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김경주 시인은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라 말했지만 내 계절은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뀐다. 누가 더 힘겨운 지구살이인지...내 그로테스크한 기분을 잘 말해주는 시인이 있다. 

 



1.
생일

탯줄이 가위에 잘린 날
먹는 미역국,
탯줄 먹듯 먹는 미역국.

그렇게 살면 못 살 것 같은데
그렇게 살았다
붉은 털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톱니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수난절도 정부미도
돌아갔다 떡국도 붙박이별도 돌아가고
판박이 삶 속에 생일이 돌아와도
그럭저럭 헛 살고 늙어간다는 느낌뿐.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은데
별수없이 이렇게 산다.
자궁 속의 강낭콩만한 태아가
부풀어오른 엄청난 육체,
그리고 전진하는 나의 갱년기,
나의 종언, 나의 재,
나 없는 나의 무덤,

無는 대체
나이를 몇 살이나 먹었을까,
내가 다시 0의 나이로
어려져서 충실하게 들어앉을 無는.

詩 최승호 (《대설주의보》, 민음사)

 

 

툭툭 일갈하는 최승호 시인의 문체에서 시적 재능이 뛰어나 너무 쉽게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곤 한다. 한국 시인 중 상당한 다작을 보여준 것만 해도 그렇고. 《대설주의보》 시집 해설을 맡은 김우창 선생의  정공법적인 시선과 비평이 대비를 이루며 돋보인다. 현학적인 수사와 철학(자)를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깊다. 이건 최승호 시인과 비슷하다.

 

"실감은 무엇이며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 손쉽게는 그것은 어떤 일을 겪는 사람의 생생한 체험을 재생하려고 노력하는 데에서 생겨난다고 여겨진다. 또 이것은, 단적으로 작가가 그리고 있는 대상과 작가와의 일치, 특히 심정상의 일치로 인하여 가능해진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리 말한다면, 사회 의식을 중요시하는 작품의 경우, 실감의 결여는 흔히 억압적 체제에 의해 희생되는 민중과의 보다 긴밀한 심정적 일치에 의하여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형상화의 관점에서 볼 때 심정적 일치의 기능은 이와 같이 긍정적인 것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형상화는 알아볼 수 있는 모양을 만든다는 것이고 이것은 객관화 작용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주체적 일치는 이 객관화 작용에 역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픈 사람과 심정적으로 일치한다고 할 때, 아픈 사람의 아픔이 크면 클수록, 또 그 사람의 커가는 아픔에 일치하면 할수록 언어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음과 외침에 한정될 것이고, 그런 경우 아픔의 내용 특히 그 객관적 정황에 대해서 전달하거나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아픔의 내용과 정황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ㅡ그것을 전달하고 진단하며 또는 형상화한다는 것은 아픔으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아픈 사람과의 일치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그것의 객관화는 있을 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학에서 기대하는 바의 직접적인 전달 또는 형상적 직관을 유발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가가 이러한 일치 상태에 머무는 한, 그는 인식이나 형상화에 나아갈 수 없다. 예술은 대상과 일치하며 동시에 이것으로부터 멀리 있는 역설을 그 조건으로 한다. 예술가가 반드시 관찰자, 제3자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대상과 그 대상을 예술적으로 인식하는 자가 같은 사람일 경우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가 단순한 수난자로 수난의 와중에 있는 한, 그는 예술적 표현을 얻어낼 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민중이라면, 민중은 예술가가 아니다. 민중적 예술가는 민중이면서 민중을 객관화할 수 있는 자, 그런 의미에서 민중을 넘어선 사람이다(이것은 민중과 예술가를 갈라놓는 이야기가 아니다. 민중이 스스로의 상태를 깨닫고 스스로의 힘을 안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과한다는 것을 말한다)."(p138~140)

 

"사람이 진실에 의하여 움직여질 수 있는가? 여기서 진실이라 함은 어떤 특정한 진실, 즉 직접적인 이해 관계에 의하여 나에게 결부되어 있는 진실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겠는데, 문학은 우리의 현실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사람 모두가 인간 존재의 진리에 직관적으로나, 또는 반성과 교육을 통하여 참여할 수 있다고 믿고자 한다. 이것은 문학이, 직접적 명령이나 교훈을 통한 전달이든, 어떤 객관화된 심상의 제시를 통한 전달이든 그것도 물리적 강제력이 없는 마당에서의, 전달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은 데에서 드러난다. 물론 사람의 참다운 모습 또는 그것에 비친 바 비뚤어진 모습이 일거에 제시될 수 있고, 또는 그것이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실천적 활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우리가 순진하게 믿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근본 바탕에 그러한 순진한 믿음을 갖지 않고는 문학이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이다."(p142)   

 

 

 

2.
모래인간은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래가 된 인간은 많지만 모래로 된 인간은 없다. 모래는 잘 뭉쳐지지 않는다. 모래는 흩어진다. 모래는 흘러다닌다. 모래들이 물어뜯은 것 같은 움푹한 미라는 있지만 모래로 빚은 태아는 없다. 사막에 사는 모래쥐도 그렇다. 모래가 되는 모래쥐는 많지만 모래로 빚은 모래쥐는 없다.

