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옮기려 해도 잘 되지 않는 것 중에서 죽음이 제일이지 않을까. 글로도 그림으로도. 그래서 그토록 많은 표현이 있는지도 모른다.

 


 

 ㅡ <운하> 中 ㅡ

˝그런데 저들은 행복한 표정이야.˝

˝그들의 얼굴은 영원히 공손한 표정으로 굳어져 있어서 그래. 하지만 그들의 기분이 어떤지를 누가 알겠어?˝

˝넌 알겠지.˝

˝나도 겉모습밖에 볼 수 없어. 인정해˝

˝뭘 인정한다는 거야?˝

˝또 하나의 포장으로 둘러싸인 겉모습은 곧 내면이 되고, 그것은 하나의 내면을 인정한 또 다른 내면이 겉모습으로 바뀌는 것만큼이나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거.˝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이건 중요하지 않아. 너도 죽을 것이고, 그러면 운하로 떨어질 것이고 이 도시 주변을 떠돌게 될거야.˝

˝아니, 난 난 말이야 죽으면 별들을 향해 날아갈거야.˝

˝새들도 죽으면 땅으로 떨어지는 법이야. 더구나 넌 날개조차도 없잖아.˝

˝내 아들은?˝

˝저기 있어, 네 뒤에. 저 애가 널 도와 줄거야.˝

아이는 가냘픈 손으로 그 남자의 등을 만졌고, 남자는 비명 한 마디 없이 쓰러졌다.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별들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운하의 물결에 몸을 맡겼다.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가버린다.

퓨마가 한숨짓는다.

˝대대손손 이런 식이야.˝

퓨마가 커다란 머리를 앞 발 위에 기대자, 그 거대한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ㅡ <어느 노동자의 죽음> 中 ㅡ

  네가 다니던 공장에서는 시계만 만든 게 아니야. 시체도 만들었지.

  공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병원에서도, 너희들은 서로 할 말이 없었어.

  넌 말이야,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 역시 네가 자고 있거나 아니면 죽었다고 생각했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어. 너 역시도 그랬고.






ㅡ<나는 더 이상 먹지 않는다> 中 ㅡ

 나는 고향마을의 끝없이 펼쳐진 밭으로 감자를 훔치러 갈 때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요리들을 상상했다. 지금 나는 흰색 냅킨, 크리스털잔, 은식기를 가지고 있지만, …






ㅡ<선생님들> 中 ㅡ

… 선생님들과  분필에 대한 나의 애정이 두터웠으므로, 당시에 나는  칼슘이 부족해서 분필을 엄청 많이 먹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열이 나곤 했지만, …

그래서, 그의 어떤 시가 학생들에게 야유를 받은 이후, 이 가엾은 선생에 대한 동정심에 사로잡힌 나는, 정확히 낮 12시 30분에, 학교 옆 공원에서, 여자 아이들이 잊어버리고 두고 간 줄넘기를 가지고 그의 고통을 끝내 주었다.

   나의 이런 인간적인 행동은 7년의 감옥살이로 보상받았다.






ㅡ <집> ㅡ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Agalma)





ㅡ <잘못 걸려온 전화> 中 ㅡ

재미있을 거라고! 그런 말을 쉽게 하는 부류들이 있다. 나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쓸 수 없는 말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재미있다˝, ˝흥분된다˝, ˝시적이다˝, ˝영혼˝, ˝고통˝, ˝고독˝ 등등. 요컨대,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럽다. 마치 ˝빌어먹을˝, ˝개자식˝, ˝창녀˝, ˝구역질 나는˝ 따위와 같이 조잡하고 천박한 말들을 할때와 마찬가지로, …






ㅡ<거리들> 中 ㅡ

아이들에게는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상관이 없었다.


 


 



신기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이 책 표지를 보니 내 그림의 손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색상 배치까지도! 역시 사람은 새보다 사람을 더 닮기 마련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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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3-25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밤잠을 잔 후 낮동안의 활동이 이어진다면 죽음 다음에는 무엇이 이어질까요? 이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여러 종교에서 내놓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Agalma님의 그림에 대한 영감은 정말 부럽습니다..

