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폴루닌'은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체조를 배웠는데, 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엄마는 세르게이를 발레 학교에 보낸다. 키예프 발레학교는 등록금이 너무 비싸 이 가난한 부모는 아이 학비 마련을 위해 떨어져 살게 된다. 아버지는 포르투갈에 가 돈을 벌고 할머니는 그리스로 가 돈을 번다.


키예프에서도 실력이 다른 누구보다 앞서는 세르게이인지라 세르게이의 엄마는 여기도 작다, 런던으로 가자, 하고는 십대의 아이를 데리고 런던 로열발레단으로 가 오디션을 본다. 오디션에 합격하고 로열발레단에 아이를 입학시키지만, 엄마에게는 비자 문제가 있어 아이와 함께할 수 없다. 결국 아이를 그곳에 남겨둔 채 엄마는 우크라이나로 돌아오고 그렇게 아이는 런던에, 엄마는 우크라이나에, 아빠는 포르투갈에, 할머니는 그리스에 있는 삶이 시작되는 거다.



아이의 엄마도 아빠도 발레를 했던 사람들이 아닌데 어떻게 아이의 발레애 대한 재능을 알아보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더 큰 곳, 더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을까. 엄마의 세르게이에 대한 교육열은 정말 대단한 것이면서 동시에 엄마의 능력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재능이 있었다한들 우리 부모님이 '이것은 이 아이의 어마어마한 재능이다' 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알 수 있었다해도 '이 아이의 앞날을 위해서 더 큰 곳으로 가야한다, 그곳은 여기다' 를 알 수 있었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재능이 있다해도 발견되지 못한채 그저 평범하게 지내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재능인줄 모르는 주변 어른들과 설사 알았다해도 그 다음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어른들만 가득해서 더 크게 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엄마의 눈은 적확했다. 아이는 로열발레단에 들어가서도 두 번이나 월반을 하고 최연소로 수석 발레리노가 된다.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엄마는 아이가 어릴적부터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그토록이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면서도 어떻게나 그렇게 큰 미래를 볼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것이 세르게이의 운명이기 때문이었을까? 운명이 착실하게 그 수순을 밟도록 한걸까?



세르게이는 그렇게 자꾸만 더 크게, 더 크게 된다. 종국에는 세르게이의 발레를 보기 위해 2년 전부터 티켓팅을 해야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세르게이는 아주아주 큰, 아주아주 유명한 일류의 발레리노가 된다. 그러나,



세르게이를 그렇게 어마어마한 발레리노로 만든 가족들은 세르게이의 공연을 볼 수 없었다. 세르게이는 자신의 가족이 자신의 공연을 보기를 원하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오지말라고 말할 뿐이었다.


어린 세르게이가 열심히 발레를 했던 건, 자신이 열심히 발레를 하는 것만이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과 얼른 합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열발레단에 들어간지 얼마 안돼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고, 어릴 적부터 그렇게나 함께 살고 싶어했던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걸 알게된 세르게이는 몹시 상처를 받았다. '내가 발레하는 걸 가족에게는 보여주지 않겠어'라고 화가난 채로 마음을 먹는다. 결국 그토록 훌륭한 발레리노로 만들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던 가족들은 볼 수 없게 된거다. 세르게이는 가족들과 헤어져 산 것이 몹시 슬펐고 아팠고 힘들었다고 했다.



무엇이 나은 것이었을까.

세계 제일의 발레리노가 된다는 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일이 아닌데, 이토록이나 훌륭한 발레리노가 되도록 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을 잘한 선택이라 해야할까.

그러나 세르게이가 원했던 것 '가족들과 다함께 사는 것' 이었으니, 발레리노라는 미래 보다는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함께 있도록 선택했어야 하는걸까?



세르게이는 발레학교에 입학해 자신을 엄하게 대하는 엄마가 야속했고 떨어져 사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엄마는 세르게이가 발레 연습이 끝나도록 밖에서 기다린 것이 집에 돌아갈 차비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의 고생은 무엇을 의미하는걸까. 그것은 결국 세르게이를 그토록 어마어마한 발레리노가 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세르게이에게 어린 시절은 힘들고 상처 받았던 기억들이었다.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 이 가족들의 희생은 세르게이를 세계 제일의 발레리노로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세르게이가 원하는 것이었나. 세르게이가 '나는 세계 제일의 발레리노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어!'라는 목표를 가진 적이 있었나.


물론 지금의 세르게이는 춤을 하루라도 추지 않으면 오히려 몸이 아픈 그런 댄서가 되어 있었다. 춤을 사랑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 가족이 떨어져 살았던 것에 대한 상처 역시 그대로 가지고 있다.

엄마는 하나의 선택을 하면 그에 따른 책임을 반드시 지어야 하는 거라 말했다. 그렇다면 세르게이가 세계 제일의 발레리노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가족과 떨어져 사는 외로움을 지고 가야 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이, 가족들과 함께 가난하게 사는 걸 택하고 발레리노가 되지 않는 걸 지고 사는 것이면 안되는 거였을까?




나는 뜬금없이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소설 《일곱 번째 파도》생각이 났다. 소설 속에서 레오는 에미이게 말한다. '너를 위해 선택한것이었는데, 그것이 너에게 좋은 게 아니었다' 고.






나는 당신에게 가장 좋은 길을 택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 자신이 당신에게 가장 좋은 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어요. 유감이고 불행이에요. 기회를 놓쳤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p.242)











세르게이의 엄마가 세르게이에게 '그 때 내가 한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을까?'를 말했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엄마는 그저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라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그 책임은 아이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세계 일류 발레리노가 되었으니, '결과가 좋으니 다 좋은 거야' 할 수 있는걸까?


행복이란 저마다의 것이니 누가 뭐랄 순 없는 거지만, 어쩌면 세르게이에게 가장 좋은 길은 가족들이 한 집에서 사는 건 아니었을까. 물론, 세르게이의 춤을 보는 내내 나는 너무나 좋았지만, 와, 이런 발레리노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아까웠을까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지만, 마지막 <take me to church>를 볼 때는 진짜 너무 좋아서 '여긴 계속 돌려봐야지' 싶었지만, 그렇지만, 결과가 좋으므로 다 좋은걸까. 결과가 좋다는 것은 누구에게 좋다는 것일까. 자꾸만 자꾸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야 늘 남는 법, 가족들과 있는 걸 선택했다면, '그때 내가 발레를 계속 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레오는 위의 문장에서처럼, '에미를 위해 뭐가 좋을까'를 선택하다가 나중에야 '내가 가장 좋은 답이 될 수도 있었는데'를 깨닫게 되는데, 이 남자는 항상 이런 식이다. 파멜라를 위해서도 '파멜라가 행복해하는 걸' 택하려고 노력하는 거다. 이때 에미는 '너 자신의 행복은?' 이라고 묻는데, 선택은 항상 '나는 어떤가',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행복한가'를 물어야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두가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기에 오는 문제이기도 하고 또 타이밍의 문제이기도 하다. 얼마전에 읽은 '리안 모리아티'의 《당신이 내게 최면을 걸었나요?》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존과는 4년을 함께 살았지만, 그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엘런은 존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런한테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존은 엘런하고는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였다.
엘런은 정말로 상처를 입었다. 도자기 컵 여러 개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것처럼 감정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예리한 통증이 파편이 되어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콧구멍 속을 따끔거리게 만든 고통들이 커다란 통증이 되어 쐐기처럼 가슴 깊이 박혔다.- P192








엘런과 헤어진 연인 '존'이 다른 여자랑 사귀고 결혼까지 하게될 거란 소식을 들은 엘런은 몹시 상처 받는다. 자신과 지낸 4년동안 자신에게 결혼에 대한 얘기를 한 적도 없는데, 그런데 결혼을 한다니. 자신은 뭐였을까, 자신과 함께한 시간은 대체 뭐였나. 엘런은 상처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다. 아, 결혼을 하고싶어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나랑' 결혼을 하고싶었던 게 아니구나.


