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그 해에 필요한 양식을 생각해 밭에 심을 곡식의 양을 결정했듯이,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현금에 맞추어 돈을 벌려고 했다. 필요한 것이 마련되었다고 판단되면, 그 해의 남은 시간 동안에는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았고, 돈을 더 벌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하고자 했으며, 이렇게 일단 기본 생활 수단이 마련되면 다른 일들에 관심을 돌려 열중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사회 활동,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와 작곡 같은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그 때 농장 시설을 손보고 고치는 일을 하기도 했다. (p.37)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는 도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버몬트 시골로 들어가 살기로 한다. 이 책은 버몬트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았던 20년간의 기록인데,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 조화로운 삶이 '이 둘이었기에' 가능하다 생각했다. 스콧 니어링이 쓴 이 책의 끝에는 아내인 헬렌 니어링의 말도 실려있는데, 헬렌 역시 이 삶에 대해 동의하고 크게 만족하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이 삶에 뛰어든 것으로 보이지만, 시골로 들어갈 당시에 헬렌의 나이는 지금의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너무 어렸다.


헬렌 니어링은 1904년생, 스코트 니어링은 1883년생, 이 둘이 사랑에 빠진 해는 1928년, 시골로 들어간 해는 1932년.

그러니까 시골에 들어가 살자, 고 결정하고 들어가 살게 됐을 때 헬렌은 고작 20대 후반이었던 거다. 스코트 니어링은 40대 후반이었고. 사람은 저마다 다르지만, 헬렌은 정말 처음부터 이 삶을 원했을까? 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건 철저히 내 기준인데, 나는 아직까지도 좀처럼 도시의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에 가 살자고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스무살 차이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결정을 따른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헬렌을 주체적이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쨌든 20년간의 버몬트 생활을 정리하고 다른 시골로 가서도 스코트 니어링은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삶을 마감했고, 80세의 헬렌 니어링은 혼자 시골에서의 삶을 지속했다고 한다.




나는 가끔, 어쩌면 가끔보다는 자주, 도시의 생활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도시의 번잡함,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 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만큼의 크기로 도시에서의 삶을 원한다. 어디든 들어갈 곳이 있다는 것이 좋고, 누구든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 친한 사람들과 만나서 수다 떠는 삶도 좋지만, 알지도 못하는 낯선이들이 가득찬 거리도, 카페, 비행기도 좋다. 나는 헬렌이 시골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그 나이보다 열 살이상 더 많지만, 여전히 '정리하고 시골에 가 조화로운 삶을 산다'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내가 한적하고 건강한 삶을 원함과 동시에 분주한 삶 역시 원하기 때문이다.



헬렌과 스코트는 시골로 내려가 순수하게 자연에 동화된다. 고기와 술과 담배를 일절 가까이 하지 않고, 돌과 나무로 집을 짓는다. 사탕단풍나무로부터 시럽을 받아 그것으로 그나마 약간의 돈을 마련하고, 식탁에 오르는 거의 모든 것들은 자연에서 얻은 날것 그대로의 식품들이다. 그들은 아침으로는 과일만 먹고, 점심은 본인들이 농사지은 것으로 수프를 만들어 먹고, 저녁은 샐러드를 먹는다. 이 식단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딱히 환영받는 식단이 아니라서, 이곳에 쉬면서 머무르고자 했던 사람들의 발길을 빨리 돌리게도 만들지만, 열에 하나는 '정말 건강한 식단'이라며 좋아하기도 한다. 헬렌과 스코트는 하루에 네 시간 일을 했다면 네 시간 쉬는 규칙을 만들어냈다. 먹을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은 반드시 해야한다, 그러나 넘치게 만들지는 말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초와 벽난로로 빛과 열기를 해결하는 곳에서 헬렌과 니어링은 일하고 생각하고 쉬면서 살아간다. 숱하게 찾아오는 손님들과 함께 일하고 식사하기도 하며 토론하기도 즐겨한다. 자기들이 손수 지은 집의 한쪽 벽면은 책으로 채워두었고.



헬렌과 스코트가 선택한 삶이 더 건강해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도시에서 사는 지금의 내 삶보다 스트레스가 덜할 것 같은 것 역시 자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혼자'라면 그 삶을 선택할 수 없을 것 같다. 헬렌과 스코트가 이 삶이 가능했던 것은 역시 둘이 함께였기에 가능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했다. 낮에 농사짓고 땀흘리는 거야 혼자할 수 있다고 하지만, 오늘의 노동이 얼마만큼 고되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보람을 느끼고 혹은 어떤 괴로움이 있었는지를 토로하는 것 역시 삶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헬렌도 또 스코트도 상대가 없어도 이 삶을 선택하고 유지해갈 수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확실히 내 노동과 다음 노동 사이에 이야기 나눌 상대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자연스레 '나였다면'을 생각해보게 된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나 혼자서라면 지금에야 한적한 삶을 원한다 해도 선택할순 없을 것 같다. 한 낮의 여유로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실컷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을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없다면, 나는 그 삶을 지속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다.


나는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혼자서 하노이 여행을 할 때 깨달았다. 내가 혼자 돌아다니며 내 발길 닿는대로 걷고, 또 내가 원할 때에 원하는 것을 먹고 마시는 것이 얼마나 신났는지, 혼자서도 흥분을 막 하게 되는거다. 짜릿해, 행복해, 너무 좋아, 꺅, 하다가, 밤에 숙소로 돌아오니, 내가 오늘 얼마나 신났는지를 나눌 사람 없이 혼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 너무 외로운 거다. 그러니 만약 내가 원해서 시골로 갔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당연히 일정부분 만족감과 행복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 거다.


