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우의 일기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도솔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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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가 일기에서 ˝오성이 싹을 틔워 나무를 자라게 한다면 이성은 나무를 숙성시켜 열매를 맺게 한다˝고 한 말처럼 그의 글도 읽는 이에게 그런 역할을 한다. 그가 말하는 침묵, 소리, 자연 그것들은 나도 이미 경험했다. 경험과 상상의 공동체로서 순간 우리는 하나의 인간이 된다. 178년 전의 그인데도 여기서 시간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인간은 정말 신기하기도 하지.

없는 그가 문장 마디마다 내게 묻는다.
너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너는 무엇인가.
왜.

나는 누구에게도 기억되고 싶지 않다. 필요는 구속된 자에게 있는 것. 그래서 모두에게 일기가 필요하다.

https://youtu.be/YDiFphUcPWw
‘Maurizio Pollini: Schubert - Piano Sonata in A major, ‘Andantino‘ D. 959‘

하나의 불꽃 속에 지옥 전체가 들어 있을 수 있다.
ㅡ1837년 12월 19일

포도주 한 방울이 술잔 전체를 물들이는 것처럼 한 방울의 진실이 우리 전 생애의 빛깔을 결정할 수 있다. 진실은 고립된 섬이 아니다. 또 창고에 재물을 쌓듯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을 잊고 다시 새롭게 배워야만 전진할 수 있다.
ㅡ1837년 12월 31일
*A 첨언: 어떤 경지에 이르면 깨달음은 비슷했다. 소로의 이 말은 마치 불교에서 깨달음을 찾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심우(尋牛)와 비슷하다.

갈라진 틈이나 옹이 구멍을 통해 보더라도 세계의 아름다움에는 변함이 없다.
ㅡ1838년 1월 16일

소리란 침묵에 가깝다. 소리는 일자마자 곧 꺼지는 거품과도 같다. 그 거품은 내면적인 풍성함과 강함을 상징한다. 이처럼 소리란 침묵과 대비될 때만 청각신경에 잡히는 침묵의 희미한 발화(發話)이다. 침묵의 발화자이자 침묵의 강조자로 나타날 때만 소리는 조화롭고 순수한 멜로디가 될 수 있다.
ㅡ1838년 10월(날짜 미상)

단 한 사람만으로도 방 하나를 충분히 침묵시킬 수 있다.
ㅡ1839년 1월 9일

약자가 평평하다는 말은 맞다. 약자는 강한 모서리 부분에 서기보다는 편리한 표면을 선호한다. 그는 무난히 인생을 보낸다. 물체는 대부분 강한 부분이 있다. 짚은 세로 방향이, 널빤지는 모서리 방향이, 나뭇결은 횡축이 강하다. 하지만 용자(勇者)는 한쪽으로 누울 수 없는 완전한 구(球)와 같아서 어느 한 곳이라도 약한 곳이 없다. 비겁한 사람은 잘해야 타원체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을 너무 많이 받은 것도 약점일 수 있다. 비겁한 사람은 한쪽이 늘어나면 반드시 또 다른 한쪽은 눌려 있다. 속이 빈 구일 수도 있다. 부피를 크게 할 의도라면 그것이 최선이다.
ㅡ1839년 5월 17일

상식은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천재의 기이한 빛만이 진실을 재현할 수 있다. 선각자의 눈길이 닿기만 한다면 아무리 진부하고 하찮은 사실도 하늘의 새로운 별이라는 믿음을 낳을 수 있다.

과거란 지금 시도되고 있는 현재에 지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과거는 과거 자체로 증명하게 하라.
ㅡ1839년 11월 5일

운명이 용감한 자를 버릴지라도 용감한 자는 운명을 버리지 않는다. 가난으로 인해 밤거리를 헤매야 하는 처지에서도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굳게 결의한 새뮤얼 존슨과 그의 벗 사비지처럼 말이다.

여러 가지 소리가 우리의 귀에 들려온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팔 소리와 북소리는 침묵의 소리이다. 아주 미미하게 들리는 ‘삐걱‘하는 소리마저도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모든 사물들을 향해 북방의 오로라와 같은 거대한 빛을 발산한다. 윤이 대리석의 정맥을, 낟알이 숲의 정맥을 표현한다면 음악은 어디엔가 숨어 있을 영웅적인 그 무엇을 나타낸다.

