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레퍼런스를 가지고 이 글을 쓴다.
왜냐. 각각에 대해 얘기하기엔 시간이 방대하게 소모되기 때문이며(읽을 책이 많다구;_;),
이 세 개의 레퍼런스에서 미묘한 연결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난 난시(-,=) 언제나 그렇듯 쓰면서 도착한다.
※ 리뷰 글쓴이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내용과 발언을 언급한 것에 그 분들이 양해하시리라.....생각보다 믿음이 있다!
§ 홍상수와 신경숙
내가 아마추어 세계에서 홍상수에 대해 그토록 분석 글을 끝없이! 쓰는 사람을 본 경우는 네오님이 유일한데, 대화를 하다보면 큐브를 맞추는 유쾌함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각자의 큐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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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분석적으로 보는 편이 아니다. 영화가 쏘는 화살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맞으려고 하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엉엉, 이게 뭐야. 뚫은데 또 뚫어놨어!’ 하며 상처를 들여다보다가 ‘그런데 이게 뭐지’ 하고 되돌아본다. 평론가나 영화학도가 아니라면 대개 이런 식일 거다. 그래서 우리는 100자평, 리뷰를 쓰기도 하고 짧게는 별점을 준다. 어떤 이는 아예 영화를 찍어보겠다고 전쟁터로 떠난다. 죽지 말고 성공해;_;)/~~~
오늘 홍상수는 어쩌면 사기꾼이 아닐까 한다는 네오님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그토록 들여다본 대상은 무엇이 바뀐 걸까. 이 반응은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 사람이더라, 작가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더라, 기대했는데 최근 작품들 실망이더라 등등등. 아! 내가 사회학을 많이 공부했다면 명쾌한 이론도 가져와 얘기할 수 있겠지만 뭐 별 수 있나 내 깜냥 내에서 얘기해야지.
네오님은 홍상수 《강원도의 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ㅡ나는 《오, 수정》까지ㅡ에서는 작가주의적 치열함을 보았지만 그 이후는 너무 즉흥적이고 인위적인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동감이다. 나도 창작의 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슈테판 츠바이크만큼은 못 되더라도 예술가와 작가들의 창작 구현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 왔다. 이 비밀은 외부에서는 잘 알 수 없고 직접 창작을 해봐야 많은 걸 깨닫게 된다. 글쓰기 책을 아무리 많이 봐도 잘 모르겠듯이 직접 써보며 실패와 단련을 통해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품을 재료로 글을 쓰는 평론을 제2의 창작이라 생각한다.
시를 써봐야 왜 세계가 유령 같은 바윗돌 같은지,
소설을 써봐야 인물을 끝없이 움직이도록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사진이나 영화를 찍어봐야 스토리와 이미지가 한 몸인 사냥감을 잡는 게 결코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창작 속엔 언제나 창작자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포기와 실패의 포화가 남아 있다. 이 때문에 글쓰기 성향이 너무도 다른 신경숙과 미시마 유키오가 그렇게 결정적인 대목에서 거의 동일한 문장일 수 없다고 경험상 말하는 거다. 이 외에도 많은 지적이 나오고 있다. 내 의도는 무용담(武勇談)적인 과시가 아니다. 창작에 대한 내 추측을 맞춰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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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초반엔 자신의 모든 걸 칼날 같이 갈아 축성(築城)에 심혈을 기울인다. 자기가 누구에게 무슨 영향을 받았는지 파악도 잘 되지 않는다. 성공적인 데뷔가 끝나고 독자나 관객을 얻게 되는 시점이 오면, 이제 자신의 재료들을 좀 더 과감하고 자유롭게 쓰게 된다. 이것은 소포모어 징크스(*첫 작품에서 성공한 뒤 두 번째 작품은 흥행이나 완성도에서 첫 작품에 비해 떨어진다는 징크스)의 한 요인으로 짐작된다.
두 번째 작품도 시장에 먹힌다면 창작자는 자신만의 개성과 구조성을 구축할 기술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 평론가와 관객 or 독자는 부정적인 자세든 긍정적인 자세든 그 창작자가 커 가는데 연료를 끊임없이 공급한다. 무플보다 악플이 더 낫다는 걸 많은 관심종자들도 알게 되었다. 트위터 만세~
자, 기술을 습득했고 의자도 마련되었으니 창작자는 끊임없이 작품만 내 놓으면 된다. 그런데 아이디어가 떨어진다면?