"오늘 새소리 들었어?"

"응. 아침부터 노래하던데?"

"지금은 좀 잠잠하네. 술마실래?"

"그러자, 내가 삼겹살 구울게."


뭐 이렇게 되어야 살만한 게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그러니까,


"저녁 뭐먹지?"

"나 요즘 카레 만드는 거 엄청 잘해. 카레 만들어 먹자."

"응. 와인 딸까?"

"응. 테라스에서 저녁 노을을 보며 마시자."

"(창밖을 내다보다) 앗. 해 벌써 지기 시작해. 빨리와, 어깨동무 하면서 일단 보고, 그 후에 먹자. 이거 놓치지 말자."

"우앙 굳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살아야 시골에서의 삶이 내게는 가능해지는 것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게 또 단순하지 않은 게, '아무나'랑 함께 사는 것이라면 그것은 혼자이니만 못해...


"오늘 새소리 들었어?"

"시끄러."


이러면 어떻게 같이 살아?


"저녁 뭐먹지?"

"난 오늘부터 저녁 굶어."


이러면 .... 나는 베란다에서 맨날 혼자 저녁 먹어야 돼...그러면 이것은 함께인가 아닌가...우리 모두는 각자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으니, 우리의 모든 것들이 같을 수도 없고 모두가 공통된 것을 지향할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한적한 곳에 가서 살기로 한다면, 사실 이건 한적한 곳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면, 우리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에 있어서는 같은 시선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또한 바라보는 방향 역시 같아야 하고. 그래야 우리가 서로 다른 많은 점들을 부딪치고 화해하면서 함께 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이 말이다.



헬렌과 스코트는 바라보는 방향이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같이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자연으로 돌아와 채식만 하는 삶을 오래 함께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전기가 없어도, 가스가 없어도.. 그래도 그 둘이 즐겁게 또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 둘이 서로 원하는 바가 일치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시골에서의 삶을 즐거이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헬렌과 스코트가 그랬듯이, 그것이 '채식만' 하는 삶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술도 담배도 고기도 없는 삶...


아침 과일

점심 수프

저녁 샐러드



아침에 과일을 먹으면서 우리는 흔히들 같이 먹는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마시지 않았다. 또한 마른 자두는 물론 사과 소스를 가볍게 떠 먹는 일도 없었다. 토스트와 커피, 그것에 따라 나오는 콘플레이크나 부풀린 밀도 먹지 않았다. 우리의 아침밥은 과일이었다. 오직 과일만 많이 먹었다. 과일은 철에 따라 딸기, 나무딸기, 검은 딸기, 월귤로 바뀌었다. 우리는 숲이나 밭에서 딸기를 따서 한 사람이 한 그릇씩 먹었던 것 같다. 멜론과 복숭아도 제철이 되면 따 먹었다. (p.147)



나는..도무지 이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구나. 한적한 시골로 간다고 했을 때 내가 원하는 건,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육덕진 아침 식사인데.... 그리고 같이 저녁에 술도 마셔야 인생이 즐거울 것 같은데.... 저 식단보고 나는 넘나... 아아, 나는.... 이런 걸 추구하는 남자랑 함께 살 수 없다...그 사람이랑 시골에 가서 사는 삶은 꿈도 꿀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스코트는 이 식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열에 아홉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아홉이야...나는 다른 하나가 될 수 없어..아홉이야.....  나는 호텔 조식을 사랑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그런데 난처한 일이 생겼다. 밥상에 앉은 사람들이 너나없이 충격을 받은 것이다. 커피, 시리얼, 베이컨, 달걀, 토스트, 팬케이크, 시럽 따위가 눈에 띄지 않아서이다. 다만 사과와 해바라기 씨, 검은 당밀 음료만이 놓여 있었다. 이런 먹을 거리는 많은 손님들을 서둘러 제 갈길로 가게 했다. (p.205)


버몬트 사람들의 보수주의를 잘 보여 주는 일로 꼭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스무 해 동안 살면서 우리는 흰 밀가루, 흰 빵, 흰 설탕, 파이, 과자의 문제점에 대해 이웃들과밤을 새면서 수없이 많이 토론을 했다. 그리고 채소를 날 것으로 먹는 것이 건강에 좋으며, 썩어 가는 동물의 시체를 먹는 것은 역겨운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입이 닳도록 얘기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그 스무 해 동안 우리의 충고에 따라 먹는 습관을 바꾼 집은 하나도 없었다. (p.171)


숲 속 농장을 방문한 수많은 사람 열 가운데 아홉은 다음과 같이 말하거나, 마음에 새기고 떠났다.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것은 좋은 생활 방식이다. 이런 삶의 방식은 그이들에게는 훌륭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그 생활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그이들보다 건강에도 좋고 값도 훨씬 덜 드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그 사람들도 인정했다. 우리가 자기들보다 훨씬 건강하고, 편안한 옷을 입고 만족스러운 집에서 살고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여유를 누린다는 사실도 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이들 스스로는 이런 생활을 따를 수 없었고, 그러게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p.208)




그러니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시골에 가서 사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단, 다른 즐거움이 동반되어야 한다. 맛있는 먹을거리, 그리고 술... 지금은 내가 술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 전에 한 잔씩 마시면서 오늘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내일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 그 삶이라면 좋은 영화를 놓치고, 다른 많은 친구들을 만나는 걸 확 줄여버리는 그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또한 돈 많이 벌지 않는 것도 내가 다 할 수 있어. 그렇지만,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술도 고기도 금지' 라고 한다면, 그건 시골에서 같이살 수가 없다..도시라면 살 수 있어. 왜냐하면 나는 나가서 다른 사람이랑 술과 고기를 먹으면 되니까...