나는 나의 벗의 인품이 나보다는 훨씬 더 훌륭하리라고 생각한다. 나의 열망이 나의 실천을 능가하듯이 말이다.
ㅡ1839년 12월(날짜 미상)

시인은 초원을 땅이나 풀이나 물이 아닌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위대한 시인은 다만 초원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말할 따름이다. 평범한 농부라 하더라도 감자꽃이 제비꽃만큼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한다. 위대한 시인은 감자꽃이 왜 좋은가만 말할 따름이다.
ㅡ1840년 1월 26일

태양이 내리쬐는 월든 호숫가에서 따뜻한 온기를 받으며 물결 살랑이는 소리를 듣는 동안 나는 과거의 모든 의무로부터 해방된다. 국가평의회 따위에서는 유권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 반짝이는 조약돌이 그런 기관들을 모두 무효로 만들고 있다.
ㅡ1840년 3월 22일
*A 첨언: <시민 불복종>을 썼고 인두세 내기를 거부해 감옥에 하룻밤 갇히기도 했던 소로. 월든 호숫가에서 자급자족을 했던 그. 세상의 의무, 세상의 인정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용기를 실천하는 사람에게서는 늘 이런 성찰을 발견한다. 알렉산더 왕이 소원을 물었을 때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한 디오게네스처럼.

나는 전쟁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다. 전쟁은 영혼의 걸음걸이와 자세가 몹시 닮았다.
ㅡ1840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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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11 0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가 참 다르군요 제가 쓰는 것과... 별일이 없어서 그날 일어난 일을 쓰는 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걸 씁니다 나중에 보면 비슷한 말만 썼더군요 그런 걸 자주 보는 건 아니고 아주 가끔, 일기라고 하지만 날마다 쓰지도 못합니다 외면일기라는 게 생각나네요 미셸 투르니에가 썼다고 하는... 잘 모르는 작가예요 일기도 제대로 써야 글쓰기에 도움이 될 텐데, 아니 이런 생각보다 그냥 쓰고 싶은대로 써도 괜찮겠죠 그런 것도 있어야죠 저는 일기도 별로 솔직하게 못 씁니다


희선

AgalmA 2017-08-11 04:30   좋아요 1 | URL
미셸 투르니에 좋아하는데 <외면일기>는 읽지 못했습니다. 또 좋아하는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도 읽지 못했고 더더욱 좋아하는 카프카의 일기도 다 읽지 못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일기를 어떻게 쓰든지 그건 본인의 자유죠 :) 소로는 일기 속에서 생각을 벼르는 작업을 한 사람이라고 해야겠지요.
 
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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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 해설이 없는 게 아쉬운데 만약 있었다면 아름답고 인상적인 글이 됐을 게 분명하다. 고전을 읽으며 우리가 배워 나가듯 좋은 글을 분석하면 그 글의 영양분이 분석에 가득 담기게 마련이니까. 물론 담는 그릇이 작으면이란 예외도 감안해야한다. 그래서 이 시집에 대한 내 리뷰는 범박합니다요!라고 포석을 깔고 가겠다. 안 물어봤는데도 굳이 알리면, 내 입장은 작품을 독립된 하나의 언어 세계로 보고 그 구조 및 수법과 형태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신비평보다는, 작품을 작가의 생애나 사상, 시대나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보는 주관적인 인상 비평이다.

 

이 시집을 대표할 시 세 개를 내게 요청한다면 복화술사의 구술사,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 브라운이 브라운에게를 가져오겠다.

내 머릿속에다 평생 허방을 판 원수 놈아라고 시간에게 호통치는 복화술사의 구술사는 시간과 자아의 닮은 꼴을 복화술의 상황과 연결해 전달하는 게 흥미롭다.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통해 자신을 전달하지만 실체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역설과 궤변의 상황이 지속적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줄기이기도 하다.

대미를 장식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흡사 단편 소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22페이지 분량), 브라운이 브라운에게(35페이지 분량)에서도 심보선 시에서 반복되는 주제부를 엿볼 수 있다. “입속에 혀가 있건 없건/언어를 쓰는 모든 이들에게는 공통의 비애가 있다라고 말하는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은 언어 속에 담긴 인류의 불멸성에 대한 탐구를 다각도로 분석 해석하고 있다. 혀 감옥도 등장하고 숟가락으로 혀를 누르고 말을 하려고 시도하는 시인의 행위도 자동 연상되어 이 시는 다체험 시라고 말해도 좋겠다. 인식과 세상의 관계를 우화적으로 그린 파크리트 쥔스킨트의 디스토피아적인 단편 <장인 뮈사르의 유언>이 떠오르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성공한 보석 세공업자인 뮈사르는 자신의 정원에서 돌조개를 우연히 발견하고 조개가 인간과 세계의 연원이며 모든 것은 조개로 돌아간다고 추론하고 진실을 파헤쳐 들어간다.

