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고 싶다면, 포틀랜드 - 풍요로운 자연과 세련된 도시의 삶이 공존하는 곳 포틀랜드 라이프 스토리
이영래 지음 / 모요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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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몇 장을 읽었을 때는 어쩐지 글 타입이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아 사진만 후루룩 넘겨봐야지 싶었는데, 읽다보니 점점 빠져들게 됐다. 빠져들었다기 보다는 사실 흥분됐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데, 와, 읽기 시작하면서 내내 얼마나 포틀랜드에 가보고 싶어졌는지, 수시로 비행기표를 검색해봤다. 같이 가고 싶다는 친구는 결혼준비 때문에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했고, 그래서 나는 '혼자 가자' 생각하게 되었는데, 비행기야 그렇다쳐도, 호텔비를 어떻게 감당하나, 생각하니 지금 머리가 아프다... (집에 가면서 로또를 사볼까...)


이게 단순히 포틀랜드 여행기였으면 나에게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책 제목에서처럼 포틀랜드에서 '살고' 있다. 포틀랜드가 고향인 남자와 함께. 여자는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었고 호주로 유학갈 준비중이었다가 한국에 와있던 미국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하면서 포틀랜드로 건너가게 된 것. 저자는 시종일관 삶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라서 포틀랜드의 삶에도 잘 적응하는데, 그걸 보는게 대단하고 또 감히 내가 대견하게 느꼈다. 컴플레인을 잘 거는 성격답게 아닌 건 아니라고 그자리에서 말하면서 자신의 유리한 위치를 가져가는 건, 파머스 마켓에서 베리를 팔 때 최정점을 찍었는데, 읽으면서 몇 번이나, 내가 이 저자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이 사람만큼 할 수 없을거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녀는 남편과 사랑하며 잘 지내는것처럼 시댁 식구들과도 즐거이 잘 지내고 있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잘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게 책장을 넘길수록 더 신났다. 게다가 남편이 맛집 찾아다니는 거 좋아해서 리스트 만들고 아내를 데려가는 거 너무 좋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포틀랜드에 살게 되면서 포틀랜드에 익숙해지고, 또 가끔은 여행자의 시선으로 포틀랜드를 보려는 저자는 삶에 있어서 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사람 사귀는 것도 좋아하고, '내가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해볼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도 진짜 대단하고... 하고 싶은 건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는 사람인 것 같아서, 이런 저자라면 어디에 데려다놔도 잘 지내지 않을까. 포틀랜드에서 사람들과 까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숙박시설등을 비롯해 전체적으로 적응해 나가는 일상을 그려내길래, 아아, 그야말로 라이프 스토리구나 싶었는데, 끝에 가서는 숙박시설과 레스토랑등의 목록표도 만들어 두었으니, 오호라, 여행갈 때 들고가도 좋을 책이 되었다. 덕분에 큰 도움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자꾸만 아, 가고싶다, 가고싶다, 하면서 가슴이 뛰었다. 무엇보다 서울의 절반정도 되는 크기에 인구는 서울의 15프로라고 하니, 아아, 뭔가 아침에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어슬렁어슬렁 거리기 딱 좋은 곳일 것 같아. 이곳 특유의 슬로라이프를 내가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또 여행할 때 특유의 조증이 발생하니까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작은 도시를 구석구석 누비고 싶다는 바람이 생긴다. 결혼하고 포틀랜드로 넘어가 남편이 데려갔다던 버거빌 이라는 버거집에 가서 버거도 먹고싶고... (  ")




저자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데 남편은 맥주를 아주아주아주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아주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아,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은 장면이었다. 내 눈앞에서도 그 장면이 그려지는 듯해서.



그가 유일하게 애지중지하는 맥주들을 꺼내 들고 나오는 시간이 있었다. 오후 5~6시. 그의 아버지가 농장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뒷마당의 포치에 앉아 저 멀리 들리는 기차 소리와 새소리만이 존재하는 평화로운 순간을 담배 한 모금으로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존은 언제나 맥주 한 병과 글라스 두 개를 들고 나와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함께 그 순간을 맞았다. 