AgalmA 2017-03-25 17:02   좋아요 1 | URL
죽음 뒤에 우리가 낱낱의 물질로 흩어지든 이를테면 영혼같은 정신적 존재성으로 떠돌든 지금 생에서 골몰할 일은 아니란 생각이 점점 강해집니다. 지금의 삶을 더 피곤하고 혼돈스럽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을 좀 더 충실히 살지 않는다면 그때 가선 그게 또 미련으로 작동하겠죠. 밤잠에서 우리가 의식 속 삶의 잉여들을 계속 겪듯이 말이죠.
겨울호랑이님이 뜬금없이 이 얘길 꺼낸 건 아닌 거 같고 지금 읽거나 읽은 책 때문에 물으신 거 같은데... ˝지금˝을 잘 설명할 수 없다면 ˝이후˝는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이 많고 공부로 관심을 두고 있긴 하지만, 제 자신과 인간의 생각의 증식에 대한 혐오도 상당합니다. 즐기면서도 싫은 양가적 감정 땜에 늘 괴롭죠.
푸앵카레의 추측을 증명했지만 수학에 실망해 수학을 포기하고 최고의 수학자 상도 거부한 페렐만 심정도 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반감을 가진들 그의 머릿속에서 수학적 생각들이 떠도는 걸 막을 수는 없었겠죠.

가령 꽃들은 잠을 자는 걸 까요. 계속 살아가는 상태이다가 어느날 툭 죽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인간에게만 유독 죽음 이후가 중요할 게 무엇인가요. ˝죽음 이후의 어떤 상태˝를 생각한다는 건 다분히 인간의 생각 유희에 가깝지 어떤 본질도 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영감이라...다들 스쳐가는 건 있을텐데 어떻게 잡느냐 차이겠죠^^;

겨울호랑이 2017-03-25 17:40   좋아요 1 | URL
^^: 삶과 죽음은 쉽지 않은 주제라 생각합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여러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를 죽어간다는 말과 같은 의미인만큼 잘 사는 것과 잘죽는 것도 통하는 것 같네요.. Agalma님께서 죽은 새를 보셨다기에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3-25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젤 좋아하는 부사, ‘아무튼‘ 인데요.... ㅎㅎ
아무튼, 그림에서 이를 꽉 깨문 듯 느낌이 듭니다.
무엇에 대한 다짐을 하는 듯...

AgalmA 2017-03-25 18:33   좋아요 2 | URL
이빨보다는 한숨에 더 기까운... 담엔 표현에 더 신경쓸께요.
색감과 새에 정신이 팔려 인물은 신경을 덜 썼거든요.

‘아무튼‘ 없음 저도 문장 쓸 때 매우 적적할 겁니다. ‘여하간,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네들보다 ‘아무튼‘이 훨 깔끔하니까요.

2017-03-25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25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26 0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26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7-03-26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은 산 사람은 영원히 모르겠죠 죽었다고 해서 그걸 알 수도 없겠습니다 그걸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모르기 때문에 자꾸 말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어제 시인이 다친 새를 구했는데 어느 날 물에 빠져 죽었다는 시를 봤어요 겨우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합니다 죽음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기도 하죠


희선

AgalmA 2017-03-26 00:28   좋아요 1 | URL
그렇겠네요. 죽었다고 본질을 알 수 있단 보장도 없을 듯^^ 우린 늘 미망 속에 있으니까. 죽었다 깨어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본다는 빛의 터널효과도 과학계에선 신경계 오류나 집단무의식 같은 현상으로도 보잖아요. 그 경험 땜에 종교를 맹신하는 어떤 분도 봤어요. 자신에게 신이 보였다고 철석같이 믿더라는.

저도 순식간에 새가 죽는 걸 목격한 적 있어요. 진짜 이상한 경험이었죠.