이 뒤늦은 깨달음은, 비록 그들이 헤어진 뒤라도 그녀에게 몹시 상처를 남긴다. 예리한 통증.



나도 정확히 저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예리한 통증이 어떻게 엘런을 아프게 했을지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엘런이 깨달은 것이 반드시 사실은 아니라는 얘기를 꼭 엘런에게 해주고 싶다. 존은, 정말로, 어쩌면, 그간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고 하고 싶지 않았었던 걸지도 모른다. '엘런이라서' 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정말로 '결혼은 관심없어'라는 태도로 살아왔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났고, 지금 다른 여자랑 사귀면서는, 자연스레 '아, 이제 나도 결혼을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엘런이 그렇게 아파하지 않아도 될만큼, 그것은 어쩌면 그저 '타이밍'의 문제였을 수 있다는 것. 물론, 이렇게 말해봤자 그 예리한 통증이 금세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이 책에서 엘런의 아버지는 ˝뒤늦은 깨달음이라. 항상 문제가 생겨야 알게 된다는 거구나.˝(p.585)라는 얘기를 하는데, 그 전에 알아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레오는 에미를 위한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세르게이는 그토록 훌륭한 발레 공연을 연달아 하면서도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가족들을 위한 자리를 내어주지는 않는다. 생애 얼마만큼의 시간을 꼭 아들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부었건만, 정작 그 아들의 성취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엄마와 다른 가족들의 마음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아프고 아프고 또 아프지 않았을까. 그간의 시간들이 도무지 잡히지 않아 안타깝지 않았을까. 우리가 그러면 안되는 거였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않았을까.





레오, 왜 "당신이랑 ( …… ) 하고 싶어", 이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 ( …… ) 할까요?", 이렇게 물어요?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몰라요? 아니면 내가 원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당신도 원하지 않을 여지를 남겨두는 건가요? (일곱 번째 파도, p.280-281)




이제와 '그랬어야 하는 건 아닐까'는 어쩌면 부질없는지 모른다. 세계 일류의 발레리노가 되었으니 '사실은 어릴 적에 가족이 함께 있고 싶었어' 라는 말을 뒤늦게 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자리는 너무도 크고 높으니까. 그렇지만 선택에 있어서 중심은 '너'가 아니라 '나'가 되는 게 맞는 것 같다. '너에게 가장 좋은 게 무얼까' 가 아니라 '나에게 가장 좋은 게 무얼까' 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물론, 세르게이가 어린 시절이었으므로 저런 가족들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이 없었을 지 모르지만, 그런데 지금은 꼭 지금이어야 했던걸까. 잘 모르겠다.




마지막 하와이에서의 촬영이 진짜 눈이 부셔서, 와, 어떻게 저런 장소를 잘도 찾아냈다 싶었다. 이 영상은 어마어마한 조회수를 기록했다 한다.










그나저나 인용문 찾는다고 일곱 번째 파도 펼쳤다가 또 흠뻑 빠져들어서 끝까지 다 읽을 뻔 했다. 하핫, 나란 여자는 정말이지...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19-04-05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상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9-04-08 15:13   좋아요 0 | URL
천만에요!
:)
 
가부장제의 창조
거다 러너 지음, 강세영 옮김 / 당대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기존에 속해있던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로 말하자면 친하게 지내던 남자사람들과 멀어지게 되었고(새로 사귄 남자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탈코르셋을 선언하고 비혼을 선언한다. 비연애나 비섹스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존에 자연스레 하고 있던 것들, 그것이 응당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과 작별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자연스레 따라올거라는 생각을 하게된거다. '거다 러너'의 이 책, [가부장제의 창조]를 읽으면서, 남자사람들과 또 결혼과 멀어진 사람이 있는것처럼, 종교랑 멀어지는 사람들도 많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그 보수성과 남성주의를 도무지 버텨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거다.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가 가부장제의 창조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기 때문에 나는 거다 러너가 이 책을 쓰기까지 아주 많이 애를 썼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읽기에는 결코 쉽지가 않았다. 낯선 용어와 여신들의 이야기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좀 힘들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성서를 가져오고나서부터는 읽기에 수월해졌는데, 그러면서 '아, 종교를 버텨낼 수 없는 사람들도 있겠구나' 싶었던 것. 



성서에서 성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은유는 남자의 갈비뼈로 창조된 여자에 관한 은유와, 신의 은총에서 인간의 타락을 초래한 유혹자 이브에 대한 은유이다. 이 두 은유는 여성의 종속을 신이 승인했다는 증거로써 2천년 동안 인용되어 왔다. 동시에 이들 은유는 그 자체만으로 성별 관계에 관련된 가치와 실천을 정의하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창세기와 같은 시적, 신화적, 풍습적 복합체에 대한 해석은 해석하는 사람의 욕구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라고 예상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의 전통이 지나치리만큼 가부장적이었다는 점과, 지난 700년 동안 여성들이 개인적으로 구축해 낸 다양한 페미니스트 해석들이 그동안 굳건히 지켜졌고 신학적인 인가도 받았던 기독교신앙 이전의 오랜 전통에 대항해 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p.318-319)




아담의 갈비뼈에서 여성을 창조한 것은, 수천년 동안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하느님이 부여한 여성의 열등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 해석이 이브가 창조된 갈비뼈가 아담의 '아래' 부분 중 하나이며 그래서 여성의 열등성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점에 기대고 있거나, 혹은 아담은 흙에서 창조되었지만 이브는 뼈와 살에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기대고 있거나 간에, 그 구절은 역사적으로 극도로 가부장적인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p.319-320)




창세기 이야기의 상징적 의미는 둘 다 야훼의 개입을 통해 신성한 물질들이 스며들었지만, 흙에서 창조된 아담과, 인간 몸의 일부에서 창조되었으며 고대 다산 여신들의 후계자인 이브로 양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이분법은 야훼가 벌로써 노동의 성별분업을 명한 타락 이야기 속에서 강화된다. 아담은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 속에서 일할 것이며, 이브는 고통 속에서 생명을 낳고 후손을 키울 것이다. 부과된 처벌이 남성에게 일을 부담으로 만들지만, 여성을 고통과 괴로움에 빠지도록 한 벌은 여성의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자연적 결과인 여성의 출산하는 몸에 대해서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p.323)




이로써 3월의 마지막 날에 3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를 완독했다. 으하하하하. 장하고 뿌듯하다. 아직까지는 제 때에 잘 읽어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렇게 같이 읽기를 하는 게 너무 좋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같이읽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공개적인 약속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지금까지의 책들을 다 읽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읽다보니 더 읽고 싶어진다. 이 책 [가부장제의 창조]는 너무 오래전의 역사로 거슬로 올라가 힘들게 읽혔던만큼 좀 더 가까운 과거 속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다르게 쓰여진 가부장제에 관련된 책들이 궁금해지는 거다. 이성애를 스톡홀름 신드롬에 비유한 책을 한 권 사둔만큼, 가부장제, 결혼, 이성애에 관련된 책들을 더 많이 읽고 싶다고 생각한다. 한 권을 읽으면 또 다른 책들이 읽고 싶어지는 게 바로 독서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내가 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는 만큼,

대학시절에, 그렇게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학교 도서관! 여대!) 그때 이렇게 페미니즘에 열정을 쏟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도 생각한다. 그랬다면 지금쯤 페미여전사가 되어 가부장제를 다 뿌셔버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쉽다.