(중략)

'저렇게 맥주 한 잔, 초콜릿 하나를 아버지와 나눠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삶을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이 내 남편, 내 아이의 아빠가 된다면…….'

나는 그를 이해하려고 되지도 않는 노력을 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저놈의 술을 끊게 해야지!라는 상상 같은 건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 역시 내가 싫어한다고 해서 일부러 그의 취미를 포기하거나 포기하는 척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년 가까이 그의 맥주 사랑과 홈브루잉 취미생활을 지켜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취미를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 (p.205-206)




아아, 하루 일과가 끝나고 포치에서의 다정한 술 한 잔은 나의 오랜 로망이 아니던가. 여기엔 내가 바라는 모든게 다 있다. 다정한 사람과 이야기, 여유로운 분위기, 술.

술...

술.....

내가 진짜 포치에서 술 마시고 싶다고 글을 몇 번이나 썼는지!!!!



그리고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아, 저 남자 좋다...라고 생각하는 여자라니..........실로 애정이 뿜뿜하는 장면이 아닌가!




포틀랜드의 파머스 마켓에서 잼도 사보고,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빵도 사서 여유롭게 빵에다 잼을 슥슥 발라 먹고 싶다. 느즈막히 책 한 권 들고 나가 맛있다는 커피집에도 가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책도 보고. 그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이곳저곳 걸으면, 아아, 얼마나 좋을까. 읽는 내내 정말이지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어.... 베트남 국수여행 책 다음으로 나를 흥분시키고 말았다. 너무 좋아서, 막, 뭐할까, 이러면서 메모하면서 읽었다. 가게 되면 여기가서 이것도 먹어보고 이것도 마셔봐야지! 동네는 어디가 좋을까? 막 혼자 걷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그러다보니, 포스트잇을 여러군데 붙였다. 포틀랜드를 꼭 가보고 싶다던 친구가 있어서, 나중에 그 친구랑 함께 가자고 약속해 두었는데, 그 전에 나는 좀 미리 다녀와야겠다. 게다가 나의 다정한 오빠가 내가 포틀랜드에 오면 스테이크를 사주겠다고 했어.... 


내 영혼은 이미 거기에 가있다. 여기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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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05-2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이 없어지려고 하네요, 영혼이. ㅜㅜ
포틀랜드 예전에 다녀왔었는데... 정감가는 곳이었어요. Saturday market도 좋았고. 아. 다시 가고 싶어욧!

다락방 2017-05-23 17:19   좋아요 1 | URL
비연님은 다녀오셨군요! 아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아무데나 막 돌아다니고 싶어요. 아아, 그렇지만 비용을 생각하니 잠깐 주춤하게 됩니다. 그래도 가고 싶으면 가야겠죠? 하하하하하

비연 2017-05-23 18:37   좋아요 0 | URL
그럼요 그럼요~ 가고 싶으면 가는 걸로. 비용은.... 어디선가 언제인가 메꿔지리라 믿으며 ㅡ.ㅡ;;

다락방 2017-05-24 08:09   좋아요 0 | URL
좀 저렴한 호텔을 알아보고 아무래도 떠나야겠어요...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계속 생각났거든요. 불끈!

transient-guest 2017-05-24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레건 주가 전체적으로 아름답죠. 저도 아주 어릴 때 가봤는데, 포틀랜드도 그렇고 유진도 그렇고 아주 예쁘다고 해요.ㅎㅎ 가서 멋진 농장주의 아들과 사랑에 빠져 눌러앉으실지도..ㅎㅎㅎ 포치에서 맥주와...등등...