ㅡ 최승호 詩 「모래인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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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1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11-01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우창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까!?

AgalmA 2017-11-01 22:04   좋아요 1 | URL
앗 죄송^^; 잠깐 박이문 선생님 생각하다가 실수를ㅜㅜ....잘 지적해 주셨어요!

AgalmA 2017-11-01 22:09   좋아요 0 | URL
평소의 감사를 담아 가즈오 이시구로 책 한 권 thanks to를 syo님께ㅎ;
이거 때문이 아니라 아까 주문ㅎ))

syo 2017-11-01 22:12   좋아요 1 | URL
도대체 syo가 무슨 평소의 감사를 받을 일을 하였을까요 ㅎㅎㅎㅎ 어찌됐건 땡스 투 땡스투입니다.

AgalmA 2017-11-01 22:13   좋아요 1 | URL
삶의 소소한 재미 제공ㅎ?

syo 2017-11-01 22:15   좋아요 1 | URL
보람차다 히히
 
나는 벽에 붙어 잤다 민음의 시 238
최지인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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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희로애락을 고루 살핀다기 보다 고통에 집중해 채록하는 역사 같다. 사람들의 많은 말들과 책을 접해도 그렇고 오늘 내 하루를 생각할 때도 그렇다. 아주 잠깐의 생각 속에서도 나는 저릿한 그 감각을 반추한다. 최지인의 첫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도 그러한 보고서였다. 작품 해설을 맡은 이경수 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면 유년의 체험과 광장의 체험을 통해현재의 비정규 청년 세대의 딜레마를 집약한 시집이라 말할 수 있다. 청년 실업률이 역대 최고라는 소식이 해마다 전해지는 가운데 너무 흔해서 너무 많아서 이러한 보고가 새삼스럽지도 않다. 너무 잔인한 말인가. 나는 개별자 최지인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집중하는 대상을 더 눈여겨보고 싶었다. 이해는 보편성이 아니라 특수성으로 다가갈 때 더 정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청년 세대의 절망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이 최지인의 시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시어이다.

외투들 벽에 걸려 있다”(이리),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잠잘 때 조금만 움직이면/아버지 살이 닿았다/나는 벽에 붙어 잤다(중략)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세상에는 벽이 많았고/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비정규), “아직은 아니다 몹시 추운 저녁/밝다 여기는 도시의 광장/길고 견고한 벽이 정면에 있다/벽에 올라선 사람들은 위태롭다 절벽/여러 표정과 식탁에서의 침묵이 암막에 가려 있다”(앙상블), “벽에 기댄 노파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 겹겹이 입은 잠바가 뼈를 가리고 있다 작은 눈이 잠깐”(기이한 버릇을 가진 잠과 앙상한 C ), “벽이 있었다면 그와 나는 두꺼운 이불을 바닥에 깔고 함께 누울 수 있었을 텐데 풀지 않은 짐들을 구석에 몰아 놓고 내일 먹을 음식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 텐데//머그잔을 벽에 던졌다/유리 조각 바닥에 흩어지고(중략)욕조가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욕조를 선물받는다면 골치 아플 거야 벽을 뚫어야 할지도 모르지 벽을 뚫다니! 해머를 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지 그는 드레스를 입고 시체처럼 누워 있네//창문을 열어 두고 시멘트벽에 기대어 있다 도시가 흙처럼 쌓여 있다”(저편의 말), “포클레인이 4층 빌라 벽을 두드린다/주저앉고 있다”(병상), “부서진 서랍장이 널브러져 있었다 벽에 기대 입 벌렸다”(천천히 말하기), “군이 벽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댔다”(쓸모의 꼴), “골목의 벽들이 무너져 있었다 마스크를 착용한 인부들이 깨진 벽돌을 옮겼다/우리는 질문하지 않고”(항간), “곰팡이 핀 벽지를 뜯어내고 페인트칠했다/얼룩들이 지워지고 벽은 새하얗다”(레드존), “우린 자동차 백미러를 부수고 다녔지. 하숙방 벽에 깨진 거울들을 전시했다. 우리를 지켜보던 거울들, 깨진 금들.”(믿어야 할 앞날), “너와 나는 하루씩 번갈아 가며 벽 쪽에 누워서 잤다//이곳의 유일한 기쁨을 나누기로 동의했다”(이후), “처형당했다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 모였었다/벽 맞대고 서 있던 여섯/도시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비참한 일을 겪게 마련이다/일상은 계속될 것/총성이 멈추면”(리얼리스트)

