발레리나를 꿈꾸는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발레를 안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저를 닮아서 발레를 좋아하는 걸까요? ㅋㅋㅋㅋㅋㅋㅋ 제 안에..저도 모르는 발레에 대한 흥미..이런 게 있는 걸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아이들이 자라는 거 보면 참 신기해요. 저 작은 몸으로 동작들 따라하는 것도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럽고요,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걸까 신기하고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그래요. 아이들은 너무 좋아요. 아이들은 너무 예뻐요. 제가 이모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제가 이모도 되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도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신비한 존재인지 모르는 채로 생을 살았을 거에요. 동생과 제부와 조카에게 감사를!!

네, 저는 예쁨을 담당할게요. 이번 생에서 귀여움은 안되겠어요. 사람이 다 가지려고 하면 안되는거죠...과한 욕심은 안좋은거죠..저는 그저 예쁨만 담당할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젤리곰 2016-06-10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제가 이 구역의 프로 귀여움러! 만물귀여움론자!

다락방 2016-06-10 10:27   좋아요 0 | URL
아! 너무나 아름다운 댓글이다. 프로 귀여움러라니! 저도 귀여워해주실 건가요? (초롱초롱)

젤리곰 2016-06-10 10:52   좋아요 0 | URL
이미 다락방님은 제 맘속의 귀요미...(막 지른다)

다락방 2016-06-10 10:54   좋아요 0 | URL
아이 좋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웽스북스 2016-06-10 11:52   좋아요 0 | URL
제 결혼식에서 제가 다락방.... 하시는 순간부터 귀여웠다고 합니다. 후훗

다락방 2016-06-10 11:5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는 무슨 자신감으로 가가지고 `제가 다락방입니다` 이랬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웃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해한모리군 2016-06-1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비분에 차서 글을 썼는데 귀여운 여자들이 이렇게 많으니까 인생은 괜찮은거 같아요.. ㅎㅎㅎㅎ

다락방 2016-06-10 13:27   좋아요 0 | URL
앗 저는 방금 모리님의 서재에 가서 비분에 찬 글을 읽으며 불끈. 힘주어 좋아요를 누르고 왔는데 말입니다. 마침 제가 요즘 읽기 시작한 책이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인데, 거기서도 경제를 정치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모리님 페이퍼에서도 같은 내용을 봐서, 비분에 찬 글이지만, 오오, 반가웠어요.

무해한모리군 2016-06-10 13:38   좋아요 0 | URL
제가 어제 세월호 유가족 대표분이 연설하는 걸 라디오로 들었어요. 정말 화가 나는거예요. 그냥 평범한 아버지였던 분이 이제 완전히 투사가 되신거예요... 평범하게 자식의 죽음을 애도할 수 조차 없다니 너무 화가나지뭐예요. 게다가... 요즘 뉴스 보도 행태가 아주 화가나네요... 제 딸도 다음딸부터 발레를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해요... 저를 보면 별 성과는 없........... 음..... 재미있으면 된거죠 ㅎㅎㅎㅎ

다락방 2016-06-10 13:42   좋아요 0 | URL
저는 지난주였나, 뉴스를 보는데 너무 화딱지가 나서 더이상 뉴스를 보고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어쩌다 본 뉴스인데 그랬어요. 아, 보지말자, 너무 스트레스 받는다, 그러나 보지 않는 게 답인가... 뉴스를 틀어두고 내내 고민했더랬습니다. 하아-

오오 모리님도 발레를 배우셨더랬어요? 모리님 아기는 또 발레할 때 얼마나 귀여울까요. 히힛. 작은 아이들이 뭔가를 보고 배운다고 꼬물꼬물 거리는 거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모리님 따님도 재미있어했으면 좋겠어요. 힛.

감은빛 2016-06-10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다락방님 조카와 우리 둘째가 동갑이군요.
큰 아이는 한 2년쯤 발레를 했었는데, 요즘은 바이올린과 가야금을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작은 아이은 아마 내년에 학교가면 발레를 배우지 않을까 싶어요.
집에서 언니에게 물려받은 분홍색 발레복을 열심히 입고 있어요.

다락방 2016-06-10 14:32   좋아요 0 | URL
크- 요즘 아이들은 다들 발레를 배우나보군요! 저한테 발레는 너무나 낯설고 멀기만 한건데 말이지요. 제가 국민학교 다닐 당시에는 피아노 배우는 아이도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애들은 발레도 배우는군요...세상..... 하하.
그나저나 바이올린과 가야금이라니. 우와- 멋져요!1 >.<

기억의집 2016-06-10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다락방님 충분히 귀여운데...

울 딸도 발레 하고 싶어했는데 저는 발레교습소가 멀어 엄두가 안 나더라구요. 혹 제 2의 강수지 탄생 아닐까요. 조카는 한참 이쁠 때고 락방님은 여전히 페이퍼에선 귀여우심~

다락방 2016-06-10 15:58   좋아요 0 | URL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거라면 되면 좋겠지만, 그 길은 너무나 고생스럽지 않을까 싶어요. 뭐든 고생스럽지 않은 게 없지만, 그래도 발레리나 하려면..먹고 싶은 거 많이 참아야 되는데... ㅠㅠ
아직은 배우는 게 발레밖에 없는데, 혹시라도 피아노라든가 다른 거 배워보면 또 어찌 변할지 모르겠어요. 다른 걸 배워보면 아마 알게 되겠죠. 얘가 발레를 정말 좋아하는건지 순간의 열정이었던건지. 어쨌든 이런 아이를 지켜보는 일이 참 즐거워요. 으흐흐흣

귀엽다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엉엉 ㅠㅠ

고양이라디오 2016-06-16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충분히 귀여우세요ㅎㅎㅎ
저는 예전에 귀엽다는 말을 조금 들었는데, 요새는 모르겠네요ㅎ
저도 귀여움을 사랑합니다 ^~^
요즘 아이들 보면 너무 귀여워요ㅎ

다락방 2016-06-20 10:1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가 글은 귀엽게 쓰는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물과 사상 2016.4 - Vol.216
인물과사상 편집부 엮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신기주: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감옥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방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감자 중에 이 음악을 아는 자는 없죠. 그런데도 모두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껴요. 배우지 않았어도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요.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 인간의 권리고 그걸 막는 건 폭력이죠. 죄책감을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고요. (p.20)



발레와 오페라를 좋아한다는 은수미 의원의 말에 신기주가 저렇게 답하는데, 저 부분을 읽노라니 영화 <프리티 우먼>이 생각났다. 생애 처음 오페라 공연을 보던 그녀가 눈물을 흘리던 장면. 교양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홀로 눈물을 줄줄 흘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배우지 않았어도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라는 신기주의 말에 동의하는 이유다. 줄리아 로버츠는 그때, 아름다움을 느.꼈.다.

같은 이유로 영화 <타인의 삶>도 생각난다. 연극 배우와 감독의 삶을 감시하고 도청하던 비스토는(이름이 비스토 맞던가..), 어느날 감독의 피아노 연주에 진심으로 감동하고야 만다.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감동하고 제대로 표현하는 사람들을 나는 언제나 사랑해왔다.






