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카테고리의 취지

  내가 알라딘을 이용하면서 아쉬운 것 중의 하나가 도서 정보에 관한 것이다. 책 구입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책에 대한 정확한 정보이다. 책이 무엇에 대한 내용이고,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쇄상태는 어떻고, 하다 못 해 두꺼운지 얇은지, 값은 얼마인지 까지.

  오프라인을 통해 서점을 찾아가서 책을 고를 때에는 구입하고자 하는 책을 실제로 확인하고 각종 책에 대한 정보를 획득한 후에 구입할 수 있다. 이것이 오프라인 서점의 장점이라면 장점일 것이다. 인터넷 상에서 거래되는 온라인 서점의 경우 이런 것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근래에 들어 책의 본문 내용을 미리 보여주는 기능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일부 신간에 제한되고 있다. 구입하고자 하는 책이 구간이거나, 별반 인기가 없는 것을 경우 저자 소개 및 목차까지도 확인할 수 없는 책들이 많다.

  대학서적이나 잘 팔리지 않는 이론서, 오래 전에 출간되어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책들의 경우 그 책에 대한 정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나의 경우 이러한 책들을 많이 구입하게 되는데, 온라인의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것이 무척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구입 후 책을 받아보고나서 실망한 적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카테고리를 만든다. 알라딘의 빈틈을 채우고자 함이다. 알라딘에서 판매는 하고 있되, 그 책에 대한 정보가 미미한 경우,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라면 그에 대한 정보를 채워넣기로 한다. 이것이 다른 알라디너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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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6-10-2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아이디어네요. 앞으로 기대해봅니다.^^

멜기세덱 2006-10-27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감사합니다. 기대라니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함께 동참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책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서로서로 나누다 보면, 보다 좋은 책을 사게되고, 그러다보면 책을 만들 때도 더 좋은 책을 만들게 되지 않을까요...ㅎㅎ
 
 전출처 : 로쟈 > 나는 '쓰다'의 주어다

오늘자 한국일보(06. 06. 14)의 연재물,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김윤식 서문집>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나는 '쓰다'의 주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서문이란 대표적인 '곁다리텍스트'이며, '곁다리텍스트'는 이 카테고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김윤식 서문집>(2001, 사회평론)은 놀라운 책이다. 그 놀라움을 낳는 것은 텍스트의 내용이라기보다 형식이다. 아니, 텍스트 너머에 어른거리는 긴 세월의 고된 글 노동에 대한 상상이다. 이 책은 국문학자 김윤식(70)이 1973년부터 2001년까지 낸 책들의 서문을 모아놓은 것이다(*물론 이후에도 그는 많은 책, 많은 서문을 썼다). 어느 프랑스 비평가는 한 책을 이루는 여러 물질적 요소 가운데 본문을 뺀 나머지(서문이나 발문, 헌사, 판권 난, 저자 소개, 표제, 부제, 제사, 차례 따위)를 곁다리텍스트(파라텍스트)라 부른 바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서문집’의 텍스트는 곁다리텍스트만으로 이뤄진 텍스트다.(*나의 '곁다리텍스트를 위하여' 참조) 

-도대체 한 저자가 제 책의 서문만으로 또 한 권의 책을 만들자면 얼마나 많은 책을 써야 할까? 서문의 길이도 천차만별이고 책의 두께도 그럴 테니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김윤식 서문집>을 기준으로 어림짐작해보자면 100권 안팎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저자가 낸 책 95권의 서문이 묶였다. 그 모두가 순수한 저서는 아니다. 책 끝머리에 모인 7편의 서문은 역서와 편서의 서문이고, 나머지 서문 88편에도 아주 드물게 같은 책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끼여들긴 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빼도 이 책에 제 서문을 빌려준 김윤식 저서는 80권이 넘는다.

-그것만해도 보통 저자라면 엄두도 못 낼 양이다. 그런데 김윤식은 2001년 이후에도 기운차게 책을 내고 있다. 그러니까, 2001년까지의 저서 가운데 ‘김윤식 서문집’에 그 이름이 빠진 책이 없다 쳐도, 김윤식이 지금까지 쓴 책은 100권에 바짝 다가간다. 거기에 편서와 역서를 보태면 김윤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책은 100권이 훌쩍 넘는다. 이 책들 대다수가 가벼운 읽을거리가 아니라 학문이나 비평의 영역에 속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김윤식 서문집>의 서문, 다시 말해 서문들의 서문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모으면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생각에 책의 서문이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물론 이 표현은 겸양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서문을 곁다리텍스트로 여긴 프랑스 비평가의 생각과 통하는 데가 있다.

