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을 열면 창비시선 418
김현 지음 / 창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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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빛과 피가 섞인 칸타타를 작곡했노라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5

 

한 예술가가 형상을 창조하면 그는 그 자신의 생각을 억제하게 된다. 생각이란, 세계를 정서적으로 인지해 낸 형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예술적 형상이란 작가에게는 자신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공고물인 것이다. 생각이란 단명(短命)하지만 예술적 형상은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감수성이 있는 인간이 한 예술 작품에서 받는 인상과, 순수한 종교적 체험 사이의 유사성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인간의 정신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영화 예술의 미학과 시학

  

 

김현, 진이정, 타르코프스키, 마크 로스코, 반 고흐를 한데 모아 찍은 저 사진에서 당신은 어떤 공통점을 보는가. 이들이 그려내는 빛 속에 강렬하게 드러나는 종교성 때문에 나는 저 사진을 찍고 말았다. 김현 입술을 열면에는 영혼이란 단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하나님”, “”, “십자가”, “예배당”, “교회”, “성당”, “기도”, “정령”, “창조”, “사랑”, “천사”, “영원”, “진실의 종”, “운명”, “평화”, “축복”, “말씀”, “전지전능”, “은총등의 단어들이 계열어로 호위하고 있다. 진이정 시집이 아트만부터 신령”, “굿”, “업보”, “윤회등 그러한 계열어로 가득했듯이. 보고 있으면서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눈() 같은 의미의 폭설이다. 눈을 한 움큼 두 손에 담았다고 눈을 가졌다고 찾았다고 말할 수 없는 우리의(시인으로서도, 독자로서도) 궁지다.

 

눈이 와

그 사람은 꿈을 꾸었다

 

박사의 마음기계에

깨지기 쉽고 증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침묵하고

밤이면 질문하고

질문을 깨뜨려버리는 자를 기록했습니다

 

어둠이

박사가 지닌 숲을 뒤덮어

박사는 가슴을 열고

녹색 광선이 등장하는 흑백영화를 상영했습니다

 

무성 영화

 

인상파(印象派)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색채·색조·질감 자체에 관심을 둔 미술 사조이다. 추상표현주의 거장인 마크 로스코의 작품도 사물의 형태가 아니라 빛과 색이 더 중요하다. 정제된 시적 몽상으로 가득한 타르코프스키의 영상도 이야기와 빛이 인상깊게 엮어 있다. 김현은 언어로서만 가능한 효과를 꿈꾼다 


 

한 남자가 칼을 들어 얼굴을 찢자 한 남자의 얼굴이 갈라졌다. 한 남자는 떨어진 눈과 코와 입을 주워 캔버스 밖으로 고요히 사라졌다. 한 남자는 눈도 없이 코도 없이 입도 없이 칼을 버렸다. 한 남자는 이제 완전한 얼굴이었다. 한 남자는 눈이 두개 코가 두개 입이 두개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 남자는 이제 완전한 사실이었다.”(보는 자의 관점) 

 

이 시집에 나오는 -’, ‘-검은’, ‘생명-죽음’, ‘조선-박근혜는 “이곳은 아주 컴컴하고 희구나. 빛이 없구나. 어둠으로 환하구나.”(조선마음 6)처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내리는 눈()을 눈()없이 만끽할 수 없듯, 몽환 속을 걷던 잠에서 깨야 아침을 맞듯 그것들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시가 아닌 것에 시간이라는 제목을 붙”(죽음과 시간)이고, “시간이란 그토록 유용한 넘나듦임에도 우리는 민숭민숭하게 늙어버”(조선마음 8)리는 순간만을 겪기에 시인은 계속 이어 붙인다. 신 없는 예배당에서 기도하듯이 없는 조선과 옛 고궁도 시인에게는 이 현실의 예배당으로 작동한다. 진이정이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갔듯이 말이다. 시간을 돌려 읽으며 조선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말하게 되어 버리는 우리가 읽지 못하는 현상(시간, , 세계 등등)을 멈춰 가져오는 게 그의 시적 방법론 같다. 그렇기에 그의 인용과 차용과 각주가 넘치는 캠프적 작법이 처음엔 불편했지만 끝에 가서는 이해가 됐다. 그리고 단순히 방법론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타르코프스키의 걸작 중 하나인 희생의 주인공 알렉산더가 누구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하고 광인이 되어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계시를 받았듯이 김현 시인도 기꺼이 그러하리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술가로서 나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 광기는 누구도 볼 수 없고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시인의 말) )

 

예술에 있어서는 개성이 진실임을 판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좀더 보편적이고 좀더 높은 이념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예술가란 자기 자신에게 마치 기적과 같이 부여된 재능에 대해 소위 관세를 물어야만 하는 하인이다. 진정한 개성이란 오로지 희생을 통해 얻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영화 예술의 미학과 시학

 