페크pek0501 2017-03-26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는 너무 큰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을 그릴 땐 - 예를 들면 자식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얼굴 -을 그릴 땐
얼굴을 푹 숙이게 그린대요. 큰 슬픔은 어떤 표정으로도 그릴 수 없음을 나타내는 거라고 하더군요.
님도 입 하나로만 표현하고 눈과 코는 가림으로써 그 효과를 보고 있는 듯해요. 나머지는 보는 사람의 상상에 맡기겠노라. 하는 것도 되겠지요. 훌륭한 솜씨입니다. 좋은 감상 하고 갑니다.

AgalmA 2017-03-26 17:39   좋아요 0 | URL
이 그림 그리기 전에 스케치를 몇 개 더 했었는데 다 고개를 어떻게든 숙이게 되더라는...결국 얼굴을 제일 가린 이 컨셉을 채택하게 됐는데 이런 건 역시 계산보다는 자동적으로 그리 되는 거 같아요.
섬세한 평 감사합니다^^
 

프랑스에서 내게 에드가 드가 서거 100주년 기념우표를 붙여서 보내줄 친구가 없는 게 안타깝다. 바랄만큼 노력한 게 없지. 친구는 없고 우표는 아름답다.
여행 가서 편지 보내는 걸 늘 잊곤 했다. 하지만 그걸 챙겨준 친구도 있었지. 미국에서 잭슨 폴록 no 5 우표 같은 거 붙여서 왜 안 보내 준 거야? 물을 수 없는 게 일단 그런 우표가 있는지도 몰랐을 거지만 내가 그렇게 요구할 만큼 친구다웠나 자문해보면...... 우리는 정녕 누가 누구의 친구인가. 자기 얘기에 귀 기울여 줄 상대를 원할 뿐. 내 말을 경청해주시는 신이라는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진정한 친구로 신을.... 호기심으로 다가가긴 쉽지만 친구로서 성의를 다하긴 너무나 부족한 우리. 사실 거의 대다수 서로에게 친구가 아니다. (아주 조금) 아는 사람. 대화라도 오가면 다행이고. 수많은 대화가 오가도 더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끝장나는 것도 감당해야지.
공동체는 더 큰 상상체. 현재 거대한 공동체가 유지되는 건 그래서 놀랍다. 개인 간엔 상상을 공유하고 유지하기 어려운데 더 큰 범주로는 그게 쉽다니!
이건 단지 내 생각의 단편일 뿐이고 모두 좋은 친구와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자. 생각이라도 덜 외롭게.


오늘 짧은 꿈에도 친구가 나왔다. 오래된 친구와 가상의 도시에서 오랜 산책을 하며 도시에 대해 이야기했고, 오래된 경양식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 메뉴로 생소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주문했다. 내가 메뉴를 오래 고르는 동안 친구는 낯선 사람에게 붙임성 있게 구는 습관대로 웨이트리스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남자 친구에 대한 험담을 했다. 100% 꿈이었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걸었고 웃었고 바람을 느꼈고 이야기했고 먹으려고 했다. 한참 고르고 주문한 음식을 먹기도 전에 깬 것도 슬펐다. 비프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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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7-03-25 0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여행지에서 보낸 편지 한 통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특히 여행지에서 엽서를 보내는 일본문화가 참 부럽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 우표는 직접 모으신거예요?

AgalmA 2017-03-25 02:55   좋아요 0 | URL
출처를 다 표기해야 하는데 북플로 써서 출처를 표기하지 못했어요. 제가 가진 우표는 하나도 없어요ㅜㅜ 이런 우표를 챙겨 보낼 친구를 일단 해외로 보내야 한다는 어려움이....

해피북 2017-03-25 03:00   좋아요 1 | URL
우표를 붙여 보내줄 친구가 없는걸 아쉬워하는건 알았는데 우표에 직인이 찍혀있어서 제가 살짝 오해를 ㅎ 우표가 정말 멋지네용^~^

AgalmA 2017-03-25 03:02   좋아요 0 | URL
잘 물어 보셨어요. 다른 분들도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있었으니까. 저작권 때문에 요즘은 그런 거 잘 따져야 하니깐요.

