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책을 대부분 팔았기 때문에 다시 샀다.
또 읽어도 역시 좋군!
기분이 안 좋을 때
하루키, 책과 맥주, 피자, 디저트, 구구크러스터 .... 끊을 수가 없어. 왜죠.


이런 날은
레코드를 아무렇게나 정리하는 정신 나간 난쟁이가 나오는 하루키 단편을 보는 것도 좋겠지.

"꿈에 난쟁이가 나타나 춤을 추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것이 꿈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꿈속에서도 몹시 지쳐 있었다."
ㅡ 「춤추는 난쟁이」첫 문장

 

난쟁이와 얘기하며 포도를 먹는 주인공에 맞춰 나는 방울 토마토를 먹었다. 왜 포도야? 꿈이라서?

리처드 브라우티건 《워터멜론 슈가에서》와 연관성을 떼기 어려운 단편이지만 그래도 좋다.
「헛간을 태우다」라는 같은 제목의 포크너 단편을 읽은 적도 없었고 포크너의 단편인 줄도 모르고 제목을 썼다고 말하고 있듯이 「춤추는 난쟁이」와 《워터멜론 슈가에서》 유사함은 단지 내가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나도 아무도 모르게 헛간을 태우고 싶어서 소심하게 쓰레기통을 태우기도 했는데...
삶이 너무도 소모적이고 보잘 것 없이 느껴지니
불안보다 불쾌가 더 많은 인생을 어찌 하란 말인가!
「헛간을 태우다」 단편 참 좋아하는데 이창동 감독 내 취향 저격했어!
《버닝》 꼭 보러 간다! 



「반딧불이」, 「비 오는 날의 여자 #241 · #242」를 제외하고 이전에 읽었던 단편들이었지만 다시 읽어도 다 수작이었다. 짧은 여행용에는 좋지만 긴 여행에는 추천하기 어렵다. 너무 잘 읽혀서! 뭔가 엄청난 걸 말해 줄 건가 기대했는데 작가의 말  「내 작품을 말한다」 너무 짧아 아쉬웠다. 그게 또 하루키 스타일이긴 하지만서도...


「헛간을 태우다」에 나오는 이상한 선곡처럼 마일스 데이비스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틀어 보았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속에 나오는 묘한 버스를 타고 가는 왼쪽 귀가 안 들리는 불안한 소년이 된 기분이 잠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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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8-05-05 0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너무 하루키 다워요. ^^하루키가 이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다시 샀다˝는 대목이 왜 이리 반갑죠?

단발머리 2018-05-05 07:56   좋아요 1 | URL
blanca님 말씀이 딱이네요!!
사진이 너무 하루키다와요~
하루키 읽다가 하루키처럼 되어버린 Agalma님!!

AgalmA 2018-05-06 14:57   좋아요 0 | URL
음...하루키 캐리커처 제가 그린 걸 하루키가 봐 줬으면 싶은데요ㅎㅎ; 봐도 좋아요 같은 건 안 누를 거 같고 ˝음...이게 나? 그렇군˝ 하고 말 거 같은ㅎㅎ;;

그...그런가요. blanca님과 단발머리님이 그렇다고 하시니 그런가보다 싶지 저는 저 사진에서 하루키다운 걸 전혀 모르겠어요^^;;; 땅콩껍질이라도 수북이 있으면 또 모를까ㅎㄱㅎ;;

페크pek0501 2018-05-05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제목에 꽂혀 들어왔어요.
저도 하루키 책은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AgalmA 2018-05-06 15:09   좋아요 0 | URL
하루키에게서 얻는 위안들이 다들 있는 거 같아 훈훈하네요^^

북프리쿠키 2018-05-05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별한 맛은 없지만, 그 점이 특별한.
지치면 다시 찾는 건강식? 하루키 좋아요^^;

AgalmA 2018-05-06 15:11   좋아요 1 | URL
레시피도 잔뜩 주고, 음악 가이드도 잔뜩 주고, 여행 가이드, 체력 관리(마라톤) 조언 .... 뭐 어디든 도움이 되는 선생이랄까요ㅎ

양철나무꾼 2018-05-08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의 그림체는 무궁무진하군요.
하루키 그림체 이뻐요~^^

AgalmA 2018-05-10 16:05   좋아요 0 | URL
애정이 있어서 더 그런 걸까요^^ . 감사요/ 헤헤
 
다동력 -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힘
호리에 다카후미 지음, 김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다동력(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힘)’은 대량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기 위한 삶의 방식이다.”(p199)
 
성공하기 위한 마음 자세와 비법을 알려 준다는 자기계발서는 몇 권만 읽어봐도 핵심 줄기는 거의 동일하다. 호기심 천국이 될 것과 시간 관리를 잘 하라는 것. 이 책도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다.
 