시인은 벽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걸 몰랐을 거 같다. 알았다 해도 막을 수 없었으리라. 벽은 아버지부터 부수고 있었지만 좀체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고, 광장에서 사는 우리는 또 그 벽에 기대 쉬고 잠을 청하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는 그의 시에 이미 표현되고 있다. “인간은 가끔 인간 자신을 쏟아 내곤 한다 그것은 아주 난해하다 울부짖음은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언어 이전의 삶은 어쩐지 위험하다선조들은 흙으로 벽을 세우고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올렸다 거기서 선조들의 가족과 가축이 살다가 죽었다 그로부터 수천 년이 지났다”(인간의 시). 벽은 우리를 보호하는 사물이 아니다. 그 벽은 우리에게 남은 제단 같다. “목매 죽은 삼촌의 손/창틀에 늘어져 있었다(중략)두루뭉술/당신 발이 차가웠다”(이리), “담벼락에 박혀 있는 못 굵은 노끈 걸려 있다 개 한 마리 목매달려 있다 대롱대롱 개의 신음/소년 창문으로 개를 지켜본다 죽은 듯 축 늘어졌다 이내 온 힘을 다한다 불쑥 창문 불쑥 창문들”(리얼리스트)

우리의 목과 가슴과 손과 발이 텅 비지 않도록 이 벽들을 무사히 지나가더라도 우리는 기어이 그렇게 될 운명이다. 배를 뒤집으면 관이 되듯이 우리를 뒤집어도 관이 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우성과 함께 뒤집히며 이 광장을 지나가야 할까. 기록되지 않는 역사가 되면서. 그래서 희망은 낙관하는 허공의 끝이 아니라 삶의 유일한 끈인지 모른다.       

 

 

ps) 이 시집에서 가장 돋보이는 시는 첫 시이자 등단작인 「돌고래 선언」과 3부 마지막 시 「인간의 시」, 4부 마지막 시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한다.  이경수 문학평론가는 이 시들의 진행에서 '시적 주체의 선언'이 거듭 새로워지고 갱신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나도 동의하는 바라 최지인 시인의 다음 시집이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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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0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10-20 03:20   좋아요 0 | URL
예. 벽 얘기 하다보니 사진도 그렇게 찍어보고 싶더라고요ㅎ
허물어질 것들만 허물어지면 좋을텐데 세상 일이 참 그렇지 않죠....
 

 

이번 주는 어쩌다보니 우리집에 시집이 많이 방문했다. 귀찮지만 나는 귀한 손님 대접을 한다. 
 
이병률 시인은 수다쟁이류가 아니다. 말을 시켜도 가장 적정한 언어가 태어나기 전까지 기다려 달라는 태도다. 안 기다려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쓰던 시를 내버려두고 훌쩍 나갔다 오는 사이 사람들이 그의 떨어진 시들을 주워주는 걸 보면서 “사실은 내가 쓰려고 쓰는 것이 시이기보다는 쓸 수 없어서 시일 때가 있다”(내가 쓴 것)고 말하듯이. 이번 시집은 맑은데 맛이 깊은 국, 손에 잡힐 거 같이 가까운데 깊은 하늘 같다.


아픈 데가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 손을 올리는 성자도 아니면서
세상 모든 가시들은 스며서 사람을 아프게 하지요.“
이병률  사람중에서 (바다는 잘 있습니다, 2017)
 
옮겨놓은 것으로부터
이토록 나를 옮겨놓을 수 있다니
사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이병률  여행중에서 (바다는 잘 있습니다, 2017)
 
발을 땅에 붙이고서는 사랑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완벽한 사랑은 공중에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어찌 삶이 비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병률  이토록 투박하고 묵직한 사랑」  중에서(바다는 잘 있습니다, 2017)
  

 

김이듬 새 시집은 특유의 결기가 많이 누그러진 거 같아 다행인지 섭섭인지 모르겠다. 시인이 내내 불행의 옷을 걸치길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실제로 만나는 것만이 제대로인 만남인 시대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했다. 공격하면 끄고 편히 숨 쉬면 된다. 담배를 끊는 마지막 세대, 죽은 이를 기억하며 낭독회를 하는 마지막 몇몇.”
김이듬  마지막 미래중에서(표류하는 흑발, 2017)

