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일의 사물들

 


일요일이다. 내내 사물들로만 일기를 쓴 적 있다. 오늘도 한없는 사물에 대한 내 사랑을 가늠하고, 내 멋대로 스승이자 동지로 삼은 프랑시스 퐁주를 떠올린다. 대상이 우리 머릿속의 추(錘)라고 말한 시인, 프랑시스 퐁주. 프랑시스 퐁주. 끝없이 대상이 되는 우리들.

 

 

인간은 그 중력의 중심이 그 자신에게 있지 않은 이상한 육체이다.

우리 영혼은 타동사적이다. 영혼에게는 직접 보어처럼 영혼을 즉각 감동시키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것은 가장 심각한 관계의 문제이다(소유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의 관계이다).

다른 어떤 인간보다 예술가는 그 짐을 받아들이고, 타격을 받은 표시를 한다.

 

프랑시스 퐁주 대상이 시학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라면 글쓰기 전에 '무엇'은 부지불식간에라도 선취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예술가들은 어떻게를 골몰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평형이지 않다. 프랑시스 퐁주는 평형추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대상들을 가져와 라는 저울에 올린다. 심연에서는 그것이 무용하다는 걸 우리는 안다. 데리다는 『시네 퐁주에서 퐁주의 주관적이지만 예리하고 무용한 작업을 얼마나 멋지게 분석했던가국내 번역은 괴발개발이었지만;

 










 

출퇴근 길에 사물에 대한 에세이 당신의 사물들』을 읽었다. 아무래도 사물에 좀 더 민감한 시인들이 주 필진이다. 사물을 대하는 네 가지 감각 느끼다/보다/듣다/만지다분류 항목에 따라 이 책에 거론된 사물들은 다음과 같다.

 

1부 느끼다 - 손삽, 숟가락, 사과, 쌍둥이칼, 알약, 오븐, 보자기, 탁주, 은수저, 칫솔, 겨울 양말, 의자, 장롱

2부 보다 등잔, 상자, 샤넬, 안경, 엽서, 여권, 팔찌, 꽃병, 전기스탠드, 신호등, 커튼, 클립

3부 듣다 콘돔, 베개, 침낭, 지도, 털실과 코바늘, 도장, , 버스, 우주선, 음반, 크리스마스트리, 우편함

4부 만지다 머플러, 봇짐, 바늘, 가발, 팔찌, 연필깎이, 교복, 맨발, 매니큐어, 플랫슈즈, 하이힐

 



여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물은 없다. 다만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물은 있을 것이다. ?

글을 읽으며ㅡ당연하게도ㅡ놀라운 것은 어떤 전형성이다. 40년대 생부터 90년대 생까지 필자들의 세대 간격은 넓으나 그들 사유는 한국이란 시대와 정서에 밀착해 있다. 좋다 나쁘다 평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시 나-라는 갇힌 세, 시대사고 틀의 작동을 보는 씁쓸함이랄까. 그래서 새롭기가 힘들며 쉽게 공감에 기댄다. 하지만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당신의 문장은 당신의 계보와 족적을 남긴다

 

 

나는 남녀노소, 어떤 계층, 어떤 국적도 거부하고 싶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구분점에서 달아나고 싶다. 그러나 내가 가져오는 문장도 내 족적을 남긴다.


 

 

어제를 살해한 오늘의 태양처럼 빛나고 향기나는 사과들. 사과는 사과나무를 불태운다. 사과나무는 아름답다

이수명 사과


얼굴이 붉어진다는 사실을 자각한 아이가 자신의 변화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더욱 얼굴이 붉어지게 되고처음 그리되게 만든 동기보다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다는 사실 그 자체를 더 수치스러워하듯이그것은 뱉을 수도삼킬 수도 없는 상태로 나를 공포스럽게 하곤 했다

ㅡ 김경후 쌍둥이칼」 

 

겉면이 살짝 그을린 치즈의 노릇노릇한 문양은 오븐만의 확실한 인장이다.

온갖 가능성를 함축한 미지의 창문을 닫고 시간을 맞춘다새로이 도래하는 낯선 세계를 만나러오븐은 먼 세계를 향해 출발하는 뜨거운 방이다

ㅡ 이혜미 오븐」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단칸방이었다나에게 독립된 공간이 생길 때는가족들이 각자 다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뿐이었다

ㅡ 권민경겨울양말」 

 

등불을 보면 생을 마감한 뒤에 남는 것은 그가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나눠줬던 것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박물관에서 제일 많은 조선 시대 등잔 중에 오드리 헵번을 닮은 등잔은 정말 늘씬했고지금의 플래시와 같은 조족등은 신기했다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의 제등도 있었고잊혀간 등잔을 보는 동안 우리 조상이 얼마나 근사한지 감탄했다낡아서 더 귀해 보이는 정겨운 등잔매혹과 행운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ㅡ 신현림 등잔」 

 

 


 

너무 사소하고 간단히 잊히지만 언제든지 무언가를 묶어내는 역할에는 한결같다그러면서 이 도구적 존재자의 성실함이 나에게 매번 확인시켜주는 것은 존재의 외로움과 외로움의 빛나는 단면이다쓸데없이 자존심이 상하거나 괜한 피해 의식으로 고통스러울 때 클립은 오히려 소슬한 목소리가 된다ㅡ 김수우 클립」 

 

베개는 잠들고 싶은 머리를 위해 고안된 단순한 물품이라기보다는머리가 잠의 문을 찾는 장소다.

베개 방랑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시중에 좋다는 베개는 수집하듯이 사서 이것저것 다 사용해보지만어느 베개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가령 인간이 돌고래처럼 생겼다면 베개는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일 것이다ㅡ 김행숙 베개」 

 

매일 밤 죽음을 연습하는 장소였다ㅡ 안희연 침낭」 

 

내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불러댔다는 이름나에게 호명당한 그는 누구였을까절박한 순간에 꼭 불러내고 싶은 그 누구나에게 그럴 만한 사람이 정말 있었던가간호사에게 혹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나도 모르는 그 이름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듯 입안이 얼얼했다ㅡ 최문자 」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단지 우연의 일치로 이루어진 일에 대해 우리는 더 깊게 해석하고 감응한다ㅡ 석지연 버스 」 



   






 

당신의 사물들을 덮으며 나는 다짐하듯 생각한다

 어느 날엔가 허탈한 매정함으로 바뀌는 가볍고 편안한 공감을 얻기보다 외롭고 불편한 생각을 세상에 던지리라. 그때 두 손 맞잡지 않아도 우리는 동지가 되리라.

 기다렸어요! 미셸 우엘벡 씨, 그래서 우리는 동지입니까, 아닙니까

 하하하. 헛소리하지 말라고요? 맞아요. 아하하하하))))






 

 

 




 

 

미셸 우엘벡이 무려 미셸 우엘벡으로 출연한! 영화 <미셸 우엘벡 납치 사건>(2014)을 놓친 게 두고두고 안탑!



이웃 A님이 알려 주셨는데, 우엘벡의 끌레망이 사망해서 눈물겨움...