브라운이 브라운에게는 포춘쿠키 애용자인 Then Brown이 포춘쿠키 속에 들어있던 불행의 글귀(“희망은 그대 영혼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다”)를 발견하고 AFOCOO에 상담 이메일을 보내면서 시작된다. 그가 행운의 문구 작성자인 Brown Gee()와 이메일을 주고받게 되면서 상황은 흥미진진해진다. 행운과 불행은 상호보완의 관계가 아니다. Brown Gee5만 개의 행운 속에 5백 개의 불행(소음 or 적막)을 심어 자신의 모순과 세계의 모순을 전파했듯이 행운과 불행은 서로를 알아보고 폭로하는 비밀스러운 관계다. Then BrownBrown Gee도 그런 관계라는 중첩의 의미도 음미해 볼 수 있는데, 심보선이 자주 시에서 내보이는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비애와 정서도 녹아있는 매우 훌륭한 소설시이기도 하다. 이 시 바로 뒤에 이어지는 리던던시가 제목은 외국어 같은 느낌인데 반해 내용은 아라리 던던시롬같이 토속어 시어인 것이 내 추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위 시 외에도 언급할 만한 작품이 꽤 많다. 2012년 작고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를 굳이 심보르스카로 호명하고 그 후예로 자청하며 오마주한 시들도 여럿 있는데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 과정에서 사망한 청년을 생각하며 쓴 시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시대와 시인이 한 몸 같이 표현되는 여러 시들( “웃음은 존재의 암흑 속에서도 반딧불이 날아다닌다는 증거야라고 말하는 끝나지 않았어, “마음의 번민은 서로 반대인 것들이 뒤섞인 핏물/장미, 노래, , 너의 손, 나의 태양……이라고 말하는 등등), 사회학자인 시인의 특성이 여실히 반영된 시들 「스물세 번째 인간, 근육의 문제, 국가론, 연극 감자와 장미를 위한 시놉시스등등), 가족과 관계와 정체성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여러 시(특히 복화술사의 구술사처럼 없는-증명할 수 없는 존재’를 등장시켜 언어화하는 ).

이 시집을 통해 심보선은보들레르가 말한 앨버트로스-시인(시인은 구름의 군주와 같으니,/그는 폭풍우 속을 드나들고 궁수를 우습게 여기지만,/바닥에 유배되어 조롱하는 사람들 속에 처하면 그는/거대한 날개가 방해되어 잘 걷지 못한다.”(보들레르 악의 꽃, 앨버트로스)이 바로 자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천도재 이후」에서 시인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As  I lay dying》의 한글 번역 제목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올바로 해석하면 "내가 누워 죽어가고 있을 때"가 맞다고 하면서도 잘못 번역된 제목이 더 맘에 든다고 말했다.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오늘은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표제시 「오늘은 잘 모르겠어」처럼 우리에게 앎과 깨달음이 꼭 올 리 만무하며 우리 선택에 있어서도 앞뒤가 명확하기 어려워서 더 그렇겠다.

 

이 시집은 해설 자리에 부록으로 볼프강 에젤만 <당나귀 문학론>을 배치했다. 우리가 왜 당나귀를 사랑하게 되는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인간은 왜 진실을 향하게 되는지에 대해 탁월하게 피력한다.

시인이 이 시집에서 호명한 당나귀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당나귀와 함께 한 세벤느 여행(1879), 후안 라몬 히메네스 플라테로와 나(1955), 윌리엄 스타이그 당나귀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1970))처럼 시도 끝없이 낭송되리라는 예언처럼 이 시집은 도착했다.

기형도 시집처럼 시대에 획을 긋는 시집이 있다. 2000년 대 들어서 황병승여장남자 시코쿠김경주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심보선《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2010년대 그런 시집에 해당할 거라고 감히 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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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굿즈가 탐난 김에 산 게 부끄러울 만큼 좋다.
생활을 말하면서도 그의 시 저변에 굴절된 투쟁의 흔적이 알알이 박힌 걸 알아 6년 만에 낸 이 시집이 신화적이고 추상적인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에서 이제 기성 시인 특유의 그 상투적 행보로 가시는가 나는 섣부르게 마음속으로 물어 보다가 어느 순간 감동한다. 잊고 있던 히메네스의 당나귀 ˝플라테로˝를 호명한 때부터 내 맘은 이미 준비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어느 순간에는 당나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가를 또다시 생각하게 만드시는군.



˝나는 안다
시를 쓰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내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내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어간다, 내가 태어나지 않은 내 아이를 대신해
살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연인이 누군가의 행복을 대신해
슬퍼하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시가 누군가의 슬픔을
대신해 사라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ㅡ「축복은 무엇일까」 중



˝그래도 형은 시인은 안 됐을 거야
두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니까 말야˝

ㅡ「형」 중



곧장 수긍하게 만드는 시의 힘에 나는 늘 새삼스럽게 놀란다. 좋은 시는 어떤 논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도착한다. 사람은 그걸 너무도 잘 안다. 시인은 언어에 가장 매혹된 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하루로 사람의 삶이 완성될 수 없듯이 단 하나의 시만 쓸 수 없어 시인은 언제나 완성을 파괴하거나 볼 수 없는 궁지에 처한다.