 

  
나이가 들면 시인들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여백이 깊어지거나 사설이 많다. 그래서 나는 신인 시인들의 시집에 더 애정이 간다. 거칠고 뚝뚝 끊기는 호흡이어도 그들의 날숨이 가득 느껴져서 좋다. 만들어진 길을 애써 비껴 엉뚱한 몸짓 발짓으로 일어서 걷기 시작하는 그들. 어떤 시인은 빛 속으로 곧장 걸어간다.
  

돌고래 선언


  
손과 죽음을 사슬이라 부르자. 그들이 손가락을 걸고 있는 모습을 엉켜 있는 오브제라 부르자. 그들은 손가락을 쥐고 엄지와 엄지를 마주한다. 구부러진 몸이 손을 향해 있다. 손이 죽음을 외면하는 것을 흔적이라 부르자. 빠져나갈 수 없는 악력이 그들 사이에 작용한다. 손이 검지와 중지 사이 담배를 끼우고 죽음은 불을 붙인다. 타오르는 숨김이 병원 로고에 닿을 때 그들의 왼쪽 가슴은 기울어진다. 손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자. 손이 기둥을 잡음으로써 손은 기둥이 되고 그것을 선()이라 부르자. 죽음이 선의 형상을 본뜰 때, 다리를 반대로 꼬아야 할 때, 무너질 수 있는 기회라 부르자. 사라진 손을, 더듬는 선을, 부드러운 사슬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들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담뱃재를 털자. 흩어짐에 대해 경의를 표하자.
 최지인  돌고래 선언」  全文(나는 벽에 붙어 잤다, 2017) 

 

물질과 기억


  
태엽을 감을 적마다
시간에도 감정이 있다는 걸 알았다.
 
감정은 신이 아니었지만
시계를 차고 사우나에 들어가면
자꾸만 바라는 게 생긴다.
 
태어나자마자 청춘이었던 사람은
어떻게 생일 챙겨 줄까?
 
에덴의 뱀을 둘둘 말아
태엽을 만들면
아담과 이브는 알람을 맞췄을 텐데.
  
선악과가 먹고 싶은 시간,
하느님 몰래
산책하고 싶은 시간.
 
창세기는 오전 730분부터.
 
기혁  물질과 기억  全文(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 2014)

 

 

예전엔 허수경 시인의 결이 나랑 맞지 않아서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맘에 착 밀착되던 순간부터 그의 시들을 참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문장이 지나간 행간 여백도 순도 100% 시여서 여운이 오래 남는다.

쓰레기도 흑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보랏빛 구릿빛 빛 아닌 살갗이었다가
허수경  나의 도시중에서(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2011)

 

 

 푸디토리움 (Pudditorium) - 인연 (Nid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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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10-14 19: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집들 제목이 공간을 전부 메우는 것들이네요~ ^^
그러면서 비워주는 곳이기도 하고.. ㅎㅎㅎ

AgalmA 2017-10-15 00:30   좋아요 2 | URL
시집은 책계 휴게소 같지 않아요? 시집 읽으면 숨통이 좀 틔어요ㅎ

2017-10-14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10-15 00:32   좋아요 2 | URL
이런 계절 외투 호주머니에 문지 시집 같은 거 끼워넣고 다니기 좋죠^^
시간이 있음 돈이 없고 돈이 있음 시간이 없고 이 상관관계 어쩌면 좋을까요;;

겨울호랑이 2017-10-14 22: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 「물질과 기억」제목을 보고 베르그송이 시썼다고 생각했네요 ㅜㅜ 이런~

AgalmA 2017-10-15 00:34   좋아요 3 | URL
ㅎㅎ 저도 제목 보고 바로 베르그송 생각했는데....아, <물질과 기억> 뿐만 아니라 사놓고 안 읽고 있는 책 보기 미안해서 집안 운신이 맘이 편하지 않습니다ㅎ;;;