은수미: 저는 사람이 삭제되는 게 견디기 어려워요. 그게 제가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이유죠. 감옥에 가면 사람이 삭제돼요. 저는 601번으로 불렸어요. 번호가 사람을 대신하죠. 그 사람이 뭘 좋아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지워져요.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가 감옥 같아요. 사람은 지워지고 연봉이 얼마고 집이 몇 평인 걸로만 기억되죠. 중원에 사는 사람들은 중원에 산다고 안 해요. 그냥 서울 산다고 해버리죠. 저는 그렇게 우리 지역이 삭제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건 사람의 존엄함을 말살하는 거니까요. 중원은 개발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개발 이익을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뿐이죠. 그런 역사가 주민들의 삶 속에 기록되어 있어요. 지금 저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다니고 있어요. (p.17)

은수미: 제가 <지젤>을 좋아해요. 발레와 오페라를 사랑하죠. 어머니는 제가 배 속에 있을 때 헨델의 <메시아>를 들었대요. 아버지가 보급 장교셨어요. 월남에도 보급 장교로 가셨죠. 달러를 꽂을 곳이 없을 정도였대요. 집안에 외국 물품이 넘쳐나고, 일제 산수이 오디오 세트가 있었죠. 어머니가 거기에 LP판을 틀어놓고 <메시아>를 들었던 거죠. 성장해서도 그런 문화를 좋아하는 취향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격렬하게 운동을 하고 있는 거죠. 그게 저한텐 엄청난 갈등이었어요. 동지들한테는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공연을 보러 가고 했어요. (p.19)

은수미: 사람들의 부글부글한 분노를 느꼈어요. 터뜨릴 대상이 필요한 거죠. 다들 안간힘을 쓰면서 견디고 있구나 싶었어요. 그분들의 마음을 얻어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요. (p.22)

은수미: 이렇게 말하면 보통 재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사실인 걸요. 어렸을 때부터 유일하게 잘하는 게 공부였어요. 그래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7년 동안 간이침대 펴놓고 미친 듯이 공부했어요. 한편으로는 아이를 갖고 가정을 이뤄서 우주 안에서 내 자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으려고 했는데 둘 다 안 된 거예요. 저도 자리를 잡고 싶었던 때가 있었던 거죠. (p.24)

신기주: 그런데 왜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나요?

은수미: 세월호 사건 때문이었어요. 4월 16일의 그 무력감은 지금도 생생해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처음으로 아주 강력하게 세상을, 정치를 바꾸고 싶었어요. 당 내에서 문제 제기를 하고 뭔가 하자고 주장했죠. 결국 할 수 있던 건 11일 단식뿐이었어요. 제가 나선다고 당이 좋아해주는 것도 아니고 정치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세월호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곡소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죠. 몸이 아파서 단식하면 안 되는데, 단식이라도 안하면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국회의원직 그만두려고 생각하면서 고민이 시작되었죠. (p.25)

은수미: 사람들한테 물어보았더니 결론은 이랬어요. "의원직을 그만둘 용기가 있다면 재선에 도전하고 그만둬라. 네가 그렇게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힘을 가져라." 세월호 때도 그랬고 메르스 때도 굉장히 고통스러웠어요. 그런 일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다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그래서 아주 위험하지만, 힘을 가지고 정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p.25)

신기주: 10시간 넘게 버틴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어요. 이야기 나누다 보니 알겠네요. 그걸 버텨내는 게 은수미다운 은수미인 거죠.

은수미: 욕심이 없어서 가능했어요. 필리버스터가 연출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신기주: 그런다고 공천 못 받는다고 한 분이 있었죠.

은수미: 공천을 생각했더라면 못 버텼을 것 같아요. 의원 총회에서 필리버스터를 지지한 사람은 6명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반은반대하고 반은 침묵했어요.

신기주: 현실적 판단이지 않습니까?

은수미: 그래서 반은 침묵하고, 반은 반대한 거죠. 찬성 6명 주에서 저만 유일하게 의원 총회에서 2번 발언했어요.

신기주: 그때 발언도 많이 회자되었죠.

은수미: 우리는 질 거다. 우리가 먼저 져야지 왜 국민더러 먼저 지라고 하느냐. 여기서 그냥 빠지지 말자. 도망가지 말자. 같이 무너져야 같이 일어설 수 있다.

신기주: 질 때 지더라도 싸우다 지자. (p.29-30)

은수미: 그걸 누가 듣겠어요. 허공에 대고 외치는 거죠. 저는 그저 시간을 벌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낮까지 버티면 그다음부터 다른 의원들이 잘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걸 누가 들으면서 시간을 잴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신기주: 그런데 그걸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은수미: 의원실에 돌아왔더니 다들 울고 있는 거예요. 지역 사무실에서도 사람들이 올라와서 울고 있고요. 노사모를 했던 부산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도 사무실로 올라와서 울고 있었어요. "이 지독한 것아." 이러면서요.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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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1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언니는 진짜 맘에 들어요 노동문제 관련해서 책도 써서 읽었거든요 이번에 국회의원이 안 되서 속상했어요 ㅠ 인물과 사상은 저도 무지 좋아하는 잡지여유 ㅋ 휴 걸어서 학원 오는 데 땀이 한가득이에요 ㅠ 그늘에 계셔유

다락방 2016-06-10 09:48   좋아요 0 | URL
이 언니는-은수미 의원이었군요. 저는 제 얘기 하는 줄 알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은수미 의원이 당선 되지 않아서 넘나 속상했어요 ㅠㅠ 되기를 꼭 바랐었는데 ㅠㅠㅠ
저는 사무실에 있으니까 더우면 에어컨 틀면 돼요. 루쉰님 더위 먹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요 ㅠㅠㅠ

루쉰P 2016-06-10 14: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다락방 언니도 맘에 들어요 ㅋ

저 역시 걱정마세요. 학원은 돈 받은 만큼 에어컨 하나는 시베리아 한 벌판에 있는 것처럼 틀어주고, 고시원은 19만원이지만 개인 에어컨에 방 창문 위에 떡 하니 붙어 있어서 ㅋ 가장 공부 적합한 환경에 있습니다. 결론은 공부만 하면 된다는 거에요 ㅋㅋㅋ (이게 제일 안 돼 ㅋㅋㅋ)

은수미 의원은 관심 있게 본 사람 중에 몇 안 되는 사람인디 당선이 안 되어서 정말 속상했어요. 공천도 이상한데다가 줘 버리니 이 분은 비례로 나와서 당선됐는 데 자기한테 공천 떨어진 지역구를 돌아다녔을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 정말 하는 짓들 보면 헐: 열 불나

암튼 다락방님도 이 더위 잘 버티세요 ㅎ

단발머리 2016-06-15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나 이 글을 못 읽었네요... 이제 봤어요.

은수미 의원 좋아요.
이 정도 사람은 있어줘야... 그래도 국회의원들 좀 예쁘게 봐주려 노력할텐데...
이번에 안 되서 아쉽네요~~

이 페이퍼 고마워요^^

다락방 2016-06-15 10:48   좋아요 1 | URL
아니, 놓칠 수도 있죠. 어떻게 다 꼼꼼하게 챙겨 읽겠습니까! ㅎㅎ

저도 은수미 의원 좋은데 당선 안되어서 너무 속상해요 ㅠㅠ 안타깝고 ㅠㅠ 당선되었으면 뭔가 바뀌어도 바뀌었을 것 같은데.. 다음 선거를 노려봐야 할까요. 대통령이 돼도 좋을것 같은데, 제가 꿈이 너무 크죠.. ㅠㅠ

clavis 2016-06-15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통령,저도 한 표♥♥

다락방 2016-06-15 11:03   좋아요 1 | URL
화이팅! 은수미는 대선출마하라!! ㅎㅎㅎ

clavis 2016-06-1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마하라!!♥♥

다락방 2016-06-15 14:56   좋아요 1 | URL
우리의 소중한 한 표를 은수미에게!!

clavis 2016-06-15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수미에게!!
ㅎㅎ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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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페인어를 배워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했다. 스페인어 발음을 어쩐지 내가 엄청 잘할 것 같은,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

2. 나도 내 연인이었던 남자들을 소재로 이런 연작소설을 한 번 써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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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6-0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 중국어 다음으로 많이 쓰는 언어죠.^^.남미여행가면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득^^

다락방 2016-06-08 14:45   좋아요 0 | URL
그렇지만...저는 영어도 못하고 공부하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에.......아마 안할거에요. 엉엉 ㅠㅠ