260여 페이지의 두툼한 시집을 받아들 때 조금 예감했지만 아마도 나는 2017년 최고의 한국문학으로 이 시집을 꼽게 될 지도 모르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시를 읽는 여름밤도 좋구나. 누군가 시를 쓰고 있어 ˝오늘 밤 이 세상에 한 사람은 반드시 시인˝(「나는 이제 시인이 아니랍니다」)인 것처럼 오늘 밤 내가 유일하게 시집을 읽고 있는 사람이어도 좋겠다. 하지만 이대로 영영 식어 버리면 더 좋지 않을까. 영영. 우리가 이토록 많은 말을 했다는 것에 부끄럽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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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5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8-05 12:05   좋아요 1 | URL
읽어 보시면 정말정말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

2017-08-05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8-05 12:18   좋아요 1 | URL
첫시집부터 적당히 심각하고 적당히 쉬워서 대중들에게 인기받겠다 싶었죠.
뭐랄까. 90년대 정서를 기형도가 대표해 줬다면 심보선은 지금의 그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시집 읽으며 더워도 위로받고 성찰하게 되는 여름밤이었습니다. 참 좋았어요.
 

 

누구나 아이의 모습을 일정 부분 가지고 있듯 시인의 시어와 상상력도 계속 변용되어 나타난다. 구력이 꽤 되는 작가의 신작이 나왔을 때 기대보다 걱정이 더 앞선다. 특히 재기 넘치는 상상력을 보여주던 시인 경우 더 그렇다. 만물의 흐름처럼 자신의 독특한 모난 매력을 퇴색 없이 유지하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어디로 옮겨도 알알이 슬프다는 표제시 박상순「슬픈 감자 200그램」이나 시집 전체에 대한 내 감상은 아쉽게도 슬픈 실망의 200그램이다.

* 시집 전반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시어의 남발이었다.
(‘초승달 눈썹, 연분홍 입술, 터질 듯 말 듯 커다란 젖가슴, 출렁이는 머릿결, 불룩한 엉덩이‘ - 「여배우 김모모루아는 바르셀로나에 갔다」)
* 긴장감 넘치는 도약 없이 감상적인 전개도 실망스러웠다.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능숙하지 못하다./그래도 몇 절은 아름답다./ 내가 여전히 우울하고/ 내가 여전히 고독하고/ 내가 아직도 꿈꾸기 때문이다.‘ - 「음악은 벽 속에 있다」, ‘바다는/ 이미 오래전에 닥쳐온 나의 고독/ 모래알 같은 고독이 파도에 쓸려/ 밀려가고 밀려오는/ 여름은 아직 살아 있는 나의 죽음‘-「죽은 말의 여름휴가」)
시인의 말을 보면 박상순 시인이 문제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내가 처음에 이 길을 선택했던 이유처럼, 나의 도구는 언어이고, 이미지와 소리와 문자이고, 나 자신이고, 문제인, 오래된, 낡은 집이어서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인 나 자신만의 미미한 독자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미한 개인에게도 사실이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가슴에 묻어두고 가야 하는 것 또한 진실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참이, 거짓이나 침묵, 헛것들을 만나 진실을 삐껴서는 것이기도 하지만 뒤집고, 버리고, 되돌아서는 작용점으로써 실재적인 곳으로 도구를 끌고 가려는 마음과 같다. 하나의 작품은 발단의 연유나 종결의 의미를 넘어서는 곳에 있다.
그러나 세상은 지각이나 감각 또는 인지의 결과와는 다른 것일 수 있고, 나는 그 한계 안에 있다. 허구처럼 보이는 사건들과 이미지로서의 환영을 교차하면서, 미미한 나의, 문제와, 절박하게, 침통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대면하고자 했지만, 더 즉물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어떠한 의미도 배제해야 한다. 문제들은 즉물적인 것들을 통해 마침내 미적으로 환상을 만들며 소멸한다. 따라서 그런 즉물성을 통해 구조에서 구축으로, 시선에서 포착으로의 이동이 필요하지만 나의 도구는 아직, 거리보다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아직은 상황과 감정이 햇빛 속의 먼지처럼 떠돈다.
언어. 공간을 여는 길은 경계의 확장이나 출구를 통한 방법이 아니라 공간을 먼저 확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시선이나 표현을 넘어서는 시적 대상이나 상황을 현재와 같은 고정된 무대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상의 동태를 내 안에 옮겨, 다시 바깥과 잇는 과정에서의 호흡과 박동의 차이, 잡음에 관한 것들. 그리고, 매체가 경직된 내용을 생성하기 전에 방향의 역전을 꾀했지만, 의미를 단순하게 확정하는 경향을 가진 구체제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심란하다. 그런 심란함은 자연을 차용하거나 정서적 상황에 머물게 한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의지나 욕망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ㅡ 「시인의 말」 중에서

 