-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 앞에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붙이면서, 저자는 1962년 ‘현대문학’ 8월호에 실린 자신의 ‘천료(추천 완료) 소감’을 옮겨놓고 있다. 문학청년의 치기가 묻어나는 그 소감에는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그의 지난 반세기 글 노동을 지탱한 것이 바로 ‘눈에 불을 켜야만 살 수 있는’ 운명이었을 테다.

 

 

 

 

-이렇게 많은 글을 쓴 저자가 글쓰기 자체에 대한 성찰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혼자 하는 작업이다. 한밤중 원고지 앞에 앉아 있노라면, 그것이 우주만큼 넓고 아득하여 절망한다.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다. 우주가 나를 가두었던 것. 이 속에서의 작업은 일종의 게임인데, 상대는 누구이겠는가. 운명이란 이름의 나 자신이었던 것”(<김윤식 평론 문학선>, 1981, 서문).

 

 

 

 

 -김윤식은 말하자면 자신을 상대로 한 그 외로운 게임의 중독자였다. 요즘 젊은 세대 말로 글쓰기 ‘폐인’이었다.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쓰다’의 주어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문학사가이자 문학비평가다. 다시 말해 그의 방대한 텍스트들은 다른 텍스트들을 분류하고 배열하고 논평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니,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읽다’의 주어를 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읽기는 20세기 이후 한국에서 ‘근대’의 표지를 지닌 채 발설된 모든 문학 텍스트를 향했다. 임화와 이상과 김동리가 보여준 이념의 엇갈림도, 이광수에서 신경숙에 이르는 세대의 엇갈림도 김윤식이 보기엔 근대성 안의 엇갈림일 뿐이었다.

 

 

 

 

-‘쓰다’와 ‘읽다’의 붙박이 주어 김윤식에게 소위 ‘명문(名文)’이라는 것은 어떤 뜻을 지녔을까? “명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가져본 적이 없다. 다만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문장이기를 바랐을 따름이다”(<문학사와 비평>, 1975, 서문). 이것이 겸양에서 나온 말인지는 또렷하지 않다. 자신이 엮은 <애수의 미, 퇴폐의 미- 재북 월북 문인 해금 수필 61편 선집>(1989)의 서문에서 그가 ‘명문’에 대한 경멸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 말해볼 수는 있습니다. 곧 명문이란 없다는 점. 설사 그런 것이 있더라도 대수로운 것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을 임화의 ‘수필론’과 서인식의 ‘애수와 퇴폐의 미’가 조금 말해놓고 있지 않습니까.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말이 있다는 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일이 그것이지요. 말을 바꾸면, 되지도 않는 자기 감정을 질펀하게 노출시켜 남을 감동시키고자 덤비거나 대단치 않은 스스로의 주제를 돌보지 않고 흡사 무슨 도사의 표정을 짓는 짓 따위에서 벗어나, 자기 분석을 겨냥하는 일이 그것이지요. 자기 성찰과 자기 도취의 형식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수필이라는 이름의 산문 형식이 필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진술은, 소설문학에 대한 그의 다른 발언, 곧 “(문학작품에 대한) 절대적 평가기준이란 무엇인가. ‘언어’가 그 정답이다. 언어의 밀도가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김윤식의 소설 현장 비평>, 1997, 서문)는 말과 통한다.

-이 기준들은 보기에 따라 꽤 엄격하다. 김윤식의 문장은 이 기준들을 넉넉히 채우고 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문제는 명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기 이후 텍스트에서 사뭇 가시기는 했으나, 김윤식 텍스트는 ‘문법에서 벗어나는’ 문장들을 너무 많이 품고 있다. 그의 웅장한 학문적 성채의 적잖은 부분은 읽어내기 힘들만큼 조악한 한국어를 벽돌로 삼아 세워졌다.