붕붕툐툐 2016-06-08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갑자기 스페인어를 배워보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다락방 2016-06-08 15:18   좋아요 0 | URL
책 중간중간 스페인어가 나오는데요, 따라해보니깐 느낌이 좋더라고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6-0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트라비다,오트라베스! ^^

다락방 2016-06-08 18:25   좋아요 0 | URL
시이소오님도 이 책을 읽으셨더라고요! 책에 스페인어 나올 때마다 막 따라 읽어봤더니 재미있었어요. 오오 스페인어 해보고 싶은데? 이런 생각도 막 들고요. 그런데 저는 책은 재미 없었어요. 하핫

시이소오 2016-06-08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전 ㅋ 저는 임병수 아이스크림
사랑 막 불렀잖아요ㆍ
스페인어는 하고싶고 할줄은 몰라서요^^;

다락방 2016-06-09 10:47   좋아요 0 | URL
외국어를 할 줄 안다는 건 진짜 멋진 일인 것 같아요. 그러면 저도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될텐데..그건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하아-
 


이별 후에 무엇을 먹어야 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헤어진 그날에는 아무것도 넘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이란 존재는 간사해서 곧 허기를 채울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이 진짜 배고픔에서 기인하든 마음의 허기에서 비롯되든 말이다. 바로 그때, 아직은 무언가를 만들어 먹을 힘은 없지만 어김없이 배가 고파와 당혹스러울 때 국수만큼 어울리는 음식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왔네, p.120)





















'진유정'의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왔네』는 '그냥 한 번 읽어볼까' 하다가 완전히 제대로 낚인 케이스다. 저자가 국수에 자신의 사연을 실어 적어둔 글들도 무척 좋았지만, 저자의 애정이 가득 담긴 국수는 하나하나 모두 맛보고 싶어졌으니까. 동남아도 베트남도 나에게는 관심 밖의 여행지였는데, 이 국수여행 책을 읽고서 아, 베트남에 가서 국수를 먹어야겠다, 생각하게 된것이다. 어떻게든 일정을 내어 다녀오리라. 하다못해 그 흔하디 흔한 가장 기본적인 퍼pho 라도 한 그릇 꼭 먹고말테다, 하는 이상한 다짐 같은 것을 하며 나는 베트남 여행책자를 샀다.


『셀트프래블 베트남』에서는 내가 가야하는 베트남이라는 나라, 하노이란 곳에 가는 방법 같은 것들만 대략적으로 훑어보았다. 일전에 홍콩과 마카오에 갔을 때, 여행책자가 소개해준 맛집을 찾아갔다가 너무 끔찍했던 경험이 있었다. 사람이 줄 서 있었고 그 모두가 여행 책자를 들고 있었던 것. 아, 이런 거 여기까지 와서 줄 서서 먹어야 하나, 정말 싫다, 했었으므로 그 뒤의 여행들에서 나는 여행책자가 소개해주는 맛집은 가지 않기로 다짐했던 거다. 또한 관광지도 가지 않기로 했다. 관광지에 가면 여행객들만 가득해서 역시 딱히 즐겁지 않았던 것. 그냥 가서 그곳의 사람들이 밥을 먹는 곳에서 밥을 먹자, 가 나의 여행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철저히 혼자 하기로 했다. 나는 책을 읽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오롯이 혼자 준비했다. 혼자서 해외에 나가는 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처음이었다. 영어도 짧아서 내가 과연 갈 수 있을지, 가고 싶었지만, 아주 많이 쫄렸다. 으윽, 내가 비행기를 타고 내려서 호텔에 가고 밥을 먹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을...혼자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나는 설레임 반 쫄림 반으로 그렇게 날짜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출발하는 당일에는 압도적으로 쫄림이 설레임을 눌렀다. 으윽, 이렇게 쫄린데, 남아있는 설레임을 붙들고 나는...가야하는 것인가. 그런데 웬걸,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꺄울, 설레임이 점점 커졌다. 설레임이 커지고 커져서는 쫄림을 쫓아내고 있었다. 공항에 내려 미니버스를 타고 호텔에 들어가기로 계획했던 터라 사람들에게 버스가 서는 곳을 묻고, 그곳에 도착해서 버스 기사와 가격을 흥정하고 버스에 오르니, 아아, 졸 흥분되는 거다. 씐나, 짜릿해! 내 옆자리에 앉은 금발머리 여성과 '너 와이파이 되니?' 이런거 물어보면서 '공항에서는 됐었니?' 이런 거 대화하면서 바깥으로 베트남 풍경을 보는데 진짜 너무 좋은 거다. 내가 여기에 혼자 왔고, 버스도 탔고, 버스 값도 흥정했다!! 우하하하하. 물론 버스비는 고정이지만 기사가 호텔까지 데려다준다고 했고, 처음 불렀던 가격에서 절반까지 내려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비싼감은 있던 터라, 만약 호텔 앞에서 내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말한 가격을 다 주지 않겠다, 혼자 불끈 결심했던 거다. 나보다 먼저 내 옆자리 금발머리 여성이 내렸고, 나는 그녀에게 bye 라고 했고 그녀는 내게 good luck 이라고 했다. 아 씨발 졸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스 기사는 호텔 앞에 나를 내려줬고, 나는 호텔의 픽업서비스의 삼분의 일 가격으로 호텔앞에 도착했다. 우하하하하. 호텔에 도착해서 룸에 들어갔는데, 와아아아아, 이건 잠시 후에 얘기하고, 나는 얼른 국수를 먹으려고 바깥으로 나갔다.



자...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냐..... 나는 여행책자우 국수책자를 모두 들고 나왔다. 무거웠다. 날도 더우니 땀이 나고, 지도를 봐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더라. 하는 수없이 앞에 보이는 약국에 들어가 여기가 이 지도상에서 어디니?를 물어야 했다. 약사들 세 명은 달려들어 아주 친절하게 here 하며 지도에 표시해주었지만, 지도에 표시해준 걸 한참을 들여다봐도 나는 이 지도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이내 지도를 접었다. 아니, 내가 지도가 뭐가 필요해? 나는 찾는 음식점도 없잖아? 음식점 정해둔 거 아니잖아? 그냥 걷다가 국숫집에 들어가면 되는거잖아? 그래서 나는 그냥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쉽게 발견할 수 있을것 같았던 국숫집은 좀처럼 눈에 띄질 않았다. 왜냐하면...그건 말이야....내가 베트남어를 모르기 때문이야.


하는 수없이 국수를 파는 것 같은 가게 앞에 서서 국수 책을 펴가지고는 국수의 이름과 간판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대조해보았다. 여기다, 이거야, 이거 국수야! 그리고 이거, 내가 먹고 싶어서 체크해뒀던, 바로 그 국수야. 분보남보!!



분보남보(Bun Bo Nam Bo)

볶은 소고기와 숙주, 상추, 그리고 땅콩이 들어가는 분보남보는 비빔국수다. 주문을 하면 바로 소고기를 자작하게 볶아 국수 위에 얹고, 볶은 땅콩과 얇게 저며 튀긴 샬롯을 아낌없이 올려준다. 비빔국수지만 막 볶은 소고기의 육즙이 국수를 적당히 데워줘 차갑지 않다. 함께 씹히는 고소한 땅콩과 바삭한 샬롯은 입 안에서 경쾌한 춤을 춘다. 분보남보가 나를 들뜨게 한다. 마치 여행을 떠나는 기차 안처럼. (p.97)







아아, 나는 내가 이것을 홀로 찾아냈다는 만족감에 도취되어 춤이라도 출 것 같았다. 분보남보를 한 그릇 시키고는 내친김에 맥주까지 시킨다. 여긴 더웠고, 나는 땀을 흘렸고, 나는 즐기러 왔으니까!!