겨울호랑이 2017-03-25 0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예전에 Pen Pal을 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우표가 모이더라는..ㅋㅋ 요즘은 거의 안하겠지요? ㅋ

AgalmA 2017-03-25 12:58   좋아요 1 | URL
저도 딱 한 번 펜팔 한 적 있습니다. 편지지랑 편지봉투를 어떻게 더 기발하게 만들어 보내는가에 더 심혈을 기울였던ㅎ;
요즘은 펜팔보다 온라인댓글을 쓰겠죠. 지금처럼ㅎ;

2017-03-25 0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25 13:00   좋아요 1 | URL
한국우표도 저런 식으로 한국그림(웹툰까지ㅎ) 이용하던데 제 눈엔 그닥..... 제가 모르는 좋은 게 있는지도 모르지만^^;

있을 때 잘해 주는 것. 그게 최선인 듯^^;

희선 2017-03-26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디에 거의 가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 편지나 엽서를 보낼 수 없군요 다른 나라에서 나오는 기념우표는 살 수 없지만 한국에서 나오는 기념우표는 사기도 해요 바로 쓰지 못하지만... 언젠가 써야지 합니다 우표를 쓰려고 편지를 쓴 적도 있군요 가까이에 있어서 자주 만나면 친구를 더 생각하겠지만, 멀리 있다면 어렵겠죠 연락은 못해도 친구가 자신을 가끔 떠올릴지도 모르죠 제가 그러는군요 연락이 끊긴 사람을...


희선

AgalmA 2017-03-26 00:22   좋아요 1 | URL
편지는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죠. 전화로라도 안부인사를 먼저 해오는 친구는 고맙죠. 사는 게 팍팍하고 아이 키우기 여념없는 나이대엔 더 힘든 일인지도. 그게 아니더라도 서서히 세상을 보는 시선,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갈라지게 되는 친구도 많고. 어찌 보면 끝까지 함께 가는 친구는 운명적인 뭔가 있나보다 싶긴 합니다...
 

 


˝난 영원이 뭔지 몰라. 하지만 널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는 느낌. 그게 바로 영원인지도 몰라.˝
노발리스 《푸른꽃》

 

˝인간의 육체는 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그 점에 있어서는 조각가들이 우리들보다 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네. 자연의 실물은 일련의 둥근 형태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고 있다네. 엄격히 말하자면 데생은 존재하지 않아! .... 인간이 대상에 대한 빛의 효과를 이해하는 방법이 바로 선이라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득 찬 자연에는 선이 없다네.
...아마도 단 한 선만으로 데생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고, 형상을 그릴 때는 우선 가장 밝은 돌출부에 몰두하면서 중간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다음에 보다 어두운 부분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네. 우주의 신성한 화가인 태양도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학문의 과잉은 무지와 마찬가지로 부정에 이르고 마네.˝
오노레 드 발자크 사라진느


모든 예술 가운데 아마 회화만이 필연적으로, <히스테리컬 하게> 자기 자신의 대재난을 통합하고, 그러고 나서 스스로를 앞으로의 도피로 구성한다. 다른 예술들에서 대재난은 단지 연상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화가는 직접 대재난을 통과하며 혼란을 껴안고 그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한다.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비현실적인 것들이 되돌아와 나의 현실이 되는 세계야말로 내가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정영문 바셀린 붓다

 

 

 

 

 

 

 

 

 

 

 

 

 

 

 

 

 

 

 

 

 

정영문 오리무중에 이르다 읽고 싶다. 내 심사가 오리무중인 걸 또 어떻게 아시고 제목이 예술!
읽기 전에도, 읽으면서도, 다 읽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꽥꽥대겠지. 파랑으로 노랑으로 심연으로.

 

 

 

 

 

 

 

 

 

 

 

 

 

 

책 사는 김에 헤르만 헤세 연필세트도 장만! 아름다운 회색!

오리무중 읽으려다 정말 오리무중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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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24 1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술이여 영원하라~ ^^..