이 지점에서 나는 홍상수와 신경숙의 이 사태가 비교된다. 홍상수는 영화라는 장르 특성상 자가 번식적인 작품을 만들기가 수월하다. 알맞은 배우와 약간의 스토리만 갖춰지면 편집을 통해 이야기를 무수히 바꿀 수 있고, 편집 기술로 당신을 기만적으로도 천사로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A: 당신과 b가 아차산에 갔다
B: 당신과 c가 아차산에 갔다
C: b와 c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D: b와 c는 아는 사이이고 남자며 당신은 여자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것은 홍상수 《옥희의 영화》 플롯 중 하나다. 당신에게는 그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인생사겠지만, 영화라는 포커스에서 보면 상황은 매우 달라진다. 위의 플롯을 A-D-B-(C삭제) 또는 A-C-(F추가)-D 이리저리 바꾼다고 생각해 보라. 홍상수는 이런 점을 잘 알고 있고 힘들이지 않고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돈이 문제지; 인물-편집에 대한 홍상수의 독특함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약간이라도 응용하면 따라한 사람이 손해 보는 특허권같이도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비슷하면 홍상수 따라하네~소릴 듣는다. 해외에 이런 식이 없느냐 하면 찾아보면 또 있다. 하여간 국내 상황은 이렇다. 여러분, 홍상수 마트는 불황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세일 안 할 걸로 팔았거든요.
그런데 글은 좀 다르다. 홍상수 영화 속에 임의성이 들어가 의미를 양산해 내듯이 소설에서는 그럴 수 없다. 소설은 치밀한 축적 속에 이르는 기록갱신과 같다. 장르나 감성의 주조를 계속 가져가는 건 상관없지만 그 내용의 직조는 전통적으로 오직 작가 한 사람에 의해서였고, 활자로만 전달되기 때문에 이야기의 다변화 외에는 변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초현실주의로 소설을 쓸 텐가. 이미 그 실험은 시도되고 폐기되었다.
끝없는 우물파기. 고갈된 아이디어. 명성과 창작을 혼동하는 작가는 이제 무슨 행동을 취할까?
신경숙의 소설을 좋아하지도 않고 많이 읽지도 않아 작품 분석으로 말할 수 없어서 여기에서 마무리한다.
여기까지는 창작의 추동 원리로서 신경숙 작가의 한계를 되짚어봤다.
§§ 제 3의 눈 - 원본과 관찰자
다음, 흔적님의 리뷰는 왜 가져 왔느냐.
내게 흥미를 끈 것은 다음 대목이다. 흔적님이 『서양 철학 산책』 (제레미 스탠그룸 & 제임스 가비, 시네마북스, 2015)을 읽고 인용한 대목이다.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의 기초라 할 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데 우리가 인식하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챈다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는 말이다.”
최근에 읽은 뇌과학 책 내용과 오버랩이 되었다. 어느 페이지였는지 찾기가 번거로워 대충 말하겠다. 내 기억의 오류를 마구 마구 의심해도 좋다.
우리는 과연 인식으로 결정하는가 하는 실험이었다. 피 실험자가 결정을 하면 행동을 하는 걸로 하고 두뇌를 측정한 결과, 그가 결정하기 몇 초 전에 뇌파가 작동했다는 것이다.
아니, 그게 뭐? 당연한 거 아냐? 할 수도 있다. 신경숙 사태와 데카르트 & 아리스토텔레스 사유의 유사성을 보면,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과연 독자적인 원본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을 몰랐을까. 그토록 명석한 철학자가 가장 유명한 선대 철학자의 중요한 언급을?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철학서로 기본 중의 기본이다. 물론 난 읽다 말았어;;))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잘 포장한 상품같기도 하다는 게 내 인상이다. 물론 그가 몰랐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남겨둔다.
이 표절문제는 창작자의 표면만으로 얘기할 수 없는 더 많은 문제가 있다.
데카르트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문장은 저토록 유사한데 우리는 데카르트에게 "코기토"의 왕관을 씌워주었다. 왜 수정되지 못했나. 여기서 제 3의 관찰자의 부정확함을 생각해보게 된다.
현상학(**)은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원리(***)”를 생각하면 근본적으로 지적받을 수밖에 없다.
[네이버 사전]
(**)현상학
- 1. 칸트 철학에서, 경험적 현상을 다루는 학문을 본체와 본질에 관한 연구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 2. 헤겔 철학에서, 감각적 직관으로부터 절대적 인식에 이르는 정신의 발전 과정을 고찰하는 학문.
- 3. 후설의 철학에서, 의식에 직접적으로 부여되는 현상의 구조를 분석하여 기술하는 학문.
(***)불확정성원리
<물리> 양자 역학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에너지와 시간 따위와 같이 서로 관계가 있는 한 쌍의 물리량에 대하여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관측하여 정확하게 측정, 결정할 수는 없다는 설.
즉, 원본은 무엇일까. 흔들리는 창작자이자 관찰자인 우리가 과연 파악 가능한가.
신경숙 표절 사건에는 보디가드로 나선 문단까지 가세해 있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어쨌거나 신경숙 <전설>이란 작품은 원본도, 패러디도 아닌 표절인 게 명확해 보인다. 뇌과학 분석이나 인식론을 가져오지 않아도. 안경도 필요없겠지?
작가란 무엇인가, 삶의 철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윤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꼭 완독해야 할 계기가 생긴 것 같다.
ㅡAgalma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옥좌에 오르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엉덩이로 앉아 있을 뿐이다. ㅡ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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