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서 중학교도 중퇴하고 하인, 사무보조, 사서, 은행 사무원, 공장노동자로 살았던 그가 작가라는 소위 지성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하인... 그래서 그가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썼던 거구나 생각했다.

1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자살에도 실패하고, 정신병원에도 입원해 봤지만 사는 건 녹록지 않았다. ‘쓰기‘와 ‘걷기‘는 그의 일상, 그의 친구, 그의 안식. 그의 죽음은 쓰기와 걷기 사이에서 마침내 벌어진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56년 크리스마스 아침 산책을 나간 길에서 홀로 눈밭에 쓰러져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 문장에서 저절로 묵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소설들, 어쩌면 산문에 더 가까운.
첫 단편은 시인에 대해서.
두 번째는 죽음에 대해서.
세 번째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이나 한 듯한 <크리스마스 이야기>


「모자와 외투는 순식간에 눈으로 하얗게 변했다. 주변의 모든 사물도 사람도 다 마찬가지였다. 천지는 소리가 없고 불빛만이 반짝였다. 마치 지금 이 세상에는 오직 정겨운 집만이,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온통 즐거운 기분만이, 오직 다정한 대화만이, 말할 수 없는 행복만이 넘치는 것처럼.
그 지식인은 지금 분명 눈이 소담스럽게 쏟아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리라. 그도 눈을 보고 기뻐할까? 분명 그렇겠지! 이렇게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내리는 눈에 기뻐하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나. 눈 내리는 광경을 보면 누구나 다 그 아름다움에 탄복한다.
그 순간 나는 여러 아이들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다시 한 명의 아이로 돌아갔다. 나는 아이를 가슴에 껴안은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나는 상상 속에서 집을 갖고 있었다. 집 앞에서 개가 짖었다. 명랑한 여인이 착한 남편을 기다렸고 아이는 책상에 앉아 학교 숙제를 했다. ‘눈이 내리면 내 마음은 행복한 시민계층, 행복한 가장의 심정이 되어버리는구나. 무의식중에 아몬드, 오렌지, 대추야자를 먹으며 크리스마스트리의 전나무 가지가 촛불에 타들어가는 소리를 듣는구나. 온 세상의 축제의 향기가 내 앞에서 넘실거리고 나는 기꺼이 한 명의 착실한 남자가 되어버린다. 튼튼하고 강직한 가장이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늑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나는 바닥에 앉아 잠들 때까지 그대로 있고 싶었다. 그러면서 눈 위에 뭔가를 써보기로 했다. 여기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내 시에도 눈송이들이 어지럽게 흩날리기를 바랐다. 여기서 내가 느끼는 그리움이 표현으로 나타나기를 바랐다.」


 

아, 그는 크리스마스 아침 죽어가면서 바닥에 시를 쓰고 죽어 갔을지도 모르겠다. 슬펐겠지만 그 순간 스스로를 위로할 방법을 이미 생각해 봤잖은가.


카프카가 발저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거 같다. 두 사람의 글은 마치 쌍둥이 같다. 교육을 혐오하는 것까지도.

한겨울 이 책이 나왔으면 좋았을걸. 겨울이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기엔 글이 너무 아름다워 참을 수 없다. 방법은 간단해. 지금 읽고 겨울에 또 읽으면 되지.
산책자가 걷는 숲의 줄기 하나를 가져온 듯한 연두색 끈, 이제껏 본 책 끈 중에 가장 아름답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상처 난 손가락이 쿡쿡 쑤신다. 눈이 쌓이듯.