2017-10-15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7 0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 짧지만 우아하게 46억 년을 말하는 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이상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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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 수학을 못했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실험물리학자보다 사고실험에 더 치열할 이론물리학자가 수학을 못했다고? 아인슈타인에 대한 오해 외에도 이 책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걸 깨는 정보가 많다.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유럽인도, 미국을 처음 발견한 사람도 아니다. 심지어 미국 본토도 밟지 못했다고 한다. 진실은 책에서ㅎ/ 이건 지금 당장 구글을 검색하면 되지만 이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는데 궁금하지 않음? 마젤란도....
아쉬웠던 건 본문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Top 10 분류 항목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가끔 웃기려고 이렇게 분류한 건가 싶은 것도 있고ㅎ; 스스로 밝혔다시피 깨부수고 핵심을 찾는 세계사 책이라기보다 인문학적 생각 깨기 책에 가깝다. 본서 핵심 내용보다 닫는 말에 부록처럼 밝힌 이런 상식 교정이 내겐 더 유익했던 교양 도서^^

아인슈타인은 수학을 못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들먹이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여러 수학시험에서 나쁜 점수를 받았다는 소문은 이미 그의 생전에도 있었다. 그는 그 같은 신문기사에 이런 반응을 보였다. "나는 수학에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는데, 이미 14세 때 미적분에 재미를 느꼈다." 실제로 그는 6세 때 뮌헨의 페터스슬레 학교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어제 알베르트의 점수가 나왔어. 이번에도 1등이야. 훌륭한 성적표를 받았단다." 두 학년을 건너 뛴 아인슈타인은 9세 때 뮌헨의 명문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하지만 권위주의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15세 때 조기에 자퇴해 졸업시험인 ‘아비투어‘ 없이 종합기술대학의 물리학과에 입학을 시도했다. 뛰어난 재능 덕에 그는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물리학과 수학 시험은 매우 우수했던 반면 지질학 등 다른 시험 과목의 성적이 썩 좋지 못해 결국 시험에 떨어졌다. 이후 1년간 아라우Aarau(스위스의 아르가우Aargau)의 주립학교에 다니며 정식으로 대입 자격을 취득하면서 1896년 10월에 비로소 연방공과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그를 둘러싼 소문에는 오해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아라우 시절의 졸업장에는 실제로 물리학 6점, 수학 6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다만 스위스에서 점수 표기 방식은 독일과 정반대다. 스위스에서 6은 ‘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원래 목표는 수학과 물리학 교사 학위를 받는 것이었는데, 그보다 앞서 상대성이론을 고안하게 된다.
p3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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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9-20 0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제목처럼 즐겁게 읽기 좋은 책이군요. 부담스럽지 않은 편안함은 사람을 여유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AgalmA 2017-09-20 00:38   좋아요 1 | URL
제가 유머가 풍부했다면 겨울호랑이님 많이 웃겨 드렸을텐데...안탑. 근데 겨울호랑이님이나 저나 그 방면엔 큰 차이 없는 거 같아 든든(?) , 편안한 여유를 많이 주시죠.ㅎ 은근히 심각한 사람들 같으니라구)))

겨울호랑이 2017-09-20 00:40   좋아요 1 | URL
^^: 저야 자타공인 썰렁한 편이라 ㅋㅋ AgalmA님은 그래도 유머 감각이 좋으시잖아요^^:

AgalmA 2017-09-20 00:41   좋아요 1 | URL
저는 코드가 통하는 사람들만 통하더라는^ㅁ^;; 온라인에서 몸개그를 보여줄 수도 없고ㅋ;;

겨울호랑이 2017-09-20 00:44   좋아요 1 | URL
^^: AgalmA님이 좀 고급진 유머를 구사하신다는 걸 제가 조금은 알지요 ㅋㅋ 글쎄요. AgalmA님의 몸개그는 죄송하지만 별로 기대가 안되네요 ㅋㅋ

서니데이 2017-09-20 0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인슈타인이 수학을 진짜 못했다고 가정해도... 대부분의 우리보다는 잘 했겠죠. 아주 많이.^^;

AgalmA 2017-09-20 01:05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당시 최고 수학자보다 못 한건지 보통사람 수준이었다는 건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 채 대 물리학자도 수학 못했지 위안삼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syo 2017-09-20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도권 교육 ㅈ까라 그래 하는 신화적 요소와 아인슈타인을 헐뜯고 싶은 욕망과 실제로 별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학창시절 등등이 막 섞여서 저런 말로 후려쳐진 것이 아닐까요ㅎ