그래서,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이냐?

내가 혼자일 때 원하는 것은?


도시.


그렇다면 내가 살아하는 사람과 함께일 때 원하는 것은?


그건 시골이든 도시든 상관없지만, 고기랑 술도 함께...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는 못살겠는데' 하게 되었으므로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이 쓸모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늘 궁금했다. 어떻게 그 생활을 유지하는지, 그게 궁금했어. 또한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도 새삼 되새겼다. 내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 같은 공간에서 사는 것,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 다른 사람의 나와 다른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대로의 의미가 있다.


나 역시 큰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원하는 바는 헬렌과 스코트보다 훨씬 크고 많긴 하지만(술과 고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마어마한 고기나 어마어마한 술을 마시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하실에 돈을 쌓아놓고 살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나는 돈이 좋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필요하다는 것은, 내가 먹고 마시는 데 부족하지 않을만큼 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나는 돈이 있으려면 내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 헬렌과 스코트가 시골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반드시 하고, 또 먹고살만큼의 자원이 오늘 내게 준비되었다면 여유롭게 취미 활동을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가끔 나에게 묻는다.

나는 종국엔 채식주의자가 될까?

시간이 흐르면 사람도 변하는데, 나는 채식주의자로 변하게 될까?

나는 술을 끊게 될까?



'절대 그렇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술도 너무 좋고 고기도 너무 좋다. 그리고 술과 고기를 앞에 두고 사랑하고 친근한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것도 너무 좋고. 그래서 가급적이면 오래, 가능하다면 눈감는 날까지 그렇게 즐겁게 살고 싶다. 그러려면 건강해야 하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계속해서 내 몸이 보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열심히 걷고, 운동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보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즐거운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내가 내 건강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제는 후렌치후라이를 너무 먹고 싶었고, 여기에 맥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맥주는 내가 즐겨 마시는 술도 아니고 딱히 좋아하지도 않지만, 감자튀김에 맥주 너무 간절했고, 또 그렇다고해서 커다랗게 술판을 벌이고 싶지도 않았어. 집에 가서 와인 마시자, 감자튀김 사가자, 생각했지만, 감자튀김은 식으면 너무 맛이 없지... 나는 문제 해결에 뛰어난 사람. 혼자서 마시는 술과 감자튀김을 모두 이뤄낼 방법을 찾았고, 그래서 그렇게 했다.






치킨 한 조각, 감자튀김,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멍하니 멍때리면서 혼자 즐겼다. 아, 너무 좋으네. 지금 KFC 에서는 맥주를 할인중이라 한 잔에 2천원. 그래서 저 한 상차림이 6,100원이었다. 저렇게 한 번 더 먹어도 12,000원.


멍하니 바깥을 보면서 먹고 마시다가,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을 이어폰을 통해 들으면서 계속 마셨다.

혼자서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어. 앞으로 종종 여기를 들러야겠어.



나는 이 지상에서 당신과 술과 고기가 필요하다.






그 여자는 나를 휘저어놓고, 들뜨게 한다. 종종 그 여자를 달로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꼭 그 마음만큼 그 여자를 달에서 도로 데려오고 싶어진다. 나한테는 이 지상에서 그 여자가 필요하다. 그 여자는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고 영리하며 재치있다. (p.178-179)





조화로운 삶은 마음이 맞는 부부나 단체가 시도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무엇보다 함께 이루려는 목표를 갖고, 생활에 필요한 일들에 달려들어 해낼 수 있는 능력과 끈기가 있어야 한다. 나처럼 나이 든 사람으로서는 혼자 해내는 게 쉽지 않다. (p.217 헬렌 니어링의 말 中에서)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8-05-31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승전술고기.....
다락방님글을 읽고 있자니 술과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 하나 떠올랐어요. 그 사람 이름이 장비라고 하는데.....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8-06-01 08:0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다락방은 장비입니까? ㅋㅋㅋㅋㅋ

그래도 예전만 못해요. 예전엔 술도 고기도 진짜 엄청 먹었는데 이제는 나이 들어그런지 예전만큼 못먹어요. 슬퍼.. ㅠㅠ

세실 2018-05-31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가 숲속에 2년 살았을때 외로웠던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데 정말? 의구심이 들더라구요.

어머 KFC에서 맥주도 판매하는군요~~~
술, 고기 저도 좋아해요.
어제 소고기에 엑스오 양주 마시는데 그냥 막 술술~~~
이런게 행복이죠^^

다락방 2018-06-01 08:02   좋아요 0 | URL
감정이라는 게 모두 다같이 같은 크기로 느끼는 게 아니라서, 어떤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요. 제 경우에는 ‘심심하다‘는 감정을 못느끼고 살거든요. 그렇지만...음..... 2년간......음.....제 기준으로 생각해도 ‘정말?‘ 이라고 되묻게 되네요. 어쩌면, 자신의 선택에 대해 당당하고 싶어 그렇게 말한 건 아닐까 싶고요.

