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을 열면 창비시선 418
김현 지음 / 창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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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빛과 피가 섞인 칸타타를 작곡했노라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5

 

한 예술가가 형상을 창조하면 그는 그 자신의 생각을 억제하게 된다. 생각이란, 세계를 정서적으로 인지해 낸 형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예술적 형상이란 작가에게는 자신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공고물인 것이다. 생각이란 단명(短命)하지만 예술적 형상은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감수성이 있는 인간이 한 예술 작품에서 받는 인상과, 순수한 종교적 체험 사이의 유사성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인간의 정신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영화 예술의 미학과 시학

  

 

김현, 진이정, 타르코프스키, 마크 로스코, 반 고흐를 한데 모아 찍은 저 사진에서 당신은 어떤 공통점을 보는가. 이들이 그려내는 빛 속에 강렬하게 드러나는 종교성 때문에 나는 저 사진을 찍고 말았다. 김현 입술을 열면에는 영혼이란 단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하나님”, “”, “십자가”, “예배당”, “교회”, “성당”, “기도”, “정령”, “창조”, “사랑”, “천사”, “영원”, “진실의 종”, “운명”, “평화”, “축복”, “말씀”, “전지전능”, “은총등의 단어들이 계열어로 호위하고 있다. 진이정 시집이 아트만부터 신령”, “굿”, “업보”, “윤회등 그러한 계열어로 가득했듯이. 보고 있으면서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눈() 같은 의미의 폭설이다. 눈을 한 움큼 두 손에 담았다고 눈을 가졌다고 찾았다고 말할 수 없는 우리의(시인으로서도, 독자로서도) 궁지다.

 

눈이 와

그 사람은 꿈을 꾸었다

 

박사의 마음기계에

깨지기 쉽고 증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침묵하고

밤이면 질문하고

질문을 깨뜨려버리는 자를 기록했습니다

 

어둠이

박사가 지닌 숲을 뒤덮어

박사는 가슴을 열고

녹색 광선이 등장하는 흑백영화를 상영했습니다

 

무성 영화

 

인상파(印象派)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색채·색조·질감 자체에 관심을 둔 미술 사조이다. 추상표현주의 거장인 마크 로스코의 작품도 사물의 형태가 아니라 빛과 색이 더 중요하다. 정제된 시적 몽상으로 가득한 타르코프스키의 영상도 이야기와 빛이 인상깊게 엮어 있다. 김현은 언어로서만 가능한 효과를 꿈꾼다 


 

한 남자가 칼을 들어 얼굴을 찢자 한 남자의 얼굴이 갈라졌다. 한 남자는 떨어진 눈과 코와 입을 주워 캔버스 밖으로 고요히 사라졌다. 한 남자는 눈도 없이 코도 없이 입도 없이 칼을 버렸다. 한 남자는 이제 완전한 얼굴이었다. 한 남자는 눈이 두개 코가 두개 입이 두개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 남자는 이제 완전한 사실이었다.”(보는 자의 관점) 

 

이 시집에 나오는 -’, ‘-검은’, ‘생명-죽음’, ‘조선-박근혜는 “이곳은 아주 컴컴하고 희구나. 빛이 없구나. 어둠으로 환하구나.”(조선마음 6)처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내리는 눈()을 눈()없이 만끽할 수 없듯, 몽환 속을 걷던 잠에서 깨야 아침을 맞듯 그것들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시가 아닌 것에 시간이라는 제목을 붙”(죽음과 시간)이고, “시간이란 그토록 유용한 넘나듦임에도 우리는 민숭민숭하게 늙어버”(조선마음 8)리는 순간만을 겪기에 시인은 계속 이어 붙인다. 신 없는 예배당에서 기도하듯이 없는 조선과 옛 고궁도 시인에게는 이 현실의 예배당으로 작동한다. 진이정이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갔듯이 말이다. 시간을 돌려 읽으며 조선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말하게 되어 버리는 우리가 읽지 못하는 현상(시간, , 세계 등등)을 멈춰 가져오는 게 그의 시적 방법론 같다. 그렇기에 그의 인용과 차용과 각주가 넘치는 캠프적 작법이 처음엔 불편했지만 끝에 가서는 이해가 됐다. 그리고 단순히 방법론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타르코프스키의 걸작 중 하나인 희생의 주인공 알렉산더가 누구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하고 광인이 되어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계시를 받았듯이 김현 시인도 기꺼이 그러하리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술가로서 나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 광기는 누구도 볼 수 없고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시인의 말) )

 

예술에 있어서는 개성이 진실임을 판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좀더 보편적이고 좀더 높은 이념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예술가란 자기 자신에게 마치 기적과 같이 부여된 재능에 대해 소위 관세를 물어야만 하는 하인이다. 진정한 개성이란 오로지 희생을 통해 얻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영화 예술의 미학과 시학

 

희생의 시 쓰기를 하는 시인은 빛은 사실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나는 그것이 최초도 최후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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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2-11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칼로 얼굴을 찢는다‘는 문장을 읽으니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눈동자를 칼로 가르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AgalmA 2018-02-12 23:11   좋아요 1 | URL
전체 시를 보면 회화 사조(입체파, 초현실주의 등등)들을 풀어 쓴 거 같은데 이 시집에 영화도 많이 삽입되어 있기도 해서 그런 상상이 되실 만도 하죠. 자세한 내막은 시인만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