시인이 뭘 답답해 하는지 알겠는데 그 문제는 오직 창작자 자신만이 풀 수 있어 나는 책이 끝나기까지 바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쯤에서 홍상수 감독 이야기를 하고 싶다. 홍상수 영화를 디지털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카메라워크도 컷을 잘게 쪼개는 최신 영화들의 경향과 달리 풀숏이나 클로즈업, 줌 인 아웃의 고전적인(?) 방식을 주로 쓴다. 저예산 조건의 문제보다 홍상수 감독의 독특한 스타일이 되었고 중요한 건 작품의 현장성으로 남지 영화가 낡아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왜?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를 보며 홍상수 감독의 돌발의 미학과 판타지 구성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볼 수 있었다. 선배와 한가롭게 공원을 걷다가 다리 앞에서 갑자기 절을 하는 영희(김민희)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움과 쾌감을 동시에 준다. 박홍열 촬영감독이 연기한 무명의 남자 설정은 또 어떤가. 그는 영희가 등장하는 독일 함부르크와 강릉 바닷가에 계속 나타난다 ‘무명의 남자 설정‘은 참 상상력을 자극했는데(참고로 홍상수 감독은 데뷔작 때부터 검은 옷을 입은 의문의 남자를 종종 영화에 넣었다) 함부르크에서는 바닷가로 걸어가던 영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컷이 바뀌자 무명의 남자가 그녀를 들쳐 업고 그녀의 일행과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납치를 하는 중인지 죽으려던 그녀를 구하게 된 상황인지 어떤 암시도 부연 설명도 없이 감독을 이야기를 끊어버린다. 강릉에서는 영희가 투숙한 호텔 룸에서 무명의 남자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창문 닦이를 하고 있다ㅎ; ‘무명의 남자‘ 설정답게 모두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데 불륜과 지질한 관계들의 일상성과 대조를 보이며 영화를 유니크하게 만든다. 또 놀랍고 아름다웠던 장면은 바다를 마주한 영희의 등을 수평으로 잡고 긴 테이크로 가던 클로즈업이었다. 영희의 앞모습을 분명 볼 수 없는데 밀려드는 겨울바다와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우리는 분명 어떤 정서를 받아들게 된다.

 

 

 
감독과 여배우 간의 스캔들 때문에 왜 이 영화 속 여자 인물들이 다 -희자 돌림(영희, 준희, 도희...)인지 슬며시 이해하게 됐고, 홍상수 영화에서 왜 그녀들은 해변에서 그를 기다리는지도 어쩐지 이해할 것도 같지만, 내가 지금 홍상수 감독 영화 얘길 꺼낸 이유로 돌아가야겠다.

이미지 특히 자신만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언어의 이미지성과 메시지성은 사진, TV, 영화 같은 영상 매체의 등극과 함께 그 지위를 많이 잃었다. 그럼에도 창조의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내내  창작의 세계에서 공존하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당당함은 공감을 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감을 날세워 다루는 창작력을 잃지 않고 있어 그의 사생활과 별개로 그의 작품을 응원한다. 얼마 전에 홍상수 《그 후》(2017)가 개봉했는데 출판사 사장과 불륜;; 보기도 전에 공감부터 발동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상상력 먼저 볼 것이다. 진부함을 낱낱이 쪼개 어떤 알갱이를 드러내는 작업을. 공감을 하게 될지 말지는 그 이후 일이다.

모두를, 모든 것을 칭찬할 수 없는 내 한계도 이해 부탁드린다. 

 

 

 

 

 

 

Yates - vir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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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7-25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포메이션과 백석시집 나란히는 뭔가 앙상블 아닌 것 같습니다. ^^ 인포메이션 한달이나 껴잡고 있었는데 통독 실패한 일인으로서 독후 감상 기대합니다. ^^

AgalmA 2017-07-26 00:55   좋아요 0 | URL
제 독서취향이 좀 중구난방틱하긴 하죠ㅎ;; 필 꽂히면 하룻밤에도 다 읽어 치우면서 어떤 건 몇 달을 가도 완결을 못 보기도 하고... 그래서 <인포메이션> 감상기가 언제 나올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ㅎ;;

2017-07-25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7-26 00:21   좋아요 1 | URL
더워서 하루에 한끼는 꼭 면 종류를 먹게 되는데 계속 먹자니 약간씩 변화를 주게 됩니다ㅎ; 향신료나 데코 조미료류 좋아해서 파슬리 가루나 후추, 치즈 가루도 엄청 좋아해요ㅋㅋ
요즘 어쩌다보니 음식 일기를 쓰고 있는 듯ㅎ;;

음... 낼 기대되네요^^ 더위는 안 기대ㅜㅜ

2017-07-25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7-26 00: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저도 비빔면에 맥주 자주 먹는데 다들 비슷한가 봅니다^^ 반복적인 걸 워낙 싫어하는 성격이라 자주 먹는 음식은 이리저리 다르게 먹는 걸 좋아해요. 어쩔 땐 콩나물도 살짝 넣으면 쫄면처럼 맛있죠^^ 더워서 재료 공급을 소홀히 한 관계로 오늘은 방울 토마토로 조촐히 해서 먹었습니다. 반찬 이것저것 만드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신경도 안 쓰면 제 자신을 넘 박대하는 거 같아서 조금이나마 신경을 쓰려 합니다.