 

 

 

 

-한 세대에 걸쳐 김윤식이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문학 교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문법에 대한 그의 이 대범함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직업적 나태였다 할 만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문장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란 무엇이겠는가’, ‘~가 아닐 것인가’ 같은 표현은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자기 도취에 빠진 도사의 표정’에서 얼마나 멀까? ‘언어의 밀도’를 잃어버린 ‘명문’의 허세에서는 또 얼마나 멀까?

-김윤식이 ‘쓰다’의 주어일 뿐만 아니라 ‘읽다’의 주어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의 글쓰기 무게중심이 중기 이후 ‘연구자의 논리’(근대문학 연구)에서 ‘표현자의 사상’(현장 비평)으로 조금씩 옮아가면서, 그 읽기 대상도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당대 소설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갔다. “‘표현’과 ‘인식’의 완전한 일치”(<작은 생각의 집짓기들>, 1985, 서문)라 스스로 정의한 비평에서 이 원로 비평가는 성실했는가? 아니 그 비평의 전제인 읽기에서 그는 성실했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고희의 나이에도 이어지고 있는 월평들은 김윤식이 이 시대의 가장 열정적인 소설 독자(가운데 한 사람)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문단 한편에서 들추듯, 그의 비평은 해석의 타당성을 떠나 작품의 줄거리 자체를 그릇 잡아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너무 많이 읽는 탓에 읽기의 ‘밀도’가 낮아졌는지도 모른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건네는 눈길은 아직 이름을 세우지 못한 작가들의 가슴을 한껏 설레게 하는 격려가 될 테다. 그러나 이 원로의 독서가 날림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그는 권위라는 자산을 너무 함부로 쓰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런 트집이 무슨 소용이랴? 20세기 한국문학 텍스트를 김윤식만큼 많이 읽은 사람은 없다. 20세기 한국문학에 대해 김윤식만큼 많이 쓴 사람도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도서관 한 구석에 처박혀 세월을 보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텍스트들이, 그리고 그 텍스트들의 저자들이, 김윤식의 손을 거쳐 한국문학사에서 제 자리를 얻었다. <김윤식 서문집>은 그의 이 끝없는 읽기-쓰기의 그림자다. 한국문학은 이 불세출의 독자-저자에게 큰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짐작에 그의 저작을 30-40권쯤 갖고 있는 나 또한 그에게, 혹은 한 '주어'에게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 

06. 06. 14.

P.S. 고종석이 '또다른 다산(多産) 저자들'로 꼽고 있는 고은과 강준만에 대한 군말도 마저 옮겨온다.

-다산성에서 김윤식과 겨룰 만한 저자가 한국에 있을까? 있다.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시인 고은(73)과 언론학자 강준만(50)이다. 고은 저서의 저자 소개에 ‘저서 1백여 권’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무렵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고은 자신이 이미 그 무렵부터 저서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해온 데다, <김윤식 서문집> 같은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인보>나 <백두산> 같은 서사시들의 낱권을 각각 한 종으로 친다면, 고은의 저서가 1백 종이 넘는 것은 확실하다. 저서의 다수가 시집인 터라, 글자수로 따져서 고은이 김윤식과 겨루기는 어렵겠지만.

 

 

 

 

-고은의 산문은 한 시절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김윤식이 ‘명문’과 관련해 빈정거린 ‘도사의 표정’과 ‘자기도취의 형식’을 짙게 지니고 있었다. 또 청년 김윤식의 글보다 훨씬 더 문법에 대범했다. 그러나 이 약점들은 고은 특유의 주정적(主情的) 문체 속에서 서로를 지워내며 기이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강점이 되었다.

 

 

 

 

-강준만은 그 저서 수에서 이미 김윤식을 앞지른 듯하다. 강준만 저서의 적잖은 부분은 자료의 가공/재구성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점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눈길도 있지만, 그것은 강준만이 김윤식에 뒤지지 않는 ‘읽다’의 주어이자 실증주의자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강준만이 사실과 현실에 바짝 붙어서 (미시)이론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여느 이론가와 달리 대중의 언어를 쓰는 데 대해서도 탐탁지 않은 눈길이 있지만, 그것 역시 이론을 학자들의 닫힌 담론 공간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건강한 욕망과 결부시킬 수 있겠다.