AgalmA 2017-03-24 11:46   좋아요 2 | URL
예술은 제가 걱정 안 해도 영원할 거 같고, 제가 예술보다 먼저 사라질 건 확실하고! 흐엉)

이름 2017-03-24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 <오리무중에 이르다> 읽고 있는데 예전에 <어떤 작위의 세계>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푹푹 빠집니다. 허허

AgalmA 2017-03-24 11:48   좋아요 1 | URL
그렇겠죠. 그렇지 않다면 저런 제목도 못 붙였을 것이고...˝작위˝만큼 ˝오리무중˝도 이미 뭔갈 상당수 전해 주고 있단 말이죠. 정영문 작가 소설 많이 읽어본 사람은 제목보면 사태 대략 짐작가지 않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지요.

단발머리 2017-03-24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앗!! 파랑파랑 이 아름다운 여인의 옆모습~~
너무 근사합니다.

AgalmA 2017-03-24 18: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가끔 색깔을 재현해보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는데, 발자크가 <사라진느>에서 그런 얘길 해주니 반갑더라는^^

겨울호랑이 2017-03-24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ㅜㅜ. Agalma님의 좋은 작품을 잘 못 봤어요.... 소용돌이 치는 파란 바다에서 참치(?)가 탈출하는 장면으로....단발머리님의 해설을 보고 나서야 제대로 보였다는... 아... 당최 이 삐딱한 시선은 답이 없군요.

AgalmA 2017-03-24 18:06   좋아요 1 | URL
참치는 어찌 해야 보이는 겁니까ㅎ; 바탕의 티처럼 보이는 저걸 보시고 그런 건가ㅎ;
삐딱하게 보는 시선이 창작이나 예술의 원동력이라고도 하는데, 겨울호랑이님은 다른데다 그걸 열심히 쓰고 있는지도요^^

겨울호랑이 2017-03-24 18:09   좋아요 1 | URL
그게... 여인의 눈이요... 여인의 눈동자가 참치(물고기) 눈이고요... 에고.. 참 한숨이 나옵니다..ㅋ

희선 2017-03-25 0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어 본 적 없지만 <바셀린 붓다>에 쓰인 말처럼 생각하는 사람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한테 현실을 생각해야지, 하면 안 될 텐데... 그러고 보니 예전에 현실을 생각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조금 했군요 지금은 그런 것과 아주 멀어졌습니다 그림 멋지면서도 슬프게 보이기도 하네요 여자가 울어서...


희선

AgalmA 2017-03-25 02:07   좋아요 1 | URL
저 말은 정영문 작가 작품의 큰 줄기라고 할 수 있어요. 항상 현실 위에 걸쳐진 줄 위를 스스로 올라가 걸으며 아슬아슬한 무언가를 말한다고 할까요. 그의 작품을 읽으면 그래, 나도 그랬지, 그렇지, 그러고 싶었어 하며 슬프면서도 인정하게 됩니다.

여자를 울게 만들 건 저죠.
 

가난해서 중학교도 중퇴하고 하인, 사무보조, 사서, 은행 사무원, 공장노동자로 살았던 그가 작가라는 소위 지성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하인... 그래서 그가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썼던 거구나 생각했다.

1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자살에도 실패하고, 정신병원에도 입원해 봤지만 사는 건 녹록지 않았다. ‘쓰기‘와 ‘걷기‘는 그의 일상, 그의 친구, 그의 안식. 그의 죽음은 쓰기와 걷기 사이에서 마침내 벌어진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56년 크리스마스 아침 산책을 나간 길에서 홀로 눈밭에 쓰러져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 문장에서 저절로 묵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소설들, 어쩌면 산문에 더 가까운.
첫 단편은 시인에 대해서.
두 번째는 죽음에 대해서.
세 번째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이나 한 듯한 <크리스마스 이야기>