흔히 꾸준함성실함을 미덕처럼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 안주창의적인 도전 의식의 결여라는 결점도 있다는 걸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다동력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일에 끊임없이 빠져드는 힘이라고 말하며 균형 따위 생각하지 말고 편향적, 극단적으로한 가지 일에 푹 빠져들라고 조언한다.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들면 그 분야의 진수를 알게 되어 다른 곳에도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싫증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어떤 일에 능숙해졌을 때 싫증은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고 다른 도전 거리를 찾는 성장의 신호로 읽을 수 있다.

일견 저자 말이 모순으로 들릴 수도 있다. 좋아하는 거 마음껏 하라고 하면서 깊게 파는 성실성은 소용없다 말하니까. 재미에 빠져 무언가에 심취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터득한 노하우로 다른 것에도 순간적 집중과 요령을 발휘할 수 있다. 다동력은 여러 가지를 되는 대로 얕게 파는 건 아니다. 하나가 또 하나를 끌어들이며 함께 추진되는 과정을 말한다.
 
하지 않을 일’, ‘상대하지 않을 사람을 정해 놓고 하루 24시간 중에서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 시간을 줄여 나가는 것은 나 자신의 시간을 획득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이다. 이 대전제를 바탕으로 모든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해나갈 궁리를 하게 된다. 비정할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완벽할 수도 없다. 호리에 씨의 추진력은 이런 선택과 배제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걸 참고해 각자 능력껏 조율할밖에^^.
 
“‘어떻게 이 사람은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모두 원액을 만들고 있다.” 그들의 발언이나 아이디어에 많은 사람이 열광하고 움직이게 된다. 즉 효과가 발생하면 증폭되기 마련이다. ‘원액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원액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는 가지와 잎이 뻗어 나갈 수 있게 교양 지식을 쌓는데 노력을 기해야 한다. 창피를 두려워하지 말고 물어보거나 구글링 등으로 즉각 수정해 나간다. 자신의 내부에서 논점이나 의문을 제대로 정리해 좋은 질문능력을 키워야 한다. “좋은 질문을 하지 못하면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고속으로 진행할 수 없다.” 논점을 명확히 하며 정보를 모은 것을 수렴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배제하는 습관도 중요하다.

 

HIU 참가자에게 살처분당하는 고양이가 불쌍한데 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해 좀 더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질문자는 살처분당하는 고양이가 불쌍하다”, “왜 다들 좀 더 행동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감정론은 영원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ㅡ 「5장 자신의 분신에게 일을 시키는 비법‘18. 회의의 99퍼센트는 필요 없다중에서 

저자는 빠르게 일을 진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마트폰 최대한 활용하기, 속도가 아니라 리듬으로 진행하기(ex-끝나지 않는 업무를 노동 시간 증가로 해결하려 않는 것), 일의 정체가 일어나지 않게 끊임없이 궁리하기 등이다.

 

 

재해나 사고 현장에서는 긴급 파견된 의사가 트리아지라고 부르는, 치료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한 부상자 분류 작업을 즉단 즉결로 진행한다. 대량의 부상자와 이재민이 넘쳐나는 현장에서는 즉시 구명 구급 의료를 실시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환자를 최우선으로 치료한다. 그런 다음 중상자를 치료하고, 부상이 가벼운 환자는 미안하지만 마지막까지 기다리게 한다. 재해나 사고 현장에서는 냉정하게 트리아지 실시하지 않으면 구할 수 있는 목숨도 구하지 못하게 된다.
이 작업을 다른 업무에서도 실시해야 한다. 일을 못하는 사람, 일처리 속도가 느린 사람은 시작 단계에서 업무 분류 작업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시작하기 때문에 중요한 업무와 아무래도 상관없는 업무가 뒤섞여 혼돈 상태가 되는 것이다. ㅡ 「6장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업무술, ‘21. 한가한 사람일수록 답신이 늦고, 바쁜 사람일수록 답신이 빠르다중에서  