 

 

 


http://www.30millionsdamis.fr/actualites/article/4401-le-monde-litteraire-pleure-clement-mort-il-y-a-un-an/






 


 

 

§§ 이웃의 사물들


 

 

서니데이님 소잉데이지 샵 http://storefarm.naver.com/sewingdaisy/products/251789266


티코스터. 카페에서는 자주 사용해 보았지만 내 돈 주고 사긴 처음이다. 선물하려고 사기도 했다. 

티코스터에 대한 에세이를 쓰게 된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쓰게 될까.  


 


 


 

 


익명을 부탁하셔서 밝힐 수 없다. 

정말 저렴한 값으로 책을 파셔서 고마웠는데, 책 보다 선물이 더 많아 블록버스터보다 충격과 감동과 당황)))

(공식 알라딘 선물은 빼고- 내 마일리지 주잖아ㅎ!) 공짜 선물이 나는 무척 부담스럽다. 어떻게 갚아야 하나 고심 중...

『벌들의 죽음여름용으로 딱이다. 헌데 이제나저제나 눈치만;;


 



 


 

 

 

 


 


§§§ 7월의 책들


 

 


이번 달엔 이쯤에서 그만 사야지 하지만..... 

김종건 교수 번역으로 조이스 <율리시스> 범우사 제2판을 팔고 생각의 나무에서 나온 제3판으로 재구입했다. 

<앤디 워홀 일기>를 물리치고 우리집에서 제일 두껍고 무거운 책이 된 거 같다. 

베고 자면 언어의 연금술 꿈을 꾸게 될까?


 


 

 

 

 

도스토옙스키도 동서문화사판으로 다시 모으고 있다. 

신간으로 산 것은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뿐이다. 





 

 

 

 

 

 

 

다 안 읽어보고 권하는 걸 꺼리지만 <그라피티와 거리미술>은 자료 차원에서 소장 강추~
그라피티를 뱅크시의 작품과 영화<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2010)로 대충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라피티를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책~
페이지마다 가득한 수록 작품들도 모두 훌륭하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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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07-19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의 사물들>들은 저도 읽은 책이라, 반갑습니다~~
임시보관함에 어느 사물,에 대한 글을 저장만 했지만.^^

<벌들의 죽음>은 어느 분께 받으셨는지~알 것 같아욤~ㅎㅎㅎ
정말 다정한 선물들을, 깜짝선물로 주시죠~~*^^*
편안하고 좋은 저녁 되세요~~

AgalmA 2015-07-19 18:24   좋아요 0 | URL
사물 애호가라 ˝사물˝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쉽게 눈길을 떼지 못합니다;;;

appletreeje님이 알라디너들을 두루 지지하고 살피시듯 그 분도 알라딘의 보물이시죠 :)
제가 좀 시니컬한 구석도 있지만 사람 간의 情을 바라보는 건 좋아합니다. 사람이라서?ㅎ))

appletreeje님의 저녁의 평안도 기원합니다/

cyrus 2015-07-19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스>는 동서문화사 번역본이 가독성 면에서 좋았습니다. 생각의나무 번역본은 주석이랑 작품해설이 좋았고요.

AgalmA 2015-07-19 23:08   좋아요 0 | URL
한 권으로 해결보기를 바라서 생각의 나무 쪽으로...사, 사실은 표지가 너무 좋아서ㅎ;;
첫 페이지부터 범우사 판과 생각의 나무 판 번역이 조사와 어미 등 많이 바뀐 게 확연해서 김종건 교수님 꾸준히 노력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베케트가 한 때 조이스 비서였었다니 충격;; (안...아울려....) 릴케가 로댕 비서였던 걸 알았을 때 만큼 괴리감-ㅁ-))˝

북다이제스터 2015-07-19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아닌 사람에겐 무엇을 써야할지도 모르면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막연히 공감됩니다.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가> 신간은 과거 책과 달리 어떤가요? 그 책으로 인생이 바뀐 일인으로서 넘 궁금합니다.

AgalmA 2015-07-19 22:41   좋아요 0 | URL
제가 너무 단언식였나요^^; 쉽게 말하면 보고서, 리포트 쓸 때 우리는 무얼 써야 하는 지 알고 쓰잖아요. 도표를 넣을 지 통계는 어떤 걸 채택할 지 개요도 짜고요. 무엇을 쓸 지 모른다면 어떻게 쓸 지도 맥락이 잡히지 않죠. 그래서 저는 함께 간다고 말한 겁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구판을 안봐서 저는 비교가 어렵습니다^^; 이참에 개정판 읽고 인생의 판도가 바뀐 대목 좀 얘기해 주십셩! 궁금하네요. 인생이 바뀌다니!

북다이제스터 2015-07-19 22:38   좋아요 0 | URL
제 어른 선배님들은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고 모두 거리로 나섰다고 하던데요, 전 그 세대는 아니구요. ㅋㅋ 역사 책은 팩트로 서술되어 있지만 전혀 팩트가 아니다라는 진리를 전해 주는 책인데요... 전 진리라는 허울을 파는 직업을 갖고 있다보니, 이 책에서 많이 배우며 많이 반성했습니다. 이 책 읽기 전엔 잘 몰랐거든요. ㅠㅠ

AgalmA 2015-07-19 22:43   좋아요 0 | URL
아,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과학이 패러다임에 따라 나온다고 말한 대목과 비슷한 거군요!

북다이제스터 2015-07-19 22:53   좋아요 0 | URL
글쿠, 일반인들에게는 뭘 써야 할지 아는 것만도 정말 어마무시한 일이란 걸 아갈마님은 정말 모르실거예요. ㅠㅠ 훌~~~~쩍 ㅠㅠ

AgalmA 2015-07-19 22:56   좋아요 0 | URL
제가 쉽게 생각한다고 누가 그럽니까(화들짝))))...(똑똑, 저 위에 니가 그렇게 쓴 거 같대.....)
저도 글쓰기 어려워요ㅜㅜ....

2015-07-19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9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9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9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5-07-19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롭고 불편한 생각을 세상에 던진다! 당신을 알라딘의 우엘벡으로 임명합니다. 외롭지 않도록 공감 꾸준히 할게요... ㅎㅎ 그림도 있고 보르헤스 보틀도 있고 티코스터에 책까지 *_* 오늘 페이퍼는 꽉 차 있어요!!