분보남보는 저 밑에 자작하게 육수가 깔려 있다. 땅콩이 가득 들어 있어서 비벼 섞어 먹으면 입안에 땅콩맛도 가득한데, 고기와 야채 그리고 국수까지 따뜻하게 씹힌다. 정말 맛있어서, 아, 너무나 맛있다, 라고 막 좋아했다. 어느 정도로 좋아했냐면, 이런 정도로.



아, 맛있어. 다 먹고 너무나 맛있어서, 그냥 다른 국수 찾아 돌아다니지 말고 이곳을 떠날 때까지 이것만 먹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국수를 다 먹고 신이 난 나는 바깥으로 나와서는 동네를 하염없이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다시 호텔로 돌아가 로비에서 우체국의 위치를 물었다. 우린 지금 어딨어? 우체국은 어디야? 그렇게 우체국의 위치를 듣고는 걷기 시작한다. 월요일에 우체국에 가서 엽서를 부쳐야지, 계획했던 터다. 아직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적 없던 직장동료1이, 자신의 소원은 외국에서 날아오는 엽서를 받는 것이란 얘기를 일전에 했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트남에 가기전부터, 그거 해줘야겠다, 생각했었다. 천천히 우체국 방향으로 걸으면서, 도중에 세 명에게 더 길을 묻고, 엽서 파는 가게를 봐두고, 그렇게 우체국을 향해 걸었다. 한참을 걸려 찾아낸 우체국 앞에서도 엽서를 팔고 있더라. 엽서를 사고 우체국은 몇 시에 문을 여냐 물었더니 월요일 여덟시에 연다고 하고는 지금도 열었다는 거다. 그래서 우체국에 들어가보니 토요일저녁에는 여섯시까지 근무한다더라. 내가 도착한 시간은 여섯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고, 나는 아직 엽서를 쓰지 않은 터라, 그렇다면 월요일에 여덟시에 오픈하는지 재차 묻고는 우체국을 나섰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아, 이곳에서 길을 건너는 것은 너무나 무섭다. 신호등 자체가 별로 없고 그냥 자신이 알아서 건너야 하는데, 진짜 오토바이들이 너무 많이 떼를 지어서 다니고 있는 거다. 흑흑. 건너면서 으윽, 하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냈던지..아아.......그러나 이렇게 많은 오토바이들이 다니기 때문인지 이 오토바이들의 속도가 빠르지 않더라. 길을 건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비켜갈만큼의 속도로 운전들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여기서 길을 건너는 것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길을 건널 때면 심장이 콩알만해 졌다.



걷다가 마사지샵을 발견해 전신마사지를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봤다. 한시간동안 마사지를 받고 바깥으로 나와보니 밝았던 하늘이 어둑해졌고, 오오, 어딘가에 들어가있었던 젊은이들이 이때다 싶어 다같이 바깥으로 뛰쳐나온 것 같았다. 낮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훠어어얼씬 더 많은 오토바이들이 사방팔방에서 나오더라. 그러자 갑자기 너무 씐나는 거다. 좋아. 짜릿해. 씐나!!! 졸 흥분돼!!!!!!!!!! 덥고 목이 말랐고 흥분한 나는, 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갈증을 가시게 하기 위해, 눈앞에 있는 맥줏집으로 들어갔다. 맥주는 잘 마시지 않지만 아아, 정말 목이 말랐으므로 일단 맥주를 한 잔 시켜 꿀꺽꿀꺽한 뒤에, 여유롭게 와인을 한 잔 더 주문했다. 그리고 샌드위치와.



이곳에는 외국인들이 많았고, 나는 너무 더워서 헐벗은 채로 다니고 있었고, 바깥에는 낯선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었으니, 크, 이 분위기 자체에 혼자 취하겠더라. 정말 신이났고, 나는 이런 거 너무 좋아해! 하면서 팔짝팔짝 뛰고 싶어졌다. 그리고, 동료에게 보낼 엽서를 이 곳에서 적었다.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에 호텔 바bar 에 가서 와인을 더 마시고 싶었지만, 진짜 너무 피곤해서 쓰러져 잤다. 그래, 고생했다, 그리고 기절해버렸는데,

아무래도 여행지에 와서 혼자 자는 게 긴장이 된 탓인지, 한 시간에 한 번씩 깨게 되더라. 푹,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덕분인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날 수 있었고, 그래서 나는 호텔 조식을 먹으러 호텔 레스토랑으로 내려간다. 하노이 여행 블로거들이 하나같이 '호텔 조식으로 먹는 퍼도 기본 이상을 한다'고 하길래, 나 역시 퍼를 한 그릇 말아달라 했다. 물론, 퍼가 말아지는 동안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과, 치킨 카레와, 볶음밥을 먹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렇게, 퍼가 내 앞에 놓였다.



퍼(Pho)

호찌민의 하숙집 할머니도 일요일이면 손주들 먹일 국수를 만드셨다. 똑똑 방문을 두드려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내게도 한 그릇 나누어 주셨다. 나는 일요일 오전, 할머니의 국수가 주는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좋아했다. 정성스럽게 만든 따뜻한 국수가 있는 완벽한 일요일이 내게 잠시 찾아왔던 것이다. (p.71)



아, 정말 맛있다. 너무나 맛있다. 이건 기본 이상이라는 표현이 실례가 될 것 같다. 진정 맛있다. 이렇게 맛있을 줄 알았다면 치킨카레와, 볶음밥과, 스크램블 에그를 먹지 말것을...그리고 이걸 두 그릇 먹을 것을.... 아.... 너무나 맛있다. 여긴 뭐가 이렇게 다 맛있냐.....


나는 이게 너무나 맛있어서 다음날 조식은 바깥으로 나가 다른 국수를 먹을 계획을 세웠었지만, 다른 국수 먹기 전에 가볍게 한 번 더 먹기로 하고 다음날 아침 역시 퍼를 한 그릇 주문한다. 이번에는 딸려나온 라임과 고추를 넣었다.



아아, 진짜 너무나 좋은맛. 너무나 훌륭한 맛. 영혼이 위로되는 맛. 결국...또 이렇게 만들고 말았다.



국수는...대체 뭐죠? 네?




호텔 조식을 먹고 룸으로 돌아와 조용히, 책을 좀 읽었다. 가져온 책들이 많으니 좀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고, 오늘은 어제처럼 돌아다니기 너무 힘들다, 라고 생각했던 터다. 책을 얼마간 읽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자, 이제 다른 국수를 찾아 헤매이자. 나는 어제 갔던 방향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해 무작정 걷는다. 얼마 안걸었는데 또 땀이 쏟아진다. 이곳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덥다. 그래서 걷다가, 이따 여기와서 시원한 거 마셔야지, 하고는 까페를 봐둔다. 그리고 또 걷는다. 국숫집 몇 개를 찾아낸다. 아, 여기엔 이게 있고, 멈춰서서 책자를 들춰보며 글자 하나씩 대조해가며, 여기엔 이게 있고...한다. 그러다가 어느 국숫집 앞에 멈춘다. 오, 여기는. 분보후에가 있다. 책을 뒤져본다. 내가 먹고 싶다고 표시해놨던, 바로 그 국수다. 꺅. 일단 이걸 맛보기 전에 까페로 다시 돌아갔다. 그 시간동안 길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저 간판을 기억하자, 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방향치가 그걸 죄다 기억할 리가 없다. 내가 여기로 왔던가? 이리로 가면 거기가 나오는건가? 그러다 한바퀴 뺑 돌기도 하고, 침착하자, 라고 나를 다독이며 간신히 아까 봐둔 까페를 찾았다. 까페에 들어가서는 시원한 아이스카푸치노를 시키고 좀 쉰다. 


그리고 이제, 분보후에를 먹으러 간다. 오예, 분보후에!