‘온정주의‘의 토대는, 교환을 위한 문서화되지 않은 계약이다. 그것은 모든 사안에서의 종속의 대가로 경제적 지원과 보호를 남성이 제공하고, 성적 서비스와 무임가사서비스를 여성이 제공한다는 계약이다. - P414

우리느 반드시, 최소한 당분간은 여성중심적(woman-centered)이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가능한 한 가부장적 사고를 떠나야 한다. - P396

여성들은 항상 자아(self)와 공동체의 현실을 경험해 왔고, 그것을 알고, 또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에 살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은 중요하지 않다는 오명을 안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불신하고 평가절하하는 것을 배웠다. 월경 속에 무슨 지혜가 있을 수 있는가? 모유로 가득 찬 젖가슴 속에 무슨 지식의 원천이 있는가? 일상적인 수유와 청소 속에 추상성을 위한 무슨 재료가 있는가? 가부장적 사고는 그와 같은 성별 정의된 경험들을 비초월적인 ‘자연스러움‘이라는 영역에 소속시켰다. 여성의 지식은 단순한 ‘직관(intuition)‘ 으로 되었고, 여성들의 이야기는 ‘수다(gossip)‘로 되었다. 여성들은 특히 희망이라고는 없는 특수한 것들을 다룬다. 그들은 자신들의 서비스 기능(음식과 쓰레기를 처리하는)속에서, 끊임없이 방해받는 시간 속에서, 그들의 분산된 주의집중 속에서, 매일 매시간 현실을 경험한다. - P390

그 특수한 것들이 자신의 소매를 당기는 동안 사실들을 일반법칙으로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상징을 만들고 세계를 설명하는 그와, 그의 신체적,심리적 욕구와 그의 자녀를 돌보는 그녀- 그 둘간의 간극은 엄청나다. - P390

가부장제 체계는 여성의 협조가 있어야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여성의 협조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수단에 의해 확보된다. 그 수단들은, 성별교의의 주입(gender indoctrination), 교육기회의 박탈, 여성의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는 것, 여성의 성적 행동에 따라 ‘존중받을 수 있음‘(respectability)과 ‘일탈‘(diviance)을 규정함에 의해, 제재와 노골적 강압에 의해, 경제적 자원과 정치적 권력에의 접근 차별에 의해, 그리고 동조하는 여성들에게 포상으로 계급적 특전을 줌으로써 여성들을 분리하고 서로 반목하게 하는 것이다. - P380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9-03-3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시절에 그 좋은 환경에.... 공부하지 않았던, 찬란하지 않았지만 어마무시 바빴던 20대를... 저도 엄청 후회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그래도 자꾸 아쉬움이 밀려오기는 해요.

전 아직 좀 남았네요. 재독이라고 괜히 여유부리다가 ..... ㅠㅠ
다락방님, 완독 축하드려요!!!

다락방 2019-03-31 21:26   좋아요 0 | URL
학창시절에 왜그렇게 공부를 안햇을까요, 저는 ㅠㅠ 대학때도 학사경고나 받고 다니고 ㅠㅠ 그 때 못한 공부 지금 다 몰아서 해야하는가 봐요 ㅠㅠ

완독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그렇지만 이 책은 다시 읽어야할 것 같아요. 전 너무 어렵더라고요. 용어도 낯설고 그래서 ㅠㅠ
이 책을 다시 읽는 것도 좋겠지만 나와있는 다른 책들을 열심히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무튼 앞으로도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단발머리님도 천천히 완독하시고!! 우리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읽어요!

비연 2019-04-0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같이 읽기 .. 넘 좋은데 번번히 참여 못하고..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 1인입니다.. 흑흑.
다시 참여해보기로 굳게 결심... 그래도 뭔가 꾸준이 읽고는 있는데 여러 권 붙잡고 진도는 안 나가고...

다락방 2019-04-01 17:08   좋아요 1 | URL
4월 도서는 [여자 전쟁] 이에요. 이 책은 [가부장제의 창조]에 비해서 읽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그렇다해도 내용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요.

천천히 같이 해봐요, 비연님. 천천히 같이 해봅시다.

비연 2019-04-01 17:41   좋아요 0 | URL
여자전쟁.. 이군요. 일단 시작해보렵니다. 꾸준히 길게 가기로...

무해한모리군 2019-04-01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사 15년만에 ‘나요즘 여자가 되나봐(바로 직전에 짜증을 냈음. 쉽게 감정적이 된다란 뜻인듯)‘란 남자팀장의 말에 ‘그거 성차별적 발언이예요. 주의해주세요‘라고 처음으로 말했어요.

제가 입사했을때 관리자급중 여성 ‘0‘명, 현재는 메니저급은 6명(대다수는 원래도 여성팀원이 많던 디자인팀) 팀장임원은 여전히 0.

저는 제가 남성문화에 맞추면서 살아남았는데 후배들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생활에서 불편해져 보려구 합니다. 그러려면 공부열심히 해야되는데 삶이 비인간적으로 바쁘네요 제길 ㅠㅠㅠㅠㅠㅠ

다락방 2019-04-01 17:11   좋아요 0 | URL
아이고 바쁘셔서 어떡해요, 모리님 ㅠㅠ 비인간적으로 바쁘다니 너무해 ㅠㅠ 아마도 지금이 3월이라 (이제 4월됐지만) 더 바쁘셨던 거겠죠? 아무쪼록 4,5월은 좀 한가해지시길 바랍니다.

일일이 지적하고 잔소리하는 거 너무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도 제가 지금 피로하고 불편하게 살아야 저보다 훨씬 젊고 어린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세상이 되는거겠죠. 지치지말고 앞으로 나아가야겠어요.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그 과정에 분명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자, 우리 열심히 합시다, 모리님!

블랙겟타 2019-04-02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완독 축하드려요!!
역시나 마지막은 스티키인증샷으로. ^^
제가 가지고 있는 책표지랑 다른걸로 봐서 구판인가요?

읽으면서 저도 느낀건데 이 책을 읽으면 종교 속에도 드러나는 가부장적 시선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껏 여성주의에 대한 책을 몇권읽어가면서 특히 가부장제도에 대해 관심이 더 갔었는데요.
그래서 이 책을 제목만 봤었을 땐. 나에게 딱 맞는 책이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으.... 저에게 제일 취약한 종교와 옛날이야기..를 중심으로 내용이 쓰여져있다보니(변명? 인가...;;;;)
아직도 쪼..쪼꼼.. 남았는데 고..곧 따라갈께요. ^^;;;
(3월안으로 읽지 못한 것은 스스로에게 분하지만요.ㅠ)

다락방 2019-04-03 08:55   좋아요 1 | URL
으하하핫. 축하 감사드려요!
네, 제가 가지고있는 건 구판이에요. 구판을 구입했던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지요. 그 친구는 다 읽지도 않고 제게 건넸답니다. 아하핫.
그나저나 저 구판은 난장판이 되었어요. 중간이 떡- 벌어지는 바람에 ㅋㅋㅋ 그래서 새 책을 살까 했지만, 그냥 구판으로 읽고 가지고있기로 결정했어요.


종교야말로 사실 가장 가부장적이 아닌가 싶어요. 애초에 이브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했을 때부터 여자의 위치는 그런식으로 남자로 인해, 남자 때문에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인식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었을텐데, 그러니 가부장제로부터 빠져나오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자신이 믿었던 종교로부터 느꼈을 배신감을 생각하면, 뭐랄까,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것 같고요. 너무 오래된 역사라 갈 길이 그만큼 더 멀게 느껴져요.