-고은 같은 탐미 취향은 없으나, 강준만은 그 대신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문장’을 구사한다. 이것은 그 같은 다산 저자에게 드문 강점이다. 강준만의 글은 김윤식이 강조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 있다는 점에 많은 관심을 갖는” ‘자기 성찰’의 글에 가까워 보인다.

 

 

 

 

-문법적으로 단정할 뿐만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반들반들 닦인 글을 쓰는 다산 저자는 없을까? 있다. 고은처럼 시와 산문을 넘나드는 김정환(52)이 그다. 그러나 그의 저술 양이 고은이나 강준만에 미치지 못하는 걸 보면, 아름답게 쓰면서 많이 쓰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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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내가 속한 모대학에서 시행하는 수시모집 적성평가에 시험감독으로 다녀왔다. 비가 어기적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적성평가를 보기위해 모인 많은 수험생들과 그에 못지 않은 학부모들로 학교가 떠들썩 했다. 주말을 주말답게 보내야 한다는 내 철두철미한 원칙이 오늘은 깨져야 한다는 억하의 심정과, 내 채우지 못한 잠을 내리는 빗방울이 놀리고만 있는 듯한 생각에 뭔가 어깃장이라도 놓아야 내일 산뜻하니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할 수 있을 듯 싶다.

  내가 대학을 들어갈 때도 대학의 입시제도 등에는 문외한이었던 나는(운이 좋았는지 별 신경 안쓰고 이 모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대입제도가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시행되는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대충을 주워들어 풍월을 대강 읊기는 하겠으나, 남들 하는 소리 앵무새처럼 따라할 뿐이니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오늘 이 적성평가 감독은 처음이다. 몇 번 이런저런 시험에 감독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무게있는(?) 시험 감독은 처음이니 적잖이 긴장이 되기도 했다. 막상 감독에 임해서는 뭐 그리 별반 다를 것도 없고, 나하고는 무려 9년의 차가 있는 젊디 젊어 애티가 줄줄이 흐르는 수험생들을 보면서 왠지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머리 속에는 '지금 얘네들이 왜 이런 시험을 볼까?'하는 어깃장이 놓여졌다.

  지금 이 시기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중간고사 기간이다. 도서관에 자리가 없어 강의실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중간고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우리 후배들이 불만이 많다. 도대체 공부할 자리도 없는데, 이놈의 수시니 적성평가니 하는 것때문에 주말 우리 후배들의 공부장소를 박탈해 버리고 있으니 그 불만이 아니 나올 수가 없으리라. 하지만 그런 것때문의 어깃장은 아니다. '적성평가? 지금 얘네들이 대학 들어오겠다는 애들 아닌가?'  이런데서 오는 어깃장이다.

  분명, 오늘 모인 많은 수험생들은 우리의 모대학에 들어오겠다는 학생들이다. 그리고 오늘의 이 시험은 그들 중에서 누구를 받아들여야 할지를 선택하기 위해 평가하는 자리다. 그런데 '적성평가?' 뭔가 이상한듯이 야릇하다. 내 기억으로는 고등학교 때 이과 문과를 선택하기 전에 이 '적성검사'라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사실 이때의 적성검사가 그다지 신뢰성이 있는듯 보이지는 않다. 나는 그때의 적성검사에서 이학계열에 적성이 있는 것으로 나왔고, 그래서 이과엘 갔고, 대학은 보란듯이 문과, 그것도 문과 중의 문과계열이랄 수 있는 곳에 갔다. 지금 생각하면, 지금의 이쪽이 내 적성에는 오히려 더 적합한 듯 싶다.) 그러나 그때의 '적성검사'와 오늘 이 '적성평가'는 그다지 비슷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검사'와 '평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학에서 왜 '적성'을 평가하고 있을까? 얼핏 들으니 "대학에서의 학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는 검사 "라는데, 말하자면 똑똑한 놈 뽑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말 그대로 '적성평가'라면 그 결과를 기초로 해서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에 알맞은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게 하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인데, 지금의 이 '적성평가'라는 것은 대학 입학의 중요한 한 시험과목으로 그 위상을 드높이니, 본말이 전복되어도 한참을 뒤집혔다.