분보후에(Bun Bo Hue)

살짝 데친 야채를 넣고 맛본 첫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힘줄이 섞여 쫄깃쫄깃한 소고기는 또 얼마나 맛있던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싹 비워버렸다. 학교에 가기 전이라 땀을 그렇게 쏟으면 안 되는데 화장이 지워지는 것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 이후로 분보후에를 혼자도 먹고, 학생들과도 먹고, 호찌민에 놀러 온 친구들과도 먹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먹으면서도 질린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이렇게 차려진 상. 가만있자, 살짝 데친 야채를 넣어서 먹는 거라고 했지? 나는 식당 직원에게 따로 나온 야채를 가리키며, 이거 여기다 넣어 먹는거냐 물었다. 직원은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다 쏟아부었다.




역시 맥주가 함께했다. 매운 고추가 들어있어서 맛이 화끈했는데, 분보후에는 내가 하노이에서 먹어본 국수중에 가장 별로였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게 아니고, 다른 국수들이 워낙 뛰어나서...



자, 이게 이틀차의 마지막 국수였다. 나는 가기전에 꼭 맛보고 싶은 국수가 있었다. 퍼싸오보가 그것인데, 그래서 분보후에를 먹고나서는 호텔로 돌아와 또 가보지 않았던 다른 길로 들어가 걸어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퍼싸오보 집을 찾아냈다. 좋았어, 너는 내가 내일 아침에 먹으러 와주겠어!


그리고 다시 우체국엘 가본다. 이번엔 길을 아니까 호텔에서부터 얼마나 걸리나 재보기로 한다. 내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열한시전에 호텔에서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그전에 우체국에 가서 엽서를 보내고, 퍼를 한그릇 더 먹고, 퍼싸오보까지 먹어야 하니, 시간을 재보는 건 필수다. 이 모든 걸 빠짐없이 해야해. 그렇게 우체국에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보고 돌아와서는, 머릿속에 시간표를 짠다. 좋았어. 일어나서 일단 호텔 조식으로 퍼를 먹고, 우체국에 가서 엽서를 보내고, 돌아와서 샤워를 한 다음에, 퍼싸오보를 먹자!!


이런 계획을 세워두고 호텔로 돌아와 땀에 젖은 몸을 씻는다. 그리고 스쿼트를 한 다음에 땀을 흘리고 또 씻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스테이크를 먹을 거거든!!!!!!!!! 그전에 일단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볼까. 나는 호텔 bar 로 내려가 화이트와인 한 잔을 시키고 책을 읽는다.




크, 여행지 호텔 바에서의 독서와 와인이라니..졸 근사해... 그리고 와인을 다 마시자 직원이 와서 한 잔 더할래? 묻는다. 나는 아니라고, 디너가 되냐고 묻는다. 직원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메뉴판을 가져다주고 나는, 호주산등심을 주문한다! 꺄울 >.<


스테이크가 나오기 전에 전채음식으로 이런 걸 준다.



그동안 국수에 들어있던 고수는 무리없이 맛있게 잘 먹었는데, 이렇게 생야채를 곱게 쌓아둔 것에 들어있는 고수는 좀 당황스럽다. 못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앗, 당황스럽네? 정도랄까. 그리고 오른쪽에 튀긴 말이는 정말 맛있더라. 레드와인을 시켜 이것들을 먹고 있노라니 스테이크가 등장한다. 두둥-



어? 비쥬얼이..초큼...마음에 안드네? 

나는 와인을 마시고 고기를 먹어본다.



어? 맛이...없네? 무슨 스테이크가 이렇게 맛이 없지? 하하하하하. 나는 맛없는 스테이크에 당황한다. 얼마나 맛이 없냐면, 스테이크를 남길 정도로 맛이 없었다. 당황스러워.....내처 와인만 더 시켜 마신다.



와인을 세잔쯤 마셨는데 호텔 레스토랑에서는 케니지의 색소폰 연주가 들린다. 그러자 갑자기 슬퍼졌다. 아, 이건 위험하다. 이건 위험해. 이런 슬픔, 위험해. 취기가 가져온 슬픔. 이건 곤란해. 그러면 나는 망가질지도 몰라,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쯤에서 술을 그만 마시자. 절제하자. 절제녀.... 나는 계산서를 가져다달라 말하고 룸으로 올라간다.



다음날 아침, 계획했던 대로 퍼를 먹고(사진은 저 위의 퍼사진) 우체국에 가서 동료직원에게 엽서를 보내고, 사실 배가 고프지 않지만, 그래도 퍼싸오보를 먹으러 간다. 이걸 안 먹을 수가 없어. 너무 먹고 싶었다고!! 그렇게 시킨다, 퍼싸오보!!



퍼싸오보(Pho Xao Bo)

재빨리 소고기를 볶고, 라우까이Rau Cai라고 불리는 야채를 숨이 죽을 정도로만 살짝 볶고, 거기에 미리 볶아둔 면을 넣어 한 번 더 볶아 수분을 날려준다. 이 과정으로 면발은 더 쫄깃해진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삭힌 고추 소스를 더해주면 금상첨화다.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하고 매콤한 자극에 야채의 신선함까지. (p.150)




아 이것도 너무나 맛있다. 이건 아이들도 좋아할 맛일 것 같다. 그러니까..음...뚝불에 국수 말은 느낌..하고 비슷하다고 해야하나. 맛있다. 야채가 많아서 너무 좋아. 야채를 듬뿍듬뿍 먹었다. 맛있어!! 나는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계속 먹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마지막,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공항에서까지. 있는 돈을 싹 다 털어서 국수를 한 번 더 먹고!!






내가 갔던 호텔은 2박에 12만원 정도였다.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 잘 거였지만, 더블침대를 예약했다. 나는 나에게 원나잇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영화나 그런 거 보면 여행지에서 만나가지고 이국의 남자와 하룻밤을 격렬하게 보내기도 하고 그러든데, 어디, 나에게도 그런 가능성을 열어둬보자, 하고는 더블침대를 예약했던 거다. 와, 침대는, 내가 여태 자보았던 그 어떤 침대보다 컸다. 너무 컸다. 정말이지 컸다. 진짜 컸다.



가로로 누워도 세로로 누워도 대각선으로 누워도 공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아아, 이런 침대라면 남자랑 끌어안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해도 충분하겠다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틀 내내 혼자 뒹굴었다. 가로로도 누워보고 세로로도 누워보고 대각선으로도 누워보고...그 모든 걸 그냥 혼자 다 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 역시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레스토랑도 가고 bar 도 가고, 술도 계속 시켜 마셨었지만, where are you from? 하면서 웃으며 다가오는 꽃청년은 내겐 없었다. 덕분에 저 큰 침대에서 그냥 혼자 마구 뒹굴었다.


원나잇은....뭐에여?




