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나는 '쓰다'의 주어다

오늘자 한국일보(06. 06. 14)의 연재물,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김윤식 서문집>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나는 '쓰다'의 주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서문이란 대표적인 '곁다리텍스트'이며, '곁다리텍스트'는 이 카테고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김윤식 서문집>(2001, 사회평론)은 놀라운 책이다. 그 놀라움을 낳는 것은 텍스트의 내용이라기보다 형식이다. 아니, 텍스트 너머에 어른거리는 긴 세월의 고된 글 노동에 대한 상상이다. 이 책은 국문학자 김윤식(70)이 1973년부터 2001년까지 낸 책들의 서문을 모아놓은 것이다(*물론 이후에도 그는 많은 책, 많은 서문을 썼다). 어느 프랑스 비평가는 한 책을 이루는 여러 물질적 요소 가운데 본문을 뺀 나머지(서문이나 발문, 헌사, 판권 난, 저자 소개, 표제, 부제, 제사, 차례 따위)를 곁다리텍스트(파라텍스트)라 부른 바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서문집’의 텍스트는 곁다리텍스트만으로 이뤄진 텍스트다.(*나의 '곁다리텍스트를 위하여' 참조) 

-도대체 한 저자가 제 책의 서문만으로 또 한 권의 책을 만들자면 얼마나 많은 책을 써야 할까? 서문의 길이도 천차만별이고 책의 두께도 그럴 테니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김윤식 서문집>을 기준으로 어림짐작해보자면 100권 안팎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저자가 낸 책 95권의 서문이 묶였다. 그 모두가 순수한 저서는 아니다. 책 끝머리에 모인 7편의 서문은 역서와 편서의 서문이고, 나머지 서문 88편에도 아주 드물게 같은 책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끼여들긴 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빼도 이 책에 제 서문을 빌려준 김윤식 저서는 80권이 넘는다.

-그것만해도 보통 저자라면 엄두도 못 낼 양이다. 그런데 김윤식은 2001년 이후에도 기운차게 책을 내고 있다. 그러니까, 2001년까지의 저서 가운데 ‘김윤식 서문집’에 그 이름이 빠진 책이 없다 쳐도, 김윤식이 지금까지 쓴 책은 100권에 바짝 다가간다. 거기에 편서와 역서를 보태면 김윤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책은 100권이 훌쩍 넘는다. 이 책들 대다수가 가벼운 읽을거리가 아니라 학문이나 비평의 영역에 속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김윤식 서문집>의 서문, 다시 말해 서문들의 서문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모으면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생각에 책의 서문이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물론 이 표현은 겸양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서문을 곁다리텍스트로 여긴 프랑스 비평가의 생각과 통하는 데가 있다.

-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 앞에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붙이면서, 저자는 1962년 ‘현대문학’ 8월호에 실린 자신의 ‘천료(추천 완료) 소감’을 옮겨놓고 있다. 문학청년의 치기가 묻어나는 그 소감에는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그의 지난 반세기 글 노동을 지탱한 것이 바로 ‘눈에 불을 켜야만 살 수 있는’ 운명이었을 테다.

 

 

 

 

-이렇게 많은 글을 쓴 저자가 글쓰기 자체에 대한 성찰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혼자 하는 작업이다. 한밤중 원고지 앞에 앉아 있노라면, 그것이 우주만큼 넓고 아득하여 절망한다.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다. 우주가 나를 가두었던 것. 이 속에서의 작업은 일종의 게임인데, 상대는 누구이겠는가. 운명이란 이름의 나 자신이었던 것”(<김윤식 평론 문학선>, 1981, 서문).

 

 

 

 

 -김윤식은 말하자면 자신을 상대로 한 그 외로운 게임의 중독자였다. 요즘 젊은 세대 말로 글쓰기 ‘폐인’이었다.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쓰다’의 주어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문학사가이자 문학비평가다. 다시 말해 그의 방대한 텍스트들은 다른 텍스트들을 분류하고 배열하고 논평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니,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읽다’의 주어를 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읽기는 20세기 이후 한국에서 ‘근대’의 표지를 지닌 채 발설된 모든 문학 텍스트를 향했다. 임화와 이상과 김동리가 보여준 이념의 엇갈림도, 이광수에서 신경숙에 이르는 세대의 엇갈림도 김윤식이 보기엔 근대성 안의 엇갈림일 뿐이었다.

 

 

 

 

-‘쓰다’와 ‘읽다’의 붙박이 주어 김윤식에게 소위 ‘명문(名文)’이라는 것은 어떤 뜻을 지녔을까? “명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가져본 적이 없다. 다만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문장이기를 바랐을 따름이다”(<문학사와 비평>, 1975, 서문). 이것이 겸양에서 나온 말인지는 또렷하지 않다. 자신이 엮은 <애수의 미, 퇴폐의 미- 재북 월북 문인 해금 수필 61편 선집>(1989)의 서문에서 그가 ‘명문’에 대한 경멸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 말해볼 수는 있습니다. 곧 명문이란 없다는 점. 설사 그런 것이 있더라도 대수로운 것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을 임화의 ‘수필론’과 서인식의 ‘애수와 퇴폐의 미’가 조금 말해놓고 있지 않습니까.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말이 있다는 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일이 그것이지요. 말을 바꾸면, 되지도 않는 자기 감정을 질펀하게 노출시켜 남을 감동시키고자 덤비거나 대단치 않은 스스로의 주제를 돌보지 않고 흡사 무슨 도사의 표정을 짓는 짓 따위에서 벗어나, 자기 분석을 겨냥하는 일이 그것이지요. 자기 성찰과 자기 도취의 형식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수필이라는 이름의 산문 형식이 필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진술은, 소설문학에 대한 그의 다른 발언, 곧 “(문학작품에 대한) 절대적 평가기준이란 무엇인가. ‘언어’가 그 정답이다. 언어의 밀도가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김윤식의 소설 현장 비평>, 1997, 서문)는 말과 통한다.

