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는 생전 처음 보는 키가 큰 남자가 페인트 칠하는 것을 지켜본다. 파이프를 피고 침을 뱉고 하는등의 낯선행동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가 칠하면 장롱이 하얗게 된다. 윤이 나고 깨끗한 장롱을 만져봐야 할 것만 같았는데 남자는 만지면 안된다고 말한다.
"왜요?"
"만질 필요가 없으니까."
또 묻는다.
"왜 이렇게 하얀 거에요?"
"티타늄이니까."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남자는 그걸 알아차리고 주머니에서 백묵을 꺼내 마리아가 서 있는 바닥에 둥근 원을 그린다. 그리고 말한다.
"이 원 밖으로 나오면 안된다."
마리아는 쪼그리고 앉아서 오랫동안 둥근 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원에 출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문질러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백묵 자국이 지워지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남자가 이 방법이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원은 분명히 마법의 힘이 있었다. 마리아는 가만히 아무 말 없이 땅바닥에 앉았다. 가끔씩 발을 뻗어 발끝으로 원을 건드려 보았고 거의 균형을 잃을 정도로 몸을 앞으로 내밀어 보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장롱이나 벽에 닿으려면 아직도 한 뼘 이상이 부족하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찬장이, 의자들과 식탁이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하얘지는 모습을, 가만히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p.243)
페인트 칠이 끝났다. 그는 발코니로 나가서 자신의 할 일을 한다. 마리아를 내버려둔채. 그리고 다시, 마리아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아저씨 이제 나가도 돼요?" 남자는 마리아와 둥근 원을 내려다보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말들을 했다. 하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물론이지. 이제 나와도 돼." 마리아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걸레를 집어 마법을 풀기 위해 원을 깨끗이 지워주었다. 원이 사라지자 마리아는 일어서서 깡총깡총 뛰어 밖으로 나갔다. 마리아는 아주 행복했고 기분이 좋았다.(p.244)
이 책을 읽는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고 있다. 수소에 대한 에세이가 좋아서 아 좋구나, 했는데 다른 원소에 관련된 에세이들은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질 않는다. 더디고 더디고 더디게 읽다가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나는 티타늄에 대한 부분을 읽었다. 맙소사, 너무나 예쁘잖아, 너무나 좋잖아!!
전문을 다 옮기려고 했는데 그건 힘들것 같아서 일부만 발췌.
소녀의 주변으로 원을 그리고 이 원 밖으로 나오지마, 했더니 소녀는 그 원이 지워질 때까지 꼼짝없이 그곳에 앉아있다. 으윽.
조금 더 크면 그 원 밖으로 나가도 된다는 것을, 사실은 그 원에는 마법의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겠지. 아, 그러나 그런 나이가 될때쯤엔 아무도 원을 그려주질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