혼자 하는 여행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스스로가 뿌듯했고 그래서 즐거웠으며 그래서 행복했다. 어디든 또 가도 이제 괜찮을거란 생각도 했다. 그러나 혼자 잠드는 것은 아직 내게 편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대화 상대가 없는 것은 아쉬웠다. 혼자 가니 내가 먹고 싶은 걸 먹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내가 가고 싶은 시간에 갈 수 있어서 좋았지만, 대화 상대가 없으니 하루종일 몇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갔고, 아마도 그래서 한국에서보다 소화가 덜 된게 아닌가 싶다. 배고픔을 잘 느끼지 못했어.... 내가 베트남에서 한 말이라고는, 하우 머치? 웨얼 이즈 레스트룸? 원 비어...같은 것이 전부라......대화가 그리웠다. 대화를 할 수 있었다면 소화가 잘 되어서 더 많이 먹을 수 있지 않았을까......나는 혼자 되게 잘 노는 사람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대화를 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비행기를 타고 인천 공항에서 내렸다. 짐을 찾고 공항리무진을 타러 갔는데 아뿔싸, 좀전에 출발해서 30분을 기다려야 하더라. 그래, 기다리자, 하고 기다리는데, 버스 도착 4분을 남기고 배가 꾸룩꾸룩 했다. 화장실을 급하게 갔다. 설사였다. 아아, 공항에 내리자마자 화장실가서 설사..했는데 또...이게 대체 뭔일이지. 내가 배가 안고픈데도 너무 먹어댔나..하는 후회가 찾아왔다. 그래도 버스 시간이 되어 얼른 뛰어가니 버스가 도착 나는 잽싸게 탔다. 버스에 앉자 진정되지 않은 배가 너무나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식은 땀이 막 흘렀다. 아아 다음 버스를 탈 걸 그랬나, 아주 늦더라도 지하철을 탈 걸 그랬나.... 나는 이제 어쩌지...버스는 이미 공항을 출발했고, 이제 국도를 달리고 있다. 밤이 깊었다. 내 배는 잔뜩 긴장한 채였다. 여기는 사람도, 택시도 다니지 않는 숲길...나는 설사....화장실.......멘붕이 왔고 울고 싶어졌다.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해결방법을 찾았다. 일단 버스안에서의 설사가 가장 안전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냄새를 어쩔 것이냐. 모두에게 지독한 피해를 준다. 그렇다면 내려서 일을 보는 게 답이다. 그러나 여긴 국도, 사방에 나무들만 있고 사람은 지나다니지 않으며 신호도 주유소도 없는, 택시도 다니지 않는 곳이다. 무섭다. 내리고 싶지 않아. 길바닥에 설사하고 싶지 않아. 진짜 울고 싶었다. 그래서 기사님께 말씀드릴 생각을 했다. 가다가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세워주세요, 그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라고. 사람이 있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일단 내려서 설사를 한 뒤에, 경찰 차를 부를 생각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니 무작정 남동생에게 데리러 오라고 할 수도 없고, 히치 하이킹을 하자니 더럭 겁이 나니, 경찰을 불러서 나 좀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달라 하자, 라고 생각을 한 거다. 경찰아저씨, 저 좀 살려주세요, 의 심정으로. 그래, 이 방법이 가장 안전하다. 무섭지만 안전해. 울고싶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러면서 자꾸 시간을 체크했다. 어느덧 공항을 출발한지 삼십분이 지나고 사십분이 지나고..이제 서울이 나올 때가 됐는데, 어쨌든 서울로만 가면, 그러면 어디서든 내려도 되는데... 나는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하고 있어, 잘참고 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뎌보자, 하며 자꾸만 나를 쓰다듬는다. 내심 혼자라서 다행이란 생각도 했다. 이 고통을, 이 괴로움을, 이 걱정을, 이 두려움을 누군가에게 같이 하자고 하기는 미안하니까...



너에게 내 불안한 미래를 함께 하자고 말하긴 미안 했기에... (신해철,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중에서)




얼마나 지났을까. 버스에서는 이제 곧 수서역이라고 안내방송을 해준다. 만세! 해냈어! 나는 울지 않았어! 중간에 내리지 않았어! 안전한 곳에 이르렀어! 이제 됐어! 여기서부터는 편안해!! 이제 아무데서나 내려도 된다는 생각에, 어디에서 내려도 어떻게든 해결 가능하단 생각이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하철역도 있고 까페도 있잖아.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도 되고 여기서는 택시를 타도 되고. 익숙한 곳이니 얼마나 좋아. 마음이 편안해지자 중간에 내리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게 결국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시간이 밤 열한시였는데, 나는 짐을 풀고는 내가 가져갔던 옷을 다 꺼내어 세탁기를 돌렸다. 빨래야 내일해도 되는 거지만, 내가 땀낸 옷, 여행 다녀온 옷, 당장 오늘 다 빨아 널고 자고 싶었던 거다. 빨래를 돌리고 샤워를 하고 나와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며 나머지 짐들을 풀었다. 빨래가 다 되자 널었고, 그렇게 잠이 든 시간이 새벽 한 시경. 아...지친 하루였고, 지독한 하루였다. 다음날인 어제도 피로가 풀리지 않아, 집에 돌아가 아빠와 남동생과 삼겹살을 먹고 혼자 소주 한 병을 마신 다음에 바로 쓰러져 자버렸다. 열시도 안 된 시간에. 일어나니 어제 먹은 삼겹살이 그대로 배 안에 있는 느낌이더라. 



그래도 오늘은 오늘의 식사를 했다.


베트남에서, 인천공항에서, 그리고 집까지 오는 길에서, 내가 노브라로 다닌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후훗. 브라를 벗어 던져버리자!!



난 진짜 버스가 싫다. 이제 안탈거야 진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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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6-13 08:23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베트남 여행 생각해본 적 없었다가 국수 책 읽고 완전 쑝 가서 다녀왔네요. ㅋㅋㅋㅋㅋ 가실거라면 저 국수책 보고 가세요. 어떤 국수 먹고 싶은가 미리 체크해보고 가시길 조언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벌 2016-06-1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담고 ... 베트남 검색을 하고 있어요. 정말 가고싶어요. 베트남 여행은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왜 이리 가고싶죠? ㅠㅠ

다락방 2016-06-14 10:28   좋아요 0 | URL
저는 성수기에 다녀와서 비행기값이 비쌌지만 ㅠㅠ 버벌님은 비수기를 선택하신다면 비행기도 저렴하게 다녀오실 수 있어요. 호텔비, 베트남에서의 식비..모두 저렴해서 한 번 가볼만 합니다, 버벌님. 국수여행 책 사서 한 번 훑으시고, 마음에 드는 국수를 찜하신뒤에, 떠나세요!! ㅋㅋㅋㅋㅋㅋ

버벌 2016-06-14 15:51   좋아요 0 | URL
책 구입해서 저녁에 받아볼 예정입니다. 국수를 찜하겠어요 ㅋㅋ

다락방 2016-06-14 20:20   좋아요 0 | URL
꺅 >.< 버벌님이 거기서 어떤 국수를 찜하게 될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이힛. 다 읽고 말씀해주세요.

잠자냥 2019-06-0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 분보남보 집은 제가 갔던 분보남보 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철판 테이블 비주얼이 비슷하네요. 분보남보 먹으러 하노이 또 가고 싶네요 ㅠㅠ 그나저나 더블침대와 설사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큰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6-08 12:28   좋아요 0 | URL
분보남보 너무 좋지요? 저는 한국에서는 쌀국수 잘 안먹은데 이상하게 쌀국수 먹으러 베트남은 정기적으로 가고 싶고 그래요. 어디에 들어가든 다 너무 맛있어요! ㅠㅠ 감동 ㅜㅜ 제가 작년에만 베트남을 세 번인가 네 번 다녀왔어요. 네, 쌀국수 먹으러요. 인생... ㅠㅠ

많이 먹는 싱글에게 침대와 설사의 간극은 늘 생기기 마련입니다. 엣헴.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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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를 모욕하지 말아요, 부인. 이 여인이 비록 죽기는 했으나 나한테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당신보다 더 소중하다고. 만약 악마가 당신의 얼굴과 그 저주스런 교태로 나를 유혹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와 결혼해야 했을 거요. 나는 당신이 내 앞길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결코 없어. 그 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물어보시오. 그렇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 늦었어! 그 대가로 나느 ㄴ고통 속에 살아 마땅해!" 그는 말을 마치고 패니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렇지만 염려 말아요, 여보." 그가 말했다. "하느님이 알고 계시듯 이제 내 아내는 오직 당신뿐이니까."

그 말을 들은 밧세바의 입에서 한없는 절망과 분개가 뒤섞인 길고 낮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 오래된 집 안에서 일찍이 들린 적이 없는 고뇌의 울부짖음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와 트로이의 결합의 결과였다.