 

 

 

 

 

Matthew Bourne - Menis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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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2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23 13:40   좋아요 2 | URL
요즘은 배수아 작가 자기 책보다 번역서가 더많이 보여요ㅎ; 이러다 자기 본업을 넘어서겠음ㅎㅎ 이미 넘어섰나a 배수아 작가가 번역한 게 다 제 취향이라 얼마나 좋고 감사한지^^

2017-03-22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23 13:44   좋아요 2 | URL
죽음을 특히 비장하거나 더 과장되지 않게 사실적인 느낌으로 담고 싶었는데 확실히 어렵습니다... 장식적인 걸 제거하기가 어려워요.
음악은 재고 따지고 할 거 없이 걍 제 취향;

달걀부인 2017-03-23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승원과 그림느낌이 비슷해요. 서정성 같은거요

AgalmA 2017-03-23 14:01   좋아요 0 | URL
문득 생각난 일화가 있는데... 지인에게 제 1일1그림 그린 거 보여주니까 대뜸 ˝만화잖아˝ 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서 참 많은 걸 생각했어요. 순수예술과 만화를 구분하는 차이에서 반드시 나오는 어떤 격하, 세대에 따른 문화를 대하는 차이, 그 사람이 (어떤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있는가에 따른) 그림을 대하는 자세 등등...
암튼 요즘 자주 하는 고민과 또 엮입니다. 나는 만화적인 그림 외에 다르게 표현할 수는 없나.

말씀하셔서 그런가 한승원 그림체 느낌도 받을 수 있겠습니다^^ 한승원 작가는 누구 영향을 받은 걸까요.
제 그림체 영향은 <올훼스의 창>을 그린 이케다 리요코를 빼놓을 수는 없을 듯;

이러저러 그림에 대해선 글만큼 고민이 많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3-23 08: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델센의 성냥팔이 소녀도 그처럼 추위에 떨다가 죽어갔지요... 동화 속에 나오는 몇 안되는 죽음이긴 합니다만, 소녀는 크리스마스에 죽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역시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여 동화에서 감정을 끌어다 쓰는 겨울호랑이입니다.ㅋ ^^:

AgalmA 2017-03-23 13:57   좋아요 1 | URL
<성냥팔이 소녀> 책 작년에 구입해놓고, 지난 겨울 너무 정신없어 못 읽고 지나갔네요ㅎ;
옛날 읽었던 기억으론 성냥을 켤 때마다 따뜻한 집, 음식 그런 게 나왔던 걸로 아는데 마지막이 뭐 였는지 가물가물...다 읽고 나면 알려 드릴께요ㅎ

모든 걸 완벽히 아는 사람은 없잖습니까. 저는 요즘 겨울호랑이님께 제일 부러운 게 그많은 책읽기가 아니라 연의를 통해 배우는 게 뭘까...하는 거임ㅎㅎ 각자 그런 부족함을 느끼고 사는 거죠. 뭐ㅎㅎ

겨울호랑이 2017-03-23 14:02   좋아요 1 | URL
^^: 저도 연의를 통해서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연의가 아플 때는 ‘아, 엄마도 내가 아플 땐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하는 공감도 배우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것을 연의한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지?‘ 하는 고민을 던져주지요.. 그런 면에서 ‘딸‘이지만, ‘선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2017-03-23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23 17:16   좋아요 1 | URL
아뇨. 제가 저 일화를 얘기한 건 달걀부인님 평이 그렇단 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볼 때 각자의 생각을 가져오는 게 흥미롭다는 뜻^^
혹 제가 불편을 드린 거면 죄송요^^; 불쑥 떠오른 생각인데 어쩌다 달걀부인님 댓글로 엮이게 된 건지도요^^

AgalmA 2017-03-24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사고 나니까 발저 핀 배지 주는 행사에, 한 권만 사도 알라딘 굿즈 주는 행사도 하고 너무하잖아!
알라딘, 진짜 이러기야!!! 왕왕!!!
그러게. 좀만 참지 그랬어. 후후)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웃겨지는 나. 현명은 내 거울은 아닌 것이다. 지켜주는 나와 망치는 나 속에서 무수한 왕복운동. 독서도 그림그리기도 글쓰기도 사실은 나를 보지 않기 위한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소비는 이미 그렇다고 증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