더운날 칭찬과 격려 얼음물 잔뜩 주고 가셔서 감사합니다^^)__)
건강 잘 챙기시길//

겨울호랑이 2017-07-26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이미지성‘이라... 시대가 바뀌어 영상매체가 발달해도 언어만이 가지는 주관성의 세계는 대체불가라 생각됩니다... 로크가 말한 ‘표상적 실재론‘의 내용이 떠오르네요..^^:

AgalmA 2017-07-26 00:31   좋아요 1 | URL
그럼요^^ 여전히 세상의 많은 부분은 언어의 힘으로 굴러가고 있잖아요. 미래엔 언어를 어떤 식으로 대체할 것인지도 궁금한 점이죠.

2017-07-26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7-26 23:18   좋아요 0 | URL
홍상수 감독 다작 감독으로도 유명한데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ㅎ 그래서 여인들도 많은 건가;;;;

2017-07-26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6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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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위해서라기보다 무엇을 하다 보니 혹은 어쩌다 보니 또 여름을 맞는 건 아닐까. 더 정확히는 여름 카테고리에 온갖 것을 집어넣고 여름을 겪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걸” 배웠다고 나름 자긍하더라도 그건 순간이었고, 그는 아이를 잃어버린 이후의 시간으로 다시 배워야 했다(입동, 바깥은 여름). 사소하고 시시한 삶들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약손’(비행운우찬제 해설 중)이 된 김애란은 무엇을 배워나가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단편 소설집 달려라, 아비(2005), 침이 고인다(2007) 인물들이 사춘기에서 청춘에 해당하는 시기의 열기, 실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과도기인 비행운(2012)을 거쳐 바깥은 여름(2017) 인물들은 반지하 자취방과 노량진과 학원과 고시촌과 고시원의 사슬, 서울살이의 미숙함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러나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호텔 니약 따, 비행운),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건너편, 바깥은 여름)라고 말하며 파국을 곱씹는 시간을 여전히 겪고 있다. 앞의 두 단편집과 확연히 다른 비행운바깥은 여름의 단편들이 여름의 폭염과 장마 풍경인 게 우연은 아닌 거 같다. “아주 먼 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물속 골리앗, 비행운)이란 표현처럼 악전고투하지만 더위에 더위가 더해지고 비에 비가 더해지듯 대부분의 나날이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들의 연속이라 지리멸렬하고 싱거워지는 인생살이와 닮았기 때문이리라.

 

카뮈의 '여름'이 굴복하지 않는 태양의 결기, 절망하지 않는 문학정신으로서 작품에 반영됐다면 김애란의 '여름'은 물기()-죽음과 눈물의 위치라 아주 대조적이다.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물속 골리앗, 비행운) 같은 게 자연뿐만이 아니라서 이 세계는 더 나아가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가리는 손, 바깥은 여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누군가와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해 종종 물속으로 뛰어든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비행운,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바깥은 여름) 계절과 달리 사람은 잘 돌아오지 않는다. 남은 이들은, 떨어지지도 썩지도 못한 채 겨울 은행나무에 매달린 은행처럼 죽은 이가 남긴 테이프 속 목소리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를 대답할 상대도 없이 따라 하거나(「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비행운), 기계장치 Siri와 대화다운 대화를 하며 인간적 편안함을 느끼거나(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바깥은 여름), 기성을 답습하는 것을 넘어 다단계 조직원으로 서로를 악랄하게 착취하며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걸 깨달을 땐 돌이킬 수 없게 되거나(서른, 비행운),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 묻기만 하고 자기 욕구에 충실하느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노찬성과 에반, 《바깥은 여름).

 

바깥은 여름에서 특히 아프게 다가오는 작품은 노찬성과 에반이었다. 이 작품은 달려라, 아비부터 김애란 소설의 큰 줄기인 소통과 유대를 가장 잘 나눌 수 있는 존재 - 부모 세대를 잃은 소년의 최신판이다. 플라이데이터리코더(침이 고인다),물속 골리앗」(비행운) 까지 그 빈자리를 판타지로 채우던 상상력의 실험은 모두 사라지고,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자신의 설자리마저 살얼음판으로 만드는 팍팍한 현실과 소년만 덩그러니 소묘로 묘사해 놨다. 아이를 얻고 기르려는 새로운 부모 세대도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 철거지역에서 양수가 터지거나(서른, 비행운),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를 기르려고 이사한 곳에서 어이없이 아이를 잃거나(입동, 바깥은 여름), 아이의 미래를 위해 생이별을 하거나(침묵의 미래, 바깥은 여름), 인종차별과 도덕적 잣대를 걱정하지만 부모 자신이 혼혈아인 자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일쑤다(가리는 손, 바깥은 여름). 소통과 유대를 가장 잘 나눌 수 있는 존재의 부재나 방기나 오해가 부른 부비트랩 상황이다.