희생의 시 쓰기를 하는 시인은 빛은 사실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나는 그것이 최초도 최후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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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2-11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칼로 얼굴을 찢는다‘는 문장을 읽으니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눈동자를 칼로 가르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AgalmA 2018-02-12 23:11   좋아요 1 | URL
전체 시를 보면 회화 사조(입체파, 초현실주의 등등)들을 풀어 쓴 거 같은데 이 시집에 영화도 많이 삽입되어 있기도 해서 그런 상상이 되실 만도 하죠. 자세한 내막은 시인만 알겠죠^^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지음, 김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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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6년이 지나 심리 상담사를 찾았을 때에야 커스틴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돌연한 가출로 인한) 회피 애착, 라비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유년기에 잃은 어머니로 인한) 불안정 애착에 평생 얽매여왔고 그 때문에 자신과 상대를 괴롭게 했음을 인정한다. 소설은 그것을 낳게 된 더 큰 배경의 문제점도 계속 거론한다. “사랑은 조사를 거부하는 본능이자 감정이라는 개념에 취해버린 세계”, “결혼생활을 감정(애정, 욕구, 열정, 갈망 등)에 대한 축성(祝聖)”이자 완성처럼 포장한 세계, 금전을 따지기보다 영혼의 짝을 만났다는 믿음을 추구하고 연인은 완벽하게 우리를 사랑할 것이라는 환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낸 낭만주의 사상의 영향은 이들 부부뿐 아니라 부모 세대에도 작용했고, 그들의 자녀 세대에도 여전히 큰 장애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에게도.

소설은 커스틴과 라비가 사랑에 빠지고 결혼 생활에서 온갖 환상의 무너짐을 겪으며 아이를 키우고 불면의 밤을 보내며 자신의 꿈을 잃어가면서(“그래, 실패란 이런 것이다. 주요 특징이라면 침묵이다. 전화기는 울리지 않고, 불러내는 사람도 없고, 새로운 일도 없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줄곧 실패를 엄청난 재난 같은 모습으로 상상해왔으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실패는 사실 겁먹은 무위를 통해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자연은 우리에게 성공을 향한 집요한 꿈을 심어놓았다. 인류에게 그런 분발심이 내장된 데에는 분명 진화상의 이점이 있었지만) 외도에도 빠지는 많은 과정과 심리들을 냉소하지 않으면서(“냉소는 너무 쉽고, 그래서 얻는 것이 없다”) 주목하며 그리고 있다. 어쩌면 낭만주의의 발전된 형태일 수도 있을 작가의 이런 휴머니즘 자세가 쉽게 깎아내릴 건 아니다. 온갖 막장과 외설이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양, 인간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괴물처럼 그려내는 요즘 소설의 지나친 과잉과 광기가 진실(“진실이 거짓보다 그들의 관계를 훨씬 더 왜곡할 수 있다”)을 드러내는 탁월한 기술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연인/배우자가 우리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이라고 의도적으로 착각한다. 사실상 결혼은 인간 본성, 인간의 약점과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고된 길이다. “우리 눈에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사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고,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기란 감정의 존재 법칙을 우회할 방법을 찾았다고 믿는 일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고통을 흔쾌히 견딜지 결정하는 일이다. 완벽한 삶을 꿈꾸는 일이 아니라 그러한 추구의 욕망을 덜어내는 일이고,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는 최고 수료 단계이다. 또한 우리가 만들어가려는 삶의 속성에서 파생된 결혼이란 제도의 문제점을 봐야지 각 개인의 문제(“모든 게 네 탓”)로만 보는 것도 옳지 않다. 외도와 배신 문제는 여전히 낭만적 성채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은데 사랑과 섹스(욕망)를 동일시하고 도덕적 잣대로만 평가하는 태도는 깊이 논의되어야 할 문제다. 이 모든 고민의 시점을 지나는 결혼 16년 차에 라비는 이제야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미래의 불확실성도 깊이 깨닫고 있다.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그는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 부를 권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단지 잠깐 동안 만족을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

그는 이제 거의 어떤 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처럼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 깊었던 것은 그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인간과 사회, 사랑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아기보다는 일반 가전제품이 더 상세한 취급 설명서와 함께 온다. 인간 사회에는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 인생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해줄 게 결국 그리 많지 않다는 측은한 믿음이 존속한다. 

아이들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사랑이란 말은 갈수록 부정적 의미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개인주의와 자기 충족에 빠진 문화는 만족과 타인의 부름에 응하는 행동을 쉽게 등치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매혹하고 위로해주는 능력에 대한 보답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아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더 자란 아이들이 가끔 큰 불안을 느끼며 판단을 내리듯이, 아이들은 아무 요점이 없고, 이것이 아이들의 요점이다. 아이들은 그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 때문에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장점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약점에 대한 동정, 즉 인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고 한때 나 자신의 것이었고 결국 나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그 취약성을 동정하는 사랑으로 인도된다. 자율과 독립성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와중에 이 무기력한 피조물은 아무도 결국은 자력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인생은문자 그대로사랑하는 능력에 의지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이 소설을 읽으면 자신을 대입해보게 될 것이다. 내 결핍들, 부모가 결혼생활에서 겪었을 어려움들, 부모와 내가 같이 머물 수 없는 평행선들, 내가 만난 모두가 가졌을 문제들, 서로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대립했던 각종 사건들…….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이 인류 삶의 가장 근본적인 끈이라는 것을 말하며, 그 노력을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평범한 말이지만 사람 삶이 그 평범 속에 있는 것과 같이. 낭만적 연애 이후는 더 많은 일상이 채우는 것과 같이.
 