생각의 나무 율리시즈는 엄청 올랐던데 잘 구하셨군요! 그라피티 책은 이번에 「중세」 나온다고 해서 검색하다 봤는데 어떤가요? 시공아트 요즘 열일 하는 듯 해요^^

AgalmA 2015-07-20 01:34   좋아요 1 | URL
오, 알라딘의 우엘벡! 정녕 제가 그리 해도 될까요 (*_ _*).... 생각도 못해 봤는데 뭔가 그림이 잡히니 하고 싶은데요. (((비비적 비비적)));;;.
공감버튼은 저도 꾸준히 투입해야 되는 코인 거래 같아져서 요즘은 그것도 싫더라고요ㅎㅎ; 가끔 구구절절 얘기 삼매경이나ㅋ
유리보틀이랑 북 스탠드도 갖고 싶었는데 중고 구매에 예산이 너무 투입돼서 신간 사기가 버거워요ㅜㅜ

<율리시스> 반값에 올라온 거 보고 제 눈을 의심! 책 상태도 좋고 완전 좋았어요)))
<그라피티와 거리미술> 책 정말 좋습니다. 여백많은 허접한 미술책도 아니고, 애너 바츠와베크가 미술사학과 도시공간, 시각예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라(박사 학위도 받고!) 이 책은 에세이식이 아니라 전문 서적에 가까워 배우는 것도 얻을 것도 많아요. 제가 이 분야에서 알고 싶었던 것을 말해주는 책^^ 무슨 책이 여백이 없어!....서 좋아요ㅎㅋㅎ;; 과장 비스킷 한 개 얹는다 치고 책을 펼쳤을 때 바스키아를 처음 만났을 때 흥분감을 준다고까지 하겠습니다. 물론 바스키아가 이미 거리미술의 대가였지만ㅎ 그래도 가격이 좀 비싸서 중고로 기다리시거나 도서관 신청을 추천;;

수이 2015-07-1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익명을 요구한 그분_ 어쩐지 저는 알 것만 같은 기분 호홋_
오랜만에 온 거 같은 이 기분은 뭔지_ 저 요즘 책 안 읽는데 아갈마님 공간에 오면 역시 찔려요 핫

AgalmA 2015-07-20 01:35   좋아요 0 | URL
모르면 간첩? ㅎㅎ
제 주절거림에 왜 혼자 찔려하시고 그래요~
야나문 열리면 책 읽을 시간 더 없으실텐데 걱정이군요. 제 지인도 핸드드립 가게 내고는 쉬더라도 책은 읽기 싫다고;;;

양철나무꾼 2015-07-19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간혹 그럴때가 있는데, 전 사물을 의인화하는걸 즐겨요. 그래도 예전만큼은 아닌데, 그렇게 된 근원에는 환자들보면 말이죠, 혼자말을 대화처럼 하는데...이상한 연상이 되면서머리카락이 쭈뼛해서예요. 벌써 혼자서 섬어를 남발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AgalmA 2015-07-20 01:36   좋아요 0 | URL
저도 어려서부터 특별한 대상에게는 이름을 붙여줬어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나 <어린왕자>는 그런 맥락에서도 참 공감이 많이 됐죠.
제 주변에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 많은데(엉;;) 내면의 비틀어진 부분에서 세어나오는 탄식이라 생각하며 넘어가요(저도 종종 그런;;;;). 제가 뭐라 답하면 상대가 뜬금없다는 듯이 쳐다본다거나 공격적이 되는 경우가 있어서....^^;;;;

[그장소] 2015-07-20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알듯도..하고 아닌 듯도 하고~ 뭐 ,제 속 생각이 틀리다고 죽기야 하겠어요?! 그쵸? 모른다고 쫓아와 때리시겠어요?! ㅎㅎㅎ
아,,좋은 분들이 곁에 많아 참 좋아 보여요!

AgalmA 2015-07-21 10:07   좋아요 0 | URL
모른다고 자신을 쥐어박는 건 아니죠ㅎㅎ;;;?
제가 서재 처음 와서 글 올릴 땐 무슨 공터 같아서 혼자 우하하하~~~해댔는데 (그래서 이웃 취소하던 분도 있었고ㅋ;;;) 어느덧 이웃이 참 많아졌죠ㅎ?
이웃인들 서로 살피기 게을리하면 멀어지는 지라 맘고생일 때 있다는 거 모르는 사람 없잖습니까ㅎ;;
독야청청 나홀로 가리라 하는 분들 보면 자유일까 고독일까 싶으면서...
 

 

 

내 이름은 아서 고든 핌이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낸터킷의 존경받는 상인이었다˝ ㅡ 에드가 앨런 포 『아서 고든 핌의 모험』 (1838) 첫 구절

˝내 이름은 이스마일(추방자, 방랑자라는 뜻)이라 부른다. 몇 해 전ㅡ정확하게 언제였는지는 묻지 말아 주길 바란다ㅡ내 주머니는 거의 텅 비고, 육지에는 흥미를 끌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잠시 배라도 타고 세계의 바다를 다녀오자고 생각했다. 우울한 마음을 털어 버리고, 혈액 순환을 조절하고 싶을 때면 나는 이 방법을 취한다. 또 입가에 험상궂은 주름이 늘 때, 특히 우울증이 나를 짓눌러 웬만큼 강하게 도덕적인 자제를 하지 않으면 거리로 뛰쳐나가 남의 모자를 계획적으로 벗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ㅡ그런 때에는 더욱더 되도록 빨리 바다로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게 권총과 총알의 대용물이다.…… ˝ ㅡ 허만 멜빌 『모비 딕』 (1851)  첫 문단

 

 

 

 

 

 


 


 

 

 

§

나는 『아서 고든 핌의 모험』 이 아니었다면 『모비 딕』 도 상당히 달라졌을 거라고 추측한다.
(심심해서는 아니고) 두 작품을 비교해 본 적 있다. 멜빌은 처음엔 포의 영향을 받았을 걸로 짐작한다. 
나중엔 『모비 딕』 을 바다의 돈키호테 같은 서사시적 모험물로 만들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조이스가 멋지게 『율리시즈』 로 또 다른 오디세우스를 만들었듯이.
도입부에 고래에 대한 현학적이면서 장대한 백과 사전식 나열을 보라.


포 『아서 고든 핌의 모험』 은 1837년도부터 뉴욕 신문에 연재되었고, 1838년도에 출간되었다. 뉴요커였던 멜빌은 그것을 읽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1837년도에 초등학교 근무를 하던 멜빌은 1838년도에 <탁상> 단편을 지방지에 게재하고 돌연 대서양을 횡단하는 세인트 로렌스 호의 급사로 항해를 떠난다.
섬에서 군 생활 잠시 한 게 다일 뿐 항해해 본 적도 없이 대단한 항해 소설을 쓴 포와
포경선의 경험, 식인종에게 잡혀 섬에서 억류생활, 군함 생활 등 다양한 해양 경험을 한 멜빌.
『모비딕』 은 1851년 7월에 멜빌이 탈고하여 10월에 런던에서 『the white whale』 로, 11월에 뉴욕에서 『moby dick』 으로 발표, 두 가지의 제목을 따른다. 그래서 국내 번역 제목으로 『백경』, 『모비딕』 두 제목이 있는 것. 예전엔 『백경』이라 많이 말했지만 요즘은 『모비딕』이 일반화되었다.
15년 차이를 두고 있는 이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멜빌이 포의 어떤 점을 능가해 추앙받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이 워낙 기괴한 전개라ㅎㅎ... 처음엔 아동문학 같더니 뒤로 갈수록 호러 판타스틱! 고전 작품 추앙자들이 안 좋아할 만 하지...

흡사 액션물이 공포물로 바뀌던 로버트 로드리게즈 <황혼에서 새벽까지>(영화, 1996) 전개와도 비슷하달까?

