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간을 위한 철학
로버트 그루딘 지음, 오숙은 옮김 / 경당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 서성이는 자에게 물음이여, 오라

 

내게 독서는 글을 따라가는 행위가 아니다. 학문의 계보학이 아니다.

무방비한 자세나 감상의 태도도 아니다. 물건을 고르는 계산도 아니며 적선을 바라는 비굴함도 아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내가 흘려버렸던 것을 글쓴이는 어떻게 끈질기게 좇아가며 실패하는지 살피는 일종의 고고학이다.

짧은 삶 속에서 이 독서에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는 감식안이 필요하다.

책의 서문,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도 이 고고학의 시작을 결정할 수 있다.

책을 읽는 중에도 문장 속의 열망과 열광을 알아챌 만큼 충분히 서성여야 한다. 다 읽은 뒤에도.

 

 

 

§§ 반복의 답습이 아닌 새로운 모색을 향해

 

기다림을 찾아가는 기다림. 그루딘은 기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관심사 속으로 완전히 빠져서 외부적 횡포와 거리를 두는 것”(p156)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몽테뉴에게서 배웠다. 자유주의자이자 이성주의자였던 몽테뉴만큼이나 그루딘도 그렇다. “우리의 자유는 공간 속의 자유인 동시에 시간 속의 자유여야 한다”(p36)

 

 

 

 

 

 

 

 

 

몽테뉴(1533 ~ 1592)가 철학 에세이수상록서문에서 나 자신이 바로 내 책의 재료”( 수상록, 동서문화사)라고 말하듯이 그루딘도 내가 쓰고 있는 글이 곧 내가 쓰는 글의 글감”(p213)이라고 말한다.

 

자기 인생에 확실한 목표를 세워 두지 않는 자는 특수한 행동을 처리해 갈 길이 없다”( 수상록, 동서문화사, p357)고 몽테뉴가 말하듯이, 그루딘도 우리가 인간적인 규모로 시간에 골조를 세울 때 시간은 의미를 가진다”(p17), “짜임새를 갖지 않는 시간이 자유로운 경우는 거의 없다”(p142)고 말한다.

 

몽테뉴가 고대 철학자들(특히 세네카)과 역사(그리스, 로마)에서 인식의 거듭된 재고를 배웠듯, 그루딘도 고대 로마를 비롯해 현실 속 많은 지역을 견유하며 얻은 사유를 말하며 철학자들(특히 몽테뉴)을 인용한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가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과정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공을 심리적 경험 속에 투영할 수 없다.……정체성과 관계는 항상 움직이고 있으며, 그것을 정적이고 절대적인 용어로 나타내려는 시도는 기껏해야 상대적인 근사치를 낳을 뿐이라고 말한다. (p49)

아인슈타인에게서 얻은 배움도 아주 아름답고 명징하게 표현해낸다. “우리의 심리적 질량은 (아인슈타인의 법칙 하나를 빌리면)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증가한다.”(p188)

 

몽테뉴가 회의적인 인문학 견지였다면 그루딘은 요즘 사람답게 좀더 현실적이며 자연과학에 기반한 자세인 게 돋보인다. 현재의 계산체계를 비판하는 부분이 신선하다. 십진법 체계를 갖추고서 왜 우리는 다루기 힘든 수를 토대로 시간을 더욱 일관성 없고 파악하기 힘들게 만들었는가. 1분을 100초가 아닌 60초로, 하루를 20시간이 아닌 24시간으로, 일주일을 10일이 아닌 7일로 만들었는가. 그래서 그루딘은 이 책을 프랑스 혁명력의 자연스러운 시간 체계를 가져와 조각조각 단상(斷想) 구조에 접목했다.

더불어 규격화된 괴로움. “일과 놀이로 정례화된 7일로 구성된 일주일은 우리 거의 모두가 공유하는 심리적 리듬을 만든다……일과 일하지 않음을 기계적으로 번갈아 하면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양상의 차이를 잘못 해석하고, 일을 불쾌한 종속과, 일하지 않음을 해방된 즐거움과 연관시킨다. 우리는 임의적인 시간만큼 일하기 때문에, 일을 성취의 측면이 아닌 시간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분노의 월요일, 고된 일의 연속인 화요일과 수요일, 피곤한 목요일, 종일 일이 안 잡히는 금요일…….”(p228)

 

 

 

 

 

 

 

§§§ 그루딘이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연속성” - 시공간에 대한 습관을 바꾸라

 

우리는 습관적인 태도로 과거-현재-미래를 분류하고서 그것들을 단절시키고, 자신이 만든 의미 - 숨쉬는 상상력이 아닌 기억 속에 제 스스로를 가둔다. 그루딘은 말한다.