저도 역사에 너무 취약해서(학교다닐 때 국사, 세계사를 제일 못했어요 ㅋㅋ 아 정치경제도 ㅋㅋㅋㅋ 다 못했네 ㅋㅋㅋㅋㅋ), 그래서 이 책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메소포타미아 나오는데 눈알 팽팽 돌아가더라고요. 역시 현대물이 저한테는 읽기가 더 수월해요. 얼른 따라오시고요, 블랙겟타님! 여러가지로 4월의 도서도 기대됩니다. 4월의 도서 읽고 우리가 더 많은 말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블랙겟타 2019-04-03 10:48   좋아요 0 | URL
네네!!
4월에도 자주뵈어요 다락방님 ^^ (๑˃̵ᴗ˂̵)و

다락방 2019-04-03 10:48   좋아요 1 | URL
아니 이렇게 귀여운 이모티콘은 대체 어케알고 쓰시나요 ㅋㅋㅋㅋ 지난번부터 너무 귀여워서 원 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19-04-03 10:58   좋아요 0 | URL
어이쿠.. (◜▿‾ )ノ
그 그런가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4-03 11:05   좋아요 1 | URL
아이참 ㅋㅋㅋ 귀여워 미치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일까지 다 읽을 생각으로 까페에 들고옴! 빠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블랙겟타 2019-03-30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ㅠㅠ
저 이번주엔 개인적인 일로 전혀 읽을 시간없었네요.
그리고 주말엔 알바로 시간이 많진 않지만 저도 부지런히 읽어서 끝내야겠어요.
결국 이번달 이 책의 글도 하나도 못썼... (˃̵͈᷄⌓˂̵͈᷅)

다락방님도.. 저도 빠샤!! :))

- 2019-03-30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글을 읽고 캘리번과 마녀 들고 카페 나왔습니다..ㅋㅋㅋ 히히

단발머리 2019-03-3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랑 책이랑 북마크라니....
아~~~~ 정갈하네요.

퍼론 2019-03-3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힘을 보탭니다 빠샤!!
 
















'엘런'은 데이트앱을 통해 '패트릭'이란 남자와 만나게 되고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만날수록 더 좋아지는 남자. 결국 내 연애가 그간 실패로 끝났던 것은 결국 이 사람에게 닿기 위한 게 아니었나 싶게 만든 남자.



엘런은 실패로 끝난 자신의 과거 연애를 늘 뭐랄까, 정말로 실패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엘런은 그 세 번의 연애가 사실은 지금 이 해변에서의 순간이라는 운명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기초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패트릭 스콧이라는 녹색 눈의 측량사에게 닿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p.37)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나면 늘 언제나 슬프고 힘들지만, 언젠가의 연애에서는 '결과적으로 그 모든 연애들이 그런 식으로 끝난 것이 내게 행운이었다' 라고 생각하게 됐던 거다. 만약 그 연애들 사이에 결혼이라도 끼어있었어봐, 나는 지금 이 남자를 만날 수 없었을 거 아냐!

분명 헤어지고 다시 혼자가 되는 힘든 시간들을 겪었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좋았다고 생각했던 일이 내게도 분명 있었던 거다.


그러나 연애를 하고 헤어졌다고 해서, 다시 싱글이 됐다고 해서 그 사랑이 '실패한' 사랑은 아니라고, '마리 루티'가 자신의 책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사랑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마리 루티의 말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장기적인 안정성을 기준으로 연애의 성공을 측정하곤 합니다. 남녀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지속석 외에도 다른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영혼을 건드리지 않는 밋밋한 관계를 오래 끌고 가느니 아주 잠깐이라도 무모한 열정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불안정한 관계를 좇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안정감, 편안한, 신뢰감이 추구할 가치가 없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의 가치를 이런 식으로만 평가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근본적인 소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감동적인 통찰은 사랑의 좌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좌절은 인생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재평가하게 만듭니다. 그것이야말로 좌절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보상인 셈이죠. (pp.22-23)




엘런은 패트릭을 만나기 위해 결국 이렇게 돌아온 것일까, 를 생각하는데 패트릭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과연 그 말은 무엇일까. 나는 혹시 프로포즈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할 말이 있다고 한 뒤에 나쁜 말을 듣고 싶진 않으니까.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 뒤에 고백을 들은 적도 있어서, 당연히 흐름은 그렇게 가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엘런은 '우리는 아닌 것 같다, 그만 만나자'는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워한다. 잠깐 그가 화장실 간 틈을 타, 그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려는 거구나, 그만 만나자고 말하려는 거구나, 두려워하고 겁을 먹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것처럼 '너를 사랑해' 하는 고백도 아니고, 엘런이 생각한 것처럼 '그만 만나고싶다'는 고백도 아니었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 그에게 스토커가 있다고 한다. 스토커가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패트릭은 '사스키아'란 여자와 사귀었고 함께 살기도 했다.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애인이면서 동시에 패트릭의 아들인 '잭'의 엄마 노릇을 했다. 사스키아가 채 준비되지 않았는데, 사스키아는 아직 사랑으로 가득찼는데, 그런데 패트릭은 사스키아에게 '그만두자'고 말을 했던 거다. 그 후로 계속해서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뒤를 따라다니고, 그가 없는 동안 집에도 들어갔다 나오고, 아들의 축구경기를 보러가고, 이메일을 보내고 문자메세지를 보낸다. 패트릭이 그만하라고 해도 막무가내. 그녀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신에게 패트릭이 없는 게, 잭이 없는 게.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사귀려고 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결국 그녀는 패트릭이 새로 만나기 시작한 '엘런'이 최면술사란 직업을 가진 걸 알고 그녀에게 찾아가 가명을 대고 최면을 받으며 엘런의 내담자가 되기까지 한다.



'리안 모리아티'의 책은 읽을 때마다 항상 수다스럽게 느껴졌다. 조용히 은근히 감상할 수 있는 책이라기 보다는 헐리우드 영화를 한 편 보는 것 같은, 그것도 시끄러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딱히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그런데 나 마니아..), 그녀가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쓰는 건 사실이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가 힘드니까. 게다가 수시로 '나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만, '엘런'에게 이입이 되지 않아 초반부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좋아하기 시작한 남자가 전여친으로부터 아직 정리되지 못했다는데, 나는 너무 짜증이 나는 거다. 그런데 엘런은 그녀가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는거다. 좀 재미있게 생각한달까. 나는 이런 엘런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아서 너무 싫은 거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에게 '전여친이 스토커가 되어서 쫓아다녀, 지금 여기에도 와있어' 라고 하면 너무 스트레스 받고 무섭고 걱정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 관계를 어쩌나 고민할 것 같은데, 엘런은 그렇지가 않은 거다. 왜 스토커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 아 스트레스...



그런데 놀라운 건, 읽다 보면 나 역시 스토커인 '사스키아'에게 이입하게 된다는 거다. 나는 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그는 내게 끝났다고 하는거지, 나는 여전히 그의 옆자리가 내자리인것 같은데, 왜 그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두려고 하는거지. 노이해... 이런 마음, 너무 잘 알겠는거다. 그를 향한 집착,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 그게 뭔지 너무 알겠어서, 그래서 또 스트레스인거다. 내가 사스키아, 이 스토커랑 다른 게 뭔가, 이 집착, 이 열정, 이 미련... 모두 다 내것인데, 나나 사스키아나 별다를 바 없는 거 아닌가. 스토커에게 이입하다니, 그래도 되는 것인가... 막 이렇게 되어가지고 스트레스가 대박 찾아오는 거다. 나.. 스토커 가능성 있는건가. 이래서 너무 스트레스 ㅠㅠ



누구나 사랑을 잃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힘이 든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이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깝고 친근했는가, 얼마나 많은 걸 나누었는가. 우리가 그저 친구였다면 계속 그렇게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여전히 다정할 수 있을텐데, 우리가 애인이었으므로 다시는 이 뜨거운 사랑을 줄 방법도 없고 그의 다정함을 느낄 수도 없다니. 가장 가까운 사이가 어떻게 이토록 가장 먼 사이가 되었나, 다시 보지 않을 사이가 되었나, 너무 슬프잖아. 아, 이별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한 사람과 아주 친근한 관계를 맺고 매일같이 함께 자고 일어나고 주기적으로 엄청나게 사적인 일들을 함께하다가 갑자기 그 사람의 전화번호는 물론, 어디에서 사는지,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지난주에는, 작년에는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 사이가 되다니, 엘런에게는 가끔 그런 상황이 아주 기묘하고도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p.38)



매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매시간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주말에는 무얼하는지 죄다 알고 있다가 이제는 어디에서 사는지, 무얼 먹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는 거, 엘런 말대로 너무 기묘하고 잘못된 것 같잖아. 그렇지 않은가요, 여러분... 슬픔의 새드니스.....