 



에드가 앨런 포가 시/소설 작법론을 썼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포의 시론은 칸트와 비견할 만 하다, 아니 그가 생각한 이론이 칸트와 맞아 떨어졌다고 봐야 할까. 내막은 포 자신만이 알겠지)))
포가 소설의 원리로 제시한 것은 "독창성, 간결성, 효과의 통일성과 수학적 치밀성"이다. 
포는 단순히 공포/탐정 그런 식의 규획, 기획으로 작품을 쓴 게 아니다. 
그는 천재적으로 치밀했고, 염세성과 현실의 불운은 수레바퀴처럼 작용했다. 

그의 전기를 보면 눈물이 글썽여진다....흑)))


단언하건대 글(시/소설)은 몰입하고 읽게 만드는 힘 자체다. 그래서 '내용이 곧 형식을 만든다'는 말이 나오는 것.
작가의 가치관과 상상과 의도와 호소가 그 속에 보이지 않게 녹아 있는 것과 설탕 범벅처럼 외부에 돌출되어 있는 것 중 어느 걸 최고라 말하겠는가?  돌출된 재미 때문에 후자를 먼저 선택할 수는 있다. 난 색다른 거~난 고전물 지루하더라~난 도전을 좋아해~영역들도 요즘 파워가 세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최종적 평가에 있어서는 (취향을 접고라도) 전자를 더 최고로 꼽지 않을까.

요즘은 영역 붕괴가 늘어나는 추세라 이 평가도 앞으로 다양해지겠지. 우려되는 것은, 취향이 매체에 의해 휘둘리지 않길 바란다.

결국 무엇을 어떻게 더 많이 담으면서 간결할 것인가, 그 원리를 파악한 자가 작가다. 
가장 미세한 입자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침투한다.


모험 가득하고 시원한 해양소설 읽고 싶어지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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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1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1 1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1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7-0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서 고든 핌>이 발표된 지 30여 년이 지나서 이 소설과 비슷한 재난사고가 일어났었죠. 제비뽑기로 걸려서 잡혀 먹은 사람 이름도 똑같았습니다. 소설 결말이 특이해서 쥘 베른이 ‘빙원의 수수께끼’라는 제목으로 <아서 고든 핌>의 후속편을 쓴 적이 있어요.

AgalmA 2015-07-01 18:27   좋아요 0 | URL
예. 저도 들었습니다. 쥘 베른이 포를 워낙 흠모해 여러가지 패러디해 쓴 책이 더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빙원의 수수께끼>가 원작에 못 미친다고 말들 하던데, 저도 읽어야지 하다가 깜빡 하고 있었어요^^
모험물의 심취자 쥘 베른이 놓칠 리가 없는 작품이죠^^

cyrus 2015-07-01 18:28   좋아요 0 | URL
읽어봤는데 포가 쓴 원작의 모호한 결말을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ㅎㅎㅎ

AgalmA 2015-07-01 18:30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원작의 그 결말의 아우라! 다시 또 읽어보고 싶네요^^!

북다이제스터 2015-07-01 2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비문학에 균형 잡힌 분 보면 신기하고 솔직히 부럽습니다. 내용(결론)은 동일해도 형식이 다른 것에 어찌 적응할 수 있을지..........아직 의문입니다.

AgalmA 2015-07-02 05:22   좋아요 0 | URL
저마다의 개성이 있듯이 그런 것 아니겠어요^^...다양한 체험이 그래서 중요한 거 같아요. 그러나 서커스 경험이 있다고 해서 디안 아버스처럼 멋진 곡예사들 사진을 찍거나 카프카의 단편 <단식곡예사>를 쓸 수 없는 것처럼 자신만의 표현능력이 있는 거 같긴 해요.
적응이요? 북 다이제스터님만의 표현을 만드시길! 지난번 알랭 드 보통 책과 관련한 포스팅도 북 다이제스터님만의 표현이 보이시던데요^^?

보슬비 2015-07-01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혼에서 새벽까지 완전 제 취향이었어요. 엄청 웃으며 봤는데, 볼때마다 제 옆에 같이 본 사람들은 죄다 도망갔어요.
제가 너무 웃으면 옆에 사람 때리는 버릇이 있어서... ㅎㅎ 쿠엔틴 티란티노의 `포룸`도 마찬가지였어요. ㅋㅋ

AgalmA 2015-07-02 07:00   좋아요 0 | URL
ㅋㅋ 그 유명한 웃패(웃으면 패는 자)시군요ㅋ...손이 매운 사람이면 정말 울고 싶더데😂 보슬비님은 ˝어우, 야아~~˝ 하며 애교가 있으실 거 같아요. 막상 닥치면 스파링은 아니겠죠!?; ㅎ
저도 이런 스타일들 황당해서 좋아해요ㅎㅎ 쥴리 델피 나오던 <파리의 늑대인간>도 로맨스->공포물로 가서 그렇게 웃으며 본 기억이? 타란티노식 그런 영화들이 나오던 시기였던가...싶네요.

[그장소] 2015-07-03 13:42   좋아요 0 | URL
어뜨케,,저,,중간에 끼어들어 앉아서 두분을 (매우 격하게 아끼는 )마구 때리며 잠시 이성을 잃고 웃다 간다고..여기 고백하고 갑니다..(아이고...배야...웃어서 배가 아픈..)
ps.다만 ,죽을 만큼 패지는 않았음.오로지 애정이었을 뿐임!

보슬비 2015-07-03 22:29   좋아요 0 | URL
여태껏 저 때리는 사람 못 봤는데, 서로 때리면 진짜 웃길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
아... 상상되니 더 웃기네요. >.<

[그장소] 2015-07-06 17:33   좋아요 0 | URL
푸하하, 알림이 없어서(? 내가 모르는걸까나...?)댓글이 달려도 모르다 이제 보고 늦장˝달아요.(늦은,답장)
그쵸!^^ 웃기겠죠.가운데 샌드위치로 Agalma님을 끼워놓고.박자 맞춰서..같이 ㅎㅎㅎ해요~ 나 는 또 이렇게
삼각관계에 빠진다는 설정에....(음?!)

5DOKU 2015-07-02 0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비 딕은 참 신기한 것이 20세기 중반까지 수산업 분야 고래학으로 분류된 이력이 있더라고요.

AgalmA 2015-07-02 07:40   좋아요 0 | URL
ㅎㅎ 다카하시 겐이치로 소설<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가 스포츠 코너에 꽂혀 있던 걸 작가가 서점에서 흐뭇하게 바라본 적도 있다죠? 저도 그런 소설이 쓰고 싶어요. 어디에 꽂을 지 알 수 없는 책을ㅎㅎ;
다큐멘터리 <코브> 본 적 있으신가요? 일본에서 비밀리에 행해지고 있는 자국 내 고래사냥의 실태를 파헤치는 다큐인데, 고래로 작품 만들 게 아직도 무궁무진하죠.
<모비딕>을 능가할 수 있을까는 미지수겠으나....