-이 기준들은 보기에 따라 꽤 엄격하다. 김윤식의 문장은 이 기준들을 넉넉히 채우고 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문제는 명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기 이후 텍스트에서 사뭇 가시기는 했으나, 김윤식 텍스트는 ‘문법에서 벗어나는’ 문장들을 너무 많이 품고 있다. 그의 웅장한 학문적 성채의 적잖은 부분은 읽어내기 힘들만큼 조악한 한국어를 벽돌로 삼아 세워졌다.

 

 

 

 

-한 세대에 걸쳐 김윤식이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문학 교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문법에 대한 그의 이 대범함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직업적 나태였다 할 만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문장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란 무엇이겠는가’, ‘~가 아닐 것인가’ 같은 표현은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자기 도취에 빠진 도사의 표정’에서 얼마나 멀까? ‘언어의 밀도’를 잃어버린 ‘명문’의 허세에서는 또 얼마나 멀까?

-김윤식이 ‘쓰다’의 주어일 뿐만 아니라 ‘읽다’의 주어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의 글쓰기 무게중심이 중기 이후 ‘연구자의 논리’(근대문학 연구)에서 ‘표현자의 사상’(현장 비평)으로 조금씩 옮아가면서, 그 읽기 대상도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당대 소설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갔다. “‘표현’과 ‘인식’의 완전한 일치”(<작은 생각의 집짓기들>, 1985, 서문)라 스스로 정의한 비평에서 이 원로 비평가는 성실했는가? 아니 그 비평의 전제인 읽기에서 그는 성실했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고희의 나이에도 이어지고 있는 월평들은 김윤식이 이 시대의 가장 열정적인 소설 독자(가운데 한 사람)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문단 한편에서 들추듯, 그의 비평은 해석의 타당성을 떠나 작품의 줄거리 자체를 그릇 잡아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너무 많이 읽는 탓에 읽기의 ‘밀도’가 낮아졌는지도 모른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건네는 눈길은 아직 이름을 세우지 못한 작가들의 가슴을 한껏 설레게 하는 격려가 될 테다. 그러나 이 원로의 독서가 날림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그는 권위라는 자산을 너무 함부로 쓰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런 트집이 무슨 소용이랴? 20세기 한국문학 텍스트를 김윤식만큼 많이 읽은 사람은 없다. 20세기 한국문학에 대해 김윤식만큼 많이 쓴 사람도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도서관 한 구석에 처박혀 세월을 보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텍스트들이, 그리고 그 텍스트들의 저자들이, 김윤식의 손을 거쳐 한국문학사에서 제 자리를 얻었다. <김윤식 서문집>은 그의 이 끝없는 읽기-쓰기의 그림자다. 한국문학은 이 불세출의 독자-저자에게 큰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짐작에 그의 저작을 30-40권쯤 갖고 있는 나 또한 그에게, 혹은 한 '주어'에게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 

06. 06. 14.

P.S. 고종석이 '또다른 다산(多産) 저자들'로 꼽고 있는 고은과 강준만에 대한 군말도 마저 옮겨온다.

-다산성에서 김윤식과 겨룰 만한 저자가 한국에 있을까? 있다.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시인 고은(73)과 언론학자 강준만(50)이다. 고은 저서의 저자 소개에 ‘저서 1백여 권’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무렵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고은 자신이 이미 그 무렵부터 저서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해온 데다, <김윤식 서문집> 같은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인보>나 <백두산> 같은 서사시들의 낱권을 각각 한 종으로 친다면, 고은의 저서가 1백 종이 넘는 것은 확실하다. 저서의 다수가 시집인 터라, 글자수로 따져서 고은이 김윤식과 겨루기는 어렵겠지만.

 

 

 

 

-고은의 산문은 한 시절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김윤식이 ‘명문’과 관련해 빈정거린 ‘도사의 표정’과 ‘자기도취의 형식’을 짙게 지니고 있었다. 또 청년 김윤식의 글보다 훨씬 더 문법에 대범했다. 그러나 이 약점들은 고은 특유의 주정적(主情的) 문체 속에서 서로를 지워내며 기이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강점이 되었다.

 

 

 

 

-강준만은 그 저서 수에서 이미 김윤식을 앞지른 듯하다. 강준만 저서의 적잖은 부분은 자료의 가공/재구성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점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눈길도 있지만, 그것은 강준만이 김윤식에 뒤지지 않는 ‘읽다’의 주어이자 실증주의자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강준만이 사실과 현실에 바짝 붙어서 (미시)이론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여느 이론가와 달리 대중의 언어를 쓰는 데 대해서도 탐탁지 않은 눈길이 있지만, 그것 역시 이론을 학자들의 닫힌 담론 공간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건강한 욕망과 결부시킬 수 있겠다.

-고은 같은 탐미 취향은 없으나, 강준만은 그 대신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문장’을 구사한다. 이것은 그 같은 다산 저자에게 드문 강점이다. 강준만의 글은 김윤식이 강조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 있다는 점에 많은 관심을 갖는” ‘자기 성찰’의 글에 가까워 보인다.

 

 

 

 

-문법적으로 단정할 뿐만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반들반들 닦인 글을 쓰는 다산 저자는 없을까? 있다. 고은처럼 시와 산문을 넘나드는 김정환(52)이 그다. 그러나 그의 저술 양이 고은이나 강준만에 미치지 못하는 걸 보면, 아름답게 쓰면서 많이 쓰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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