"그녀가…… 그렇다면…… 나는 뭔가요?" 밧세바는 같은 외침을 계속 이으며 비탄에 잠겨 흐느꼈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자포자기하는 모습은 상황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오, 아무것도." 트로이가 매정하게 말했다. "결혼식을 올렸다고 해서 진짜 부부가 되는 건 아니지. 나는 도덕적으로도 당신의 남편이 아닌 거야." (p.489)

















밧세바에게 청혼한 남자가 두 명이나 있었지만, 밧세바는 트로이를 선택했다. 이 잘생긴 남자가 끊임없이 그녀를 보러 와서는 '너는 너무 아름다워'를 속삭였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매혹당했고, 속절없이 끌렸다. 그래서 그와 결혼했다. 결혼하기 전에 그에 대해 안좋은 말들을 여기저기서 들었지만, 그 말들은 그녀의 귀에 가 닿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달콤한 남자인데... 그러나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군인이란 직업을 그만두고는 집에 눌러앉아 자신이 집과 농장의 주인 행세를 하며 아내의 돈으로 경마에 돈을 탕진한다. 일하기보다 먹고 마시기에 취해있던 그는, 아내의 돈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다. 심지어 일꾼들에게 마음껏 술을 퍼마시게 해서는 그 해 농사를 망치기 직전까지 이른다. 우리의 의젓한 남주인공 오크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여주인공 밧세바는 가난뱅이가 되었을 터다. 밧세바가 실패와 실수를 겪고나서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또 기존에 여성의 역할을 벗어나 '내가 하겠어!'라는 입장을 취한 것도 사실이지만, 딱히 이 책이 페미니즘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질 않는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밧세바를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보이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여기에서 내가 보기에 이 소설에 페미니즘을 얘기하기는 참으로 부족하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사실 오크가 아니던가. 그는 겸손하고 사려깊고, 밧세바보다 여덟살이 많으며, 밧세바가 잘못된 길로 가는 걸 바로 잡아 주려고 하니까. 이 책 속의 여자주인공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것도 사실이지만, 글쎄다. 딱히 만족스럽진 않다. 아, 그런데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고,


밧세바는 자신이 선택한 남자가 자신이 생각했던 그 남자가 아니었음을 알고 절망한다. 자신의 돈을 탕진하려는 남자이면서 동시에 난봉꾼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게다가 심지어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내 아내는 너이지만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했어'라는 말을 듣기까지 하다니. 아이구 맙소사... 내 앞에서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남편이라니, 내가 다른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토록 다정했던 남자가 그 모든 것이 '네가 알짱거렸기 때문에 넘어간거야'라고 말하다니... 참...어느 시대에나 개놈들은 있구먼......


나는 사랑했는데, 사랑하는데, 여전히 사랑하는데, 그 남자가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했지',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걸 들어야 하는 심정이란 대체 어떤걸까. 가슴이 찢어진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것 같다. 맴찢....마음이 찢어진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로렌스는 프레드와 천년만년 잘 살 거라 믿었다. 우리는 어려움을 함께 이겨낼 수 있을거야,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레드는 너무 지친 나머지 로렌스와 이별한다. 그 후에 프레드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고 있고, 로렌스 역시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로렌스는 옛 연인을 잊지 못해 그녀를 생각하며 시를 쓰고 시집을 내고 출판된 시집을 프레드에게 보낸다. 프레드는 그 시집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며 로렌스에게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로렌스의 애인이 뜯어보게 된다. 그때 그녀는 알게 된다. 아, 로렌스는 내가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는구나, 여전히 그녀를 생각하는구나, 나와 함께 있지만 나는 안중에도 없구나. 화가 난 로렌스의 애인 샤를로뜨는 짐을 싸가지고 편지를 로렌스에게 던진 뒤 집을 나간다. 로렌스는 샤를로뜨에게 왜그러느냐고 묻다가 뜯어진 편지를 보게 된다. 아, 이것 때문에 나갔구나, 다 알게 됐구나, 하고 뛰쳐나가 샤를로뜨를 붙잡는 대신, 로렌스는 프레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환하게 웃는다. 


아, 이사람아...당신을 사랑했고 당신을 보던 여자가, 당신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뛰쳐나갔다고!! 당신이 지금 감동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란 말이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누구나 가슴속에 가장 큰 자리를 내어준 사람은 따로 있게 마련이다. 내가 지금에 충실하고 현재에 충분히 만족하며 새로운 사람과 연애를 한다고 해도, 가장 큰 자리를 내어줬으며 여전히 그 자리를 주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런 나에게 그 큰 자리의 사람이 다가와 다시 문을 두드린다면, 그때의 나는 어떨까. '지금 내 옆에 사람이 소중해' 하며 애써 못본척 할 수 있을까. 나 역시 뒤도 안돌아보고 그에게 달려가지 않을까. 이 영화의 이 장면에 대해 여자1과 얘기하다가 둘 다 그랬다. 샤를로뜨의 입장이 되어 너무 화가 나고 가슴 아프지만, 로렌스의 입장이 되면 또 우리는 그 큰 사랑한테 뒤도 안돌아보고 뛰어가지 않을까, 라고....


가슴속에 그렇게 큰 사랑이 있다면, 내내 큰 자리를 내어주고야 만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만나서 60-70도 되는 연애를 하지말자. 그건 그 연애의 상대에게 진짜 못할 짓인 것 같아. 



아, 그리고 로렌스. 이 남자(여자)를 어찌해야 할까. 


자,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이 남자와 나는 지금 함께 살고 있으며, 나는 이 남자가 너무너무 좋다. 이 남자의 짧은 머리가, 큰 키가, 팔의 근육이, 단단한 성기가 좋다. 이 남자가 아침 잠을 깨우는 게 너무 좋다. 이 남자의 팔을 베고 눕는 것도 행복하다. 그런데 이 남자가, 2년간 연애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팔의 근육이, 단단한 성기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거야' 라고. 이건 모두 내 것이 아니야. 나는 이제 여자로 살고 싶어, 계속 그러고 싶었어, 나는 여자 속옷을 입고 여자 스커트를 입고, 이제는 그렇게 나를 드러내고 살고 싶어. 그리고 여전히 널 사랑해.





내가 이 남자의 남성성이 드러나는 육체적인 면만을 보고 사랑에 빠졌던 것은 아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의 옆에 누웠을 때 내가 느끼는 안정감이,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그의 생각들이, 그리고 나를 보는 눈빛들이 좋았다. 그러므로 그가 이제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다닌다고 해도 그가 그가 아닌 것은 아니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사랑한다. 우리는 어쩌면 이 시간을 함께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를 지지하자, 그의 편이 되어주자. 그를 응원하자. 나는 다른 남자에게 안기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다른 남자의 팔을 베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이 상황을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이 여자, 프레드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계속 생각해보아야 했다. 일단 영화상으로는 그를 계속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거기에 내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대입해보았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가 어느날, 나랑 사랑하던 그 어느날, 나는 이제부터 여자로 살기로 했어, 라고 하면, 나는..그를 떠날까? 라고 스스로에게 묻자, 프레드와 같은 결론이 나왔다.


아니.


나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어떤 모습이어도. 그가 바라는 게 결국 그거라면 그렇게 살게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하는데, 나하나쯤은 그를 온전히 지지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가 자기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겠다는데, 나까지 나서서 그러지말라고, 넌 아픈 거라고, 정신 차리라고 할 순 없는 거 아닐까. 이 세상에 누구 하나쯤은, 그 사람에게, 자신의 편이라고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프레드도 그랬다. 프레드도 그랬는데, 세상의 시선은 결국 프레드조차 이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계속계속 좋아하니까, 계속계속 만나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감정이란 것이, 그 특별한 사랑이라든가 관계라는 것이, 결국은, 어느 순간에는 퇴색되기 마련인 것 같다. 아아, 줄리언 반스의 말은 얼마나 명징한가. 모든 사랑은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다, 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몽 루아.

아... 진짜 이 영화는 2016년 내가 본 최고의 영화다. 아 진짜 너무 좋아서 계속계속 생각나고, 보는 동안에도 온전히 몰입이 가능한 영화였는데, 2016년에 그동안 내가 무슨 영화를 봤는지 생각도 안나더라. 이 영화 하나만 남게 될 것 같다. 이 영화 진짜 좋다. 이거 지금 극장에서 상영중이니까 여러분 보세요, 꼭 보세요...