KFC 가 전 지점이 다 가능한건 아니지만 맥주를 팔더라고요. 혼자 간단하게 맥주하거나 또 친구랑 둘이 간단하게 2차하기에 너무 좋은 것 같아요. 게다가 맥주에 곁들일 최고의 안주, 치킨과 감자튀김이 있잖습니까! 우하하하하. 너무 좋아요! 네네, 먹고 마시면서 사는 게 행복인 것 같아요. 헤헷.

단발머리 2018-05-3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어링 부부의 건강 식단 참 좋기는 한데, 저도 적응 못하는 아홉에 들것 같네요.
술도 고기도 좋아 우리는 떠날 수 없는건가... 이 도시를...........

다락방님 추천 한 상차림 참 근사하네요.
저희 동네 KFC는 문 닫고 맥날만 성행한다는 슬픈 소식.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06-01 08:16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도시를 무척 좋아해요. 여행을 간다고 해도 도시로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집 밖을 나섰을 때 커피와, 영화와, 술과, 고기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도 많았으면 좋겠고요. 낯선 이들이라도.
물론 직장생활에서 사람에 치이거나 할 때면, 시골로 가서 한적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제가 그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까 라고 물어보면 아닐 것 같더라고요..휴..

KFC 에서 혼맥하는 시간은 정말 좋았습니다, 단발머리님.
인간은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 같아요! >.<

비연 2018-05-31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FC에서 맥주를!

다락방 2018-06-01 08:17   좋아요 0 | URL
그러합니다! 닭과 감자튀김이라니, 환상의 조합 아닙니까!!

2018-06-01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1 0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1-01-13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년전에도 오늘과 같은 고민.. 난 채식주의자가 될까? 아니야.. 안될거야...
새벽세시 저 문장 좋아요 ㅋㅋ 저두 밑줄 그어놓음. 달에서 다시 데려오고 싶대.. 어쩔 ㅠ 레오야 ㅠㅠ

다락방 2021-01-13 08:36   좋아요 0 | URL
그쵸그쵸 속 시끄러우니까 달로 보내버리고 싶은데 그렇지만 또 없으면 안되니까 다시 데려오고 싶어. 이 지상에서 필요하다...
 
















'레일라 슬리마니'의 장편소설 《달콤한 노래》를 어제 읽기 시작했는데, 책의 시작 부분에서 이미 결말을 알려주긴 했지만, 끝으로 갈수록 읽기가 두려웠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끔직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나올 터였다. 그래서 책장을 덮고 고민했다. 끝까지 읽고 내일 새 책을 들고갈 것인가, 아니면 끝부분은 내일 읽을 것인가..



아침에 읽기 싫은 부분이기도 했지만 잠들기 전에 읽기는 더 싫었다. 분명 꿈을 꿀텐데, 그런 식의 꿈을 꾸고 싶지가 않았어...해서 나는 책을 덮고 자기 위해 누웠다. 잔인한 결말은 내일 읽자, 하고.



분명 초저녁에는 졸렸는데 자리에 눕자 잠이 오지 않았다. 마침 엊그제 넷플릭스 가입을 해둔 터다. 흐음. 그렇다면 뭔가를 볼까...산드라 블럭이 나온다는 로맨스 영화를 볼까, 에로틱한 영화를 볼까, 주루룩 훑어보다가 드라마 《아웃랜더》가 눈에 띄었다. 오래전에 원작 소설 '다이애너 개벌든'의 책을 읽은 터라, 그냥 훑어만 보자, 하고는 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지는 않고 좌르륵 빨리감기로 해서 주인공인 '클레어'와 '제이미'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들에 집중했다. 나는 그 둘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아웃랜더와 호박속의 잠자리 작가 '다이애너 개벌든'음 엄청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일전에도 내가 이곳에 몇 번 언급했던 작가인데, 다양한 쪽으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거다. 게다가 글도 잘 써! 알라딘에 이 책들의 작가소개를 보면 이렇게 써있다.



동물학 학사 학위, 해양생물학 석사 학위, 그리고 생태학 박사 학위과정을 밟았다. 작가가 되기 전까지 월트 디즈니를 위한 연작 만화를 쓰기도 했으며 12년간 대학교수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Voyager>, <Drums of Autumn> 등이 있으며, 국내 출간작으로는 <호박 속의 잠자리>의 전편인 <아웃랜더>가 있다. 현재 애리조나주의 스콧데일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클레어 시리즈를 읽는 것은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다. 책 속에서 주인공 클레어가 과거의 스코틀랜드로 날아가는만큼, 아직 의학기술은 발전하지 못했고, 민간의학이라 해야하나, 그런 걸로 사람을 치료하고 돌봐주는 장면들이 펼쳐지는 거다. 게다가 과거의 스코틀랜드를 얘기하며 역사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게 펼쳐낸다. 그 과정에서의 제이미와 클레어의 로맨스는 더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데, 클레어가 '현재'를 사는 여자이며 동시에 '과거'로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그 과거에서의 남자들이 여자를 대하는 문화에서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제이미는 신사이다. 그래서 클레어를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남자들은 '버릇 없는 아내를 혼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체벌로써' 이루어내고자 한다. 그래서 동정으로 결혼해 아무것도 모르는 제이미, 아내인 연상의 클레어를 원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한 제이미에게, 버릇 없는 아내의 엉덩이를 때리라고 하는거다.