  시험감독을 하면서, 문제들을 얼핏보니, 예전에 본 IQ테스트 같기도 하고, 그냥 저냥 머리 좋은가 하는 검사만 같다. 사실 적성이라는 것이 이런 시험으로 딱하니 판별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둘째치고, 과연 이 평가를 대학 입시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가가 의문이다. 만약 그것이 타당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대단히 무가치, 무의미, 무분별 등등등, 여러 無한 것임에 틀림 없으리라. 말하자면 그렇게 뽑아 놓아도, 말짱 도로묵이 될 것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적성평가'가 대단히 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각 유명대학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대학이라면 이 적성평가로 거둬들이는 수익이 어지간히 적지 않단다. 뭐 그게 잘못 됐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수익이 많은 게 무슨 잘못이겠는가? 장사에서도 좋은 물건 팔아 돈 많이 벌면 그제 자랑이지 어디 욕 먹을 일인가? 그런데, 쓰잘데기 없는 물건 비싸게 팔아먹어 돈을 긁어 모았다면 그건 욕먹을 짓이고, 죄 받을 짓이긴 하다. 문제는 거기에 있을 듯 싶다. 지금의 대학에서 시행하는 '적성평가'라는 게 '쓸데없는 것' 아니냐라는 의문에 긍정한다면, 이것은 문제 아닐 수 없고, 욕먹을 짓 아닐 수 없으며, 어깃장을 놓아도 수 만 장을 놓아야 하리라.

  각 대학이 자신의 대학에 와서 공부 잘할 학생들을 뽑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적성평가'이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대학의 장삿속은 아닌지, 그 속에서 허우적 거려야할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쓰다보니 길어졌고, '오늘'은 어제가 된 지금이다. 하여간에, 오늘 어깃장은 여기까지만 하자. 한 가지, '적성평가'는 대학오기 전에 미리미리 해두는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게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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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10-23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는 금욜에 수시 면접본다고 시험을 월~목으로 몰아서 본-_-; 이제 나갈 물고기들보다는 새로운 물고기들에 관심이 많은건지 원. 그나저나 문법 달달달 외우기 힘들어요 ㅠ_ㅠ

마노아 2006-10-23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님의 얘기에 공감이에요. 교육정책도, 교육현장도 불만이 너무 많아요. 안티 교육이에요^^;;;

멜기세덱 2006-10-2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제가 언제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건 이매지님이 시험 잘 보시는 거랍니다. ㅎㅎ
마노아님...저는 안티교육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처지네요....ㅜ.ㅜ;; 문제도 많고 탈도 많지만, '안티'말고 다른 걸 해야 될 거 같아요. ㅎㅎ
 
 전출처 : 해콩 > 한자를 포기할 수 있을까

 2006년10월13일 제630호
     
한자를 포기할 수 있을까

유럽 언어들에서 보기 드문 언어의 압축력을 만들어내는 ‘지혜의 건전지’… 언어는 ‘섞임’의 토양서 자라는 것, 순 우리말 고집은 ‘대인기피증’ 같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몇 년 전,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관련의 한 학회에서 한자를 “서양인 등 한자문화권 외부인들의 한국어 학습의 장벽 중 하나”로 꼽은 한 국내 학자의 발표를 들은 일이 있었다. 이 의견이 국내 학계에서 거의 통설인 듯한데, 내 경험으로 봐서는 그렇게만 보기 힘들다. 이것이 외국어 학습의 변증법이라 할까?


△ 한글날을 맞아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외국인 한글 백일장에 참가한 이들이 글쓰기에 한창이다.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한자는 최대의 걸림돌이자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사진/ 연합)

 

최악의 걸림돌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좋은 학습 방법을 쓰면 바로 최고의 디딤돌이 된다는 법. 한국어를 전공하지 않는 학습자들에게 한자 학습이 추가 부담이 될지도 모르지만, 한자를 배울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진 전공자 같으면, 초기의 진입장벽, 즉 어려운 습자 과정이라는 산맥만 넘으면 그야말로 시원한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다.

 

‘표적수사’를 러시아어로 바꾸면?