충분한 ​수면과 건강 관리는 기본 조건이고, 저자의 조언 중 발상의 순서도 중요하게 체크해 볼 부분이다

 

○○을 하고 싶다. → ○○가 필요하다가 되어야 하는데, ‘○○을 가지고 있다. → ○○을 하지 않으면 아깝다같은 발상을 하면 대체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
ㅡ 「8장 인생에 목적 따위는 필요 없다, ‘29. 자산이 사람을 망친다중에서

저자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다. 목적 따위 두지 않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잃지 않기 때문에 스트레스 없이 놀이경계 없이 자연스레 하루 24시간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현재 생활이 정체되어 있다는 고민에 싸여 있다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재점검해보는 것도 좋겠다. 삶이 재미없고 힘든 것은 삶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 생각의 발상이나 비효율적 시간 관리 때문일 수도 있다. 다행히 2시간 이내로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니 당신의 시간을 크게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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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긴 침묵)

  파이 파텔 : “그래서 내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드나요?”

  오카모토 : “아니, 마음에 들었습니다. 안 그런가, 아츠로? 당신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기억할 거예요.”

  치바 : “그럴 겁니다.”

  (침묵)

  오카모토 : “한데 우리가 조사를 해야 돼서,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진짜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네.”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를 원하신다?”

  “저…… 그건 아니고.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군요.”

  “뭔가 말하면, 어쨌건 이야기가 되지 않나요?”

  “저…… 영어에서는 그렇겠지요. 일본어로 이야기라 하면 ‘창작’의 요소가 들어가게 돼요. 우리는 창작을 원하지 않아요. 영어로 ‘직설적인 사실’만 원하죠.”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저…….”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하! 하! 하! 정말 똑똑하군요, 파텔.”

  치바 :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겁니까?”

  “나도 몰라.”

  파이 파텔 : “현실을 반영하는 언어를 원하나요?”


  “그래요.”

  “현실에 반하지 않는 언어요?”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호랑이는 현실에 반하지 않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이제 호랑이 이야기는 그만해요.”

  “두 분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놀라지 않을 이야기를 기대하겠죠. 이미 아는 바를 확인시켜줄 이야기를 말이에요. 더 높거나 더 멀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 당신들은 무덤덤한 이야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붙박이장 같은 이야기. 메마르고 부풀리지 않는 사실적인 이야기.”

  “저…….”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를 기다리죠.”

  “네!”

  “호랑이나 오랑우탄이 안 나오는.”

  “맞아요.”

  “하이에나나 얼룩말이 안 나오는 이야기."

1977년 7월 2일에 침몰한 배에서 탈출해 1978년 2월 14일 멕시코 해안에 도착할 때까지 227일 동안 인도 소년 피신 몰리토 파텔이 살아낸 해양 모험담. 

영화를 보고 한참만에 소설을 읽었다. 스펙터클한 영상이 압도할지라도 영화가 다 담지 못하는 매력이 역시 글에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날렵한 호랑이도, 좁디좁은 구명보트도, 바다도 눈부시게 거기 있었다. 이 모험을 이야기라고 생각했기에 즐겼고, 오랑우탄과 하이에나와 얼룩말이 어머니와 프랑스 요리사와 선원으로 바뀌는 대목에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영화가 담지 않은 혹은 못한 명장면도 발견했다. 영양실조에 눈먼 호랑이와 파이가 조난 당해 떠돌던 또 다른 눈먼 자를 잡아먹는 환상적인 이야기. 이 장면은 파이가 요리사를 죽이고 먹는 장면을 우화처럼 나타낸 것처럼 보인다. 공포와 절망감을 극복하지 못할 때 동물적 본능은 우리의 이성보다 종교보다 빠르고 강하다. 본능조차 우리가 가고자 하고 믿고자 하는 방향 아니던가. 파이는 종교가 빛이라고 생각했고 빛을 만끽하듯 모든 종교를 다 받아들였던 아이였다. 채식주의자였지만 거북을 어떻게 먹어야 가장 효과적일지 고심해야 했고 시간을 정해 예배를 올리고 리처드 파커를 보살폈다. 이율배반일까. 마침내 지상에 도착했을 때 혼자가 되고 호랑이가 사라지고 나자 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안간힘을 쓰다가 모래사장에서 쓰려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완전히 혼자였다. 가족도 없는데 이제 리처드 파커도 없이 혼자가 되어버렸다. 신마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신도 없었다. 보드랍고, 단단하고, 드넓은 이 해변은 신의 뺨 같았고, 내가 거기 있자 어디선가 두 눈이 기쁨으로 번득이고 입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몇 시간 후, 나와 같은 종족이 날 발견했다."

