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 이다혜 기자의 페미니즘적 책 읽기
이다혜 지음 / 현암사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린디 웨스트'는 자신의 책,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에서 '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나 역시 이문장에 동의하는 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를 '사랑'했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깨달았다. 그것을 미워한다고 표현하진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혹독하게 깨달았달까.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라 생각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최대한 수용범위를 넓혀 상대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 스스로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생각하고, 그래서 여태 많은 사람들-특히 '남자'란 성별을 가진 사람들'-을, '어?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랑해왔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내게는 '건드려서는 안될' 부분, '허락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겨버렸고, 그걸 건드린 사람에 대해서라면 아쉽게도 등을 돌리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사람인데, 하고 수시로 상대를 그리워하지만, 그러나 '그는 내게 그렇게 말해서는 안되는 거였어' 하며, 상황을 떠올리고 다시 고개를 젓는다. 그러니 린디 웨스트의 말처럼,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일 것이다.



이 과정을 이다혜 기자 역시 거쳤던 것 같고,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다혜 기자와 내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든 것을 깨닫고, 또 우리의 연배가 비슷하며, 우리가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고 그동안의 자신의 말과 행동을 뼈저리게 반성한다는 것 역시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페미니짐은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나를 미워한다는 걸 깨닫는 과정임과 동시에, 내가 얼마나 과거에 무지했는지, 또 지금도 여전히 어느 면에서 부족한지를 자꾸 들여다보려 노력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잘못된 말과 행동들을 했었는지 돌아보며 가슴 아파하는 그 과정을, 이다혜 기자 역시 겪어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알고난 뒤에는 알기 전과 같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몰랐던 때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내가 보는 세상, 즉 내가 보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개그 프로그램,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책까지, 내 모든 시선은 그전과 같을 수가 없다. 이다혜 기자 역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니만큼, 어떤 책에서 무엇이 불편했는지, 자신이 그동안 사랑해온 책들이 어떤 시선을 가졌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이 읽는 책들이 어떤지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다혜 기자의 페미니즘적 책읽기를 함께 하고 싶으며 또 깊이 응원하게 된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내가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 좋다고 생각했던 책들을 지금 '다시' 읽게 되면, 그렇다면 어떤 다른 감상을 갖게 될까. 하나의 책이 읽을 때마다 다른 감상을 준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페미니즘을 알기 전과 후에 그 감상은 결을 달리하지 않나. 나는 그래서 예전에 읽었던 좋았던 책을 다시 만났을 때 크게 실망하거나 화가 나진 않을까 걱정되어 다시 펼쳐보지 말자, 고 생각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존 쿳시의 추락을 읽으면 나는 이제 어떤걸 느끼게 될까?). 물론, 그 다른 감상이 기대되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고(어슐리 르귄의 책이 그렇다).


이다혜 기자의 이 책을 읽어보니 나와 비슷한 후회, 나와 비슷한 깨달음, 나와 비슷한 슬픔을 겪어왔는데, 그렇다면 아마도 나와 비슷한 걱정을 가지고 있진 않을까. 계기는 모두 달랐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에 페미니스트를 선언하며 페미니즘 속으로 들어간 많은 사람들이 이다혜 기자의 이 책을 읽으면 모두들 저마다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 우리가 그간 생각하고 느낀 것을 정리해준 책이라 보면 이 책에 대한 적합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는 참으로 딱 맞는 제목이라 하겠다. 그러나,



내용과 별개로 책 한 권을 두고 적잖이 실망하기도 했다. 일단 사이즈가 너무 작다. 내가 생각한 노멀한 책의 사이즈보다 작고, 책을 넘겨보면 행간도 넓고 글자도 크다. 그래서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가 적다. 빠른 시간 내에 후딱 읽힌다. 후딱 읽히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아니, 이 정도 분량으로 내다니 좀 너무하잖아?? 하는 기분이 되어버리는 거다. 이정도 분량으로 내기 보다는, 이 정도 분량에 곱하기 3은 해서 책 한권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그런 기분. 그 점이 실망스러워서 별은 3.5로 주고 싶은데, 아아, 알라딘에는 별점 반 개가 표시 되지 않으므로, 후하게 넷을 주기로 한다.


사이즈를 비교하고 있는 책은 마침 내 책상 위에 놓여있던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 이다.







마지막으로, '가스라이팅'의 유래를 알게 된 건 이 책을 읽고난 후의 가장 큰 수확이다.




조지 큐커 감독이 연출한 <가스등>(1944)의 주인공 폴라(잉그리드 버그먼)는 유명한 성악가의 조카로, 그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녀다. 그레고리(샤를 부아예)는 폴라의 유산을 노리고 접근한 뒤 집에 숨겨진 보석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레고리가 다락방을 뒤지기 위해 불을 켜면 그 때문에 폴라의 방에 있는 가스등 불빛이 흐릿해진다. 폴라가 그레고리에게 이유 없이 흐릿해지는 가스등에 대해 말을 꺼내면, 그레고리는 그녀가 미쳤기 때문에 환각을 본다고 말한다. 남편에게서 히스테리와 신경쇠약을 지속적으로 지적받은 폴라는 실제로도 무기력증에 빠진다.

로빈 스턴은 『가스등 이펙트』라는 책에서 이런 심리를 분석한 적 있는데, '가스라이팅' 혹은 '가스등 이펙트'는 상대를 심리적으로 조종하는 가해자와의 관계를 다룬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인정받고자 하는 소방이 잘못된 상대를 만나 빚는 비극으로, 일과 관련해서는 지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조차 자신을 하찮게 취급하는 배우자나 애인, 직장 상사나 부모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영화 <가스등>에 비유해 설명한다. 나의 의견을 기분으로 받아들이는 상대와 대화하기란 쉽지 않다. 큰 그림을 보지 그래? 생리 중이야? 왜 그렇게 예민해? 남들은 괜찮다는데. 대화를 꺼냈다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대화를 접어본 적 있다면,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의 두려움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책은 그런 상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성적인 비판을 가장한, 반복적이고 집요한 공격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지 않도록 조심하라. 만난 뒤 집에 돌아오면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비판하는 시간을 길게 갖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기분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 당신의 판단을 오랫동안 불신하지 않았는지.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당신이 끌려 다녀온 건 아닌지.

가스라이팅의 가장 대단한 부분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보통 상황 조작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분명히 어두워지는 가스등을 정신적인 불안정 때문이라고 몰아가는 식이다. (p.256-258)



덧붙이자면, '분명히 어두워지는 가스등을 정신적인 불안정 때문이라고 몰아가는 식'이라는 문장을 읽노라니,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영원히 사랑해》가 생각난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같은, 세상 달콤한 책을 쓴 작가가, 글쎄, 《영원히 사랑해》같은 책도 썼다니깐?


또 덧붙이자면, 내 기분이 나쁘거나 내가 화가 나 있을 때 상대로부터 '생리중이야?' 라는 말을 듣는 것만큼 빡치는 게 없다. 내 기분을 '생리중이기 때문'이라고 탓해버리면, 내 화는 불필요하며 부조리하며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나야할 상황이라서, 기분이 나쁜 상황에 맞닥뜨려서 기분이 나쁜 거다.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지금 생리중이라 예민해졌나' 돌아볼 순 있지만, 자기에게 화냈다고 섣부르게 '생리중이야?' 라고 묻는 건, 무조건 참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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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7-05-22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받아보고 가격에 깜놀. 가성비랄까.. 너무한듯.

다락방 2017-05-22 11:04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좀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