클레어는 위험에 노출됐었다. 위기의 순간이 분명 있었고, 그래서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제이미는 벨트로 클레어의 엉덩이를 때리고자 한다. 이에 클레어는 맞선다.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다, 그건 하지 말아라' 하고. 나 역시 '그건 아니야, 그러지마, 그러는 순간 화나, 정떨어지는 거 시간문제야' 라고 생각했지만, 제이미는 끝내 반항하는 클레어를 자기 무릎위에 엎어놓고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는 거다. 바깥에서 이 소리를 들었던 다른 남자들은 '역시 그래야 한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당연히 이 장면은 나에게도 불편하고 클레어에게도 그랬다. 클레어는 제이미를 사랑하고, 지금이 자기가 기존에 살던 세상과 다르다는 걸 인지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분명 화나는 일이다. 그러니 클레어가 제이미와 다시 사이 좋아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클레어는 '다시는' 제이미가 이러지 않도록 어떻게든 강하게 인식시켜야 했다.


그 일이 있고난 뒤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 틈에 평소에 제이미를 좋아했던 여자가 제이미에게 다가오기도 하고. 그러나 제이미는 클레어를 정말 사랑했다. 그 여자에게 '나는 내 아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클레어에게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거다. 며칠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던 터다. 클레어의 화는 당연히 아직 풀리지 않았고. 이에 제이미는 용서해줄 수 없겠냐면서, 혹시 너 나랑 그만 살고 싶은 거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클레어는 그렇지는 않다고, 그만 살고 싶은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둘은 섹스를 하게 되는데, 나는 '흐음, 이렇게 쉽게 용서하면 안될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그 장면을 계속 보았다. 격렬한 섹스로 가기전 클레어가 위에 올라 있는 여성상위체위에서, 쾌락에 몸둘 바를 모르는 아래에 있는 제이미를 향해, 클레어 역시 아직 그에게 들어가 있는 채로, 저기, 옷을 벗느라 늘 가지고 있다 떨어진 제이미의 손 칼을 가져와서는 얼른 칼집에서 빼네 제이미의 심장을 겨눈다. 아직 그들은 섹스중인데, 클레어는 그 칼을 제이미의 심장에 바짝 대고는 말한다.



"한 번만 더 그랬다가는 니 심장으로 내가 아침을 해먹을 줄 알아."



그러자 제이미는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의 시리즈인 저 잠자리와 아웃랜더를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희미한 내용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클레어가 과거의 스코틀랜드로 넘어간 것, 거기에서 제이미랑 결혼을 한 것, 그러다 나중에 현재로 오게된 것등등..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건 클레어가 현재로 돌아오게 되어 현재의 남편과 함께 살고 있을 때, 제이미도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가 그녀의 삶을 엿봤다는 것 ..정도인데, 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검색해보니 드라마는 지금 시즌4까지 나온 모양이다. 나는 시즌1을 대충 훑어서 7회까지 보게됐고. 드라마가 원작을 얼마만큼 반영할지 모르겠지만, 드라마 상에서는 현재의 남편도 열심히 클레어를 찾는 중이다. 그래서, 과거로 가는 것까지 찾게 되는걸까? 나 이 시리즈 정식으로 시작해볼까?



책은 출간됐을 당시에 아는 사람들에게선 굉장히 유명한 책이라 읽기는 했지만, 번역 상의 문제를 많이 지적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혹여 그 사이에 다시 나오진 않았을까 싶어 검색해봤더니, 여전히 위의 책들이다. 기존에 사보고 팔아버려서... 다시 사서 읽을까? 이왕이면 개정판이 나와줬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저 시리즈는 저게 끝인가? 아마존 검색해봤는데 뭔가 외전으로 짧은 스토리가 있는 것 같긴한데..저게 전부인가?


드라마를 시작해볼까? 너무 길던데..그렇지만 제이미랑 클레어가 이야기 나누는 거 보고싶다.

드라마를 시작해볼까? 너무 길던데.. 역시 볼 시간이 없어. 언제 본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졔졔 2018-05-28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콤한 노래, 저도 읽으려고 주말에 도서관에서 빌렸어요. 아, 읽기 두렵네요ㅠㅠ

다락방 2018-05-28 16:25   좋아요 0 | URL
책은 잘 읽히는데 저는 피해자(희생자)가 아동일 경우에 너무 힘들어서요 ㅠㅠ
최졔님 다 읽고나면 감상 남겨주세요!

비연 2018-05-2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피해자가 아동인가요.. 저도 이거 보관함에 두었는데... 읽기 겁나네요..ㅜ

다락방 2018-05-28 17:53   좋아요 0 | URL
네, 아동 피해자가 등장하는 책이라 .. 저는 읽기 좀 힘들었어요. 비연님, 다른 분들 리뷰도 참고해보세요. ㅠㅠ
 
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승국의 허벅지에 고개를 얹고, 그것만으로 불안했는지 앞발로 바지를 잡고 테이는 잠들었다. 덕분에 승국은 불편해 보이는 정장 바지를 갈아입지도 못했다. 형제는 볼륨을 낮춘 채 티브이를 봤다. 한 아이돌 가수가 그룹에서 탈퇴한다는 연예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탈퇴하는 아이돌들 이해가 가. 같은 회사를 7년, 8년 다니면 그만둘 수도 있는 거지, 욕할 문제가 아닌 거 같아."