「모자와 외투는 순식간에 눈으로 하얗게 변했다. 주변의 모든 사물도 사람도 다 마찬가지였다. 천지는 소리가 없고 불빛만이 반짝였다. 마치 지금 이 세상에는 오직 정겨운 집만이,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온통 즐거운 기분만이, 오직 다정한 대화만이, 말할 수 없는 행복만이 넘치는 것처럼.
그 지식인은 지금 분명 눈이 소담스럽게 쏟아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리라. 그도 눈을 보고 기뻐할까? 분명 그렇겠지! 이렇게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내리는 눈에 기뻐하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나. 눈 내리는 광경을 보면 누구나 다 그 아름다움에 탄복한다.
그 순간 나는 여러 아이들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다시 한 명의 아이로 돌아갔다. 나는 아이를 가슴에 껴안은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나는 상상 속에서 집을 갖고 있었다. 집 앞에서 개가 짖었다. 명랑한 여인이 착한 남편을 기다렸고 아이는 책상에 앉아 학교 숙제를 했다. ‘눈이 내리면 내 마음은 행복한 시민계층, 행복한 가장의 심정이 되어버리는구나. 무의식중에 아몬드, 오렌지, 대추야자를 먹으며 크리스마스트리의 전나무 가지가 촛불에 타들어가는 소리를 듣는구나. 온 세상의 축제의 향기가 내 앞에서 넘실거리고 나는 기꺼이 한 명의 착실한 남자가 되어버린다. 튼튼하고 강직한 가장이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늑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나는 바닥에 앉아 잠들 때까지 그대로 있고 싶었다. 그러면서 눈 위에 뭔가를 써보기로 했다. 여기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내 시에도 눈송이들이 어지럽게 흩날리기를 바랐다. 여기서 내가 느끼는 그리움이 표현으로 나타나기를 바랐다.」


 

아, 그는 크리스마스 아침 죽어가면서 바닥에 시를 쓰고 죽어 갔을지도 모르겠다. 슬펐겠지만 그 순간 스스로를 위로할 방법을 이미 생각해 봤잖은가.


카프카가 발저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거 같다. 두 사람의 글은 마치 쌍둥이 같다. 교육을 혐오하는 것까지도.

한겨울 이 책이 나왔으면 좋았을걸. 겨울이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기엔 글이 너무 아름다워 참을 수 없다. 방법은 간단해. 지금 읽고 겨울에 또 읽으면 되지.
산책자가 걷는 숲의 줄기 하나를 가져온 듯한 연두색 끈, 이제껏 본 책 끈 중에 가장 아름답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상처 난 손가락이 쿡쿡 쑤신다. 눈이 쌓이듯.

 

 

 

 

 

Matthew Bourne - Menis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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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2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23 13:40   좋아요 2 | URL
요즘은 배수아 작가 자기 책보다 번역서가 더많이 보여요ㅎ; 이러다 자기 본업을 넘어서겠음ㅎㅎ 이미 넘어섰나a 배수아 작가가 번역한 게 다 제 취향이라 얼마나 좋고 감사한지^^

2017-03-22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23 13:44   좋아요 2 | URL
죽음을 특히 비장하거나 더 과장되지 않게 사실적인 느낌으로 담고 싶었는데 확실히 어렵습니다... 장식적인 걸 제거하기가 어려워요.
음악은 재고 따지고 할 거 없이 걍 제 취향;

달걀부인 2017-03-23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승원과 그림느낌이 비슷해요. 서정성 같은거요

AgalmA 2017-03-23 14:01   좋아요 0 | URL
문득 생각난 일화가 있는데... 지인에게 제 1일1그림 그린 거 보여주니까 대뜸 ˝만화잖아˝ 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서 참 많은 걸 생각했어요. 순수예술과 만화를 구분하는 차이에서 반드시 나오는 어떤 격하, 세대에 따른 문화를 대하는 차이, 그 사람이 (어떤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있는가에 따른) 그림을 대하는 자세 등등...
암튼 요즘 자주 하는 고민과 또 엮입니다. 나는 만화적인 그림 외에 다르게 표현할 수는 없나.