 

이광호 평론가는 침이 고인다해설에서 김애란 소설의 문학적 성취는 동시대 젊은 세대의 사회문화적인 궁핍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개인성의 균열과 심연을 탐사하고, 그 안에서 실존의 지리학과 우주적 공간을 발견하는 상상적 모험을 펼쳐 보인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우찬제 평론가는 비행운해설에서 김애란의 발전상에 대해 이런 상황을 구성하면서 작가는 단지 사회구조의 모순을 드러낸다거나, 그 안에서 이전투구하는 인간관계의 난맥상을 그린다거나,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가혹한 시대의 피해자일 뿐이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은 그 어떤 부류의 면죄부를 위한 알리바이도 대지 않은 채, 자신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문제의 근원을 전면적으로 재탐사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종합해 보면 어른이 되는 시간이란 게/결국 실망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지만/글이란 게 그걸 꼭 안아주는 것은 아닐지라도/보다 실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지도 모르겠어”(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2011))란 작가의 문장이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같다. 김애란의 초기작은 좋아했지만 최근작에 대해서는 예전만큼 호감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독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갈린다고 생각한다. 연인의 대표적 이벤트 날인 크리스마스가 가난한 연애 해프닝(「성탄 특선」, 침이 고인다)에서 더 이상 참지 못 하는 부부의 이혼 결정(건너편, 바깥은 여름)으로 묵직해졌듯이 김애란의 자연(특히 여름)-환경과 소재들은 반복되는 소용돌이 속에 침묵의 결을 키워가고 있다는 게 지금 내가 주목하는 점이다. 어느 대목에서는 이 침묵이 레이먼드 카버의 그것과 비슷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판타지나 상상력의 실험이 아니라 김애란은 더 많은 실망과 실패의 실험으로 진지하게 접근하리라 짐작한다.

서른을 넘겼던 작가가 쓴 서른의 주인공은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거 같다고. 조만간 다시 옛날이 될 오늘이, 이렇게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있네요.”라고 말했지만, 작가는 과거나 사실을 보고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 시간, 감정, 인상모두에 공기처럼 배어 있는 것들을 글로 표현하려는 자 아닌가. 바깥의 여름도 스노볼 안의 폭설도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할 때, 품이 드는 이해가 시차를 좁힐 것이고 한 사람만의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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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0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0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17-07-20 1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학평론가분의 글인줄 알았어요. 즐겨찾는 서재라 찾았다가, 아름다운 문장에 놀라고 감동받고 갑니다

AgalmA 2017-07-20 16:12   좋아요 1 | URL
어이쿠, 평론가분들의 글을 가져와서 그런 인상이 강해진 걸까요;;;
딱딱한 평론 같은 글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분석적으로 쓰다 보니 어째 그런 식으로 보이게 된 지도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17-07-20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려고 검색해 보니
모두 6권이 있는데 모두 대출 중이네요.

한참 더 기다려야 할 듯 싶네요.

AgalmA 2017-07-20 16:13   좋아요 1 | URL
<기사단장 이야기>를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것 보다는 빠를 거 같은데요^^;; 레삭매냐님 부러워요!

cyrus 2017-07-20 1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애란 소설의 ‘여름‘은 곧 비가 내릴 것만 같은 구름이 잔뜩 낀 계절이었습니다. ‘노찬성과 에반‘의 결말이 안타까워서 작가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AgalmA 2017-07-20 16:14   좋아요 1 | URL
다 비감한 작품들이었죠...<노찬성과 에반>에 대해서 다들 그런 감정이 조금씩은 들 거라 생각해요.

단발머리 2017-07-20 1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비행운> 중에서도 한 작품만 읽은 것 같아요. 김애란을 잘 몰라요 ㅠㅠ
Agalma님 리뷰 읽다보니까 김애란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겠다, 뭐 이런 긍정적인 생각이 솔솔 듭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AgalmA 2017-07-20 16:15   좋아요 1 | URL
이 책 때문에 그동안 안 읽고 있었던 김애란 단편집을 다시 읽게 됐는데 역시 전작 읽기가 작품과 작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감사요/

서니데이 2017-07-20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이 좋았어요.
아직 책은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가을이 되어야 읽게 될 것 같아요.

