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시간
공간을 넘어왔지만 내 습관이 바뀐 건 아니었다. 나는 강화의 밤 속에서도 서성이며 귀 기울였다. 깊은 밤엔 잠귀 밝은 개들이, 이른 새벽엔 새벽잠 없는 닭들이, 제 언어로 뭐라 뭐라 말했다. 아니 뭐라 뭐라 표현한다고 생각했다는 게 더 정확하다. 햇볕이 눈 밑까지 밀려오자 까마귀와 까치가 허공을 담은 목소리로 뭐라 뭐라 표현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부딪히지 않고 평화로이 흩어졌다. 이 소리들은 익히 알던 소리였다. 한동안 그 개성들을 잊고 살았다. 사람과 자동차 소리에만 둘러싸여 산 그간의 반복들. 단 하룻밤으로도 이런 차이를 알게 되다니 여행은 얼마나 멋진 선생님인가. 그러나 같이 살아가는 생물 외 무생물의 언어까지 헤아리기에 나는 아직도 까마득하다.



사람의 시간
벗은 ‘올해의 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평가해준 상. 그에게 상은 하냥* 아이들이었다. 그게 과시적 자랑이 아니란 걸 안다. 나는 늘 그를 키팅 선생이라 생각해서 당연하다고 끄덕였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소비의 사회, 논어를 가르칠 때 아이들이 얼마나 열광했는지 들려주었다. 조를 짜서 토론을 하며 이런 사색을 하는 아이들의 공간에서는 따돌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들이 세상에 대해 일찍 눈뜨고 더 깊게 보게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곳곳에 숨어 있다. 한국의 일반 고등학교에서도 이런 커리큘럼과 토론의 장이 열릴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하냥: ‘늘, 함께‘라는 뜻의 방언. 허수경 시인의 이 시집에 자주 등장한다.



나무의 시간
벗은 텃밭을 가꾸는데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일을 마치자마자 달려와 텃밭에 비료를 뿌렸다. 흙에 대한 허수경 시인의 표현 중 하나가 떠올랐다. 
˝팔을 잃어버리고도 안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흙은 인간의 팔이 해주는 포옹을 기억하는지
삽으로 흙을 파는 건지 땅에 상처를 주는 건지˝(「매캐함 자욱함」)
호모 사피엔스의 농부 기질보다 나는  네안데르탈인의 채집 기질이 더 많으니 전등사로 가자고 했다. 대웅전 지붕 모서리에 있는 ‘나녀상‘과 대웅전 부처상 위의 ‘닫집‘(부처님이 사는 작은 집을 표현한 것)을 보기 위해.
그러나 우린 다른 무엇보다 700년 된 은행나무에 감탄했다. 고려에서 시작되고 조선이 망해도 살아있는 나무. 하지만 인간은 이런 나무를 간단히 잘라냈으며 앞으로도 충분히 잘라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이곳 오래된 소나무들은 상처가 많은데 일제시대 송진 수탈 때문에 그리된 것이라 한다. 멋모르고 보면 못생겼거나 흉측하다 말할 테지만 그것은 소나무에게 살아낸 증거였다. 700년 된 은행나무에도 일제와 관련된 신기한 전승이 있는데, 은행을 두 배로 공출하려고 하자 노승이 은행나무에게 앞으로 천년 동안 열매를 맺지 말 것을 기도했다. 지금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하는데 가을에 다시 와서 확인을 해야 하나.
700년 된 은행나무에 감탄하고 그래설까 화분 몇 개를 사들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차, 했다. 고려궁 터 옆에는 688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눈앞의 것을 우린 항상 놓친다.



시의 시간
지금은 까치가 저녁의 목소리로 울고 날아가는 시간.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시집을 나는 ˝낙엽도 온몸으로 걷고 있는˝(「발이 부은 가을 저녁」) '가을의 시간'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


ㅡ 「이 가을의 무늬」 중

이광호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가을의 무늬‘는 여름의 시간 뒤에 나타나는 오래된 시간의 지도를 나타나게 한다. 시간의 지도를 볼 수 있는 계절은, 세월 속에서 엇갈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하˝는 시간˝이라고. 동감이다. 이 시집 2부의 주요 소재와 제목이 열매로 채워진 것은 단순한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지도를 품은 성물이었다.
‘가을‘은 저마다 영근 낮의 기운들이 밤으로 가는 ‘저녁‘ 같기도 해서 이 시집에서 ‘가을‘과 ‘저녁‘은 동의어이다
허수경 시인에게 기억은 완벽히 복원할 수 없는 불가능-시간과 동의어일 것이다. 죽음의 시간으로 가는 동안 우리들의 기억들은 모여 살며 언제든 불쑥 나타난다. 누구에게든.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내 손을 잡아줄래요?」)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한국 최초의 문묘와 교육 기능을 행한 교동향교, 한국 최초의 방직공장과 노동운동,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한옥 성당, 평화 전망대까지 품고 있는 강화에서 이런 생각은 퍽 어울린다.

빙하기의 역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는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대요 뼈만 남은 손을 감싸며 흐느끼던 손요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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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3-20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것이 알고싶다 1068회 죽음을 부른 실습 - 열아홉 연쇄사망 미스터리]를 보고...
이 방송 보고 특성화고, 마이스터교 가려던 학생은 생각이 많을 거 같다.
가축을 길러 팔아 치우듯 학생들을 사회에 내보내는 사육장 시스템.
실습을 그만 두고 싶어도 체벌에, 벌점에, 모욕에... 갈 곳 없는 사회의 단면을 절감하고 결국 자살하는 아이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곳곳이 썩은 이 사회... 곳곳에서 무수하게 죽어가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