다락방 2017-05-24 08:00   좋아요 1 | URL
아..... 멋진 농장주의 아들.....아아....포치에서 맥주.....멋진 농장주의 아들을 돈도 많고 볕에 그을려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겠죠....농장에서 일하니 근육질의 단단한 몸.............일것이고, 아름다운 곳에서 살았으니 마음도 여유로울 것이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 환상속의 남자네요. 네, 제가 포틀랜드로 가겠습니다. 멋진 농장주와 사랑에 빠져 포틀랜드에 눌러 살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너무 멋져서 인생이 황홀해질 것 같아요..
>.<

웽스북스 2017-05-24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킨포크 스타일의 원조가 포틀랜드라고 들었는데, 역시 킨포크를 좋아하시던 다락방님은 이 책도 좋아하시는군요! ^^

다락방 2017-05-24 10:0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웽님. 여기에서 킨포크 본사 찾아가서 직원들 만나고 인터뷰 하는 것도 나와요. 이 저자도 킨포크를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후훗.
 



많은 물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벚꽃이 달아난다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편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렴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뜩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서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훑는다



그 자리 그대로인데

풍경은 왜 놀란 듯 달아나고 있는지



벚꽃은 제가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은 또한 제 시절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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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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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안읽었다고 해서 억울할 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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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7-05-1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감사합니다 시원하게 패스^^

다락방 2017-05-16 13:54   좋아요 0 | URL
네 패스하시고 다른 책 읽으세요! ㅎㅎ

유부만두 2017-05-16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 그 시간이 아깝고 그러나요?

다락방 2017-05-16 17:40   좋아요 1 | URL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고 팔랑팔랑 넘어가서 시간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닌데요, 그 시간에 다른 책 읽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은 듭니다. 이게 뭐냐...싶거든요. 아하하하하 ;;

그렇게혜윰 2017-05-16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레강스하면서 샤프하며 함축적이며 구체적인 이 한줄 리뷰!!!♥ㅋㅋㅋㅋ

다락방 2017-05-16 18:0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무척 감사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17-05-16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안 읽으면 억울한 작품 많이 추천해 주세요~^^

다락방 2017-05-17 09:4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앞으로 열심히 그러하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슬비 2017-05-16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만들어진다고 하니 영화만 봐도 될것같긴했어요.^^

다락방 2017-05-17 09:4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영화 만들어지면 볼까.. 생각중이긴 한데, 아 중간중간 너무 짜증나더라고요. 굳이 영화까지 봐야되나 이런 생각도 동시에 들어요 ㅎㅎ

라네쥬 2017-05-30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개하는 카드뉴스가 너무 흥미로워서 볼까 했는데 예전에 앞에 잠깐 봤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안 나가서... 안 보고 있습니다. 솔직한 평 감사합니다. 안 봐도 될 거 같아요! ㅋㅋㅋ

다락방 2017-05-30 16:54   좋아요 0 | URL
네 안봐도 됩니다. 다른 재미있는 책 보세요! ㅎㅎ
 
[eBook] 오후의 아내
유정선 지음 / 벨아모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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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되는 말들. 기가 막힐 정도로 말이 안된다. 이 책에서 세상은 똥이여....
재미있고 에로틱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건가. 내가 쓰는 게 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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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 2017-05-1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써주세요 꼭

다락방 2017-05-15 11:08   좋아요 0 | URL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oonnight 2017-05-15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쓰시면 재미와 수준을 모두 보장하리라 믿습니다. 써주세요!^^

다락방 2017-05-15 12:15   좋아요 0 | URL
아아. 한 번 써봐야 할까요..... (고민고민)

레와 2017-05-15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시도(여러가지면에서)를 해볼수 있지 않을까요? ㅎㅎ

써줘요. 다락방!!