엘런과 패트릭의 사랑은 무럭무럭 자란다. 사스키아가 졸졸 따라다녀도 그들의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 그렇다고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엘런은 '나는 사스키아만큼 패트릭을 사랑하지 않는다, 내 사랑의 크기는 그보다 작다' 라고도 생각하고,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게 맞나, 나는 그저 사랑에 빠지고 싶었던 건 아닌가'도 수시로 자신에게 묻는다.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깊어가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 남자 때문에 짜증도 난다. 아아..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지금 아버지 사진은 하나도 없냐고 물은 건가? 그러니까 내 얘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거네? 내가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한지 벌써 몇 년은 됐다는 듯이, 자세한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거야? 엘런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또다시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스꺼워졌다. 내가 이 사람하고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에 절실하게 매달려 있는 거면 어쩌지? 이 사람에 대한 모든 생각이 내 지나친 망상이면 어쩌지? 이 사람이 사실은 그저 피상적이고 이기적인 멍청이라면 어쩌지? (p.124)




그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나 이제 그들은 같이 살기로 한다. 그렇게 패트릭과 그의 어린 아들 잭은 엘런의 집으로 짐을 싸가지고 들어오는데, 아아, 여기서 또 한번 스트레스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데이트 할 때는 몰랐는데, 데이트 할 때 그의 집에 가서 자고 그럴 때는 몰랐는데, 이 남자가 세상에,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이었고, 오래된 짐을 가져와서 놓고는 그걸 치우라고 치우라고 잔소리를 해도 치우지 않는 사람이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엘런은 이제 딥빡이 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씨양 내가 뭘한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스트레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되어버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아, 이 부분에서 나 엘런하고 같이 대박 스트레스 받았다. 그러게, 혼자살아 이 여자야!! 막 이렇게 일어나서 소리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달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 패트릭 거지?"

매들린이 덥석 그 주제를 잡았다.

"맞아. 계속 옮겨달라고 부탁했거든. 상자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잔소리를 하지 않고 남자가 일을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엘런이 물었고,

"오호, 그거야말로 10억짜리 질문이군."

매들린이 대답했다. (p.408)



아아 스트레스 스트레스. 엘런은 그러지말자고 스스로에게 속삭이지만, 자꾸만 상자는 언제 치울거냐고 묻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외조부가 살던 이 집이 패트릭의 짐으로 좁아지고 지저분해졌어, 아 빡침이... 이렇게 되어버림 ㅋㅋㅋ


그러나 무릇, 사랑이란 무엇인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게 되는데 어찌 순탄하기만 할것이요, 이렇게 마찰이 일어나면 해결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짐을 치우지 않는 패트릭과 거기에서 빡침 오는 엘런을 보면서 건지 아일랜드 생각을 했다. 건지 아일랜드에서도 약혼자가 같이 살러 들어오기 때문에 책장의 절반을 내어줬더니 거기에 트로피만 잔뜩 진열하는 남자가 나왔더랬지. 나중에 여자는 약혼자랑 헤어지지. 후훗.



그러나 사실 엘런이 패트릭과 결혼하게 되는데 가장 망설이는 이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은 따로 있었다. 어쩌면 그가, 패트릭이, 죽은 그의 아내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자신과 비교하며 자신을 그만큼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는 것. 그 점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늘상 그녀를 괴롭힌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이 남자가,그러나 나를 '가장'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

슬픔의 새드니스..

우리는 이렇게 다들 각자의 슬픔을 안고 사는건가요..






한편,스토커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애인으로서 그리고 잭의 엄마 역할까지 잘해내면서 행복했다. 게다가 패트릭의 부모님들까지도 자신을 좋아하고 다정하게 대해줬고. 그런데 패트릭과 헤어지니 잭도, 그리고 패트릭의 부모님도 잃게된 것이다. 자신은 이곳에 다정하게 지냈던 사람, 소속감을 느끼던 사람이 이들 뿐이었는데, 그런데 한꺼번에 이들을 모두 잃게된 것이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잃었지만, 그 사람들을 대체할 사람들을 나는 충분히 알지 못해. 나에게는 이모도, 고모도, 사촌도, 조부모도 없단 말이야. 나는 백업이 되어줄 사람들을 마련해두지 못했어. 이런 상실을 겪었을 때 나를 지탱해줄 보험을 들어놓지 않았어. (p.225)



사스키아가 패트릭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 그의 집에 침입하고 그의 새로운 애인을 감시하는 것 모두, 그녀에게는 패트릭 외에 다른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항상 같이 있고 싶고 생각나고 보고싶고. 헤어진 뒤에 상실감 역시 어마어마할 것이다. 늘 친근했던 그의 소식을 이제 알 수조차 없다니 얼마나 미칠 노릇인가. 그러니 어떻게해서든 그의 삶을 엿보고 싶고 누구를 만나는지 알고 싶은 건 당연한 욕망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스키아와 내가 같다. 그러나 사스키아는 그러기 위해 상대의 스트레스와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한다. 누굴 만나는지 보고 약속장소에 따라가고. 그녀의 삶은 온통 그로 채워져있다. 나는 그녀가 갈 데까지 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토킹을 하면서 그녀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녀는 여전히 '그의 옆엔 내가 있어야해' 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면 화가 난다. 제발 날 따라다니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게 스토킹을 하면서 그녀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그녀의 바람대로 '역시 너만큼 날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어' 하고 그녀에게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 이제 패트릭의 새로운 여자친구는 임신했다. 그 사실마저도 사스키아는 알게 됐고, 이 때는 정말 그녀가 미칠지경에 놓인다. 아이고.. 참... 몰랐으면 미치지는 않았을텐데. 게다가 초음파 사진 찍으러 패트릭과 엘런이 잭까지 함께 데리고 갔는데 거길 따라가서 통곡을 한다. 이 때는 정말이지 너무... ㅠㅠ 아니 이 여자야, 거길 왜 따라가서 자기한테 스스로 상처를 줘, 몰랐으면 됐잖아, 몰랐으면...

몰랐으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스토커에게도 스토커의 사정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이 이야기를 시작한걸까, 싶었는데,

마지막에는 스토커가 상대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얘기해준다.

사스키아 역시도 자신이 자신의 감정, 자신의 사랑에 빠져서 상대가 자신으로 인해 고통스러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은 패트릭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패트릭이 어떤 기분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다.


나는 상대를 괴롭히는 사랑은, 그것이 상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스토커의 경우에도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 잊지못해', '나는 늘 너랑 있고 싶어' 라고 표면적으로 상대를 사랑해서라 말하지만, 그러나 스토킹을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지마', '하지마', '니가 그러면 괴로워'라고 누누이 말해도 그걸 들을 생각조차 없는 거다. 자신의 사랑에 갇혀서 거절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도무지 상대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거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리는데, 네, 그 사랑 크죠, 너무 큰데, 그거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에요.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를 괴롭히면 안되는거죠. 괴롭게 하는 게 무슨 사랑이에요.



사스키아가 뒤늦게라도 이걸 깨닫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당신이 계속 전화를 걸었을 때, 패트릭은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면 패트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패트릭은 그날 밤 두려웠을까요?"

이상한 건, 지난 3년 동안 나는 패트릭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작 패트릭이 어땠을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거야.

"폭력을 휘두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육체적인 폭력만 폭력인 건 아니에요. 당신은 패트릭을 무기력하게 만든 거예요."

"무기력하게 만들다뇨? 나는 패트릭을 사랑했어요. 그저 다시 함께하기를 바란 것뿐이에요."

"다시 생각해봐요, 사스키아."

