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승국의 허벅지에 고개를 얹고, 그것만으로 불안했는지 앞발로 바지를 잡고 테이는 잠들었다. 덕분에 승국은 불편해 보이는 정장 바지를 갈아입지도 못했다. 형제는 볼륨을 낮춘 채 티브이를 봤다. 한 아이돌 가수가 그룹에서 탈퇴한다는 연예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탈퇴하는 아이돌들 이해가 가. 같은 회사를 7년, 8년 다니면 그만둘 수도 있는 거지, 욕할 문제가 아닌 거 같아."

"그러게 말이다." (p.83)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을 읽으면서 '아, 소설은 이야기였지!' 하고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 소설은 이야기였다.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 혹은 나와 관계없는 저 먼 곳의 사람들, 또한 나의 이야기. 각자가 가지고있는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짧게 짧게 그려지는데, 그 일들마다 섬세함이 살아있어, 작가는 이 오십명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전조사를 했을까, 그 노고에 감탄했다.


이야기는 이야기마다의 힘을 갖고 있다.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어느 하나 허투루 버릴 것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아픈 이야기도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들이 선하다. 선한 의지를 갖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내게는 '너무 착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진다.


위의 인용문은 늙고 병든 개가 허벅지에 고개를 얹었기 때문에, 불편해도 그 자세를 유지하는 '승국'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한데, 내가 소설을 읽을 때 '착하기만한 이야기'에 대해서 딱히 매력을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착한 이야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처음부터 한글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은 한국 소설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이다. 술렁술렁 잘도 넘어간다. 오십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나와서 모두들 어딘가에서 만나고 연결되어 지는데도 '아 아까 이렇게 나왔던 인물이구나' 알면서도 이름은 까먹게 되긴하지만,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었던 《마당이 있는 집》과 연달아 읽노라니, '아 한국소설 읽는 거 너무 즐거운 경험이다'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섬세하게 펼쳐지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또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 있으니, 저마다의 이야기가 자꾸 다른 기억들을 불러낸다는 데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사건이나 사고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소소한 일상에 있어서도 그렇다. 소개팅을 한 남녀가 그 후로 두 번 더 만났다가 끝내는 어그러지고 마는,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 정말 지극히 작고 아무것도 아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그 소소한 이야기 앞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아주 오래된 내 소개팅이 떠올랐고, 한 번 더, 라는 그의 답에 그러마고 답해 한 번 더 만나놓고, 사소한 이유들로 '계속 만나자'는 그에게 '나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 내게 있었던 그 일이 내게 무슨 상처로 남아있거나 한 것도 아니고, 그 남자의 이름과 얼굴마저 잊을만큼 별 거 아닌 일이긴 했지만, 대체 인연이란 건 어디서 어떻게 얽히는 것이고 어떻게 어긋나는 것인가에 대해 한참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 이야기 말고도 나를 머무르게 한 이야기는 이 책 곳곳에 숨어 있었다. 대체로 작은 일들에 대해서.



모든 인물들이 한데 얽히는 마지막에서, 나는 바라는 결말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발 그렇게 되는 결말을 쓰지는 말아줘'라고 바랐달까. 만약 결말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내내 재밌게 읽었지만 작가를 미워하게 됐을 것 같다. 작가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결말이어서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세랑 작가의 책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구에서 한아뿐》,《보건교사 안은영》을 몇 해전에 읽었었고 그 후에 가장 최근에 읽은 게 이 책, 오십명에 대한 이야기인데,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내가 읽어본 작가의 전작들보다 좋았다. 그리고 최근작이 더 좋다는 것이 나는 어쩐지 더 좋았다. 나랑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고 나랑 비슷한 세대(나보다는 훨씬 젊지만!)의 작가가, 더 성숙해진 것 같아서이다. 자꾸 자라는 느낌. 같이 자라자고, 우리 같이 나아가자고 하고 싶다. 작가의 발전이 눈에 보였다. 나는 착하기만 한 소설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앞서 밝힌 바 있지만, 그래도 작가가 지금처럼 착한 이야기들을 자꾸 자꾸 써주었으면 좋겠다. 예의 그 세심한 시선도 유지하면서.




"극장 들어오면 영화 보고 싶네요."
이번엔 정말요, 마저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영화 좋아하는군요, 말고 뭐 좀 똑똑해 보이는 말 없나. 게다가 도넛을 입에 너무 많이 넣고 씹고 있었기에 리액션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
"제가 도넛 샀으니까, 다음에 극장 문 열면 영화 보여주실래요?"
"네."
천재소녀가 두번째 데이트를 제안했다. 혁현은 천재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 대답했다. 그 빠름이 좀 민망할 정도였다. 사실 혁현은 도넛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그대로 멈춰 평생 도넛만 먹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데이트겠지? 이거, 데이트겠지?
"데이트예요."
혁현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천재소녀가 말했다 뒤늦게 카페인이 몸에 도는지 귀가 울렸다. 천재소녀가, 채원이 수술이 있다며 먼저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원까지 쫄래쫄래 따라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도넛 가게의 화장실에서 앞발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그럴 만한 날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알고 있었어, 내가 좋아한다는 걸. 내가 내내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아마도, 눈만 보고. (p.99-100)

"그럼, 저 맨입으로 고맙다 하지 말고 맛있는 거 사줘요."
그러자 천재소녀의 똑똑하고 조그만 머리가 혁현을 향한 채 가만 멈추었다. 알아들은 것이다, 데이트 신청이라는 걸. 혁현은 발바닥에까지 땀이 나는 걸 느꼈다. 병원 바닥이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화처럼 아래층으로 도망가고 싶다고 말이다.
"그럼 내일 아침 7시 반에 옆 건물에 있는 도넛 가게 괜찮아요?"
"네, 좋아요."
그날밤 혁현은 거의 자지 못했다. 천재소녀가 아침을 사주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술이 8시에 시작인데 7시 반이라니. 물론 바빠서겠지만 선 긋기가 아닐까. 빵 쪼가리나 먹고 빨리 헤어지자는 그런 이야긴가. 도넛을 좋아하는 것인가. 혁현을 싫어하는 것인가. 도넛을 좋아하며 혁현을 싫어할 수도 있다. 가슴이 거대한 도넛에 눌리는 듯해 얕게 잠들었다.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니 아침이었다. 안 그래도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닌데 거울을 보니 처참했다. (p.98)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좋아해서 지키고 싶었던 거리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나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혜련은 기가 막혀서 혼자 더 웃었다. (p.248)

"아니. 각자 결혼했지. 다른 건 안 무서워해도 자기 아버진 무서워했거든. 성질이 똑같은 데 더 센 분이었어. 부잣집에 시집갔는데 남편이 금방 요절해버려서 힘들게 살았다더라고."
"저런."
이번엔 세훈이 저런, 하고 옛날 사람처럼 말했다. 약간 쑥스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쪽문 식당은 어두워 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연락할 수는 없잖아. 나도 가정이 있었으니까. 아내와 사별하고, 3년을 넘겨 예의를 지킨 다음에 연락했는데 뭐 너무 늦은 거였지. 몇번 만나지도 못하고."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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