다락방 2017-05-15 15:03   좋아요 0 | URL
다양한 시도...음...그렇군요...음....좋은 아이디어야...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혜윰 2017-05-16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리뷰는 서민적이며 해학적이고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동시에 미래지향적(다락방표 에로스 기대)이네요 ㅋㅋㅋㅋ 나 오늘 이런 식으로만 댓글 쓸 건가봐요 ㅎㅎ

다락방 2017-05-16 18:5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참신한 댓글 스타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 이다혜 기자의 페미니즘적 책 읽기
이다혜 지음 / 현암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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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디 웨스트'는 자신의 책,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에서 '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나 역시 이문장에 동의하는 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를 '사랑'했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깨달았다. 그것을 미워한다고 표현하진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혹독하게 깨달았달까.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라 생각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최대한 수용범위를 넓혀 상대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 스스로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생각하고, 그래서 여태 많은 사람들-특히 '남자'란 성별을 가진 사람들'-을, '어?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랑해왔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내게는 '건드려서는 안될' 부분, '허락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겨버렸고, 그걸 건드린 사람에 대해서라면 아쉽게도 등을 돌리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사람인데, 하고 수시로 상대를 그리워하지만, 그러나 '그는 내게 그렇게 말해서는 안되는 거였어' 하며, 상황을 떠올리고 다시 고개를 젓는다. 그러니 린디 웨스트의 말처럼,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일 것이다.



이 과정을 이다혜 기자 역시 거쳤던 것 같고,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다혜 기자와 내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든 것을 깨닫고, 또 우리의 연배가 비슷하며, 우리가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고 그동안의 자신의 말과 행동을 뼈저리게 반성한다는 것 역시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페미니짐은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나를 미워한다는 걸 깨닫는 과정임과 동시에, 내가 얼마나 과거에 무지했는지, 또 지금도 여전히 어느 면에서 부족한지를 자꾸 들여다보려 노력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잘못된 말과 행동들을 했었는지 돌아보며 가슴 아파하는 그 과정을, 이다혜 기자 역시 겪어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알고난 뒤에는 알기 전과 같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몰랐던 때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내가 보는 세상, 즉 내가 보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개그 프로그램,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책까지, 내 모든 시선은 그전과 같을 수가 없다. 이다혜 기자 역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니만큼, 어떤 책에서 무엇이 불편했는지, 자신이 그동안 사랑해온 책들이 어떤 시선을 가졌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이 읽는 책들이 어떤지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다혜 기자의 페미니즘적 책읽기를 함께 하고 싶으며 또 깊이 응원하게 된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내가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 좋다고 생각했던 책들을 지금 '다시' 읽게 되면, 그렇다면 어떤 다른 감상을 갖게 될까. 하나의 책이 읽을 때마다 다른 감상을 준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페미니즘을 알기 전과 후에 그 감상은 결을 달리하지 않나. 나는 그래서 예전에 읽었던 좋았던 책을 다시 만났을 때 크게 실망하거나 화가 나진 않을까 걱정되어 다시 펼쳐보지 말자, 고 생각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존 쿳시의 추락을 읽으면 나는 이제 어떤걸 느끼게 될까?). 물론, 그 다른 감상이 기대되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고(어슐리 르귄의 책이 그렇다).


이다혜 기자의 이 책을 읽어보니 나와 비슷한 후회, 나와 비슷한 깨달음, 나와 비슷한 슬픔을 겪어왔는데, 그렇다면 아마도 나와 비슷한 걱정을 가지고 있진 않을까. 계기는 모두 달랐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에 페미니스트를 선언하며 페미니즘 속으로 들어간 많은 사람들이 이다혜 기자의 이 책을 읽으면 모두들 저마다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 우리가 그간 생각하고 느낀 것을 정리해준 책이라 보면 이 책에 대한 적합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는 참으로 딱 맞는 제목이라 하겠다. 그러나,



내용과 별개로 책 한 권을 두고 적잖이 실망하기도 했다. 일단 사이즈가 너무 작다. 내가 생각한 노멀한 책의 사이즈보다 작고, 책을 넘겨보면 행간도 넓고 글자도 크다. 그래서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가 적다. 빠른 시간 내에 후딱 읽힌다. 후딱 읽히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아니, 이 정도 분량으로 내다니 좀 너무하잖아?? 하는 기분이 되어버리는 거다. 이정도 분량으로 내기 보다는, 이 정도 분량에 곱하기 3은 해서 책 한권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그런 기분. 그 점이 실망스러워서 별은 3.5로 주고 싶은데, 아아, 알라딘에는 별점 반 개가 표시 되지 않으므로, 후하게 넷을 주기로 한다.