"그러게 말이다." (p.83)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을 읽으면서 '아, 소설은 이야기였지!' 하고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 소설은 이야기였다.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 혹은 나와 관계없는 저 먼 곳의 사람들, 또한 나의 이야기. 각자가 가지고있는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짧게 짧게 그려지는데, 그 일들마다 섬세함이 살아있어, 작가는 이 오십명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전조사를 했을까, 그 노고에 감탄했다.


이야기는 이야기마다의 힘을 갖고 있다.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어느 하나 허투루 버릴 것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아픈 이야기도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들이 선하다. 선한 의지를 갖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내게는 '너무 착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진다.


위의 인용문은 늙고 병든 개가 허벅지에 고개를 얹었기 때문에, 불편해도 그 자세를 유지하는 '승국'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한데, 내가 소설을 읽을 때 '착하기만한 이야기'에 대해서 딱히 매력을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착한 이야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처음부터 한글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은 한국 소설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이다. 술렁술렁 잘도 넘어간다. 오십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나와서 모두들 어딘가에서 만나고 연결되어 지는데도 '아 아까 이렇게 나왔던 인물이구나' 알면서도 이름은 까먹게 되긴하지만,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었던 《마당이 있는 집》과 연달아 읽노라니, '아 한국소설 읽는 거 너무 즐거운 경험이다'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섬세하게 펼쳐지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또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 있으니, 저마다의 이야기가 자꾸 다른 기억들을 불러낸다는 데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사건이나 사고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소소한 일상에 있어서도 그렇다. 소개팅을 한 남녀가 그 후로 두 번 더 만났다가 끝내는 어그러지고 마는,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 정말 지극히 작고 아무것도 아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그 소소한 이야기 앞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아주 오래된 내 소개팅이 떠올랐고, 한 번 더, 라는 그의 답에 그러마고 답해 한 번 더 만나놓고, 사소한 이유들로 '계속 만나자'는 그에게 '나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 내게 있었던 그 일이 내게 무슨 상처로 남아있거나 한 것도 아니고, 그 남자의 이름과 얼굴마저 잊을만큼 별 거 아닌 일이긴 했지만, 대체 인연이란 건 어디서 어떻게 얽히는 것이고 어떻게 어긋나는 것인가에 대해 한참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 이야기 말고도 나를 머무르게 한 이야기는 이 책 곳곳에 숨어 있었다. 대체로 작은 일들에 대해서.



모든 인물들이 한데 얽히는 마지막에서, 나는 바라는 결말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발 그렇게 되는 결말을 쓰지는 말아줘'라고 바랐달까. 만약 결말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내내 재밌게 읽었지만 작가를 미워하게 됐을 것 같다. 작가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결말이어서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세랑 작가의 책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구에서 한아뿐》,《보건교사 안은영》을 몇 해전에 읽었었고 그 후에 가장 최근에 읽은 게 이 책, 오십명에 대한 이야기인데,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내가 읽어본 작가의 전작들보다 좋았다. 그리고 최근작이 더 좋다는 것이 나는 어쩐지 더 좋았다. 나랑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고 나랑 비슷한 세대(나보다는 훨씬 젊지만!)의 작가가, 더 성숙해진 것 같아서이다. 자꾸 자라는 느낌. 같이 자라자고, 우리 같이 나아가자고 하고 싶다. 작가의 발전이 눈에 보였다. 나는 착하기만 한 소설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앞서 밝힌 바 있지만, 그래도 작가가 지금처럼 착한 이야기들을 자꾸 자꾸 써주었으면 좋겠다. 예의 그 세심한 시선도 유지하면서.




"극장 들어오면 영화 보고 싶네요."
이번엔 정말요, 마저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영화 좋아하는군요, 말고 뭐 좀 똑똑해 보이는 말 없나. 게다가 도넛을 입에 너무 많이 넣고 씹고 있었기에 리액션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
"제가 도넛 샀으니까, 다음에 극장 문 열면 영화 보여주실래요?"
"네."
천재소녀가 두번째 데이트를 제안했다. 혁현은 천재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 대답했다. 그 빠름이 좀 민망할 정도였다. 사실 혁현은 도넛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그대로 멈춰 평생 도넛만 먹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데이트겠지? 이거, 데이트겠지?
"데이트예요."
혁현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천재소녀가 말했다 뒤늦게 카페인이 몸에 도는지 귀가 울렸다. 천재소녀가, 채원이 수술이 있다며 먼저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원까지 쫄래쫄래 따라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도넛 가게의 화장실에서 앞발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그럴 만한 날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알고 있었어, 내가 좋아한다는 걸. 내가 내내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아마도, 눈만 보고. (p.99-100)