아 진짜 너무 좋아 ㅠㅠ 이 영화를 보고 내가 와인을 마실 수 없었던 게 가장 애석하다. 안타까워... 크- 와인 마시면서 볼 영화다 진짜...



여자 '토니'는 남자' 조르주'와 사랑에 빠진다. 와, 이 남자는 진짜 너무 달콤하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내가 너무 인상 깊은 남자를 만나고 그의 영향력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당시에 만났던 친구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었다. '여자들이 누구나 다 이런 영향력을 가진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봐야 한다고 생각해, 결국 헤어지더라도 이런 남자를 만나봐야 해' 라고. 젊었던 시절의 얘기긴 한데, 어쨌든 이 영화속의 조르주를 보면 바로 그런 남자인 것이다. 다정하고 달콤한 남자. 계속계속 나를 웃게 하면서 진지하게 자신의 마음을 얘기할 줄도 아는 남자. 첫 섹스후 여자가 '내가 너무 열려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하자 남자는 '어떤 새끼가 너에게 그런 말을 한거냐'며, '전혀 그렇지 않고', 그러면서 네 안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를 그녀의 귓가에 속삭여주는 남자다. 자신의 큰 팔로 그녀를 안기에 주저함이 없고, 사랑한다는 표현도 거침이 없다. 크- 너무 완벽하게 느껴져서 '저런 남자랑은 결혼 못하지 않나, 현실같지가 않잖아' 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찌나 좋던지, 아 좋다 좋다, 하면서 봤다니깐. 이런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하고 아이 낳기를 원한다. 그 사랑과 진지함에 '이럴 수도 있구나', '저렇게 근사한 남자가 나와 결혼을 원할 수도 있는거였어' 라고 생각하려는데, 아아,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은 왜이다지도 장애물이 많단 말인가.



(↑이 장면 진짜 너무 좋아하구요 제가!!)






남자에겐 3년전에 헤어진 여자가 있었다. 남자는 그녀와 5년간 사귀다 3년전에 헤어졌으며 지금은 그냥 '오누이'같은 사이라고 여자에게 말했던 터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자살을 시도해서 병원에 실려간다. 그녀가 자살하려는 이유를 너는 알지? 라고 토니가 조르주에게 묻자, 조르주는 그렇다며 '네가 임신한 사실을 말했거든' 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이들 부부는 삐걱이기 시작한다. 남자는 시시때때로 병원에 전화해 '오누이 같다'던 여자가 의식을 찾았는지 묻고, 의식을 찾았다는 말에는 그녀가 찾을 때면 그때가 몇시든지 달려간다. 토니의 배는 불러오는데, 조르주는 자신의 옆에 없다. 그런 토니가 우울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 아직 아이를 낳기 전인데 우울한 그녀는 병원에 가 약을 처방 받고, 남편인 조르주는 '우리가 이렇게 계속 함께 있으면 서로 미칠거'라며 따로 집을 구한다. 이 일은 토니를 더 우울하게 만들고, 조르주역시 토니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지만, 오누이 같은 여자를 자신이 돌보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그 오누이같은 여자는 계속 그들 사이에 있다.



게다가 조르주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너무나 좋아한다. 늘상 파티를 열어야 하고 놀러 나가야 한다. 태어난 아이를 함께 돌보려고 하지만, 친구들이 놀자고 하면 참을 수가 없다. 이들 부부는 계속 이렇게 삐걱이다가 결국 이혼을 한다. 이혼하고 나서도 이들 부부는 종종 만나는데, 조르주는 토니에게 말한다. '당신 달라진 것 같아, 더 차분해지고 여유있어 졌네' 라고. 이에 토니는 '이게 원래의 나였어' 라고 말한다. 변호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다시 열중하고 차분해진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원래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전(前)남편 조르주에게 말한다. '나는 잘못된 게 없어, 당신도 잘못된 게 없고. 그런데 우리 둘이 함께 하니까 잘못된거야' 라고. 이들은 헤어지고 나서도 연인같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피눈물 나게 싸우기를 반복한다. 


크- '앤 타일러'의 [아마추어 메리지]가 생각나는 부분이 아닌가!




정말이지 폴린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건 마이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둘이 함께 사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230쪽












스물여섯살 때였나. 어쨌든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을 오랜만에 만나 함께 갈비살을 먹었던 적이 있다. 갈비살을 앞에 두고 서로의 술잔을 채우면서 얘기를 하다보니, '아, 내가 이래서 이 남자를 사랑했었지' 하는 생각이 절로 떠올랐더랬다. 그 후에 또 만나서 다시 사귀게 됐다거나 했던 건 아니지만, 내가 사랑했던 면을 또 볼 수 있었던 거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사랑한 기억을 지워도 다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누군가에게 끌린다면 시간이 지나도 또 끌릴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이 영화 [몽 루아]의 마지막이 설득력 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보게 된 전남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녀 역시 내가 오래전에 했던 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 이래서 내가 그를 사랑했었지, 라고. 어떤 사랑은 그런 생각만하고 바스라지지만, 어떤 사랑은 그래서 다시 불타오르기도 할 것이다.




크- 인생..이라고 까지 하면 거창하고, 사랑과 연애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보여주는 정말 좋은 영화였다. 조르주가 달콤하고 다정했던 장면이 너무 좋아서 -그러니까 서로의 연락처를 모르고 헤어질 때 '내 핸드폰 줄까?' 묻고는 '마음대로 해'라는 대답에 휙, 자신의 핸드폰을 던지던 장면부터 시작해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달콤했던 장면까지만 보고 일어나고 싶어졌다. 그 뒤는 보고 싶지 않아. 달콤했던 부분들 만을 드러내어 언제까지고 반복해서 보고싶어졌다. 그러면 안되는걸까. 사랑과 연애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달콤함만으로 연결되고 또 연결되면 안되는걸까. 오래오래 내내 다정하기만 하면 안되는걸까. 내가 좋은 사람이고 네가 좋은 사람이면 함께하는 것도 좋으면 되는거잖아.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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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6-06-07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문장을 보고 토지의 용이가 떠올랐는데 오호 비할데없는 잡놈이었군요. 몽루아 꼭 보러가야겠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사람중에 완벽하게 손재주가 좋고, 가무에 능하며, 단순하고 섹시했던 녀석이 있었는데 저랑 너무 달라서 미친듯이 좋았는데 약발이 딱 육개월 갔어요 ㅎㅎㅎㅎ 같이 할게 없는거예요. 더 나빴던게 할말도 없는거죠.... 그녀석은 말도 없지 혼자 그림 그리고 무대 만들고 나는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술쳐먹고 음허허허... 아 그래도 아직도 모임가서 만나면 뒷목을 보면서 여전히 예쁘고 섹시하구나 경탄합니다... 좋아한다고해서 함께 잘지낼 수 있는건 역시 아닌거 같아요.. 음.

다락방 2016-06-07 15:37   좋아요 1 | URL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바뀔 때마다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다 주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어느 한 명에게만 가장 큰 마음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적은 마음을 주는 것 같아요. 저는 후자의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로렌스 애니웨이에서 로렌스가 그랬듯 언제든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 것 같달까요. 그래서 그런 로렌스가 너무 야속하면서 또 이해도 되고 그래요. 흑흑 ㅠㅠ

맞아요, 휘모리님. 좋아한다고 해서 함께 잘 지낼 수 있는 건 아니죠. 정말 그래요. 누군가와는 함께 지내기보다 그저 좋아하기만 하는 게 더 낫기도 한 것 같아요. 사실 사랑이란 게 이뤄지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단맛만 있는 게 아니라서..

아 댓글 그만 써야지 가슴이 막 후벼파지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