 

많은 한자어들이 유럽 언어들에서 보기 드문 의미의 압축성을 과시한다. 예컨대 ‘일조권’(日照權)과 같은 의미의 표현을 영어로 지어보시라. 직역하자면 ‘햇빛을 누릴 권리’ 같은 설명식의 표현이 되는데, 한국어 능통자가 긴 설명 없이 이 의미를 석 자의 한자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누가 봐도 부러운 일이 아닌가? 내 모국어인 러시아어 같으면, ‘일조권’을 의역하는 데 적어도 4~5개의 단어가 필요하다. ‘일조권’과 같은 의미의 표현은 유럽 언어들에서도 하나의 관용구가 될 수 있지만, ‘표적 수사’나 ‘친인척 비리’ 정도면 아예 따로 문장을 지어 설명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표적 수사’의 러어 의역을 한국어로 다시 직역해보면 ‘수사의 주체 내지 감독자가 특별히 경계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자가 표적이 되어 불공평하게 진행되는 수사’쯤 될 것인가? 어쨌든 학생 때 나는 이런 압축적 표현력을 가진 한겵?일의 언어가 끝없이 부럽기만 했다. 약 7년 전 국내의 한 전문 번역자 양성기관에 출강했을 때 ‘지식기반 사회’의 러어 번역어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영어 같으면 준비된 번역어가 있지만, 이 간단한 여섯 글자의 한자 표현을 러어로 좀 어색하고 장황한 문어로 의역해야 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한자어들을 익히면서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정리할 수도 있구나!” 하고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학생으로서 나의 진정한 사랑은 고사성어였다. 나에게 넉 자짜리의 고사성어는 거의 한 권의 책과 맞바꿀 수 있는 지혜의 무게를 지니는 것 같았다. 예컨대 지금도 동아시아 종교사 수업 때면 불교의 방편론을 설명하려고 늘 칠판에 쓰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을 들어보자. 이 간단한 표현 하나를 머리에 떠올려 계속 반추하고 명상을 해보면, 상황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면서도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는 처세법을 다 터득할 수 있는 것 같다. 처세서를 사느라 돈 쓸 일도 없이. 나는 이 표현을 접하면 꼭 남의 말에 잘 응대해 이 고사의 유래가 된 제나라 재상 안평중(晏平仲)에게서 개인적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고마운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일일삼성(一日三省),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재점검하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대로 하루에 몇 번씩 각종 고사성어를 떠올리면서 내가 이 부류에 해당되지 않는지 생각해본다. 눈이 높아봤자 재주가 따르지 않아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안고수비(眼高手卑) 아닌가, 자신의 밭에 물을 대듯이 이미 내린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논증 과정을 편의적으로 하는 아전인수 (我田引水) 격이 아닌가? 러어에도 어떤 유럽 언어에도 없는 이 ‘지혜의 건전지’ 없이 내가 과연 살 수 있었을까 가끔 궁금하기도 하고. 물론 고사성어를 모르고 사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럭저럭 살아갔겠지만, ‘임기응변’의 의미를 한 번도 고심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왠지 아쉬움이 생기기도 한다.

 

한글 통해 한자·한문·일본어까지 익혀

 

하이퍼텍스트인 인터넷에서는 한 사이트의 가치가 다른 사이트와 링크가 얼마나 잘되는지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언어 공부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습 대상으로서 특정 언어의 가치는, 그 언어가 다른 언어의 연속 학습의 디딤돌이 어느 정도 돼줄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돼 있다. 나에게 한글의 가치는 한글 공부 그 자체에도 있었지만, 한글을 통해 한자, 한문 그리고- ‘한자 코드’를 통해- 초급 일본어까지 익힐 수 있는 데에 있었다. 말하자면 한자 문화권 바깥에서 이 한자 문화권 안으로 틈입한 자인 나로서는 배우기 쉬운 과학적·체계적기호 체계로서의 한글이란 바로 난삽한 한문·일본식 국한문 혼용 표기 세계로 가는 첩경이기도 하다.