내 정신과 의사는 나를 어디로든 달아나지 못하게 했어. 마치 나를 거울 앞에 세워놓고는, 내가 자꾸 외면하고 다른 곳을 보려고 할 때마다 내 어깨를 붙잡고 다시 거울 앞으로 돌려놓는 것처럼 느껴졌어. 내가 손으로 눈을 가릴 때마다 그녀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고 내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는 거야. 마침내 나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게 말이야. (p.621)






진짜 반복해 말하지만, '너 없이 안돼' 는 안된다. '너가 없어도 된다'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씩씩하게. 다른 사람들과도 다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돼. 물론 당신이 있으면 내 삶은 더 즐겁고 행복해지겠지, 가급적이면 당신하고 같이 살고 싶겠지. 그러나 '너 없으면 난 못산다' 로 살아가면, 헤어짐을 견디지 못할 뿐더러 상대를 괴롭히게 된다. 범죄자가 되는 겁니다.

사스키아가 자신이 '백업해둔' 인간 관계가 없다고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없으니 미치는 거다.

그러나 사스키아의 경우, 없다고 생각한 것 역시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 곁에도 다른 사람들이, 친구랑 회사 동료들이 있었는데, 그녀가 몰랐다. 그녀가 그들을 관계라고 생각하지를 않은 거였어. 이게 그녀가 자신의 사랑안에 너무 갇혀 있어서 그렇다. 자기 사랑에, 자기의 큰 사랑에 갇혀 있으니, 상대으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따라다니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보지도 못해. 그것은 그렇다면 '상대를 향한 이토록 큰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내 사랑은 사랑이되 상대의 사랑은 타이밍일 수 있다.

나 역시 내 사랑이 타이밍이고 상대의 사랑이 사랑이었던 적도 있고.

사랑이 그저 순수한 사랑이라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게 시작되고 또 끝나는 관계는 드문 것 같다. 사랑이 식어서 헤어지기도 하지만, 사랑이 식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이유들로도 헤어질 수 있다.

사랑은 중요하고 또 많은 것들을 해결해주지만, 사랑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순간순간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홀로 서는 것도, 살아갈 방향을 바라보는 것도, 때로는 애인과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거니까.





내 정신과 의사는 패트릭이 나와 헤어진 이유가 사실 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그녀는 패트릭이 나와 헤어진 건 그 자신의 문제, 콜린을 잃은 슬픔 때문일 거라고 했어.

"만약 그때 회의장에서 만난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 엘런이었다고 해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헤어졌을 거예요."

내 정신과 의사는 그렇게 말했어.

"아니에요. 두 사람은 소울메이트인걸요. 두 사람은 정말 서로를 사랑해요."

내가 말했어.

"타이밍의 문제예요." (p.623)





어디에서 어떤 타이밍이 어떤 방식으로 끼어든걸까, 나는 계속 생각한다. 멈추지 않고 생각한다.

이토록이나 큰 사랑을 품고서, 아무도 이렇게 큰 사랑을 품을 수 없다고 자부할만큼 큰 사랑을 품고서는, 그러나 사랑하고 헤어지게 된 것은 어디에서 어떤 우연이 끼어든걸까. 어쩌면 운명이란 큰 틀에서 이 시기에 누군가 들어오고 또 이 시기에 누군가 나가고 하는 것들이 다 정해져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 정해져있다면, 그래서 이 시점에 헤어져야 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큰 사랑은 남겨두지 말고 같이 거둬갔어야 하는 건 아닌가. 이 감정은 남겨둔채로 관계만 정리하라고 하면 그건 너무 엉망진창의 운명의 흐름 아닌가. 헤어지는 게 운명이었다면 고통스럽지 않아야 운명을 받아들일 거 아냐.

나에게는 사랑이었고 상대에게는 타이밍이었던걸까.




누군가를 뒤에서 한참 응시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돌아보게 돼. 실제로 쳐다보는 사람을 보지는 못하지만 공기를 흐르는 기운이 다르다는 걸 느끼는 거야.

그게 바로 내가 패트릭을 오랫동안, 충분히 오랫동안 생각하면 패트릭이 나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이유야. 같은 방에서 한 사람을 오랫동안 쳐다봤을 때 그 시선을 느낄 수 있다면, 아무리 떨어진 지역에 있어도 엄청난 감정을 계속해서 보내면, 수많은 감정을 해일처럼 보내면, 그 감정을 느낄 수도 있는 거잖아. (p.145-146)




겁나 텔레파시 쏘고 있는데, 느껴지니?







사스키아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 온 친구가 사스키아가 받은 초콜렛을 먹어봐도 되냐고 묻고서는 하나씩 계속 먹는 장면이 있다.




나는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려고 했지만, 아주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손이 너무 떨려서 꺼내지지가 않았어.

"내가 해줄게요."

랜스가 부드럽게 말했어.

"초콜릿 한 개만 먹어도 돼요?'

케이트가 말했어.

"나중에 할게요."

내가 말했어.

"초콜릿 하나 먹으면 안 돼요?"

케이트가 말했어.

"케이트!"

랜스가 말했어.

"미안해요."

케이트가 말했어.

"당연히 드셔도 돼요."

내가 말했어. (p.523)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우리가 가져다 줄게요."

케이트가 초콜릿을 두 개쩨 먹으면서 말했어. (p.524)



나는 다시 랜스의 아내를 봤어. 정말로 말랐고, 가슴은 평평했어. 엄마가 봤다면 '남자아이처럼 매력적으로 생긴 여자구나'라고 했을 것 같아. 케이트는 산림지대에서 온 사람처럼 머리가 정말 짧았고 눈이 컸어. 그리고 아주 이상한 각도로 의자에 앉아서 여전히 내 초콜릿을 먹고 있었어. (p.524-525)



아이고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나는 평소에 늘상 초콜릿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초코릿을 좋아한다. 어느 날에는 되게 먹고싶어질 때가 있는 거야. 그렇지만 매일 그런 건 아니야. 초콜릿보다는 와인을 더 사랑합니다. 아니 근데 저 장면 읽는데 갑자기 나도 하나씩 꺼내먹는 초콜릿이 너무 먹고 싶은 거다. 고디바라든가 길리안 이라든가, 왜 그렇게 하나씩 작게 들어가 있는 그런 초콜릿. 아 너무 먹고 싶어, 나도 하나씩 꺼내먹다가 정신을 차린 다음에 '헐, 내가 이거 다 먹어버렸네..' 이렇게 하고 싶은 거야. 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장면 읽은 뒤로 머릿속에 초콜릿 생각만 하다가 잊고 있었는데, 아까 페이퍼 써야지, 하는 순간 '아 초콜릿 먹고싶어!' 이렇게 된거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에게는 얼마전에 동료로부터 받은 초콜렛이 있지.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서 허겁지겁 그 초콜릿을 먹기 시작했는데, 이건 내가 원한 그 낱개 초콜릿이 아니라 뭐라고 하지, 막대 초콜릿이라고 해야 하나 통 초콜릿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부러뜨려 먹어야 하는 허쉬초콜렛이고, 아아, 초콜렛이 순수하지 못하고 피넛버터랑 캬라멜 크림.. 어쩌고 막 이렇다. 아쉬우나마 이거라도 먹긴 했지만, 이건 내가 원하는 그 초콜릿이 아니야,진짜가 아니다! 아아, 고디바 낱개 박스째 열어놓고 하나씩 집어 먹고 싶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런거 부러뜨려 먹는 거 말고, 그런걸로 하나씩 집어 먹고 싶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리고 제일 하고 싶은 건 다 먹은 다음에


Oops!! I did it again!!



하는 것이야...











길게 쓰긴 했는데 뭘 썼는지를 모르겠다. 킁킁.