부모의 다정함만으로 충분하다면 인류는 활기를 잃고 머지않아 사멸할 것이다. 인류의 생존은 마침내 넌더리를 내고 사랑과 흥분을 선사할 더 만족스러운 원천을 찾겠다는 희망을 품은 채 세상으로 나아갈 아이들에게 달려 있다.”

이 세상에 항상 나쁘기만 한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스스로도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적절한 대응은 냉소나 공격이 아니라, 드문 순간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사랑해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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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4 0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1-24 16:05   좋아요 1 | URL
저도 알랭 드 보통 견해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ㅎ; 하지만 생각해 볼 지점을 건드려주는 지성이 돋보이지요^^ 세상의 복잡하고 많은 부분을 비정상과 정상으로 가르고 보는 건 문제가 있긴 해요.

겨울호랑이 2018-01-24 09: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쪽 format이 조금 더 좋네요^^!ㅋ

AgalmA 2018-01-24 15:39   좋아요 2 | URL
기혼자라 더 그러신 건 아니고요ㅎㅎ? 이 책 덕에 제가 잘 모르는 관계나 감정들을 많이 알게 되었지요^^

겨울호랑이 2018-01-24 17:14   좋아요 1 | URL
^^: AgalmA님의 말씀처럼 제게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네요. 리뷰만으로도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니 이쪽 format이 좋아요 ㅋㅋ

2018-01-26 1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6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6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1-26 22:45   좋아요 0 | URL
강! ㅎㅎ 잘못 말했네요. 강원도 갈 때 길게 이어지던데^^.
여름철에 안개 피어 오르고 해서 좋더라고요. 땅이 넓으니 거기 사는 사람의 감흥도 천차만별이겠지요^^
전 이제부터 피자 먹을거임~케헤헤

2018-01-28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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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가치라는 단어는 붙어 다닌다. 불행과 무가치가 몰려다니는 것처럼. 행복과 가치의 선후관계를 생각해보면 가치를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기쁘고 행복하다. 가치 중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느낄 때가 가장 강렬할 것이다. 꿈을 이루고 상을 받을 때 기쁜 이유이다. 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7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과 타인 즉 인간의 가치 없음에 대해 고통스러움과 환멸을 호소하고 있었다.

 

수상작 황정은 <웃는 남자>d와 여소녀가 주인공이다. 가정에서부터 길에서 차가운 주검이 되기까지 ddd 외에 그 존재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dd의 죽음 이후 사물의 온도와 세상의 소음에 온통 불쾌감과 냉소를 보내던 d는 택배 기사로 다닐 뿐인 자신을 알아본 세운상가 음향기기 수리사 여소녀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듣고 보기 시작한다. 이 두 사람은 닮았다기보다 인간의 보편적 평등을 보여주는 쌍 같다. 평생 고장 난 기계 속을 들여다보던 여소녀는 무너져가는 시대의 건물 속에서 지옥과 같은 적막을 경험하고 있다. 평생의 가치라고 할 연인을 잃은 d는 자신처럼 가족을 상실했지만 시대의 혁명으로 싸워가는 사람들 함성 속에서도 죽음 같은 환멸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버려지기 직전의 빈티지 음향기기에서 어떤 것과도 다른 소리를 살려내는 여소녀를 통해 d는 지금까지와 다른 소릴 알게 되었고 진공관에서 예상치 못한 사물의 온도를 느낀다. 작가는 여기서 끝을 냈는데 그 온도, 소리, 관계, 가치의 이후는 우리의 몫이라는 뜻일까.

 

김숨 <이혼>은 제목 그대로 서로에게 가치가 되지 못한 이들의 파국이다. 작가는 단순히 부부 관계의 단절, 헤어짐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이혼을 하지 않는 엄마에게 나도 더는 엄마를 도울 수 없다고 후회할 말을 하고 민정은 독립해 떠났다. 그녀는 아버지로 인해 세상에 닫힌 문을 갖게 되었다(“한때 그녀는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폭력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 같은 망상에 시달렸다. 세상 모든 폭력의 근원이 아버지 같았다. 심지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탄 테러도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만 같았다”). 아내 민정의 병과 마음에는 무심했으면서 사회 약자들을 가까이하며 사진 작업을 했던 철식은 그동안 쫓아다녔던 비정규직 노동자 강인구와도 민정과도 어떤 소통도 하지 못한 결과를 맞닥뜨리게 됐다. 관계가 쉽사리 끊어지지 못하는 예도 작가는 안배했다. 스스로 이혼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지경까지 상대에게 깊이 예속되고 만 민정의 어머니, 이혼 후에도 결혼 생활에서의 의문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영미 선배,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맺어진 인연에 혼신의 힘을 다한 다리 없는 여자 같은 이들은 우리에게 텁텁한 뒷맛을 남긴다. 가치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상대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걸 보여주는데, 무시 못 할 강력함이다.