말씀하셔서 그런가 한승원 그림체 느낌도 받을 수 있겠습니다^^ 한승원 작가는 누구 영향을 받은 걸까요.
제 그림체 영향은 <올훼스의 창>을 그린 이케다 리요코를 빼놓을 수는 없을 듯;

이러저러 그림에 대해선 글만큼 고민이 많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3-23 08: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델센의 성냥팔이 소녀도 그처럼 추위에 떨다가 죽어갔지요... 동화 속에 나오는 몇 안되는 죽음이긴 합니다만, 소녀는 크리스마스에 죽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역시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여 동화에서 감정을 끌어다 쓰는 겨울호랑이입니다.ㅋ ^^:

AgalmA 2017-03-23 13:57   좋아요 1 | URL
<성냥팔이 소녀> 책 작년에 구입해놓고, 지난 겨울 너무 정신없어 못 읽고 지나갔네요ㅎ;
옛날 읽었던 기억으론 성냥을 켤 때마다 따뜻한 집, 음식 그런 게 나왔던 걸로 아는데 마지막이 뭐 였는지 가물가물...다 읽고 나면 알려 드릴께요ㅎ

모든 걸 완벽히 아는 사람은 없잖습니까. 저는 요즘 겨울호랑이님께 제일 부러운 게 그많은 책읽기가 아니라 연의를 통해 배우는 게 뭘까...하는 거임ㅎㅎ 각자 그런 부족함을 느끼고 사는 거죠. 뭐ㅎㅎ

겨울호랑이 2017-03-23 14:02   좋아요 1 | URL
^^: 저도 연의를 통해서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연의가 아플 때는 ‘아, 엄마도 내가 아플 땐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하는 공감도 배우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것을 연의한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지?‘ 하는 고민을 던져주지요.. 그런 면에서 ‘딸‘이지만, ‘선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2017-03-23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23 17:16   좋아요 1 | URL
아뇨. 제가 저 일화를 얘기한 건 달걀부인님 평이 그렇단 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볼 때 각자의 생각을 가져오는 게 흥미롭다는 뜻^^
혹 제가 불편을 드린 거면 죄송요^^; 불쑥 떠오른 생각인데 어쩌다 달걀부인님 댓글로 엮이게 된 건지도요^^

AgalmA 2017-03-24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사고 나니까 발저 핀 배지 주는 행사에, 한 권만 사도 알라딘 굿즈 주는 행사도 하고 너무하잖아!
알라딘, 진짜 이러기야!!! 왕왕!!!
그러게. 좀만 참지 그랬어. 후후)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웃겨지는 나. 현명은 내 거울은 아닌 것이다. 지켜주는 나와 망치는 나 속에서 무수한 왕복운동. 독서도 그림그리기도 글쓰기도 사실은 나를 보지 않기 위한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소비는 이미 그렇다고 증명되었다.)
 

밤의 시간
공간을 넘어왔지만 내 습관이 바뀐 건 아니었다. 나는 강화의 밤 속에서도 서성이며 귀 기울였다. 깊은 밤엔 잠귀 밝은 개들이, 이른 새벽엔 새벽잠 없는 닭들이, 제 언어로 뭐라 뭐라 말했다. 아니 뭐라 뭐라 표현한다고 생각했다는 게 더 정확하다. 햇볕이 눈 밑까지 밀려오자 까마귀와 까치가 허공을 담은 목소리로 뭐라 뭐라 표현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부딪히지 않고 평화로이 흩어졌다. 이 소리들은 익히 알던 소리였다. 한동안 그 개성들을 잊고 살았다. 사람과 자동차 소리에만 둘러싸여 산 그간의 반복들. 단 하룻밤으로도 이런 차이를 알게 되다니 여행은 얼마나 멋진 선생님인가. 그러나 같이 살아가는 생물 외 무생물의 언어까지 헤아리기에 나는 아직도 까마득하다.



사람의 시간
벗은 ‘올해의 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평가해준 상. 그에게 상은 하냥* 아이들이었다. 그게 과시적 자랑이 아니란 걸 안다. 나는 늘 그를 키팅 선생이라 생각해서 당연하다고 끄덕였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소비의 사회, 논어를 가르칠 때 아이들이 얼마나 열광했는지 들려주었다. 조를 짜서 토론을 하며 이런 사색을 하는 아이들의 공간에서는 따돌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들이 세상에 대해 일찍 눈뜨고 더 깊게 보게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곳곳에 숨어 있다. 한국의 일반 고등학교에서도 이런 커리큘럼과 토론의 장이 열릴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하냥: ‘늘, 함께‘라는 뜻의 방언. 허수경 시인의 이 시집에 자주 등장한다.