AgalmA 2017-09-20 07:20   좋아요 1 | URL
실제로 수학을 전혀 몰랐음에도 전자기유도현상과 ‘장‘개념을 만든 마이클 패러데이라는 예가 있긴 하죠. 패러데이는 생계가 어려워 학업을 하기도 어려웠고 제본소 견습공으로 일하며 제본하던 책으로 공부를 했죠. 쇼맨십도 있어서 강연도 호응이 좋았고 이런 여러가지 면 때문에 대중적으로도 많은 인기를 얻은 과학자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패러데이는 실험물리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해나간 발명가 스타일입니다. 패러데이의 개념들은 후일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수학적으로 증명해 그 유명한 맥스웰 법칙으로 완성된 거죠.
아인슈타인은 너무도 천재라 흠을 좀 만들고 싶었던 게 있지 않나 싶어요. 아인슈타인이 자기 이론 증명을 위해 수학이론을 누구에게 배웠다는 소리 저도 읽은 적 있는데 그 경우는 더 고차원적 수학논리가 필요해 보완하려는 거였다고 봐야죠. 아인슈타인 이론이 워낙 어렵잖아요^^; 지금도 그것도 수학적으로 이해하는 사람 몇 없는데 당시는 더 했을 거 아니겠어요. 누구도 모르는 걸 수학적으로 증명이라니 생각만 해도 저는 까마득)))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 잃어버린 몸 할란 엘리슨 걸작선 2
할란 엘리슨 지음, 신해경.이수현 옮김 / 아작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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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란 엘리슨 리뷰 쓰기의 어려움은 소설의 주요 줄기를 말하는 것이 강력한 스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소설 리뷰에서 자세한 스토리를 밝히는 걸 되도록 피하는데 너무 자세하게 알 경우 흥미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후 리뷰를 보는 것보다 책을 사기 전에 리뷰를 검토하는 경우가 더 많은 내 경험을 통해서도 그렇다. 스토리를 너무 잘 아는 고전들 경우 사람들이 잘 안 읽는다는 걸 생각해 보라. 독후감 형으로 글 쓰는 사람들은 자기 감상을 쓰는데 도취해 이 부분을 고려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자세하게 얘기해서 내가 이만큼 열심히 봤다는 걸 알리는 과시형, 귀찮거나 능력이 부족해 대충 말하는 리뷰어 등등 경우의 수는 많다. 아무튼 할란 엘리슨은 스토리 이상 가는 특유의 재담, 화려한 언술이 있다는 걸 당부하며 리뷰로 들어가겠다

    

 

 

마노로 깎은 메피스토  

(1993년 브람스토커상 수상, 1994년 로커스 상 수상, 1994년 휴고상 노미네이트, 1994년 네뷸러상 노미네이트, 1994년 세계판타지문학상 노미네이트)

 

이 단편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스릴러물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외톨이 흑인 루디는 유일한 친구이자 짝사랑하는 앨리슨의 부탁으로 그녀가 조사하던 연쇄살인범 스패닝의 진실을 알기 위해 그를 만나게 되는데……. 역으로 루디가 연쇄살인범이 되고 그가 흑인에서 백인이 되는 과정이 있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야? SF 장르물을 많이 본 사람들은 대략 짐작할 수도 있겠고, 제목을 상기하시라. 파우스트에게 영혼을 팔고 살 수 있다고 말하는 메피스토펠레스를.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허비한 건 인종차별이나 불운 때문이 아니라 끝없는 자기 연민 때문이었다는 루디의 깨달음은 의외로 계도적인 결말이 되어버렸지만 군더더기 없이 상큼한 끝을 보여줬다.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1968년 휴고상 수상)

 

표제작이기도 한 이 단편이 2권에서 단연 돋보인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각국이 개발한 AM의 성격을 얘기하면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 대략 보인다

 

처음에는 연합형 마스터컴퓨터(Alied Mastercomputer)였다가, 그다음에는 적응형 조종자(Adapyive Mastercomputer)가 됐다가, 그다음에는 적응형 조종자(Adaptive Manipulator)가 됐다가, 나중에 그게 지성을 발전시키고 스스로를 연결한 후에는 사람들이 그걸 공격형 위협(Aggressive Menace)이라고 불렀지만, 그때쯤엔 너무 늦었고 결국에는 그게 스스로 AM, 떠오르는 지성이라고 자칭했지. 그건 나는 존재한다(I Am)는 뜻이었어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p102)

“AM은 돌아다닐 수 없었고, 경탄할 수 없었으며, 소속할 수 없었다. 그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p111) 

 

자신을 창조한 신(이 있다면)을 죽이는 인간처럼 AM은 모든 인간을 죽이고 자기에게 지능을 부여한 개발자 5명에게 자기가 겪는 무한 고통을 같이 겪게 만드는 걸 목적으로 산다. 마지막 생존자는 AM이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처리한 외형으로 인간이라고 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없는 입으로 실존의 비명을 지른다.