 

김언수 <존엄의 탄생>은 떠돌이 개에게조차 무시를 당하는 것에 분개한 진수라는 인물의 비루한 일상을 담았고, 윤고은 <평범해진 처제>는 자신과 타인의 가치를 가장 깊이 알게 되는 사건인 첫사랑과 재회한 주인공이 자신이 그런 가치의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에피소드다. 그녀가 쓰려던 소설 천재평범해진 천재에서 평범해진 처제로 변형되어 완성되듯이. 윤성희 <여름방학>은 집안의 돌림자 때문에 이병자라는 촌스러운 이름으로 오십 넘는 생을 산 주인공이 그 이름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듯 세상에도 적당히 맞춰서 산 삶을 이야기한다. 새 삶과 새 이름을 가지는 것을 여름방학으로 표현하는 주인공과 작가에게 왜 하필 방학이냐고, 방학은 금방 끝나고 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려다가 삶의 환희가 그런 것이라 결국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기호 <최미진은 어디에>는 자신의 소설이 평가 절하되어 중고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것에 모욕을 느낀 작가가 판매자와 직거래로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판매자의 내막을 알게 된 작가는 모욕을 당할까 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서글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짧고 재밌는 메타 소설인데 박형서 작가를 재밌게 이용(?)해서 더 재밌었다.

 

편혜영 소설은 늘 서늘함이 떠도는데 <개의 밤>도 역시 그러했다. 김은 처가의 도움으로 고급 전원주택을 얻게 됐고 장인의 도움으로 현장 사고 처리 일을 맡게 됐다. 그 가족에 융화될 수 없었고, 부대 폭행의 악질 가해자인 처남 문제에서 그들의 옹호에도 동조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가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다. 사고를 당한 직원 장의 집에 합의를 요구하러 동료 안과 찾아간 김은 안에게 불가피한 처리를 교묘하게 떠넘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노인을 내동댕이쳐야만 빠져나올 수 있는 역할을. 그리고 처남 일의 탄원서를 내민다. 그가 처남의 탄원서 서명을 받아야 되는 수치와 굴욕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연대를 만드는 이 과정은 익히 보아온 일이지만 잔상으로 오래 남는다. 그가 살던 전원주택 단지 내에 노부부 살인 사건이 있었는데도 개가 짖지 않았던 것처럼 이 세상의 많은 밤과 불의에도 그런 파수견이 없다는 메시지가 잘 전달되었다. 자기뿐만 아니라 모두를 죄인으로 만드는 세상에 대해.

 

김은 감은 눈을 떴다. 아내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나님은 아무도 벌하시지 않는다고, 우리를 벌하는 건 우리 자신일 뿐이라고,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는 대신 아내와 잡은 손에 힘을 주었고 그럼으로써 아내가 정작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에는 침묵하고 잘못을 추상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처남의 죄를 하찮게 만들어버린 것을 모르는 척했다. 아내에 따르면 모두의 인생에 죄가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도 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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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1-24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소설의 리뷰는 이렇게 쓰는 것이군요. 좋은 format을 알고 갑니다.. 참, 더 좋은 내용도 배워가네요.^^!

AgalmA 2018-01-24 15:40   좋아요 1 | URL
많고 많은 리뷰 중 하나일 뿐이죠^^; 겨울호랑이님 뷔페 글만큼 영양가가 풍부했으면 좋겠다는 게 희망사항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1-24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가치 없음. 불행의 지속성,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안개의 풍경 ... 요즘 소설의 화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명랑하던 김애란도 우울한 풍경을 이야기하고는 했으니... 아마도 용산사태와 세월호가 작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됩니다..

AgalmA 2018-01-24 16:54   좋아요 0 | URL
네, 황정은 <웃는 남자>에도 세월호 당시의 광화문 풍경이 가득 펼쳐지죠.
작가는 시대를 넘어 보기도 하지만 시대의 카나리아라고도 생각해요.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인간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겠죠. 최근 한국문학 보면 너무 위축되어 있는 거 같아 안타까운데 좀 더 힘을 내주길 바랍니다.
 
악스트 Axt 2018.1.2 - no.016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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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은 이것이다.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러웠다.   

당시 김종삼에게 있어서 시란 릴케가 말한, 언어의 도끼가 들어가본 적이 없는 깊은 숲속에 숨쉬고 있는 순수한 어떤 것이다.”(故 최하림, <김종삼이 있는 풍경 2>)

이 말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이승우 <귓속말을 하는 황제와 사신-카프카의 황제의 전갈읽으며> 나오는 대목이자 Axt의 정신을 상징하는 다음 말과 괘를 이룬다.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단 말인가.……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ㅡ 프란츠 카프카

같은 말인 듯하면서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김종삼은 불가능한 접근에, 카프카는 가능한 접근에 더 방점을 찍는 걸로 나는 해석한다. 김종삼과 카프카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들의 작품은 언어의 도끼로 내려친 단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도끼로 내려쳤는데 그 중심은 이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다음 리뷰와도 연결해 볼 수 있겠다. 노태복 필자가 주기율표와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1학년 봄, 화학 수업에서 원자 보셨어요?”라는 질문으로 교사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리뷰까지 쓰게 된 딜레마를 말이다. 필자는 프리모 레비에 빙의해 이야기한다. 정신은 하나여야 한다고 말하고 하나일 수 없는 불순물을 제거하려는 시기에 물질의 세계와 인간의 삶이 만나는 접촉 지점을 프리모 레비는 원자를 통해 이야기한 거라고. 