살아남은 파이가 동물학자이자 종교학자가 된 건 인간이 양극단 사이에서 평생 살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인간은 권태와 공포를 벗어날 수 없고 이성의 힘 없이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바다에서든 육지에서든 우주에서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이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 삶이다. 호랑이는 냉혈한 프랑스 요리사이자 무시무시한 생존본능이면서 동시에 파이가 이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파수꾼이기도 했다. 우리는 타인에게 더없는 맹수이자 지옥일 수도 있고 구원자이자 천국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날씨보다 더 변화무쌍한 게 사람 맘이라 모두가 이리도 힘들다. 궂은 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다소 희망일까. 순수한 아이로서 신을 받아들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불행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참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다. 그런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수수께끼로 남기면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할수록 사라진 리처드 파커의 뒷모습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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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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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기와 편지를 구분한다. 시와 소설도 구분한다. 그런데 일기는 나에게 쓰는 편지로 은유되기도 하고, 일기처럼 쓴 시와 소설, 편지의 형식을 빌린 여러 창작물이 나오기도 한다. 작품은 작가의 것이지만 이해는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즉 어떤 것도 절대적 위치에 있지 않다. 우리는 한 번만 사는 인생이라 무엇이든 답처럼 명확하길 바란다. 세계가 우리가 정말 명확하긴 한가? 인간의 가정에 지나지 않는 시간까지 포함해 4차원만 볼 수 있는 우리가. 그러나 결정론자들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금방 사실로 드러날 것들ㅡ원자 폭탄 이름, 미치오 가쿠 이름, 랄프 로렌을 허구로 변환했다. ? 사실과 정보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럴듯하다고 여기며 기억으로 저장해가며 읽어 갈 테고, 허구를 파악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사람은 대번에 흥미를 잃든지 진의가 뭔지 궁금해하며 따라갈 것이다. 즉 소설 자체 이야기뿐 아니라 독자가 만든 여러 갈래의 길로 아주 복잡한 소설 읽기가 된다. 그러니까 왜?
 
이 이야기는 종수의 일기이자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소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뛰어난 영재였던 그가 타국에서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을 때, 인생의 실패자가 될 거라 여겼던 수영이 보낸 청첩장(무려 7년 전)을 발견하는 순간은 묘한 도치를 보여준다.
수영이 종수에게 번역을 요청한 디어 랄프 로렌으로 시작한 편지도, 그들이 편지를 쓰기 위해 함께했던 시간도 이제 없지만 디어 종수로 시작하는 수영의 편지는 미처 사라지지 않은 증거로 남아 있다. 수영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디어의 의미처럼 아련하게. 랄프 로렌 컬렉션을 완성하기 위해 금지된 알바를 하고 수집품에 없는 시계를 가지기 위해 일기 같은 글로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보내겠다는 수영을 종수는 한심하게 여겼지만 부모 뜻에 따라 공부만 좇았던 종수의 삶이 더 무력했다는 걸 그는 이제야 깨닫는다. 그들의 편지가 랄프 로렌에게 도착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때로부터 9년 뒤 종수는 랄프 로렌의 생애를 추적한다. 이 세계에서는 살아 있는 랄프 로렌이 죽어 있는 소설의 세계로 더 깊숙이.
 
