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기독교 - 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
리처드 마우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한국의 기독교는 코너에 몰렸다. 언론에 의해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대형교회들의 비리가 폭로된 데다가, 아프간에서의 피랍사건까지, 이른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한국 기독교는 현재 비난의 ‘윤간(輪姦)’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판을 넘어 비난으로 향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난이라는 행위가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비난의 당위가 인정될 때, 우리는 충분히 비난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최근 한국 기독교에 대한, 정확히 말하자면 주류 한국 기독교 지도층에 대한 비난은 얼핏 그 당위가 인정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어디까지는 감내해야할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서 많은 네티즌들(엄밀히 그들을 네티즌, 즉 인터넷 상의 시민이라고 부르기 민망하기조차 한)에 의해 무자비한 폭력적 비난의 세례를 받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하다. 비판과 비난을 넘어, 앞서 표현한바 ‘윤간’을 당하고 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하는 소리다.

  우리 사회에서 ‘윤간’은 어떤 경우에라도 긍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 윤간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정되어진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현상들에서 이런 ‘윤간’적 막심(莫甚)함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동정적 목소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럴까? 최근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들이 그 거대한 내막을 들어낸 것도 있겠지만, 이는 길고도 오랜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의 잘못들이 한국 사회 일반에 뿌리 깊게 각인된 것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현대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 복음주의의 산실인 미국의 풀러 신학교 총장인 리처드 마우의 저서 『Uncommon Decency』(InterVarsity Press, 1992.)가 최근 번역되어 『무례한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는 그간의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여실히 인식한 산물이라고 하겠다. 한국 교회가 이 사회에서 그간 부단히도 ‘무례’했다는 인식이 이 책의 번역을 촉진한 것은 아닐까? 고려신학대학원 신원하 교수는 추천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 한국 교회에는 마우가 요구하는 기독교적 교양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왜 ‘요구’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와는 조금 다른 맥락 가운데에 적용해 볼 수도 있으리라. 변하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의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이 사회에 대해 '무례'했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무례함을 기독교 일반으로 싸잡아 이야기 하지만, 그 중심에는 ‘개신교(改新敎)’가 존재한다. 사람들이 무례하게 느끼는 것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천주교와 개신교 중에서 개신교가 한 역할이 훨씬 크다는 소리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의 발자취를 되살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왜 한국 개신교가 그렇게 무례했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천주교에 의해서였다. 잘 알다시피 천주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로 인해 잠시 쇠퇴하다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이번엔 개신교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이 침투의 대다수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는데, 당시 국제사회의 힘의 논리가 작용하게 되면서 이전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같은 것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이는 개신교가 급속히 퍼질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그것과 함께 천주교와는 다른, 아니 여타의 종교와는 다른 수법이 개신교에는 있었는데, 그것은 이 개신교가 “찾아가는 종교”였다는 점이다. 천주교의 성당과 불교의 사찰과는 달리 개신교의 교회당은 산골짝 마을 곳곳까지 찾아간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빨간불의 십자가는 이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개신교의 신(新)포교전략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전략은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급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보편 종교로서의 이러한 포교 전략을 탓할 바는 아니지만, 이는 ‘기독교의 복음’과 함께 역설적이지만 ‘종교적 무례함’이라는 두 양상으로 찾아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그 모토와 함께 세속화라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다. 종교의 세속화는 질적 성장보다는 양적 성장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매우 상업적이고 기업적인 행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밑도 끝도 없는 “안 믿으면 지옥불”식의 협박은 사람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한국의 뿌리 깊은 민간 신앙의 중추자(中樞者) 무당들의 신(神) 들린 모습들까지 개신교의 종교 행태에서 보게 됨으로써 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비루함에 대한 혐오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울며불며, 두 팔을 휘저어대며,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는 그들의 모습에 일종에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행태들을 초심자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은 지나친 것인데다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 죄 없는 어린양들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외침은 그 자체로 비호감일 따름이다.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개신교의 복음주의의 목표의식은, 그 연원을 신약 성경에 두고 있다. “땅 끝까지 이러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기독교는 선교를 그 절대적 사명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기독교(基督敎), 즉 그리스도교(敎)로서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은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의 행렬을 이루게 한다. 산과 강도 그들을 막지는 못한다. 이것을 우리는 ‘세속화(世俗化)’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세속화라는 어휘가 가지는 부정적 의미는 다소간 배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는 그 복음을 들고 세상 곳곳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찾아가는 종교” 전략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문제는 포교 전략적 ‘세속화’ 뿐만이 아니라, 부정적 함의로서의 ‘세속화’도 함께 일어났다는 데에 있다. “세상 만방이 주의 이름을 알게 되는 그날 세상의 종말이 오리라”고 여기는 이 포교자(布敎者)들은, 그 ‘끝날’에 자신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 확실한 관계로 잃었던 양을 다시금 찾아오는 것보다는 단지 ‘예수’란 존재가 있었다는 단순한 알림만으로 그들의 선교를 지속해 왔다. 그들이 믿건 안 믿건 크게 개의(介意)치 않았던 것이다. 이는 단지 양적 성장만을 목표로 하게 되었던 것이고,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가지는 거대한 오류의 원인자(原因子)가 된 것이다.