△ “한자는 ‘남의 글’일 뿐일까?” 지난 8월 충북 충주 탄금호에서 열린 호수축제 기간 동안 도내 대표 서예가 125명이 천자문 합작 휘호를 하고 있다.(사진/ 연합 박일 기자)

 

나는 지금도 중국의 고전 한시까지 습관적으로 한글로 표기해 한국식 발음으로 읊고, 현재 체류하고 있는 후쿠오카의 간판이나 식당 메뉴판들까지도 한국어 한자어 지식을 총동원해 어렵게 판독하다시피 한다. 나는 한국어 속의 한자어를 익혔기에 일본어를 따로 배울 일도 없이 “요야쿠가 무료데스”를 들으면 예약이 무료인 줄로 당장 눈치챌 수 있다. 과연 ‘토종 한국인’들도 한자를 ‘국어 속의 이질적인 요소’ ‘남의 글’로 배척하기만 해야 하는가? 대중적인 글에서 한자를 남용할 일은 없지만, 국내 인구보다 30배나 많은 이웃 나라들의 인구에게 통하는 ‘코드’가 이미 우리 언어 속에 내재돼 있다는 것을 굳이 나쁘게만 볼 일인가?

메이지 시대 초기의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처럼 한자를 아예 폐기처분해 ‘언문일치’의 완전을 기하자는 일본의 근대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나, 그들 후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판단되는 한국의 외솔 최현배 선생 등 언어 국수주의자들이 한자를 ‘남의 글’로 규정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의 경우 아마도 이미 고조선 시기에 이용됐을 법한 한자를 ‘남의 글’로 본다는 것은, 불교를 ‘외래 종교’라 규정해 1868~72년 불교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를 강제 환속시켰던 메이지 시대 초기의 신도(神道) 국수주의자들의 사유 방법이나, 기독교를 “독일 민족에 이질적인 유대인들의 종교”로 생각했던 히틀러의 사고방식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이두도 아닌 순수 한문만 쓴데다 그 저술에서 ‘신라’라는 자신의 국가 명칭을 겨우 몇 번만 썼을 뿐 주로 ‘국적이 없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했던 원효를 ‘우리’ 지성사에서 빼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진정한 ‘남의 말’이라 하더라도, 그 사용을 굳이 그렇게까지 꺼릴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우리에게는 예컨대 일본어나 영어에서 온 차용어들이 제국주의 침략과 연상돼서 불쾌하게 생각될 수도 있고 ‘언어 제국주의’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데 단어들에 과연 꼭 명확한 ‘국적’이 있는가?

한 유명한 국수주의적 언어학자가 ‘커피’라는 ‘외국말’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하여 ‘미국 차’라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역시 ‘순 우리말’이 아닌- 표현을 써왔다고 하는데, ‘커피’에다 과연 ‘미국’이라는 꼬리표를 꼭 달아야 하는가? 커피 원두의 원산지로 알려진 곳은 에티오피아고, 그 원두가 잘 자라는 한 계곡의 이름이 나중에 아랍어 ‘Qah’wa ’(중독성이 있는 음료)의 유래가 됐다는 설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럽 언어의 ‘커피’와 같은 단어는, 터키어를 매개로 하여 그 아랍어 단어를 기반으로 한다. 그 정도의 계보를 가진 단어라면 ‘미제 침략의 언어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공유해도 좋을 세계사의 일부분이 아닌가? ‘남의 말’이 만약 모두 ‘침투’라면 바깥 세계에서도 ‘태권도’와 같은 한국어 차용어를 서둘러 그쪽의 ‘순 우리말’로 ‘순화’해야 하는가?

 

단어들에 꼭 명확한 국적이 있는가

 

음과 양의 합침이 우주 만물을 만들고 두 사람의 합침이 가족을 만들고 수많은 방언겙訛?영향들의 합침과 스며듦이 언어를 만들어 발전시킨다. 사람이 외부인들과의 ‘소통’ 속에서 성장하듯 언어도 외부와의 ‘섞임’을 토양 삼아 자란다. 외부와의 접촉을 지나치게 꺼리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흔히 ‘대인기피증’이라고 진단한다. 솔직히 말하면, ‘순 우리말’을 고집하시는 분들을 보면 꼭 떠오르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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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최민식의 "꽃피는 봄이오면"을 직접 연주해보자!

 

게임방법은 지나가는 화살표가 박스에 들어왔을 때 키보드 방향키를 누르시면 됩니다.

과제다 시험이다 머리 아프실텐데 기분 전환 하시라고 올려 봅니다...^^

대학원 후배가 머리 아플 때 "쉬엄쉬엄(시험시험)"하며 하라고 올려준 건데...

생각보다 듣기가 괜찮더군요. 연주가 모두 완료되면 스스로의 연주를 들어볼 수도 있는 것이 아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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