인터뷰어 중 한 사람이었던 헨리 카터의 말(“나의 말이 나의 기억을 불러오는군요”)처럼 더너웨이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며 나의 기억이 나의 기억을 불러온다고 종수가 오열하듯이 이 소설이 불러오는 역사와 기억과 말의 소용돌이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불러온다. 우리가 열광했던 것들, 우리가 놓쳤던 것들, 우리가 실패했던 것들, 우리가 좇았던 수많은 의미와 무의미들. 우리가 몰두한 건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소설 속 다른 인물들도 다르지 않다. 미래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걸 알면서도 중요한 학창 시절에 수영은 랄프 로렌에 집착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을 기대할 정도로 대단한 기쿠 박사는 본업만큼 열중했던 피겨스케이팅을 수상 실패를 겪을 때엔 더 몰두했다. 천재적인 시계 수리공이었던 조셉 프랭클은 본업을 키우지 않고 매번 얻어터지는 권투에 일흔이 넘을 때까지 몰두했다. 사업 확장에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랄프 로렌은 시계 사업을 거부했다. 타인의 삶을 돌보는 입주 간호사 섀넌 헤이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돌보는 환자가 죽어야 다른 환자나 자신을 돌볼 수 있다. 종수는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전혀 몰랐던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들 또한 랄프 로렌에 대해 말하면서 잊었던 다른 기억들을 떠올렸다. 어린 랄프 로렌을 거둬 키웠지만 배신당한 조셉 프랭클의 더 기이한 과거, 무례하고 직설적이기만 한 줄 알았던 섀넌 헤이스의 비밀스러움, 백네 살의 레이첼 잭슨이 끝까지 감추려 한 것들. 인터뷰 때마다 잠드는 잭슨 할머니가 잠이 들면 자신의 내밀함을 고백하던 종수. 이들에게 무엇이 진실이고 소중한 것일까. 그것들은 타인의 눈에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다. 절대 찢지 말라는 경고가 붙었던 잡지를 찢었던 종수는 섀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연극을 하려고 잡지 조각을 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잡지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햄버거 가게 주인이 종수에게 도둑맞은 고양이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그에게 고양이가 무엇보다 소중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말한들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까지고 우리의 바람을 담은 말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데도 말을 이야기를 행동을 하다 보면 그냥 시간 낭비가 아닐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린 글을 쓰고 읽는 시간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중 누군가는 잊고, 누군가는 뒤늦게 찾아 나서고, 누군가는 영영 안녕을 고하더라도.
 
 
 
ps) 뉴욕 배경에 이민자들과 외톨이들의 잃어버린 기억들,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는 동선들이 그 지역 소설가들(폴 오스터, 니콜 크라우스, 조너선 사프란 포어)과 많이 닮았다는 걸 빼면 한국에서 보기 드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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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여름을 이 하루에 레이 브래드버리 소설집 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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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해당하는 멜랑콜리의 묘약이 판타지가 더 강했다면 이 책 온 여름을 이 하루에SF가 더 두드러지는데 그의 감각적 문체와 서정성으로 SF 소설이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소재가 SF라는 걸 빼면 영락없이 서정문학이다. 최근 출간된 시월의 저택은 공포물 종합이라고 봐야 할 텐데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으니 레이 브래드버리가 어떤 작가인지 슬슬 그림이 잡혀간다.

 

표제작 온 여름을 이 하루에」는 시작부터 아주 인상적인 단편이다. 비만 내리는 금성에 7년 만에 태양이 딱 한 시간 나타나는 광경을 그리는데 그의 감각적인 문체가 빛을 발한다. 이런 상황은 비를 기다리던 단편 영원히 비가 내린 날(멜랑콜리의 묘약)과 묘하게 겹친다. 이 단편에서는 비가 내리는 풍경을 멋지게 묘사했다. 

 

비슷한 소재의 단편들 비교도 재밌다.