오늘 많이 덥네요. a님 더위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AgalmA 2017-07-20 16:16   좋아요 2 | URL
읽을 책 많으시잖아요. 바깥이 여름이 아닐 때 읽는 맛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네요^^

서니데이 2017-07-20 16:34   좋아요 2 | URL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하면서 열심히 사서 모으고 있습니다.;;

[그장소] 2017-07-22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 이거 너무 좋다 . 리뷰(?)라고 하기엔 아깝고 평론이라고 해야겠어요 . 넘 멋져요 . 이 책은 아직이지만 몇 몇 작품은 읽었던 것들이라 더 와닿는 것같아요 .
모처럼 집중도 높게 읽은 글이라 기분 좋아요!!^^

AgalmA 2017-07-24 17:22   좋아요 1 | URL
리뷰대회 때문에 부러 쓴 리뷰인데 리뷰같지 않고 평론 같으면 이거 곤란한 거 아닙니까ㅎㅎ; 어쨌거나 당시로선 이렇게 쓰고 싶었고 결과가 어찌 되든 지나간 일이 되었습니다^^;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왔다가 비 잔뜩 쏟아져서 에어컨에 몸을 맡기고 잠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 있자니 잠이 와요-.- 배가 고파서 일까요, 1000페이지 넘는 책이 책베개 같이 느껴져서 일까요. 시원해서 나가기 싫지만 배고파서 가야 겠어요.
그장소님 저녁 메뉴는 뭐예요?
책에서,
˝쓴 맥주 육 파운트요.˝ 포드 프리펙트가 호스 앤드 그룸의 바텐더에게 말했다. ˝빨리 좀 줘요. 세상이 막 끝장나려는 참이니까.˝라고 하네요.

[그장소] 2017-07-24 18:29   좋아요 1 | URL
아, 쓴 맥주 좋네요! 시원하게 쭉 한잔 들이키면 저녁으로 딱일것 같아요 .
리뷰대회 결과는 감히 못 물어보겠잖아요 ~~^^
수상내역에 없으면 그건 평론이라고 말한 제탓입니다 ! 흐헉! ( 매를 벌고 있는 중??)
비가 와서 오후가 견딜 만 해요 . 걸으면 땀은 비오듯 쏟아지지만요!
어여 어여 맥주랑 든든한 저녁 식사 하세요! 맛난 걸로 드시고요 . 저는 아직 고민하는중~~^^

AgalmA 2017-07-24 22:15   좋아요 1 | URL
결과야 알아서 나겠죠ㅎㅎ 제 선을 떠난 것은 과감히 잊는 게 속 편한 거 아닌가요ㅎ
저는 오징어덮밥 해먹었어요. 맥주도 떨어져서 편의점 가서 흑맥주 사다 먹고요ㅎ
비가 와서 후덥지근이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네요. 더워도 전 여름이 좋아요^^

[그장소] 2017-07-24 23:49   좋아요 1 | URL
전 여름은 엉~엉~~;;; 싫어요 ~ 싫어~ ㅎㅎ
가을만 있는 나라가 있음 좋겠다니까요 . ㅋㅎㅎ 매콤달콤 오징어 덮밥 좋았겠어요 .
입맛도 돌고요! 흑맥주도 그렇구!!^^
저는 금욜까진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단 보류 ^^
지금도 비가 오다말다 그러네요. 여기는~
그래서 꽤 선선해요 . 그쪽 동네도 이 공기 나눠주고 싶네요 .^^
음음~ 어떤 결과든 멋진 리뷰였다는 건 변함없어요 . 제게는요! 히잇~♡ AgalmA님도 굿밤 굿밤 되시길 ~

AgalmA 2017-07-24 23:54   좋아요 1 | URL
오늘 뉴스 보니 여름이 늘어난 만큼 겨울이 제일 줄었다네요. 한 20~30일? 봄이 5일, 가을이 9일 정도 줄고...앞으로 한국에서 살려면 여름 대마왕에 적응해야 할 듯^^;;
그런데 올여름엔 매미 소리를 많이 못 들은 거 같아요. 장마 그치고 기세를 펼치려나^^;
그장소님은 제가 메주로 리뷰 써도 좋다라고 할 양반ㅋㅋ 고마워요^--^♡

[그장소] 2017-07-25 00:39   좋아요 1 | URL
아닛~ 이거 왜 이러세욧^^? 저 , 나름 기호 있는 여잔데~~^^!! ㅎㅎㅎ 호불호가 분명한~!!!
싫어하는 쪽으론 읽지도 않는다는 분명함을 보이잖아요 .푸하하핫~^^ㅋㅋ

아 , 가을 왕국 같은 곳으로 이민을 가야할까요?
난민 신청 같은거요~ ㅠㅠ
더위가 심해지면 에어컨 실외기 가동은 더 극심해 질테고 환경은 더 가파르게 파괴되어 갈테고 ... 우주로 히치하이커라도 ... 진짜 고려를 해야할까봐요 . 겨울이 줄었다는 말은 기쁘면서도 역시 동시에 환경 문제가 ..끄응 ~~
에잇~~~
고맙긴요 . 좋은 글 읽게해준 글쓴이에게 제가 감사를 !( 이러다 감사로 밤새 서로 인사를 주고 받다 날이 샜다는 ... 꼬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