"그럼, 저 맨입으로 고맙다 하지 말고 맛있는 거 사줘요."
그러자 천재소녀의 똑똑하고 조그만 머리가 혁현을 향한 채 가만 멈추었다. 알아들은 것이다, 데이트 신청이라는 걸. 혁현은 발바닥에까지 땀이 나는 걸 느꼈다. 병원 바닥이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화처럼 아래층으로 도망가고 싶다고 말이다.
"그럼 내일 아침 7시 반에 옆 건물에 있는 도넛 가게 괜찮아요?"
"네, 좋아요."
그날밤 혁현은 거의 자지 못했다. 천재소녀가 아침을 사주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술이 8시에 시작인데 7시 반이라니. 물론 바빠서겠지만 선 긋기가 아닐까. 빵 쪼가리나 먹고 빨리 헤어지자는 그런 이야긴가. 도넛을 좋아하는 것인가. 혁현을 싫어하는 것인가. 도넛을 좋아하며 혁현을 싫어할 수도 있다. 가슴이 거대한 도넛에 눌리는 듯해 얕게 잠들었다.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니 아침이었다. 안 그래도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닌데 거울을 보니 처참했다. (p.98)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좋아해서 지키고 싶었던 거리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나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혜련은 기가 막혀서 혼자 더 웃었다. (p.248)

"아니. 각자 결혼했지. 다른 건 안 무서워해도 자기 아버진 무서워했거든. 성질이 똑같은 데 더 센 분이었어. 부잣집에 시집갔는데 남편이 금방 요절해버려서 힘들게 살았다더라고."
"저런."
이번엔 세훈이 저런, 하고 옛날 사람처럼 말했다. 약간 쑥스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쪽문 식당은 어두워 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연락할 수는 없잖아. 나도 가정이 있었으니까. 아내와 사별하고, 3년을 넘겨 예의를 지킨 다음에 연락했는데 뭐 너무 늦은 거였지. 몇번 만나지도 못하고." (p.2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내외 남자 작가들의 책을 두 권 내리 읽다가 이 책을 읽으니, 와, 세상에 그렇게 잘 읽히는 거다. 걸리적 거리는 게 없이 술술 넘어가는 게 너무 좋은데, 그렇다고 내용이 가벼우냐 하면 그렇지가 않아. 가스라이팅에 자기 중심 잃은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걸 읽어가는 건 정말 힘들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이 여자야, 중심 잡어! 나는 얼마나 그렇게 속으로 외쳤던지.



마당이 있는 좋은 집에 사는 여자와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싶었던 가난한 여자의 이야기가 교대로 펼쳐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이 얽히고.

그리고 이 이야기는 가난한 여자가 폭력적인 가난한 남편을 죽이면서 시작한다.



이야기 자체로도 흥미로워서 다음장이 어떤 장면이 나올지 한 장 한 장 넘기는 재미가 있었고, 무엇보다, 여성혐오의 현실을 세련되게 박아두었다. 아마 주인공은, 나중에, 그러니까 책이 끝나고 나서도 훨씬 나중이 되어서야, '아, 그 때 내가 멍청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겠지. 나 역시 현실에서 '그들이 멍청했다'고 깨닫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으니까.



이 소설의 가장 큰 교훈은 악을 응징하는 데 있다 하겠다. 책 처음부터 나오지만, 이 책의 결론이라고 내 나름대로 부여한 것은 이것이다.



'쓰레기 같은 남(자)편은 죽이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작가의 다음 책을 기다리겠다.




제약 회사 영업직이던 남자는 유머 수준은 최악이었지만 잘생긴데다 성실해 보였다. 나는 허영이 가득한 동료와 사귀는 남자가 불쌍했고 연민을 느꼈다. 여자를 잘못 만나 당장 패가망신이라도 당할 것 같아 불쌍히 여겼던 것 같다. 나는 남자를 동정했다. 내가 구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남자 역시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화장을 안 한 내가 다른 여자들과 달리 검소해 보였다고 했다.
남자느느 자신의 무능을 성실함으로 포장했을 뿐이고, 나는 검소한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돈이 없어서 궁색하게 살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못된 환상을 키우며 연애를 시작하여 일 년이 안 돼서 결혼에 골인했다. (p.168-169)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5-25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5-25 13:1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아주 재미있게 읽은 한국소설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어야할 건 유명인의 신혼일기가 아니라(!) 바로 이런 소설인 것 같아요. 후훗.

moonnight 2018-05-25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렇게 좋아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욧!@_@;;;

다락방 2018-05-25 13:34   좋아요 0 | URL
지루할 틈없이 팍팍 넘어가요, 문나잇님!!

단발머리 2018-05-2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루할 틈이 없다는 거죠? 팍팍!!!
나도 찾아봐야겠어요.
믿고 읽는 다락방님 추천 도서*^^*

다락방 2018-05-25 17:00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그렇습니다!
지루할 틈없이 팍팍 넘어갑니다.
아, 그래서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러면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가지로 살짝 아쉬운 점이 있긴하지만, 재미있는 소설인 것입니다!!! ㅎㅎ
 

엊그제는 머리를 다듬으러 미용실에 갔다. 나는 짧은 단발보다도 더 짧은 컷트머리인데, 그래서인지 뒤에 머리가 자라면 영 보기가 싫은 거다. 게다가 한 번 이렇게 짧게 잘라 편한 게 무엇인지 알고나니, 다시 기를 엄두가 안난다. 일단 머리 무게가 가볍고 샴푸할 때도 편해.. 세상 편하다. 그렇지만 제비초리... 자꾸 나를 미용실에 가서 머리 다듬게 해.