엘런은 그런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알고 있을까? 엘런은 특별히 운동을 좋아하는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아. 엘런이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어. 나에게 엘런은 그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찬가를 읊는 사람일 뿐이야. 요가는 하겠지. 태양을 보고 합장하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할 것 같아. - P148

엘런은 언제나 엄마가 늘 엘런 자신을 그렇게 날카롭고 맹렬하게 쳐다보는 이유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건 엄마가 엘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감추려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들키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항상 사랑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엄마의 사랑스러운 단점이라고 생각해왔다. 언제나 엄마에게 ‘나를 조금만 더 좋아해봐. 사랑에 좀 더 너그러워지란 말이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가 사랑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감내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엘런도 사랑이 얼마나, 문자 그대로 얼마나 아픈지를 안다. 가슴 한가운데가 사랑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 P613

"패트릭이 널 보는 눈길이 참 좋더라. 네가 옳아. 존은 재미있기는 했지만, 패트릭이 바라보는 것처럼 너를 보지는 않았어."
"패트릭이 나를 어떻게 보는데?" - P541

"난 항상 패트릭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그를 더 많이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냥 내가 훨신 사랑하면 되는 거니까." - P498

엘런의 혈관 속으로 따뜻하고 평온한 감정이 퍼져나갔다. 엘런의 마음을 움직인 건 패트릭이 한 말이 아니었다. 엘런의 이해가 너무나도, 너무나도 절실하다는 듯이, 말하는 내내 패트릭의 미간에 잡혀 있던 두 가닥 굵은 주름이었다. - P571

존과는 4년을 함께 살았지만, 그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엘런은 존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런한테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존은 엘런하고는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였다.
엘런은 정말로 상처를 입었다. 도자기 컵 여러 개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것처럼 감정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예리한 통증이 파편이 되어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콧구멍 속을 따끔거리게 만든 고통들이 커다란 통증이 되어 쐐기처럼 가슴 깊이 박혔다. - P192

"그만두라고요?"
"맞아요. 그게 내가 주는 아주 끝내주는 충고예요. 그만둘 것!"
"그냥……그만두라고요?"
케이트는 웃기 시작했어.
"내가 치료사라면 그렇게 말할 거예요. 사스키아, 그냥 그만둬요. 스토킹은 관두고 뜨개질이나 해요!" - P588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전혀 다른 방법으로 치료했어야 했어요."
엘런은 걸어가는 로지를 보면서 말했다.
"뒤늦은 깨달음이라. 항상 문제가 생겨야 알게 된다는 거구나."
엘런의 아버지가 말했다. - P585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 마음을 다해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반쪽 마음도 아니고, 두 번째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당신을 사랑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남은 평생을 다해서 그걸 당신에게 증명해 보이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 미친 최면술사님?" - P571


댓글(4) 먼댓글(1)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프로이트 콤플렉스] 스토커와 아버지
    from 마지막 키스 2020-10-15 10:37 
    프로이트에 따르면, 일반적인 경우에 나르시시즘은 발달의 한 단계로 간주될 수 있는데,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대상에게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러한 사랑은 보통 부모 중 한명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자기애를 다른 사람에게로 전이시키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원래의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심각한 정신 질환을 초래하게 되고, 이는 정신병의 발달 과정을 따라 진행된다.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 정신병의 징후들에는 자기 자
 
 
jeje 2019-03-29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낱개 초코렛 하나씩 집어먹고싶은 최면에 걸렸습니다아아아아.....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3-29 22:24   좋아요 0 | URL
가까운 시일내에 고디바를 꼭 사먹고 싶습니다!!! 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19-03-2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랑학 수업 꼭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19-03-29 22:25   좋아요 1 | URL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에요. 후회하지 않으실거라 말씀드려요. 후훗 :)
 
















며칠전 읽은 소설《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에는 폭력적인 아버지가 나온다. 딸의 머리채를 잡고 던져버리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늙은 족장을 집에 데려와서는 자신의 열네살 딸을 팔아치울 계획을 갖고 있다. 열네살 딸은 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소유물로써 존재하며 그렇게 다른 남자에게 넘겨질 판이다. 여기에 딸의 의도나 목적, 동기는 없다. 집에 찾아온 늙은 족장의 눈에 띄었고, 그러므로 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건네져야 했다.

《가부장제의 창조》의 <제5장 부인과 첩>은 바로 이런 내용을 다룬다. 여성학 서적을 읽어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유물로써의' 여성.

보존되어 있는 세 가지 주요 메소포타미아법전들-함무라비법전(CH), 중기 아시리아법(MAL), 히타이트법(HL)-과 성서 율법은 역사적 분석을 위한 풍부한 자료다. (p.181)

보존되어 있는 법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당시의 여성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데, 나이지리아의 최근 소설을 읽다보니 그 때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왔나,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멀리 왔는가...하는 것.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 보자.

약혼자가 결혼 전에 죽은 신부는 시아버지에 의해 그의 아들들 중 한 명에게 주어질 수도 있다. 반대로, 만일 한 남자의 신부가 죽으면, 장인은 그의 다른 딸들 중 한 명을 그에게 부인으로 줄 수 있다. MAL §33 은 아들이 없는 젊은 과부는 남편의 형제 중 한 명이나 그의 아버지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녀와 결혼할 남편의 친척이 없을 경우에만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이 법들은 결혼교환이 개별 부부들이 개입된 거래가 아니라, 한 가족의 여성구성원들에 대한 또 다른 가족의 남성구성원들의 권리가 개입된 거래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

이 개념은 유대인들의 수혼제(嫂婚製, 과부가 고인의 형제와 결혼하는 풍습-옮긴이)의 기초를 이룬다. (p.206)

여자가 다른 남자 가족에게 '주.어.질' 수 있다. '주어지기'도 한다.

얼마전에는 한 만화가의 아내가 이십대 젊은 여자일 때 예쁘게 꾸미고 얼른 좋은 남자랑 결혼하라는 유튜브를 올렸는데, 이 얼마나 가부장제에 충실히 복무하는 마인드인가. 가부장제에 들어가고 충실히 복무하기 위해서는 이십대에 예쁘게 꾸며야 가장 잘 팔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셈이다. 게다가, 이십대에 가장 잘 '팔릴 수' 있고, 그렇게 팔리는 걸 자기의 권력으로 생각한 것 같은데, 그거 아니죠. 그녀는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평소 그 만화가에 대해 '대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는 어떤 여자와 대화하는 걸까' 했는데, 아내의 마인드도 남편과 같았다. 가부장제 만세죠?

여성은 그들의 성적 활동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식활동에 의해서도 더 높은 지위로 배정될 수 있었다.

유산이나 낙태에 관한 법들은 성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더 많은 통찰력을 제공한다. 메소포타미아의 법은 피해자의 계급에 따라 처벌이 달라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여성들의 경우, 이것은 대체로 피해자에 대한 소유권이 있는 남성의 계급을 의미한다. 그래서 함무라비법은 일반 시민의 딸인 경우 그 처벌은 5세켈의 벌금인 데 비해, 귀족의 딸을 때려서 유산하게 하면 10셰켈이다. 만일 때려서 귀족의 딸이 죽으면, 그 처벌은 가해자 딸을 죽이는 것이고, 피해자가 시민의 딸이면 처벌은 벌금이다. 다시 한번, 가해자 딸의 생명은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에 따라 죄지은 아버지의 생명을 대신한다(CH§ 209~214).

아시리아법은 더 넓은 범위에서 가능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MAL§50 은 결혼한 여성을 유산하게 만든 남자는, 자기 부인이 똑같이 취급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p.207)

성접대도 마찬가지. 아니, 대체 '성접대'라니, 이런 단어가 애초에 왜 존재해야 할까. 단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너무 끔찍하잖아. 성으로 접대를 한다는 생각자체도 끔찍하지만, 성'접대'를 할거면 지들 성을 접대하지, 왜 여자들 데리고 와서 그 여자들 성으로 접대를 해? 접대는 지들이 하는 거니까, 지들 성으로 해야할 거 아니야. 남자1이 남자2에게 접대를 한다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일 거다. 저 좀 잘 봐주십쇼, 하고. 그게 돈이든 지위든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든, 어쨌든 접대를 함으로써 뭔가 얻게 된다면 그건 바로 자신일 터. 그런데 왜 접대를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여성의 것'을 가져오는가. 왜 남자1과 남자2의 거래에 여자가 수단으로써 활용되는가. 이게 어떻게 성접대야. 타인의 몸을 가져와 '사용'하는데. 그건 성폭력이지. 남자1과 남자2가 본인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으로써 그건 여자를 물화 시키고 타자화 시키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성폭력이다. 왜 내 성으로 니가 접대해?