다른 원소들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어떤 하나의 절대적으로 순수한 물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순물인 그런 물질들이 다양성의 터전에서 평등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파시즘에 짓이겨졌던 내 영혼은 원소들의 목록, 주기율표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노태복 <어떤 질문과 대화와 배웅>(프리모 레비 주기율표리뷰)

잠깐, 원자는 또 나뉜다. 원자 중심부에는 원자핵이 있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 분류는 쿼크 6, 렙톤 6개로 구분된다. 여기에 중력을 제외한 세 종류의 힘을 매개하는 매개입자들(게이지 보손)도 같이 따라다닌다. 게이지 보손은 QED(양자전기역학)의 광자, 약력의 W+, W, Z0(중성 흐름), 쿼크와 쿼크 사이에 작용하는 힘인 강력의 글루온을 칭한다. 쿼크는 세 가지 색도 있고 모든 입자는 각각에 대응하는 반입자 파트너도 갖고 있다(리언 레더먼, 딕 테레시 신의 입자참고). 결국 도끼는 여전히 무언가를 깨고 있는 중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각자 방법을 찾는 중이고 어떤 결과란 각자가 보는 단편일 수 있다. 더 깊이 깨고 들어가는 것에 대해 이인성 작가는 말한다.

 

감각의 한 모퉁이가 무너짐을 느낀다, 나는. 일어선 바람이 풍경을 흐린다. 급격한 침몰, 내 저항은 쉽사리 무너진다. 무슨 까닭일까, 나는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며 여울지는 그 느낌의 뒤 끝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 찰나적인 풍경, 그것은 어딘가 다른 곳임에 틀림없다. 나는 무언가 다른 것을 감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믿을 수 없는 저 너머를 드러냈던 풍경은 단순한 하나의 물리적인 대상으로 환원되어 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낯선 시간 속으로(문학과지성사, 1983, p182)

 

 

이인성 작가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당신 아버지의 생각대로 진화되어가는가?”란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이인성 : “뭔가 조금씩 달라져가는 측면이 분명히 있는데, 그게 발전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단순 반복도 아닌 것 같다. 이건 베케트 희곡에 관한 논문을 쓸 때 떠오른 건데, 그게 반복이라도 평면적인 원형의 반복은 아닌 듯하다. 가령 나사를 생각해보자. 위에서 내려다보면 빙글빙글 원처럼 돌아가는데, 옆에서 보면 깊이가 있잖은가. 나사를 돌면서 아래로 파고들어간다. 어딘가 더 깊은 곳을 향해서. 그 깊은 곳이 어딘지는, 역시 잘 모르겠다. 이상향일까? 종말일까? 지독한 허무주의자였던 베케트는 그것을 종말이라고 본 게 분명하다(중략).” (cover story 이인성+백가흠 <진정으로 있지 않은 있음과 없음>)

 

내가 쓰고 있는 이 리뷰도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지점에 있는 글들을 모은 하나의 앵글이다. 첫 번째 사진과 마지막 사진이 결정적으로 다른 연속 촬영한 사진들이랄까. 하지만 그 이미지들을 포개면 한 몸을 이룬다.
이번 호는 미국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끝나는 구성이다

  
손정수 필자는 이민자들의 나라에서도 더 이민자들의 공간인 뉴욕 브루클린을 소설의 주 무대로 하는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2017)미국 콤플렉스로부터 우아하게 벗어나고 있는 옥시덴탈리즘(오리엔탈리즘의 반대 개념)’을 활용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라고 말한다.
조용호 필자는 소설의 배경지에서 생업에 종사한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는 양헌석 아메리카 홀리(2016)가 미국 한인 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부조리를 말함과 동시에 아메리카를 넘어 거대한 정신병동 같은 작금의 세상을 굽어보는 소설이라고 한다.
이권우 필자는 천승세 황구의 비명-황구의 비명(2007)이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기지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미국이 분단의 원인임에도 전쟁에서 체제를 지켜주었기에 오랫동안 스톡홀름증후군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는 한국 상황을 개탄하는 오늘날의 관점에도 들어맞는 작품이라고 한다.
한설 필자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욕망의 비만 상태에 빠져 있는 김사과 더 나쁜 쪽으로(2017)에서 우리 사고방식에 스며든 미국을 읽었다. 필자는 과학 저술가 게리 토브스 연구를 인용하며 비만율이 가장 높았던 미국의 원인이 기름진 음식이나 비디오게임 같은 생활양식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산술적으로 취급하는 미국적 사고방식에서도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김성중 필자는 미국 유학이라는 허풍선을 남발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손창섭 잉여인간-잉여인간(2005)60년 전 소설이라고 해도 냉담한 관찰을 통해 얻은 인식을 아무 데도 꿰지 못하는 무기력함”, “통속으로도 허위로도 가지 못하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젊은이모습에서 지금을 읽었다. 손창섭, 김승옥, 장용학 등 당대 빼어났던 작가들이 일본어의 번역투로 쓰였다는 점, 그리고 아메리칸드림을 담았던 것들에서 역사와 욕망과 세대와 삶이 침윤되고 범벅이 되는 한국소설 또한 미해결의 장이 아닌가말한다.
함성호 필자는 남정현 남정현 대표 소설선집(2004)에서 북한 노동당 기관지 조국통일 전재돼 용공 탄압 제1호였던 분지(糞池)에 집중한다.