[그장소] 2015-07-03 13:46   좋아요 0 | URL
왜, 그 잠수정으로 해서 세계무기학이라든가 ,결론은 x파일 ....

Agalma 님, 기다려줄게요..언제까지라도..빨리...!!^^; 다그치면 막 써낼 것 같음!!! (화이팅!)

2015-07-03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5-07-03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메인 프로필이 바뀐 ~!! ^^ 늘 변화를 추구하는 당신!
소박한 응원을 애정과 함께 남기고...

AgalmA 2015-07-05 00:39   좋아요 0 | URL
그장소님 요즘 리뷰에 활력이~ 저도 응원합니다/

[그장소] 2015-07-06 17:38   좋아요 0 | URL
음,댓글을 많이 못하니까..외려 읽고 걍 정리 하는 데 시간만 조금 신경쓰면 되더라고요.
예전에 생각하면서 쓰느라 시간 걸리고 그러다 로그아웃된거 모르고 날아가고 그럼 순간 욱~! 수치가
안드로메다 급 되서 마음이 다쳐 다운되던 것을 요즘은 써놓고 옮겨 붙여버려요. 꾀만 늘어 달까요.
쉿~~!!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짝퉁 아니고 오리지널 情 놓고 가요!^^

단발머리 2015-07-04 0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키햐~~ 어떻게 님의 방은 댓글도 이렇게 재미있나요?
모르는 것 투성이라서, 또 절망.. T.T

오늘의 문장 :

글(시/소설)은 몰입하고 읽게 만드는 힘 자체다.

좋은 거 건졌어요. 우아, 신난다!!!

AgalmA 2015-07-05 00:41   좋아요 0 | URL
서재 고수님들이 아는 게 많으시니 저는 그저 거드는 정도ㅎㅎ;
서재 와서 저도 많이 배운 답니다^^...헤헤

CREBBP 2015-07-04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미세한 입자가 가장 빠르게 침투한다` 흠 이런 멋진 문장은 침발라 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기쁨을 아는 몸들로부터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에요~~~

AgalmA 2015-07-05 00:45   좋아요 0 | URL
ㅎㅎ guiness님 관심사(과학쪽)에 걸맞는 문장이라 그런 거 아닙니까ㅎㅎ
아무리 그래도 ˝기쁨을 아는 몸˝ 제 취향도 아니지만 그렇게 멋진 문장처럼 느껴지지도 않던데 굳이 그렇게 써야 했을까 좀 뜨악...))
 
당신의 시간을 위한 철학
로버트 그루딘 지음, 오숙은 옮김 / 경당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 서성이는 자에게 물음이여, 오라

 

내게 독서는 글을 따라가는 행위가 아니다. 학문의 계보학이 아니다.

무방비한 자세나 감상의 태도도 아니다. 물건을 고르는 계산도 아니며 적선을 바라는 비굴함도 아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내가 흘려버렸던 것을 글쓴이는 어떻게 끈질기게 좇아가며 실패하는지 살피는 일종의 고고학이다.

짧은 삶 속에서 이 독서에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는 감식안이 필요하다.

책의 서문,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도 이 고고학의 시작을 결정할 수 있다.

책을 읽는 중에도 문장 속의 열망과 열광을 알아챌 만큼 충분히 서성여야 한다. 다 읽은 뒤에도.

 

 

 

§§ 반복의 답습이 아닌 새로운 모색을 향해

 

기다림을 찾아가는 기다림. 그루딘은 기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관심사 속으로 완전히 빠져서 외부적 횡포와 거리를 두는 것”(p156)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몽테뉴에게서 배웠다. 자유주의자이자 이성주의자였던 몽테뉴만큼이나 그루딘도 그렇다. “우리의 자유는 공간 속의 자유인 동시에 시간 속의 자유여야 한다”(p36)

 

 

 

 

 

 

 

 

 

몽테뉴(1533 ~ 1592)가 철학 에세이수상록서문에서 나 자신이 바로 내 책의 재료”( 수상록, 동서문화사)라고 말하듯이 그루딘도 내가 쓰고 있는 글이 곧 내가 쓰는 글의 글감”(p213)이라고 말한다.

 

자기 인생에 확실한 목표를 세워 두지 않는 자는 특수한 행동을 처리해 갈 길이 없다”( 수상록, 동서문화사, p357)고 몽테뉴가 말하듯이, 그루딘도 우리가 인간적인 규모로 시간에 골조를 세울 때 시간은 의미를 가진다”(p17), “짜임새를 갖지 않는 시간이 자유로운 경우는 거의 없다”(p142)고 말한다.

 

몽테뉴가 고대 철학자들(특히 세네카)과 역사(그리스, 로마)에서 인식의 거듭된 재고를 배웠듯, 그루딘도 고대 로마를 비롯해 현실 속 많은 지역을 견유하며 얻은 사유를 말하며 철학자들(특히 몽테뉴)을 인용한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가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과정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공을 심리적 경험 속에 투영할 수 없다.……정체성과 관계는 항상 움직이고 있으며, 그것을 정적이고 절대적인 용어로 나타내려는 시도는 기껏해야 상대적인 근사치를 낳을 뿐이라고 말한다. (p49)

아인슈타인에게서 얻은 배움도 아주 아름답고 명징하게 표현해낸다. “우리의 심리적 질량은 (아인슈타인의 법칙 하나를 빌리면)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증가한다.”(p188)

 

몽테뉴가 회의적인 인문학 견지였다면 그루딘은 요즘 사람답게 좀더 현실적이며 자연과학에 기반한 자세인 게 돋보인다. 현재의 계산체계를 비판하는 부분이 신선하다. 십진법 체계를 갖추고서 왜 우리는 다루기 힘든 수를 토대로 시간을 더욱 일관성 없고 파악하기 힘들게 만들었는가. 1분을 100초가 아닌 60초로, 하루를 20시간이 아닌 24시간으로, 일주일을 10일이 아닌 7일로 만들었는가. 그래서 그루딘은 이 책을 프랑스 혁명력의 자연스러운 시간 체계를 가져와 조각조각 단상(斷想) 구조에 접목했다.

더불어 규격화된 괴로움. “일과 놀이로 정례화된 7일로 구성된 일주일은 우리 거의 모두가 공유하는 심리적 리듬을 만든다……일과 일하지 않음을 기계적으로 번갈아 하면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양상의 차이를 잘못 해석하고, 일을 불쾌한 종속과, 일하지 않음을 해방된 즐거움과 연관시킨다. 우리는 임의적인 시간만큼 일하기 때문에, 일을 성취의 측면이 아닌 시간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분노의 월요일, 고된 일의 연속인 화요일과 수요일, 피곤한 목요일, 종일 일이 안 잡히는 금요일…….”(p228)

 

 

 

 

 

 

 

§§§ 그루딘이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연속성” - 시공간에 대한 습관을 바꾸라

 

우리는 습관적인 태도로 과거-현재-미래를 분류하고서 그것들을 단절시키고, 자신이 만든 의미 - 숨쉬는 상상력이 아닌 기억 속에 제 스스로를 가둔다. 그루딘은 말한다.