위의 인용한 문장을 보면 현재의 성접대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죄를 지은 건 남자인데 그 벌을 받는 것은 그 남자에게 '속한 여자' 였던 것. 가해자가 살인을 했고 그것이 동등한 복수의 법을 적용해 살인으로 처벌할 것이었다면, 그 살인은 가해자에게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의 '딸'에게 적용되어졌다. 다른 여성을 괴롭힌 남자가 있다면, 그 남자가 처벌 받아야 하는데 그 남자의 '아내'가 처벌받았다. 딸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아내는 다른 여자를 유산시킨 게 아닌데, 그런데 그녀들은 남자들을 대신해 벌을 받아야 했다. 내가 대신 벌을 받는 것도 억울해 미치겠는데, 나는 집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남자들이 어디가서 죄짓고 다니는 건 아닐지 신경써야겠네.

이에, 나는 여자를 산 채로 화형시켰던 사티가 생각났다.





어제, 정부의 금지조치가 내려졌음에도 엄청난 수의 인도인 군중이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되는 신부이게 찾아와 경의를 표했다. 18세의 신부는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남편의 머리를 무릎에 뉘고 조용히 앉은 채로 불태워졌다.지난 9월 4일, 결혼한 지 8개월 된 신부 칸와르Roop Kanwar는 무늬를 넣은 비단으로 지은 결혼예복 사리를 입고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앉아 사티를 거행했다. 이 분신자살은 예부터 인도에서 정절을 드러내는 궁극적 행위로 여겨진 관습이지만, 이미 몇 세기 전부터 불법화되었다.이 젋은 신부의 행동 덕분에 라자스탄 주의 서부에 위치한, 자이푸르에서 8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이 사막 마을은 순례객들의 성지가 되었다. (p.238)









MAL§ 55는 처녀에 대한 강간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만일 결혼한 남성이 친아버지 집에 사는 처녀를 강간하면

강간이 도시 내에서 범해졌건, 트인 벌판에서 일어났건, (공공의) 거리에서 밤에 일어났건, 혹은 도시의 축제에서 일어났건, 처녀의 아버지는 처녀를 범한 남자의 부인을 취해서 그녀를 불명예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부인을 남편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자기가 취할 것이다. 아버지는 능욕당한 딸을 그녀를 능욕한 남자에게 배우자로 줄 것이다.

만일 강간한 남자에게 부인이 없다면, 그는 그 아버지에게 숫처녀의 값을 지불해야 하고 그 소녀와 결혼해야 하며 결코 그녀와 이혼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소녀의 아버지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아버지는 돈은 벌금으로 받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딸을 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강간이 희생자의 아버지와 남편에게 해를 입힌다는 개념이, 고통받은 여성들에게는 절망적인 결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203)

강간당한 내가, 나를 강간한 놈하고 결혼까지 해야되냐? 야... 진짜 .....아니, 강간은 내가 당했는데 왜 명예는 아버지 명예가 떨어지죠? 강간은 내가 당했는데 왜 나는 나를 강간한 놈하고 결혼까지 해야해? 다들 미친거야 진짜? 내가 숫처녀인데 숫처녀의 값을 누구에게 지불해 썅?! 내가 숫처녀인데 숫처녀 값은 어떻게 매길건데? 누가 매기는건데?

이 미친세상에서, 여성들이여, 어떻게 살아오고 버텨냈습니까. 물론, 버티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하고 아주 많은 여성들이 죽음의 길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가기도 했지만, 아, 여성들이여, 어찌도 이리 고단한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오래전에 본 티비 프로그램에서 한 여성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 제목은 생각이 안나는데, 인간극장 류의, 보통 사람의 삶을 보여주고 얘기를 듣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그 날 주인공인 여자는 자신이 다니는 공장의 남자동료가 자기에게 구애했고 여자는 그를 거절했었다고 했다. 자신은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으므로. 그러자 공장 동료가 그녀를 강간했고, 그녀는 강간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와 결혼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죽어서(왜 죽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그 무덤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이 어마어마한 범죄가, 강간이라는 범죄가 텔레비젼에 나오는데 그 남자를 잡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단 강간이 용인되어 온것일테고, 그리고 아주 많은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면 강간한 남자와 함께 사는 걸 택해야 했다. 강간당한 여자는 여자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거니까.

김형경의 소설 속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나온다. 운동권 여자가 같은 운동권 남자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결국 그 남자랑 결혼하는 걸 택하는 삶. 대학교육을 받았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고,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생각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강간 앞에서는 강간범과 결혼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삶이야, 이게 어떻게 삶이니.

이 소설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까?

많은 남자들이 이 여자를 '사귀고' 싶은데, 사귀자고 해도 사귀어주질 않으니, 제뜻대로 되질 않으니, '강간해서 갖자'로 방법을 찾는다. 맙소사. 하아-

강간의 역사가 이토록이나 길고,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로만 생각했던 역사가 이렇게 긴데, 세상이 과연 바뀌기는 할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지만, 바뀌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려나. 혹여라도 지쳐버리면 이 견고한 여성 물화, 성적대상화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될까봐 지치기도 쉽지 않다.

이 책의 <제6장>은 '여성에게 베일 씌우기' 라는 제목이다. 자, 겁내지 말고, 지치지 말고 계속 읽어나가자.

여러분, 기운냅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3-26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3-26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죄를 지은 아버지의 형벌을 딸이 받는 것으로 정해진 당시의 법에 가장 경악했어요. 복수라는 측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여성의 정조에 대한 범죄를 ‘재산권에 대한 침탈’로 이해했다는 것이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성접대’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남성이 ‘접대’ 받았을 때 제일 좋아하는 것이 ‘여성’, ‘여성의 성’이고, 그게 필요하다면 ‘여성’을 ‘공급’해 ‘접대’하겠다는 거죠. 여성이 사물화 되었기 때문에, 남성 의지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인간이 아니니까요. 나의 필요(접대)를 위해 대접(성접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거겠죠.

다락방 2019-03-27 15:10   좋아요 0 | URL
제가 위에 썼던 것처럼, 접대는 ‘내가‘ 가진 것으로 해야 하는 거잖아요. 내 집, 내 돈, 내 성의, 내가 마련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진‘ 것으로 해야한다고 봤기 때문에 ‘여성‘을 접대한것 같아요. 여성은 나와 같은 하나의 인간이라기 보다 ‘내 꺼‘ 니까요. 내가 돈 주고 살 수 있는, 내가 마련할 수 있는 ‘것‘.
예전부터 법에서까지 여자를 남자의 소유로 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의 것이다가 남편의 것이다가... 어휴........ 같은 인간이 아닌거에요, 정말.

비연 2019-03-27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사이드>의 저 장면. 인도의 사티. . 조용히 앉은 채로 불태워진 18세의 신부. 정말 소름이 돋았었어요, 너무 끔찍해서. 아직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니. 도대체 여성을 뭘로 보는 건지. 그냥 소유물? 물건? .. 그러니 선물로 주고 그러겠죠. 접대하라고. 정말이지 아직도 멀었다 멀었다. 라는 생각만이 들면서 그날 잠이 안 왔었어요..ㅜㅜ

다락방 2019-03-27 15:12   좋아요 0 | URL
죽은 남편과 함께 산 채로 태우면서 그렇게 정절을 지켜 남편과 죽은 여자를 ‘성녀화‘ 시키니, 그 문화는 여자들에게 강요될 수밖에 없겠죠. 그걸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니,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서 산 채로 불타 죽는 걸 보면서 숭배할 수 있을까요. 너무 끔찍해요 진짜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