어쨌든 이번에도 두 달이 채 안돼 미용실에 다시 갔는데, 이번에는 다듬어달라고 말하면서 '더 짧게 해주세요' 주문을 넣었다. 원장님은 알겠다고 하셨고, 그래서 다 잘라놓고나서는 '길이 괜찮으세요?' 물으셨다. 드라이빨 강하게 먹은 나는 네, 좋아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가볍게 미용실 문을 나섰는데,


다음날 출근하기 위해 머리를 감고 말리니...아아..너무 짧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제기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드라이빨 가고나니 머리가........하아........................인생은 참... 쉽지가 않아? 게다가 나는 원장님의 조언-'앞머리 짧으면 옆으로 못넘기고 앞으로만 내려와요'- 에도 앞머리를 짧게 잘라달라했어.


인생은..뭐죠?

드라이빨....대체 뭐죠?

이렇게 짧은데..어떡하죠?


어떡하죠, 내 심장이 고장났나봐... (응?)


그렇지만 뭐, 그렇게 크게 당황하지 않고 나는 쿨하게 마음 먹었다.


'금방 자랄텐데, 뭐'


그런데 오늘!!

뭔가... 어제보다 나은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스타일 잡히면 멋있는데? ㅋㅋㅋㅋㅋㅋ 멋지다, 근사하다. 나는 무슨 애가 머리가 길어도 멋지고 짧아도 멋지고..그냥 다 멋지냐... 잘했다. 스무살 때 한 번 숏컷 하고서는 이렇게 다시 숏컷으로 돌아오기까지 오래걸린 셈인데, 나는 참...짧은 머리가 잘어울린다. 뒤통수도 예뻐서 그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지금 자기뽕에 취함)




새치가 하나씩 생기고 있고, 그래서 나는 염색을 자꾸 고민했다. 지난번에 미용실 갔을 때는, '다음에 예약잡고 새치염색 하러 올게요' 했던 터다. 원장님은 자연스런 갈색으로 하면 새치가 자라나도 눈에 띄지 않을거라며 자연갈색을 권하셨고, 나는 알겠다고 했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은, 염색과 좀 멀어졌다. 염색이 건강에 나빠서가 아니라, 나를 자꾸 미용실에 가게 만드는 원인을 아예 제공하고 싶지 않아서. 그건 며칠 전에 읽은 책의 영향이 컸다.
















몇 년 전 언어학 교수인 친구가 눈썹을 다듬어주는 동네 가게에 학생들과 함께 가기로 약속햇다. 이는 단합을 도모하는 행사였고 학생들은 여자 교수가 함께한다는 것에 기뻐했다. 친구는 모임을 함께하자며 나를 초대했다. 나는 고마웠지만 초대를 거절했다. ˝‘미모관리용‘ 뭔가를 또 늘리고 싶지 않거든.˝ 나는 설명했다. 이후 우리 테이블에서는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학생들이 이 만남을 무척 기대하고 있어. 눈썹 다듬기를 강요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비싸지도 않아. 겨우 10달러라고.˝ 친구는 말했다.
(중략)
당시 나는 눈썹을 다듬기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그걸 좋아하게 될까 봐 걱정됐다. 눈썹을 다듬은 후 더 예뻐 보인다고 느낀다면, 그때부터 눈썹 다듬기는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해야 할 일로 추가됐을 것이다. 나는 기존의 ‘해야 할 일‘ 목록에 그 어떤 것도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방식으로 내 외모를 감시하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부추기고 싶지 않았다. (p.128)




내가 새치 염색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앞으로 꽤 장기간 '해야 할 일'이 될 터였다. 머리는 계속 자라고 그렇다면 나는 자꾸 염색을 해야하겠지. 나는 그 쳇바퀴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시작하면 반복하게 될 그 일을, 나는 그러므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러다가 언젠가는 굴복하고 염색을 하게될지도 모르지만, 가급적 뭔가 하나 해야할 일을 더 만드는 것은 지양하고 싶다. 일단 무언가를 하나 더 시작해서 그것이 나를 지금의 외모보다 더 낫게 보이게 만든다면 거기에서 벗어나기는 더 힘들거였다. 그렇게 돈과 에너지와 시간을 '조금 더 젊어보이게' 하기 위해 혹은 '조금 더 예뻐 보이게 하기 위해' 쓰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 나에게 보이는 새치가 고작 한 두개이기 때문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한두개 보다는 초큼 더 있긴 하지만...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지금의 다짐이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이 생긴다면, 나도 어쩔수 없이 내 발로 미용실로 찾아가 염색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러니까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외모에 관계되어 해야 할 일을 늘리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여러분. 그리고 저 책...지금 리디북스에서 대여 무료...


https://ridibooks.com/v2/Detail?id=1508005037&_s=search&_q=%EA%B1%B0%EC%9A%B8%EC%95%9E%EC%97%90%EC%84%9C





그럼 이만...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5-24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4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4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5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8-05-2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치염색 부분 너무 와닿네요. 이제는 무언가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젊어보이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게 때로 너무 귀찮아요. 이 책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다락방 2018-05-28 08:06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이 책 한 번 읽어보세요. 전 참 좋았습니다. 독서가 무엇인지, 독서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깨닫게 됐어요. 블랑카님이 읽으시면 또 어떤 감상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추천합니다!

clavis 2018-06-18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알 링크 받아다 잘 읽고 지인님께 링크를 한아름 선사하려 다시 이 페이퍼에 찾아왔습당 다시 한번 락방님 만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