두려움과 혼란을 느끼는 우리는 미래가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을 두리번거린다. 시간의 진정한 문제는 시간의 성격에 있다기보다는 시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으며, 우리가 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방식에 있다.”(p25)

과거와 미래는 한 연속체의 일부로서 본질상 아무런 질적 차이가 없다. …… 실제로 과거와 미래를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 시간의 형태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어제 낮에 버스를 타고 2시간 정도 이동했다. 익숙한 길이었음에도 낯선 이미지들이 가득했다. 씨푸드 레스토랑이 헐리고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었고(문득 겹치는 용산 생각...), 어느 이층집 창문의 반쯤 열린 틈새로 커튼이 탈출에 실패한 채 걸려 있었다. 커피가 내려지고 있는 카페를 겹겹의 유리창을 통해 바라봤다. 휙휙 지나치는 간판의 글자들은 사람이 걸어다니고 있지만 사실은 이곳이 거대한 언어 왕국임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버스 안은 어두웠고 나는 책을 무릎에 둔 채 진기한 투명의 세계를 휘둥그레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비의 미래가 내렸다. 낱낱의 빗방울들은 저마다 개성적인데 왜 "비"라고 통칭해서 부를까. 무수히 출현했음에도 우리의 언어, 표현은 여전히 부족한 것이다.

모든 공간과 언어에 시간이 녹아 있음을, 그 시간을 지금 이 공간에 내가 가져오는 것을 당신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의 과거는 어떤 현재로 나타나며, 당신의 현재를 또 어떻게 과거로 만들고 있는가.

 

 

 

그루딘은 그 경험은 가라앉고, 과거라는 평범한 벽 위의 이미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등장”(p57)하고, “과거는 거울처럼 밋밋”(p78)할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자신에 의해서.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크기가 곧 시간 속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크기다”(p62)

 

시공간에 대한 것만큼이나 정체성도, 자유도, 자유의지도 성스럽게 보관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억을 좌절과 나이 듦 속에 묻어 버리지 않을 때 그것은 일시에 드러난다. 그것은 다른 말로 용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외 그루딘이 제시하는 유용할 습관 표현들

 

하루 중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 것, 세세한 계획 세우기와 실행, 추상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일기 쓰기, 타인에 대한 사랑의 표현 등…….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아 평범해 보이겠지만 책에서 직접 만나 보라.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거라고 장담한다!

 

역자가 후기에서 밝힌 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진지한 철학서, 자기계발서, 방황하는 누군가에게는 삶을 변혁시킬 길잡이”(p278)가 돼줄 책이다. 무엇보다 시간, 기억, 정체성, 글쓰기에 대해 짧지만 오랜 숙고가 엿보이는 보고서다. 1200페이지에 달하는 몽테뉴 수상록전문을 읽기가 버거운 사람에게는 현실적으로 유용할ㅎ.

그루딘의 책을 읽고 나니 예전에 읽다가 포기했던 몽테뉴 수상록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하루 10페이지 남짓이면 100일이면 가능하다! 동서문화사 번역이 참 맘에 안 들지만 이미 샀으니 크흠))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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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7-01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신해철의 저주파 같은 낮은 목소리,로 나래이션인듯 랩인듯 그리 읊조리게 되는 ^^

AgalmA 2015-07-01 01:28   좋아요 0 | URL
😧;;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요. 신기하군요. 왜 그런 느낌일까... 책 내용이 까다로운 부분을 건드려서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호😑

[그장소] 2015-07-03 13:52   좋아요 0 | URL
음, 머릴 풀어헤쳐서 그러는...그런데..나 좋아요 눌렀는데..분명.!! 와보니 띵~!!! 다시 누르고 갑니다!^^
나는 해철씨의 그 초저음의 그 목소릴 넘 좋아했다는 ,음도시민역사..를..그니까..단호히..좋아한다고 말하고 갈께요!^^

수이 2015-07-01 0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종의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는 거죠?

AgalmA 2015-07-01 01:34   좋아요 2 | URL
네, 자기만의 생처럼, 자기만의 방도^^
야나님의 <자기 앞의 생> 원문 완독 (단독은 아니지만) 완전 축하🎉🎊🎆🎇

수이 2015-07-01 01:49   좋아요 0 | URL
단독은 아니지만_ ㅠㅠ
화낼 거야 엉엉 ㅠㅠ

아갈마님 덕분에 불어 공부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겠군요 ㅋㅋ

AgalmA 2015-07-01 02:40   좋아요 0 | URL
아니, 이거 오햅니다;;; 축하가 제 단독이 아니라는😰

서니데이 2015-07-01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7월 첫날이네요. 즐겁고 기분 좋은 한 달 되세요.^^

AgalmA 2015-07-01 17:59   좋아요 0 | URL
7월의 첫 미소를 서니데이님께 드릴께요. :)

cyrus 2015-07-0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서문화사판 <수상록>이 빽빽한 활자라서 불편해요. 내용이 긴 글 하나 읽는데도 눈이 쉽게 피로를 느껴요. 아직까지 100쪽을 넘게 읽어본 적이 없어요. ^^;;

AgalmA 2015-07-01 18:29   좋아요 0 | URL
그쵸! 번역에, 활자까지 그래서 정말 고역ㅎㅎ;; 무게는 또 어떻고;;;
 

1. 새로운 마술사 등장

문학동네 팟캐스트로 처음 접했는데, 내 제멋대로 직감에는 문학계 새로운 기류를 만들어줄 신인이 아닐까 한다. 신인치곤 나이가 많지만 그게 뭐!
누구나 공감할 글줄을 중얼대는 재주가 있다. 그렇다. 중얼댄다. 한국식으로. 한정식은 아니다. 흔히 지나쳤을 온갖 감정과 단상을 그는 내내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거 같다. 평생 고백은 몇 번 못 해봤을 거 같다. 어쩌다 이리저리 엮여 연애하는 스타일? 작가님, 죄송ㅎ;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만나본 적 있는, 소심하고 어눌하지만 자기 말은 청산유수로 중얼중얼대는 등단은 하지 못하고 있던 그런 사람 이미지? 그런데 이제 등단도 하고 책도 냈군~ 김애란, 황정은의 뒤를 이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필사의 신화들은 이제 그만 가 줄래?
언어 조립과 조탁이 아닌 김종옥식 언어 순두부...과연 한국 대중의 입맛에 맞을지.
내 개인적인 궁금증이다.


당신을 찾아갈 테지. 비오는 날에도 동물원을 찾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당신은 우릴 빗속에 서 있게 만들지 않기를.





2. 김종옥 등단작 <거리의 마술사> 그리고 도망자들...