전 세계 아이들이 외계인에 포섭되는 걸 그린 침공놀이(멜랑콜리의 묘약)나의 지하실로 오세요(온 여름을 이 하루에)

기이한 증상의 소년들 이야기. 열병(멜랑콜리의 묘약), 어서 와, 잘 가(온 여름을 이 하루에)

노년의 외로움을 그린 이야기. 길 떠날 시간(멜랑콜리의 묘약), 보이지 않는 소년(온 여름을 이 하루에)

고독한 인간의 모습, 우리가 잃어가는 과거에 대한 연민은 그의 단편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다. 시간 여행을 해도 어리석어 구원자를 놓치거나(그분) 미래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게 된다(그대의 시간여행). 온 여름을 이 하루에에서 그걸 가장 잘 나타낸 단편은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라고 생각한다. 미래 세계(2349년... 이때까지 지구가 안 망하다니)에 깨어난 좀비가 죽음과 공포를 모르는 지구인들을 죽여 자신의 아군으로 만들려는 상황 설정이 매우 흥미롭다.

 

어둠은 공포야. 그는 작은 집들을 향해 말없이 외쳤다. 어둠은 대조를 위해 존재한다고. 마땅히 두려워해야지! 이 세계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에드거 앨런 포를, 거창한 말을 멋들어지게 써낸 러브크래프트를 파괴하고, 핼러윈 가면을 태워버리고, 호박등을 없애버렸지! 내가 밤을 예전 모습으로 되돌려놓겠어. 사람들이 도시를 등불로 환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모습으로. 아이들이 어둠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로.” 

그러나 시민 한 사람이 그렇지 못하듯 시체 한 구(?)도 원대한 계획에 성공하지 못 한다. 화성에 남아 있다는 시체 친구들이라도 만났다면 좋았으련만.

 

브래드버리가 토마토 수프 깡통에 자신의 유해를 담아 화성에 묻어 달라고 할 정도로 화성을 사랑했던 만큼 온 여름을 이 하루에에는 화성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다. 지구를 탈출해 정착하는 희망봉처럼 화성을 그리고 있지만 지구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가면서 모호해지는 게 딱히 자유롭다거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백만 년 동안의 소풍, 검은 얼굴, 금빛 눈동자). 이 두 단편은 2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간 40년대 후반 발표된 작품인 걸 생각할 때 작가는 희망을 올곳이 긍정으로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모든 게 무너져 예술작품마저 침 세례를 맞는 경멸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파괴되는 캔버스 조각 하나를 구해내는 소년이 그 조각에서 미소를 발견하게 되는 미소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땅속 여자의 비명을 듣고 하루 종일 구출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소녀를 그린 비명 지르는 여자같은 단편을 보면 브래드버리는 인간과 세계에 끝끝내 희망을 품으려 한 따뜻한 작가였다고 생각한다. 2053년에는 밤에 산책하는 것조차 정신병자 취급당할(고독한 산책자) 일로 그리고 있지만, 살고 싶은 맘, 지키고 싶은 것들, 나누고 싶은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의 본질적인 삶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ps)

여름이 오기 전에 《온 여름을 이 하루에》까지 다 읽어서 속이 좀 시원하다. 이제 약간 으스스할 《시월의 저택》이 남았군~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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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1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8-04-15 0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고 난 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영혼이 자유로워져서 우주로도 갈 수 있다면 괜찮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소설이 있기도 하다고 들었습니다 몸이 아닌 영혼만이 우주로 간다는...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레이 브레드버리가 화성에 갔기를... 여기에도 상상력 가득한 이야기가 담겼군요 좀비가 혼자라는 거 조금 재미있기도 하면서 안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희선

AgalmA 2018-04-15 09:51   좋아요 0 | URL
영혼이 과연 있는 것일까 저는 점점 의문인데요. 살아 있을 때 어떤 지표로서 도움이 된다면 믿는다고 나쁠 건 없겠죠^^

단발머리 2019-03-04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읽고 싶어요’에 넣어 두었는데 북플이 아갈마님 리뷰 읽으라 추천해 주네요. 제가 근 며칠 레이 브래드버리에 감동하고 있거든요. 아갈마님 많이 읽으셨네요. 레이의 소설과 아갈마님 리뷰의 환상 조화~~
기대되는 시간이 제 앞에 펼쳐졌네요 ㅎㅎ

AgalmA 2019-03-08 10:20   좋아요 0 | URL
레이 브래드버리 책 많이 샀는데 안 읽은 것도 꽤 있어요^^; 다른 책들에 늘 치이는 인생이다보니;;
저도 레이 브래드버리 처음 읽었을 때 정말 신선하고 신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