반일민족주의는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얻지만, 북에 우호적이거나 반미민족주의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민족에 대해 가지는 소속감에서 나오는 애착심이 대상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면 필시 이런 세상은 뭔가 이상한 세상임에 틀림없다. (당시 남정현 씨와 변호인단은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승복이 아니라 체념으로 상고를 포기했다. 당시 변호인이었던 한승헌은 나중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필화는 있어도 불행하고, 없어도 불행하다. 필화가 있다는 것은 규제자의 억압과 작가의 수난을 생각할 때 불행한 일이고, 필화가 없다는 것은 작가의 무력이나 문학 부재의 반사적 평온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역시 불행하다.”

 

 

미국과 연루된 우리 모두의 노스탤지어에 대해 잘 보여준 글이라고 생각된 것은 이번 호의 마지막 기고 글이기도 했던 김보경 필자가 쓴 콜럼 토빈 브루클린(2016) 리뷰였다.

 

홀로 타지로 이주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멀쩡하게 돌아다녀도 유령이 된 듯한 기분. 방에 들어오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영 깨지 않을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이곳이 딱히 나에게만 배타적인 것도 아닌데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기분. 성인이 되어 집으로부터 독립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고립감을 매우 고통스럽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또 새로운 삶이 주는 즐거움이 생겨난다. 갈등도 있고 어려움도 있지만, 내가 꾸려가는 인생이라는 게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고향에 돌아갔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그곳을 떠나온 데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 다양한 아메리칸들이 함께 만들어낸 관용의 정신이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꿈의 땅으로 만들었다. 김진웅이 쓴 미국인의 탄생이라는 책에는 신생 공화국 미국의 비공식적인 표어는 결코 뒤돌아 보지 마라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미래만 바라보고 모인 이들이었기에 기존의 관습은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 사회가 오로지 배타적이고 폭력적이기만 했다면, 세계사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 미국은 아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메리카는 관대한 타향이 아니다. 그곳을 지탱하던 관용의 정신도 없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낡은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극심한 불평등에 시달리는 사회, 계층 이동의 기회가 없는 사회, 하층 계금과 빈곤층이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가 된 지금, 미국은 그들의 선조들이 떠나왔던 과거 신분제 사회의 유럽과 같은 곳이 되었다. 2016년 미국을 휩쓸었던 논픽션 힐빌리의 노래가 보여주었듯이 이주 노동자들의 후세대들이 백인 하층 계급으로 몰락하고 재생산되고 고착화되고 있고, 그런 사회에서 관용의 정신은 뿌리내릴 토양은 없다.
오늘날 태어난 곳에서 자라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략) 본인이 미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음에도 그곳에서 그렇게 고생을 했음에도 아메리카라는 말에 자부심을 느끼던 전세계의 이민자들, 그들의 청춘을 지켰던 그 관대한 타향은 또 어느 시대에 어느 곳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다시 처음의 주제를 돌아오면 미국은 우리 내외부에 속속들이 관련된 세계의 요소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원소도 복잡하고 상반되는 것들이 뭉쳐 만들어지는 물질인 걸 생각하면 이 세계의 지난한 상충들도 자연의 이치겠다. 불 났는데 도 닦는 소리일까.
이 글을 쓰느라 식은 된장찌개를 다시 데우기 위해 일어선다. 어쨌든 오늘을 성실히 살아 봐야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ps)
보통 200페이지가 훨씬 넘던 것에 비해 이번 호가 좀 얇아서 더 빨리 읽을 수 있었나 싶은데 글의 질과 편집이 좋아 술술 읽은 거다에 더 손을 들어 주기로 했습니다^^ 1월에 하는 일도 술술 풀리라고 이렇게 하신 건가Axt 처음으로 완독해서 엄청 기뻐요 T^T)!
트루먼 카포티에 대한 기획 글도 좋았는데 리뷰가 너무 길어져서 그 부분은 책을 산 저 혼자 즐기는 걸로)~

제가 산 《Axt》는 대체로 품절되는 경향이 있는 듯? 천명관 편, 듀나 편, 파스칼 키냐르 편. 그러니 저처럼 띄엄띄엄 사시는 분들은 이번 호 사시는 걸 권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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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1-20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잡지 읽을 때마다, 어렵군, 다 읽으면, 다 읽었군, 하고 끝인데..... 아갈마님bb

AgalmA 2018-01-20 16:19   좋아요 1 | URL
매번 다 못 읽어서 리뷰를 못 쓰고 있었는데;_;) 이제 다 읽고 리뷰 쓸 능력이 되어 기쁩니다ㅜㅁㅜ

2018-01-20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1-20 19:08   좋아요 1 | URL
이상하지요. 이상국가를 부르짖었던 혁명이 결국 절대 권력의 제국의 성질로 바뀌는 모습을 우린 공산주의 혁명들에서 많이 봤지요. 오히려 복지 혜택이라든지 해서 자본주의 영역이 공산주의/사회주의 제도를 흡수해 더 탄력적인 정치 형태를 보여줬죠. 참으로 아이러니하죠. 미국은 어쩌면 자유주의 이상국가의 마지막 변질을 보여주는 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의 비전은 무얼까요. 우리 모두가 궁금해 하는 점이죠.