경산경찰서 뉴스가 눈길을 끌었다.
약간 장애가 있던 대학생이 기숙사 한 방 동급생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던 모양이다.
테이프를 칭칭 감아 대자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맞을래, 치킨 사 줄래?˝

피해 학생은 병원에 입원 중이고, 수사를 받던 가해 학생 중 한 명이 메르스 증상이 의심돼 경산경찰서 수사과가 임시 패쇄되고 수사담당했던 경찰 2명은 잠정 휴가. 정말 난리통.
가해 학생은 자신의 가해자 메르스 공포에서 돌아오면 피해 학생에게 사과하게 될까.
나는 인과응보 그런 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가해 학생 네게 중요한 기회가 온 거 같긴 해.
법이 아니라 네 생각의 잘못된 톱니바퀴를 으스러뜨려줄 찰나가... 놓치지 마, 이 기회는 아주 짧아. 마술의 순간보다 더.

<거리의 마술사>에서 왕따였던 남우는 비극적인 마술사가 되었다. 지금 현실에서는 마술사가 없지. 우리는 쇼와 속임수 밖에 몰라. 늘 당해서 사기라고 생각하지. 그거 알아보기도 벅차지. 마술? 몰라도 사는 거 자체가 피곤하지. 돈 벌고 편할 궁리만 생각하지. 모조리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그게 다는 아니잖아.
마술사는 못 되어도 가해자는 되지 말아야지. 될 거 없어도 그렇겐 되지 말아야지.
메르스 14번 환자는 자신이 슈퍼전파자라는 걸 몰랐다지만 넌 네가 가해자인 걸 알았다.


자신이 때려 놓고 그렇게 될 줄 몰랐다고 말만 하면 다 인가. 그 상처들 어쩌고.
자신이 써 놓고 표절인지 몰랐다고 도망만 가면 다 인가. 그 글들 다 어쩌려고.
제 속에서 무엇을 키워가고 있는 것인지...모두여.

우리가 하지 않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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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6-23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3년 제 4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첫 순서로 실린
이 작가의 `거리의 마술사`를 읽었습니다. 대상 수상작이라고 하지요.
오래 지나 그 책을 다시 보니 김종옥 작가의 작품은 다 읽었고(밑줄이 쳐진
것으로 보아) 나머지 황정은, 박솔뫼 등은 중간에 그쳐 있더군요.
읽어야겠네요...

AgalmA 2015-06-24 03:42   좋아요 1 | URL
기존의 문단스러운 느낌이 아닌 느슨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매력인 거 같아요.

에이바 2015-06-24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종옥 작가의 <거리의 마술사>에서 남우는 어떤 마술사인지 모르겠지만 비극적이라 하니... 아지즈 안사리의 스케치에서 이런 얘길 하더라고요. 흑형(Black dudes니까)들이 마술사를 대하는 것처럼 모두를 대해야 한다고요. 부두의 영향인지 미신을 믿는다는 편견을 비튼건데, 볼만해요. 나의 시각 자체가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감하기도 했고요. 링크는 https://youtu.be/3oLuxhYO5cw

경산의 뉴스를 보니, 아지즈가 말하는 <마술사 응대법>을 배워야겠어요. 부인하고, 회피하거나 사건이 종결됐다는 이유로 문제의 본질이 해결됐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죠.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로 남으니까.. 가해학생은 깨달음을 얻을까. 추천해주신 책 읽어보겠습니다.

AgalmA 2015-06-24 15:12   좋아요 1 | URL
거리의 마술사는 신춘 등단작이라 웹에서도 읽기 가능~
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10101035502202003

모비딕 생각도 나지 않아요^^? 이스마엘이 부두교를 믿던 퀴퀘그를 존중하며 우정을 쌓던...

신경숙 작가도 반성할 수 있는 순간을 놓쳤죠. 모두가 반성할 기회 대신 모두에게 상처을 주기로 결정했죠..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이 나라의 기조는 위아래 좌우도 없이(없어야 하는 건 맞지만 이건 좀...) 왜 점점 이 모양인지...자본주의 탓으로 계속 돌리지 말았으면 해요. 윤리와 양심 얼마나 더 많은 걸 그 탓으로 돌리며 편안해 할 것인지...속 편하지도 않잖아!

단발머리 2015-06-25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종옥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겠군요.
순두부라면 언제 먹어도 부담이 없거든요.

신경숙은.... 참 안 됐어요.
표절을 표절이라 못 하고, 기억을 기억이라 못 하다니. 놀라울 뿐이죠.

AgalmA 2015-06-27 19:56   좋아요 0 | URL
틀에 딱 맞춰진 두부와는 다른 성질이 느껴져서 그렇게 표현한 것^^

신경숙 작가에게 에너지를 뺏기기 보다 더 좋은 소설을 찾아 읽는 것이 정당한 반응이겠지요;

[그장소] 2015-06-26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가요. 비가와서 들려보는,

AgalmA 2015-06-27 19:56   좋아요 0 | URL
언제든/~
 
창작의 비밀 - 원본 그리고 창작자와 사기꾼에 대해서

  § 유시민의 온몸과 김수영의 온몸

 

신경숙 표절 사건에서 많은 부분이 총체적으로 문제였지만 기쁨을 아는 몸은 결정적이었다. 이 표절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예전에 유시민 <글쓰기 특강> 읽을 때 매우 중요한 단락에서 석연치 않았던 표현이 있었다. 오늘 pek0501님 글을 읽다가(http://blog.aladin.co.kr/717964183/7606172) 다시 보게 되니 신경숙 표절 사건도 있고 해서 이번 기회에 짚고 넘어가고 싶다. 어떤 분란을 조장하려는 의도는 없다.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제시하는 바를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싶어서다.

 

글을 잘 쓰려면 왜 쓰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다. 표현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 존중받고 존경받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글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다. 글은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것이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260)

-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pek0501님 인용문 가져옴)

 

 

내가 독서를 잠시 멈췄던 것은 "글은 온몸으로"라는 대목이다. 이 문구를 이성복 시인이 쓴 거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문학 평론가들이 출처 제시 없이 쓰고 있기도 하다. 평론계에서는 유명해서 다들 알 거라고 쓰고 있는 것도 같고, 일반에서는 김수영에게서 읽었지만 잊었거나(어떻게 잊을 수 있지!) 여기저기서 듣다보니 원 출처를 모른 채 쓰고 있는 것도 같다.

여하간 "온몸으로"라는 표현으로 글쓰기에 대해 말하며, 국내에서 명문화(明文化)한 원조는 내가 아는 바로는 김수영이다. 외국 사례까지는 모르겠다.

<시여, 침을 뱉어라> 1968 문학 세미나에서 나온 말인데, 옮겨 본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破算)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p398)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롤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p403)

 

<김수영전집 2 산문>

 

 

 

 

 

 

 

 

 

 

 

글 전체에 온몸이 워낙 강렬하게 반복되기 때문에 이 글을 읽은 뒤 나는 글을 논하는 문장에서 온몸이란 단어만 보면 바로 김수영을 떠올릴 정도다. 실제 詩 뿐만 아니라 글쓰기 강의 초반에 <시여, 침을 뱉어라>는 자주 언급되는 텍스트다.

자세히 보면 유시민 "글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다. 글은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것이다. " 문장 배열은 김수영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 문장 배열과 매우 유사하다.