사이즈를 비교하고 있는 책은 마침 내 책상 위에 놓여있던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 이다.







마지막으로, '가스라이팅'의 유래를 알게 된 건 이 책을 읽고난 후의 가장 큰 수확이다.




조지 큐커 감독이 연출한 <가스등>(1944)의 주인공 폴라(잉그리드 버그먼)는 유명한 성악가의 조카로, 그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녀다. 그레고리(샤를 부아예)는 폴라의 유산을 노리고 접근한 뒤 집에 숨겨진 보석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레고리가 다락방을 뒤지기 위해 불을 켜면 그 때문에 폴라의 방에 있는 가스등 불빛이 흐릿해진다. 폴라가 그레고리에게 이유 없이 흐릿해지는 가스등에 대해 말을 꺼내면, 그레고리는 그녀가 미쳤기 때문에 환각을 본다고 말한다. 남편에게서 히스테리와 신경쇠약을 지속적으로 지적받은 폴라는 실제로도 무기력증에 빠진다.

로빈 스턴은 『가스등 이펙트』라는 책에서 이런 심리를 분석한 적 있는데, '가스라이팅' 혹은 '가스등 이펙트'는 상대를 심리적으로 조종하는 가해자와의 관계를 다룬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인정받고자 하는 소방이 잘못된 상대를 만나 빚는 비극으로, 일과 관련해서는 지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조차 자신을 하찮게 취급하는 배우자나 애인, 직장 상사나 부모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영화 <가스등>에 비유해 설명한다. 나의 의견을 기분으로 받아들이는 상대와 대화하기란 쉽지 않다. 큰 그림을 보지 그래? 생리 중이야? 왜 그렇게 예민해? 남들은 괜찮다는데. 대화를 꺼냈다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대화를 접어본 적 있다면,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의 두려움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책은 그런 상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성적인 비판을 가장한, 반복적이고 집요한 공격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지 않도록 조심하라. 만난 뒤 집에 돌아오면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비판하는 시간을 길게 갖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기분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 당신의 판단을 오랫동안 불신하지 않았는지.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당신이 끌려 다녀온 건 아닌지.

가스라이팅의 가장 대단한 부분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보통 상황 조작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분명히 어두워지는 가스등을 정신적인 불안정 때문이라고 몰아가는 식이다. (p.256-258)



덧붙이자면, '분명히 어두워지는 가스등을 정신적인 불안정 때문이라고 몰아가는 식'이라는 문장을 읽노라니,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영원히 사랑해》가 생각난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같은, 세상 달콤한 책을 쓴 작가가, 글쎄, 《영원히 사랑해》같은 책도 썼다니깐?


또 덧붙이자면, 내 기분이 나쁘거나 내가 화가 나 있을 때 상대로부터 '생리중이야?' 라는 말을 듣는 것만큼 빡치는 게 없다. 내 기분을 '생리중이기 때문'이라고 탓해버리면, 내 화는 불필요하며 부조리하며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나야할 상황이라서, 기분이 나쁜 상황에 맞닥뜨려서 기분이 나쁜 거다.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지금 생리중이라 예민해졌나' 돌아볼 순 있지만, 자기에게 화냈다고 섣부르게 '생리중이야?' 라고 묻는 건, 무조건 참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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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7-05-22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받아보고 가격에 깜놀. 가성비랄까.. 너무한듯.

다락방 2017-05-22 11:04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좀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