겨울호랑이 2018-01-20 19:10   좋아요 1 | URL
「드래곤 볼」에서 샤이어인 다음의 초샤이어인이 나온 것처럼, 초민주주의가 나오지 않을까요? ㅋ

2018-01-23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3 0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기둥 - 제3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42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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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요지의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을 나는 새 시집을 만날 때마다 생각한다. 사건의 개연성이나 구성, 스토리, 인물, 주제 등을 두고 따지는 소설보다 시가 더 요령부득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시를 읽는 이들은 다른 문학 장르보다 더  문학을 대하는 자신을 점검해보게 될 것이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자주 본다. 점잖게 ‘요즘 시는 어렵네요’ 라거나 ‘이런 시는 별로예요’ 말하면서도 시를 꾸준히 읽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히키코모리나 외계어 같은 문장과 생각에 넌더리를 내며 시에서 점점 멀어지는 이들도 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시가 뚜렷했던 것처럼 한국시는 한국인의 시대적 감수성과 아주 밀접했다. 소설보다 정서에 더 가깝게 와닿기 때문에 소설보다 기대하는 게 컸다. 신춘문예와 각종 문예지, 많은 시 모임들만 봐도 한국인의 시 사랑은 대단하잖은가. 그만큼 많은 시들이 쏟아져 나왔고 분량이 짧은 시의 구조상 기존 시 스타일로 더 이상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시는 새로운 모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시는 소비에서도 뚜렷한 두 양상이 있다. 시 쓰는 자들이 읽는 시와 일반 독자들이 읽는 시. 전자는 더욱 신선한 걸 원하고 후자는 자기 감성에 와닿는 시를 써주길 바란다는 게 내가 보는 현 상태다. 그래서 무수한 실험이 펼쳐지고 있는 이 시집이 전자에겐 환호 받겠지만 후자에겐 환영받기 어렵겠다는 게 내 소견이다.
 
나는 나대로 이 시집에 몇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다.
1. 작위와 無用 사이
시의 無用은 시인이 말하는 게 아니라 시 자체가 어쩔 수 없이 가닿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가 쓸모없다고 말하는데 그 말은 기분 좋은 말입니다. 저는 평소에 제가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내가 아무리 쓸데없어 봤자 시만큼 쓸모없겠냐 싶고 그런 생각을 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라는 시인의 <김수영 문학상> 수상 소감이나 이 수상 소감에 깔깔대며 좋아하는 박상수 시인·평론가는 자조를 넘어  문학 판의 치기로 보였다. 그 말은 약간의 허세였고  詩作에서는 다르다고 해도 그 수상 소감은 내가 이 시집에서 내내 느꼈던 개운하지 못한 의심을  확인해줬다. 문 시인이 시를 ‘쓰는 도구’로 생각하는 게 시집  전반에 뚜렷이 보였다. 그러지 말란 법도 없고 막을 생각도 없지만 몇몇 이들의 공감과 인정으로 만족하거나(과연?) 개의치도 않는다면(더 과연?) 스스로 자신의 시 가치를 깎는 것 아닐까.
“문장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주변을 신경 쓸 재간도 없이, 미래를 도모하지도 않고도 않고 오직 한자리에서 홈을 파며, 어쨌든, 바닥에 흔적을 내고, 그것을 위해 몸을 꼴 대로 꼬며 깊어지는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다//…(중략)…//이 문장은 다른 문장에 비해 더 오랜 기간 외롭게 매듭을 만들고 있으며 고유한 방식으로 몸을 꼬고 있는 것 같다”(「멀리서 온  책」)고 말하는 이 문장처럼 이 시집에서는 낯선 것들을  ‘이중 매듭’으로 엮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아래에는 두드러졌던 예 하나만  가져왔다.
    
ex) “피는 끝에 오니까. 나무뿌리처럼 뽑히기 직전까지 땅을 움켜쥐니까. 배다. 작은 어선. 당신은 졸고 있다.  지루하게 돌아가던, 구석의 앉은뱅이 도르래의 속도가  빨라진다. 당신은 넓은 모자의 끝을 턱에 걸었다. 턱으로 흐르는 검은 액체를 해풍이 말리고 있다.”(「뾰루지를 짠다」)
 
뾰루지 짜는 정황을 갑자기 항해를 하는 정황으로 점프 컷 연결했다. 재밌거나 신선하게 느낄 윤활유가 전혀 없어서 과장만 되고 말았다. 사소한 것들에 과장을 붙이는 게 문 시인 시작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만.   
  