우리는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해(과연?) 인공지능을 개발했지만 할란 엘리슨은 자멸의 경고로 풀어놓고 있다. 그의 다른 단편에서도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메시지다. 존재 간에는 결코 융합될 수 없는 이질성이 있다는 인식. 인공지능이 우리 관심을 이토록 끄는 이유는 존재,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강하게 주기 때문이다.

 

 

    

크로아토안 

(1976년 로커스상 수상, 1976년 휴고상 노미네이트)

 

도시전설에 대한 단편이다. 자기중심적으로 연애하던 남자는 불법 시술로 여자 친구에게 낙태를 시켰고 여자 친구는 변기에 흘려버린 태아를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이 이야기는 하수구에 악어를 버려서 탄생했다고 알려진 앨리게이터(하수구 악어) 도시 전설과 이어지는데, 태아를 찾으러 간 남자는 악어를 탄 아이들이 살아가는 기묘한 지하세계를 만난다. 지상에서는 철없는 아이처럼 살았던 그는 이 세계에서는 아버지라 불리며 모든 걸 다시 배워나가는 삶을 살게 된다. 악어를 탄 아이들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는다.

 

 

    

랑게르한스섬 표류기 : 북위 38° 54서경 77° 0013에서 

(1975년 휴고상 수상, 1975년 로커스상 수상)

 

이 단편을 두고 카프카, 멜빌, 메리 셸리, 아시모프, 시오드막의 융합이라는 평은 적확하다. 오마주들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늑대 인간이라는 괴물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탈봇은 자신의 존재 이유, 영혼을 찾고 싶어 한다. 비밀스러운 정보제휴처를 통해 그의 영혼이 있는 장소의 지리적 좌표를 얻긴 하는데, 가는 방법은 굉장히 물리학적이다그는 대형 강입자 충돌기를 가진 연구소 책임자 친구를 가진 덕분에 나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할란 앨리슨은 탈봇의 영혼이 있는 장소를 환상적으로 그려 놓았다. 책을 통해 직접 만나 보시길/

 

 

 

 

 

폭신한 원숭이 인형

(1988년 에드거상 수상)

 

행동심리학 책을 본 사람은 제목만으로도 짐작이 쉬울 텐데, 동물들은 폭신한 것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애니는 아이를 잃고 폭신한 인형을 아이로 여기며 노숙자로 살아가는 흑인 여성이다. 최하층이자 가장 취약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범죄 무리들에게 얽혀 곤경을 헤쳐 가는 모습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 피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신춘문예 당선작 같은 느낌이었는데(비교할 만한 작품이라면 황정은 신춘문예 당선작 마더) 역시나 에드거상을 탔군

 

 

    

꿈수면의 기능

(1989년 로커스상 수상, 1989년 휴고상 노미네이트, 1989년 브람스토커상 노미네이트)

 

이 단편도 아주 독특한 설정이다. 상실의 아픔을 흘려보내지 못해 타나토스의 입을 몸에 품게 된 맥그래스의 기이한 경험을 담고 있다 

 

그녀가 집단 꿈치료를 제안했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일찍 그 근처로 왔다. 그러고는 하루 대부분을 자신이 정말 일을 하고 싶은지, 자신의 경험을 완전히 낯선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지 판단하려 애쓰며 돌아다녔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 일대가 어떻게 고급화됐는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변했는지, 이곳에 번창했던 멋진 작은 가게들이 급등하는 임대료 때문에 어떻게 쫓겨났는지 살펴보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 가게와 저 상점을 기웃거리고 쇼핑을 하며 그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는 아무것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쁨이 말라간다는 사실에 갈수록 낙담했다. 기쁨이 말라갔다. 가게마다, 거리마다, 사람마다. 

그러다 누군가는 홀로 남는다.“(p252)

 

몽유병과 꿈, 기억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탐구를 버무린 그로테스크한 미스터리물이다. 1980년대 프랜시스 크릭과 그레임 미치슨의 뇌 연구 이론인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기 위해서 꿈을 꾼다는 가설”(p253)을 주축으로 할란은 이 단편을 쓴 거 같은데, 최근엔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한나 모니어, 마르틴 게스만)고도 하니 이거 참 나로선 어려운 문제다. , 읽을 책만 늘어나는 반갑지 않은 소식들.

 

 

 

 

 

 

 

 

 

 

 

 

 

 

 

 

 

  

 

콜롬버스를 뭍에 데려다준 남자

(1993미국 베스트 단편소설집수록, 1994년 네뷸러상 노미네이트)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의 오마주인가 싶은 단편이다. 101일부터 35(?)까지 레벤디스가 행한 악행과 선행 혹은 어느 것에도 속하기 어려운 기묘한 삶에 대한 관찰들을 제목을 붙여가며(‘오디세우스의 여정’, ‘환대하는 수선화’, ‘매일 착한 일 한 가지’, ‘보답 없는 일에 몰두하기’) 일기처럼 기록하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그랬듯 언어에 대한 짓궂은 농담들이 많다.