  이들에게 복음의 알림은 시급한 문제였을까? 이 기독교 전도자들은 너무 급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물불을 가리지 않고, 흔히들 말하는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포교전략을 구사해 왔던 것이다. 여기에 비기독교인, 즉 그들의 포교대상자에 대한 배려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리처드 마우가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복음의 진리가 영향력 있게 전파되게 하자면 성도들은 타인을 향해 일반적인 정중함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닮은 정중함을 지녀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도자들에게는 지금까지 이런 정중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 그대로 “무례한 기독교”였던 것이다.

  공자(孔子)는 이런 말을 했다. “恭而無禮則勞(공이무례즉노), 愼而無禮則諰(신이무례즉시), 勇而無禮則亂(용이무례즉란), 直而無禮則絞(직이무례즉교).” 곧,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고, 조심하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스럽되 예가 없으면 혼란하고, 강직하되 예가 없으면 너무 급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공손해 보이고, 조심하는 것처럼 보이고, 용감한 것처럼 보이며, 때론 강직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예의도 없었다. 그러니 괜한 헛수고만 한 것이고, 세상이 두렵게 여겨지고, 혼란스럽기만 하고, 또 너무 급한 것이 아닌가? 몇 천 년 전의 공자가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문제들에 예견하듯이 이런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 참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기독교의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해법으로서 나는 이 책 리처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가 충분한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리처드 마우가 이 책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세상과 기독교인이 공존하기 위해서, 즉 그 둘이 다른 상황가운데서 분리되지 않고 세상가운데서 하나가 되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품의와 신앙을 가지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 보다 효과적인 복음전파의 한 방식으로서 대안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있다. 그 적절한 해결책으로서 “기독교적 시민교양”, 즉 ‘Uncommon Decency’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원하 교수의 소개를 들어보자.




  “현대는 문화 전쟁 시대라고 할 만큼 각종 문화와 사조가 공존하면서 때로 충돌하고 부침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신념과 문화를 지닌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전해야 할 ‘무엇’(what)에 대해서보다는 ‘어떻게’(how) 전달해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마우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중하고 친절하며 관용하는 태도 즉 기독교적 교양과 예절(Christian Civility)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점점 사나워지고 전투적이 되어 가는 사회에서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비일상적인 정중함”(Uncommon Decency)을 갖추고 일반 시민들을 대하고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결국 이는 그간의 복음주의의 대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다변화된 현대사회에서의 전략적 수정, 즉 포교의 방법론적 측면에 대한 해법인 것이다. 이러한 마우의 주장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불만적일 수도 있다. 그간의 자신들의 ‘헌신적’ 선교가 무의미한 것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마우는 여러 장을 할애(割愛)하면서 이러한 오해에 대해 해명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전략적 수정에 대한 주장은 일면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경청해야할 시대적 필요성과 부합한다. 21세기 세계는 변화했고, 다원화 사회가 되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해야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서로 다른 것은 폭력적으로 자기화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지금은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 그런 폭력적 자기화에 대한 부작용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고 기독교적 존재 목적인 복음 자체에 대한 변화를 마우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신용하 교수의 말처럼 그들의 진리를 간직한 채, 그 진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하느냐, 즉 방법적 측면에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기독교인들에게 타당한 방법이다. 또한 그들의 포교대상인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좋은 소식임에 분명하다. 어떤 종교에 대한 혐오감은 현대를 살아가는 무신론적 인간들에게는 불행이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불교건 천주교건 개신교이건 이슬람이건, 현대인들에게 이들은 하나의 도움의 목소리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을 교화시키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어떤 종교에 대해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 우선시될 때, 교화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비판적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기독교적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이것은 어느 상황에서는 항상 열기를 띄기 마련이다. 그런데, 비기독교인들과는 어느 정도 대화가 되지만, 기독교인들과는 대화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할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진리(=복음)가 곧 자신들의 모든 것을 합리화 해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진리에 대한 비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타협하려 하지 않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 마우는 “불신자에게 배우”라고 주장한다. “주님은 때때로 이상한 교사들을 보내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시 한 번 공자의 말을 생각하게 한다. “三人行(삼인행), 必有我師焉(필유아사언). 擇其善者而從之(댁기선자이종지), 其不善者而改之(기불선자이개지).” 곧, “세 사람이 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사람을 가려서는 그를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는 자신 속의 그런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論語』「述而」편의 이야기인데, 이는 마우의 조언과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즉, 누구를 막론하고 누구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 존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우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무신론적 사상가 니체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당당히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고사성어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당연스러운 교훈마저도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마우의 주장이 특이한 것이 아니면서도 놀라운 것은 이런 한국 기독교의 기초적 태도의 문제를 적실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바로 마우가 인용한 다음과 같은 글에서의 자세다.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타인의] 눈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삶 속에서 그분을 볼 수 없다면 그분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요구되는 만큼 다른 이들과 차별성 있게 살아간다면, 그를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에는 의문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런 의문들을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의문에 대해 힌두교가 제공하는 대답이 아주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제시하게 하며, 기꺼이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인간의 모든 의문에 대해 흡족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분,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는 모범적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에, 세상의 많은 이들로부터 칭찬받고 존경받게 될 때에, 자연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그렇지는 않더라도, 기독교인으로서 ‘예수의 향기’를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모범적 교양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에서건 기독교인들이 모범적일 때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칭송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간혹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사회에서 욕먹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마우의 이런 지적이 너무나도 소름끼칠 정도이기까지 하다.