나무의 시간
벗은 텃밭을 가꾸는데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일을 마치자마자 달려와 텃밭에 비료를 뿌렸다. 흙에 대한 허수경 시인의 표현 중 하나가 떠올랐다. 
˝팔을 잃어버리고도 안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흙은 인간의 팔이 해주는 포옹을 기억하는지
삽으로 흙을 파는 건지 땅에 상처를 주는 건지˝(「매캐함 자욱함」)
호모 사피엔스의 농부 기질보다 나는  네안데르탈인의 채집 기질이 더 많으니 전등사로 가자고 했다. 대웅전 지붕 모서리에 있는 ‘나녀상‘과 대웅전 부처상 위의 ‘닫집‘(부처님이 사는 작은 집을 표현한 것)을 보기 위해.
그러나 우린 다른 무엇보다 700년 된 은행나무에 감탄했다. 고려에서 시작되고 조선이 망해도 살아있는 나무. 하지만 인간은 이런 나무를 간단히 잘라냈으며 앞으로도 충분히 잘라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이곳 오래된 소나무들은 상처가 많은데 일제시대 송진 수탈 때문에 그리된 것이라 한다. 멋모르고 보면 못생겼거나 흉측하다 말할 테지만 그것은 소나무에게 살아낸 증거였다. 700년 된 은행나무에도 일제와 관련된 신기한 전승이 있는데, 은행을 두 배로 공출하려고 하자 노승이 은행나무에게 앞으로 천년 동안 열매를 맺지 말 것을 기도했다. 지금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하는데 가을에 다시 와서 확인을 해야 하나.
700년 된 은행나무에 감탄하고 그래설까 화분 몇 개를 사들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차, 했다. 고려궁 터 옆에는 688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눈앞의 것을 우린 항상 놓친다.



시의 시간
지금은 까치가 저녁의 목소리로 울고 날아가는 시간.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시집을 나는 ˝낙엽도 온몸으로 걷고 있는˝(「발이 부은 가을 저녁」) '가을의 시간'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


ㅡ 「이 가을의 무늬」 중

이광호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가을의 무늬‘는 여름의 시간 뒤에 나타나는 오래된 시간의 지도를 나타나게 한다. 시간의 지도를 볼 수 있는 계절은, 세월 속에서 엇갈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하˝는 시간˝이라고. 동감이다. 이 시집 2부의 주요 소재와 제목이 열매로 채워진 것은 단순한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지도를 품은 성물이었다.
‘가을‘은 저마다 영근 낮의 기운들이 밤으로 가는 ‘저녁‘ 같기도 해서 이 시집에서 ‘가을‘과 ‘저녁‘은 동의어이다
허수경 시인에게 기억은 완벽히 복원할 수 없는 불가능-시간과 동의어일 것이다. 죽음의 시간으로 가는 동안 우리들의 기억들은 모여 살며 언제든 불쑥 나타난다. 누구에게든.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내 손을 잡아줄래요?」)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한국 최초의 문묘와 교육 기능을 행한 교동향교, 한국 최초의 방직공장과 노동운동,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한옥 성당, 평화 전망대까지 품고 있는 강화에서 이런 생각은 퍽 어울린다.

빙하기의 역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는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대요 뼈만 남은 손을 감싸며 흐느끼던 손요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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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3-20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것이 알고싶다 1068회 죽음을 부른 실습 - 열아홉 연쇄사망 미스터리]를 보고...
이 방송 보고 특성화고, 마이스터교 가려던 학생은 생각이 많을 거 같다.
가축을 길러 팔아 치우듯 학생들을 사회에 내보내는 사육장 시스템.
실습을 그만 두고 싶어도 체벌에, 벌점에, 모욕에... 갈 곳 없는 사회의 단면을 절감하고 결국 자살하는 아이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곳곳이 썩은 이 사회... 곳곳에서 무수하게 죽어가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