  

레벤디스 : 1034일 필틱요일, 그는 모든 개들에게 영어와 프랑스어, 북방 중국어, 우르두어, 에르페란토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하지만 개들이 말한 거라곤 최악이라고 평할 만한 운율을 맞춘 시뿐이었고, 그는 견시(犬詩)라고 불렀다.”  

 

레벤디스는 삶의 기쁨으로 충만한 이라는 그리스어라고 한다. 이야기 진행으로 보아 시공간을 두루 오가는 그는 인간 삶에 개입하며 인간 속에서 살아가는 장난기 많은 타락천사 같은데(반복되는 추임새 전 슬프게도 유한한 세계에서 사는 무한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레벤디스라고 부른 일, 마스터 변수 지출을 많이 한 것 등등으로 본부로부터 견책을 받고 다른 임무에 임한다. 아무도 알아줄 사람도 없는데 세르챠라는 이름을 굳이 택하고.

   

 

 

악동 같은 할란 엘리슨의 웃기고 슬프고 서늘하고 기발한 2권은 이렇게 끝난다. 할란의 작품에서 시간을 낭비해서인간은 이렇다는 견해를 자주 본다. 없는 1035일까지 챙겨서 사는 존재처럼 나도 삶의 창조에 전력해야겠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에트루리아어로 열변을 토하던 레벤디스 같을 순 없겠지. 난 일단 에트루리아어를 모르고 더 많은 걸 모른다. 그렇지만 함께 재밌을 수 있는 방법은 많을 거다. 좋은 음악만 같이 들어도 삶은 더 나아 보이지 않던가.

 

 

 

Nothing But Thieves 신보가 나왔어용~

https://youtu.be/S6Nt1ssPLBA 

Nothing But Thieves - Broken Machine (Stripped Version)  

 

 

 

 

 


 

이번 Axt(악스트)  No. 014에서 이주혜 씨가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리뷰를 쓰셨지만 제 리뷰가 더 꼼꼼하고 애정 넘친다고 자부합니다-_-! 워워~ 이러다 리뷰 과시형이 될 수 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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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18 14: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능력이 없어서 대충 말하는 리뷰어 1번 등장이요! ㅎㅎㅎ

과연, 이런 게 리뷰구만요....ㅠㅠ 끄덕끄덕

AgalmA 2017-09-18 17:28   좋아요 0 | URL
syo님은 읽기도 바쁘시잖아요ㅎㅎ; 저라도 그렇게 읽으면 리뷰 쓸 시간에 책을 더 읽을 듯ㅎ;
리뷰도 계속 쓰는 버릇을 해야 습관이 되고 기술도 늘죠. 안 쓰다보면 또 잘 안 돼요. 자전거 타기처럼 한 번 익히면 평생 되는 그런 게 아니더라는.
남들이 어찌 쓰든 제가 가타부타할 깜냥이 되나요. 어디까지나 내 생각엔 이런 것 같다 정도입니다.

서니데이 2017-09-18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스포일러를 하지 않으면서 리뷰를 쓴다는 건, 쉽지 않아요.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잘 되지 않는 것 처럼요.
A님 즐거운 오후 보내세요.^^

AgalmA 2017-09-18 17:30   좋아요 1 | URL
오,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좋은 표현인데요. 서니데이님 공부 열심히 하신 분답게 멋진 표현^^b
더운 건지 선선한 건지 묘한 날이네요~

ICE-9 2017-09-18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엘리슨의 팬으로서 이 페이퍼를 격하게 환영합니다^^

AgalmA 2017-09-18 17:41   좋아요 1 | URL
헤르메스님한테 ˝할란 엘리슨 안 사요, 흐흐˝ 팅겼던 기억이 납니다-.-; 다 소장할 책들인 걸로 아뢰옵니다.

ICE-9 2017-09-18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까지 회심시킨 갓 엘리슨이로군요^^

cyrus 2017-09-18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판된 SF 앤솔로지에 수록된 작품들이 하나둘씩 다시 소개되는 건 정말 좋은 현상입니다. 아작출판사가 요즘 열일하는군요. ^^

AgalmA 2017-09-18 20:1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예전엔 그렇게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요즘은 아작 같은 데에서 열심히 내주니 관심이 많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