 

신경숙 표절 건을 논하는 pek0501님의 글에서 나는 유시민도 표절이 의심된다! 말하려는 게 아니다. 명백한 표절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는 영향을 받는다는 점, 아주 조금이니까 괜찮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쓰는 것도 글 쓸 때 유념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다.

 

 

 

§§ 홍세화는 괴테도, 합리적 사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다

 

pek0501님 글에서 홍세화가 괴테를 언급한 부분에서 나는 응?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음 대목이다.

 

토론은 주로 글쓰기에 필요한 논리력, 추리력, 분석력, 정확성의 추구 등이 수학교육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길러진다는 주장과, 수학적인 차가운 논리가 오히려 창조적 감성이나 미적 상상력을 해칠 수 있다는 반론 사이에 벌어진다. 반론자들은 하나의 좋은 예로 괴테를 내세운다. 독일의 으뜸가는 시인인 괴테가 수학에는 아주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토론에는 한 가지 흥미있는 재치응답이 있다. 반론자가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예를 들어가며 수학과 글쓰기 사이에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할라치면, 상대방이 당신이 그렇게 반론을 펼칠 수 있는 것도 실은 수학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응수하는 것이다.(192~193)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pek0501님 인용문 가져옴)

 

 

괴테가 수학을 못 했다는 반론자의 인용으로 그친 것 같아 아쉽다. 괴테를 그저 시인이나 소설가 정도로만 여기는 것 같다. (그 분야에서도 최고인데...) 이 본문에서 그들이 수학과 수학적 사고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괴테(1749~1832) <색채론>1790년에서 1810년 사이에 걸친 연구로, 뉴턴의 색채 이론이 광학에 초점을 둔 것에 반박하기 위해 괴테가 프리즘을 들여다보며 색채 생성의 원리를 탐구해 나간 연구서다. 그의 책이 과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괴테의 자연상(自然像)과 기술-자연과학의 세계」(1967)란 논문을 쓰기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처럼 자연적인 삶에서 벗어나 추상적인 인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몸을 파는 것에 비유하면서, 근대 이후의 자연과학의 발전을 따르고 있는 과학자들이 악마를 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이 입증하고 있듯이, 자연의 기본 구조 자체가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직관에 의해서든 그리고 이성적 추리에 의해서든 자연에 대한 접근의 가능성은 열어놓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이젠베르크는 두 사고방식 사이의 궁극적인 공존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모색하고 있다. 괴테로부터 배울 점은 우리가 하나의 기관, 즉 합리적 분석에 의존함으로써 다른 모든 기관을 위축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괴테 <색채론> 번역자 장희창 서문 p20

 

 

 

 

 

 

 

 

<색채론>에는 수학적 수식이나 공식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관찰과 인식의 연결들이 논리력, 추리력, 분석력, 정확성’을 추구하려는 수학적 혹은 합리적 사고가 아니라고 나는 볼 수 없다. <색채론>의 저작 의도처럼 괴테는 자연과학적인 사고에 치중하지 않으려 했고 그의 많은 작품들이 그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괴테는 색채론 외에도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지질학 등 광범위하게 관심을 보였다.

좋은 글쓰기라면 홍세화는 위 대목에서 괴테의 이런 점을 짚어줬어야 했다.

 

<색채론>“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자연과학의 기계론적,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재조명”(<색채학>에서 인용)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사고가 획일적이고 무비판적인 수용에 취약하다는 점도 경계해야 한다. 글쓰기가 이 무수한 노고 속에 완성된다는 게 우릴 절망에 빠뜨리지만.

 

 

Agalma

 

모든 언어는 과오다. 나는 시 속의 모든 과오인 언어를 사랑한다. 언어는 최고의 상상이다. 그리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잠정적인 과오다. 수정될 과오. 그래서 최고의 상상인 언어가 일시적인 언어가 되어도 만족할 줄 안다.
……
지금의 언어도 좋고 앞으로의 언어도 좋다. 지금 나도 모르게 쓰는 앞으로의 언어.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中 (<김수영 시전집 2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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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6-21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의식중에 쓰여지는 표현들을 어떻게 걸러내야 할지... 알고 있다고 믿고있는 지식도 가물가물해지는데...
쓴다는 행위가 더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충분히 고민해서 써야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AgalmA 2015-06-21 03:24   좋아요 0 | URL
많은 글을 섭렵하면 사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고 쓰는 표현들이 많아지죠~_~;
정말 내 머릿속으로 생각한 표현이 앞서 출판된 책에 이미 존재하는 경우도 많이 있죠. 이런 경우는 정말 속 쓰리지만ㅎ;;;
하지만 영향을 받은 건지, 안 받은 건지 두 작품을 대면했을 때 작가는 분명 알아요.
신경숙 작가는 표절도, 영향도 일체 부인했기에 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죠.

2015-06-21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5-06-21 03:25   좋아요 0 | URL
신경숙 작가의 표절은 명확한 것으로 저는 앞서 페이퍼로도 밝혔습니다/
이 글은 그 표절 건에 대한 pek0501님 글에서 유시민, 홍세화의 발언의 의혹과 문제점에 초점을 둔 글입니다~

저도 제 글이 도용된 사례를 이리저리 전해 듣긴 했는데, 캐자고 들면 피곤할 거 같아 내버려 둔 적 있어요.
아예 문장을 가져다 썼다고 사후 통보를 받은 적도 있는데, 그제서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그렇더군요....

2015-06-21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5-06-21 0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정도의 영향이란 영향받았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국내 저자의 상당수 자기계발류나 에세이 심지어는 인문 과학 관련책에서 레퍼런스를 전혀 싣지 않는 경우도 이번 기회에 철저히 짚고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어떤 예술가의 일화같은 건 정말로 비슷비슷한 글들이 온갖 책에서 화자되지만 누구 하나 그 일화의 소스가 어디인지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게.. 그러면 독자는 그 사실을 그냥 성경처럼 믿습니다 라는 책에 대한 근거없는 신뢰로 읽으면 되는 일인지 .. 아갈마님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AgalmA 2015-06-22 01:05   좋아요 0 | URL
좋은 지적이십니다. 우리나라 논문 표절도 이런 경향에 기인한 것도 있다고 봅니다. 출처를 정확히 옮기지 않으니 어디서 가져오든 상관이 없는 거 잖습니까. 그러다보니 와전되고 오류도 상당하고...필자에 따라 논점이 바뀌는 것도 다반사고...독자들은 그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할 수밖에요.
`너 자신을 알라`도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확실히 믿고 있는 사람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어요-,-);;
guiness님 리뷰도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antibaal 2015-07-0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북플에 대한 단상을 읽다가 이 글도 읽게 되었어요. 이 글을 읽으면서 읽고 쓰는 것과 정직하게 사는 것에 대해 다시금 정신 번쩍 차리며 생각하게 되네요. 글 감사합니다.

AgalmA 2015-07-01 18:06   좋아요 0 | URL
기억을 우리가 다 감당하긴 어렵지만 서로서로 반성하고 보완하는 자세가 중요한 거 같아요...말씀처럼 정직성!

antibaal 2015-07-0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저기 글을 읽으며 많이 배우고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