 
2. 시시함과 단언 사이
이 시집은 이질감과 딱딱한 느낌을 주는 현재 시제로 대부분 진행되고 있는 데다 단언이 많아서 읽는 이에게 거부감을 주는 구석이 많다. 신은 왜 그렇게 시시해야 하며, 시인의 단언을 우리가 신뢰하며 귀 담아들을 이유는 또 무엇인가. 재기 넘치고 빛나는 문장이 곳곳에 있어도 설득력은 뒷받침되지 않아 시 자체를 부질없고 시시하게 만든다
 
●  동의되지 않는 神
ex 1) 신의 손을 편 채 뒤집어 가방 위에 올려놓았으므로/신이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모양의 책은 누구에게나 공유될 수 있다(「역사와 신의  손」)
 
ex 2) “그녀는 일찍 태어나 버렸다./ 신이 무단횡단을 하는  바람에 //…(중략)…//인간에게 약간의 삭제가 허락된다면 ㅡ 그것이 신의  직업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일지라도 ㅡ 전봇대 아래의 똥, 아니 똥이 보여 주는 침착함 그 자체가 되고 싶었으며, 깜깜한 밤보다 비 오는 대낮을 무서워하는 똥의 속사정을 몰랐지만 그것까지 알았다면 정말 똥이 되었을  것이다.”(「무단횡단은 왜 필요한가」)
 
ex 3) "중력의 법칙은 원자보다 작은 입자들의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신이 원자보다 작은 미생물이기 때문이다 신은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따라서 신을 보려면 특수한 기구가 필요하다 신은 인간과 연락을 끊기 위해 자신이 속한 세계에 인간세계의 중력 법칙이 미치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인간들이 섭섭해한다”(「과학의 법칙」)
 
ex 4) "손이 부족한 천국에서는/천사가 악마도 겸임한다는 사실 같은 게/사람들의 따뜻한 여름날을 망쳐선 안 된다고.”(「공원의 싸움」)
 
ex 5) “새/가창문에부딪혀자꾸자꾸죽었다신은실력이좋지않았던/거지,도끼를내려놓고도그런생각이가능했다”(「도끼를 든 엉덩이가 미친  사람」)
    
신을 인간 위치로 끌어내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상품성이 있다는 듯 신을 가져와 쓰는 방식이 굉장히 소비적이며 문제적이다. 그 위치시킨 신, 추상에 대한 비유와 정의도 너무 가볍다. 지금 시대 이것이 과연 신선한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시대도 아니고. 전복적이라기보다 신의 추종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부딪힌 벽을 그렇게 처리하고 마는 한계로 느껴졌다.
  
● 있어 보이는 문장이지만 동의하기엔 미숙해 보이는  화자의 단언들
ex 1) 죽음은 두둑하게 쌓여 있는 무엇일 뿐이다(「N의 백일장의 풀숲」)
ex 2) 인간을 불행으로 나눈 뒤 다시 불행을 곱해 인간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수학의  법칙」)
 
과학과 수학 등을 동원하며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하지만 소화가 덜 되어 보였고 시인의 사색과 상상력이 좌중을 휘어잡을 설득력도 부족해 보였다. 시인이 정서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이성의 시 쓰기를 하고 있어서 더 그렇다.
문 시인의 가능성에는 꽤 긍정하고 있다. 다음 시집에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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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1-08 11:15   좋아요 1 | URL
네... 일단 시가 분량이 적어 다른 장르보다 쓰는 부담이 덜하죠^^; 그래서 쉽게 접근하게 되죠. 막상 써 보면 좋은 시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지만. 시처럼 보이게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닫죠.
문장에 고심하게 되면 비틀리는 단계가 추동되는 건 언어와 사고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철학의 현학성과 비슷하죠. 감성 시를 원하는 독자에겐 반갑지도 않고 필요도 없는 현상이겠고요ㅎ;
읽는 사람이 있으니 쓰기도 하는 거겠으나 문학도 자본 시장인 만큼 요즘 소비자의 위상처럼 독자도 늘 불만을 표할 수밖에 없겠죠^^;

곰곰생각하는발 2018-01-08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좋습니다. 릿터 같은 문예지 글 읽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아..

AgalmA 2018-01-08 14: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요즘은 민음 시집을 많이 읽게 되는데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특히 잘 알 수 있죠. 대중과의 소통이 어려운 부분이 많이 느껴져서 안타까우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도 알겠고 복잡하네요....

cyrus 2018-01-08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난감한 직업이에요. 읽기 쉬운 시를 쓰면 사람들은 시인의 자질을 의심하고(ex: 서울시 지하철 스크린도어 시 수준 논란), 오랜 사색을 해서 나온 시가 비평가들이 인정해줘도 독자들은 어렵고 난해하다고 말합니다. ‘독자들이 좋아할 수 있는 시‘가 어떤 것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

AgalmA 2018-01-08 18:35   좋아요 0 | URL
그렇죠^^; 다른 장르도 그렇지만 한국의 시 문화도 다양성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서 아카데믹한 데가 있잖아요. 안 그런 척 하지만 대학 따지고 국문학과, 문창과, 급을 나누기도 하고; 그런 학적이 없는 신춘문예 시인은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 하죠....
출판사별로 주로 활동하는 비평가들로 나뉘어진 것도 눈에 뻔히 보이는데 시에 비해 평이 과하다 싶을 땐 평가를 신뢰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요. 평을 위한 평을 볼 때도 많고요.
걍 저는 저 대로 읽어요. 좋은 시집이 나오길 기대할 뿐...

그것은실로 2018-01-08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의 무용은 어쩔 수 없이 가닿는 지점이다.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