두려움과 혼란을 느끼는 우리는 미래가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을 두리번거린다. 시간의 진정한 문제는 시간의 성격에 있다기보다는 시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으며, 우리가 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방식에 있다.”(p25)

과거와 미래는 한 연속체의 일부로서 본질상 아무런 질적 차이가 없다. …… 실제로 과거와 미래를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 시간의 형태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어제 낮에 버스를 타고 2시간 정도 이동했다. 익숙한 길이었음에도 낯선 이미지들이 가득했다. 씨푸드 레스토랑이 헐리고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었고(문득 겹치는 용산 생각...), 어느 이층집 창문의 반쯤 열린 틈새로 커튼이 탈출에 실패한 채 걸려 있었다. 커피가 내려지고 있는 카페를 겹겹의 유리창을 통해 바라봤다. 휙휙 지나치는 간판의 글자들은 사람이 걸어다니고 있지만 사실은 이곳이 거대한 언어 왕국임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버스 안은 어두웠고 나는 책을 무릎에 둔 채 진기한 투명의 세계를 휘둥그레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비의 미래가 내렸다. 낱낱의 빗방울들은 저마다 개성적인데 왜 "비"라고 통칭해서 부를까. 무수히 출현했음에도 우리의 언어, 표현은 여전히 부족한 것이다.

모든 공간과 언어에 시간이 녹아 있음을, 그 시간을 지금 이 공간에 내가 가져오는 것을 당신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의 과거는 어떤 현재로 나타나며, 당신의 현재를 또 어떻게 과거로 만들고 있는가.

 

 

 

그루딘은 그 경험은 가라앉고, 과거라는 평범한 벽 위의 이미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등장”(p57)하고, “과거는 거울처럼 밋밋”(p78)할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자신에 의해서.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크기가 곧 시간 속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크기다”(p62)

 

시공간에 대한 것만큼이나 정체성도, 자유도, 자유의지도 성스럽게 보관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억을 좌절과 나이 듦 속에 묻어 버리지 않을 때 그것은 일시에 드러난다. 그것은 다른 말로 용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외 그루딘이 제시하는 유용할 습관 표현들

 

하루 중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 것, 세세한 계획 세우기와 실행, 추상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일기 쓰기, 타인에 대한 사랑의 표현 등…….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아 평범해 보이겠지만 책에서 직접 만나 보라.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거라고 장담한다!

 

역자가 후기에서 밝힌 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진지한 철학서, 자기계발서, 방황하는 누군가에게는 삶을 변혁시킬 길잡이”(p278)가 돼줄 책이다. 무엇보다 시간, 기억, 정체성, 글쓰기에 대해 짧지만 오랜 숙고가 엿보이는 보고서다. 1200페이지에 달하는 몽테뉴 수상록전문을 읽기가 버거운 사람에게는 현실적으로 유용할ㅎ.

그루딘의 책을 읽고 나니 예전에 읽다가 포기했던 몽테뉴 수상록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하루 10페이지 남짓이면 100일이면 가능하다! 동서문화사 번역이 참 맘에 안 들지만 이미 샀으니 크흠))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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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7-01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신해철의 저주파 같은 낮은 목소리,로 나래이션인듯 랩인듯 그리 읊조리게 되는 ^^

AgalmA 2015-07-01 01:28   좋아요 0 | URL
😧;;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요. 신기하군요. 왜 그런 느낌일까... 책 내용이 까다로운 부분을 건드려서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호😑

[그장소] 2015-07-03 13:52   좋아요 0 | URL
음, 머릴 풀어헤쳐서 그러는...그런데..나 좋아요 눌렀는데..분명.!! 와보니 띵~!!! 다시 누르고 갑니다!^^
나는 해철씨의 그 초저음의 그 목소릴 넘 좋아했다는 ,음도시민역사..를..그니까..단호히..좋아한다고 말하고 갈께요!^^

수이 2015-07-01 0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종의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는 거죠?

AgalmA 2015-07-01 01:34   좋아요 2 | URL
네, 자기만의 생처럼, 자기만의 방도^^
야나님의 <자기 앞의 생> 원문 완독 (단독은 아니지만) 완전 축하🎉🎊🎆🎇

수이 2015-07-01 01:49   좋아요 0 | URL
단독은 아니지만_ ㅠㅠ
화낼 거야 엉엉 ㅠㅠ

아갈마님 덕분에 불어 공부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겠군요 ㅋㅋ

AgalmA 2015-07-01 02:40   좋아요 0 | URL
아니, 이거 오햅니다;;; 축하가 제 단독이 아니라는😰

서니데이 2015-07-01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7월 첫날이네요. 즐겁고 기분 좋은 한 달 되세요.^^

AgalmA 2015-07-01 17:59   좋아요 0 | URL
7월의 첫 미소를 서니데이님께 드릴께요. :)

cyrus 2015-07-0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서문화사판 <수상록>이 빽빽한 활자라서 불편해요. 내용이 긴 글 하나 읽는데도 눈이 쉽게 피로를 느껴요. 아직까지 100쪽을 넘게 읽어본 적이 없어요. ^^;;

AgalmA 2015-07-01 18:29   좋아요 0 | URL
그쵸! 번역에, 활자까지 그래서 정말 고역ㅎㅎ;; 무게는 또 어떻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