  리처드 마우가 펼치는 ‘시민교양’의 논리에서 다소간 나와는 그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정당한 전쟁’론에 대한 시각이다. 그는 ‘정당한 전쟁’론을 옹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적 원리에 근거할 때 이는 타당한 처사가 아니라는 것이 내 견해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적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에서나, 그리고 성서에 입각해서나 자명한 논리인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우의 “어떤 상황에서는 시민교양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건대 그 기본적인 요건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친절과 온유함을 제쳐놓을 권리가 없다”는 언급은 우리 모두가 경청해야만 하겠다.

  마지막으로 마우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대에 공적인 존재로서 사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자질”을 언급한다. ‘융통성’을 가질 것, ‘잠정적인 입장’에 설 것, ‘겸손함’의 태도, ‘경외감’, ‘소박함’ 등이 그것이다. 이 5가지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적 삶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함을 마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마우는 ‘기독교적 시민교양’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살펴보면, 마우가 언급한 저 5가지 원칙이 얼마나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마우의 이 처방이 한국 기독교에 잘 먹혀들기 힘들어 보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우의 이런 지적들은 한국 기독교에 적합한 ‘양약(良藥)’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될 때에 기독교 복음주의는 보다 합리적 보수주의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의 수장격인 리처드 마우의 지적을 한국 보수주의의 절대 기반인 한국 기독교가 자기 것으로 실천할 때, 한국 기독교는 존경받을 수 있고, 기독교의 존재목적을 충실히 이행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욕먹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아파한다. 그러나 먹을 욕은 먹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 한국 기독교가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 변화의 행동강령이 이 책 『무례한 기독교』에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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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1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눈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말에 큰 울림이 남네요. 최근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세례가 일말의 예의없이(?) 자행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었는데, 이 책이 문제의 올바른 해답을 제시해주는 것 같군요. 다만 멜기세덱님의 견해처럼, '정당한 전쟁'이란 허상을 찬성하는데에는 마뜩치 않지만 말이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멜기세덱 2007-08-17 17:28   좋아요 0 | URL
최근 한국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초례한 한국기독교의 '예의 없음'을 지적한 것인데요. 그 점에서 있어서 리처드 마우의 기독교적 시민교양은 적절한 해법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바람결님과는 첨인 것 같네요. 반갑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Jade 2007-08-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멜기님은 항상 리뷰를 너무 열심히 쓰셔서 읽기가 힘들어요 ㅎㅎ 그래도 항상 읽고나면 생각을 많이 한다는...멜기님, 밤새 책읽고 글만 쓰시나봐 ㅎㅎ 책 말고 연애를..ㅎㅎ

멜기세덱 2007-08-17 17:30   좋아요 0 | URL
책과 하는 연애도 영~ 시덥잖네요...ㅎㅎ 리뷰 쓰기도 일주일에 하나 쓸까 말까 하구요....ㅎㅎ 저도 말이죠, 다른 걸 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답니다...
ㅠㅠ;;

웽스북스 2007-09-0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 리뷰(당신들의 예수)를 읽으며 이 책을 추천해드려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언급되서 깜짝 놀랐어요- 근데 스크롤을 내리니 리뷰까지 있네요 ㅎㅎ 기독교인들보다 비기독교인들과 대화가 더 잘된다는 말에 저도 공감을 해요- 사실 내가 너무 쿨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잠깐 이 모드 벗어났는데, 결국 본성은 어쩔 수 없는건가, 싶기도 하고요
아프간 사건을 겪으며 답답한 마음에 다시 집어든 책이었어요- 작년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와닿는 부분이 더 많았고요- 초기미국 선교사 쪽에 관심이 많으신 듯하여 대학시절 은사님께서 쓰신 '초기미국 선교사 연구'라는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절판이네요 ㅠ
멜기세덱님 내공 따라가려면 아직 먼 길인 것 같지만 차근차근 걸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