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중용 - 인문학연구소 고전총서, 동양사상 1
김학주 옮김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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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던 중 불교TV에서 종범스님의 설법을 듣게 되었다. 스님의 말씀 중에 반조라는 말이 가슴속으로 쏙 들어왔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볼 때 마음이 외부에 가서 달라붙지 않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받아들이는 바를 지켜본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생기고 사라지는 그 자리를 지켜보라는 말로써 받아들였다. 두번째로 들게 되는 대학과 중용은 나에게 반조하는 공부를 가리키고 있다.

  저자는 학자이기 때문에 마음의 경계로서 써내려간 글들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듯하였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해석을 충실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읽어내는 데 큰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음에 다시 대학을 읽을 때에는 마음공부가 된 사람의 글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이 이미 격물치지가 무엇인지 도가 무엇인지 성의와 지선이 무엇인지를 마음으로 점검한 이가 적어낸 글이기 때문에 단순히 학문적으로만 풀어서는 그 의미를 마음으로 담아내기가 쉽지 않고 따라서 죽은 글이 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격물치지인가? 치지격물인가? 이를 놓고 주자학과 양명학의 논쟁이 떠오른다.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사물의 본성에 다를 것인가? 치지하는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여 천지의 본성을 깨달아서 격물하는 것인가? 우선 마음으로는 후자에 더욱 끌린다. 그것은 수신하는 방법으로서 우선 나의 내면을 성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격물치지와 함께 대학을 대표하는 말을 고르라면 나는 '혈구지도'를 고르겠다. 이는 논어의 종심소욕불유구의 구를 가지는 것이 되고, 중용에서는 충서의 정신으로 나타난다.

   忠은 마음의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흔들림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중심을 도의 한가운데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恕는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격물하는 대상과 같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 속의 곱자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과 같은 것이라고 보여진다.

  대학이 수신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먼저 읽어야 하는 방법론에 관한 책이라면 중용은 공부를 마친 사람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그래서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내용을 한 권에 묶어 둔 것이 어색하기조차하다. 하지만 마음으로 점검하는 공부에 시작과 끝이 어디있는가? 대학이든 중용이든 그것이 가리키는 진리는 다르지 않다고 할 것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중용의 첫구절부터 마음이 환해진다. 천명이 제일 첫부분에 나온다. 자신을 비운 상태에서 떠오르는 마음이 바로 천명이 아니겠는가? 정성이 하늘의 덕이면 그것을 따라 정성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덕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따르는 것이 도라고 했다. 이 도는 멀리 있지 않으니 바로 우리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라면 지성을 다하는 곳에 마음이 자리잡아야 하며 그러할 때 만물을 화육하게 한다.

  중용에서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말이 있었다.  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그대가 방에 있는 것을 보건대, 방구석에 대하여서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했다. 군자는 사람들이 보나 보지 않으나 그 마음가짐을 지성에 닿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 우리가 이르는 곳이 어딘지는 명백하다. 이런 공부가 세상에 나아갈 때에라야 비로소 다툼과 논란이 없을 것이다. 공부를 마치지 않고 세상에 나아가서 오히려 세상을 혼란되게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큰 공부는 비로소 치우침이 없는 삶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삶의 완성이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야할 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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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6-03-0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으로 읽으면 씹으면 씹을수록 맛나는 음식처럼 더디더디 맛나게 다가옵니다. 저는 다양한 역주를 읽어본 게 없습니다. 그나마 읽은 것 중 하나가 감산 스님의 "중용"입니다. 감산 스님을 따라 중용을 읽으면 이렇게 읽으면 참 재미있구나, 허튼 말 없이 연관되어 쓰여져 있구나 싶습니다. 선지식이나 서적이 어떤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요즘은 내 하는 모양이 어떤지 살필 때 생활이 스승이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기자심이라고 가만히 보면 저 자신을 속일 수는 없더군요. 세상을 다 속여도 제 자신, 제 자신의 생활을 속일 수는 없더라구요.

달팽이 2006-03-0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불기자심...성철스님 책 사니까 끼워져있던 붓글씨가 생각나네요.
저는 불기자심을 나의 본성을 속이지 않는다고 풀이하고 싶었습니다.
고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몸마음에 착 달라붙는 맛이 있어
공부하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 같습니다.
감산 스님의 중용도 읽어보겠습니다.
 
길을 찾은 사람들 김흥호 전집 2
김흥호 / 솔출판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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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호 선생님의 이름을 보는 순간 나에게 낯설지않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다석 류영모선생님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던 분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안이 열린 분이고 그의 눈으로 찾아간 선현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그들의 업적이나 인생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이 지향한 바를 읽어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내가 별로 끌리지 않는 짧은 전기적 이야기를 묶은 책을 선뜻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은 우선 우리 나라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살다간 유학자와 승려 그리고 다석 선생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리의 길에서는 깨달음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소통되지만 현실적 삶으로 나오게 되면 여러 가지 옷을 입게 되므로 서로가 달라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학자 간에 유학자와 승려 간에 서로 일치되지 않는 생각들은 드러난 문화적 차이일 뿐, 그들의 공부는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건 내면을 궁구하건 결국엔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여 마음의 거울에 비친 상의 실을 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주자와 양명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주자와 양명은 서로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이론의 차이로 인해 현실적으로 대립할 수 밖에 없었던 점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들어가면 결국엔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깨달음의 차이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고 깨달음의 문화적 관습적 차이도 하나의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왕양명의 치지하는 마음바탕을 깨닫고 난 뒤의 격물의 가능성에 대해서 많은 떨림이 있었다.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행은 합일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밖에의 행동밖에 못하는 것이리라. 겉으로 보기엔 행동이 철저해도 마음을 억지로 끌고간다면 그것은 또 다른 병통을 낳게 마련이니까.

  둘째 장에서는 제자백가사상과 노자, 순자, 주자, 육상산, 왕양명, 석가, 혜능, 조주에게도 치닫는다. 동양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들이 망라된다. 앞서 말한대로 깨달음의 깊이와 차이는 있지만 그리고 깨달음의 문화적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자신의 주어진 삶에서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매진하여 깨달음을 성취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나의 스승이다.

  마지막 장에서 김흥호 선생님은 왜 인도로 끝을 내시려했을까? 샹카라와 간디, 네루를 통해 좀 더 인류의 지혜의 원천이었던 인도 사회의 인물로서 마무리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인류의 스승 그 첫 자리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자리한다. 물론 노자와 석가와의 연대기적인 비교가 분명히 매듭된 것은 아니지만 진리의 첫 길을 걸어가신 분에 대한 마음의 자리가 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무도 걷지 않았던 그 길을 처음 걸어가서 온 세상에 진리의 환한 빛을 드리운 분, 그 분이 있어서 후세에 많은 성현들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많은 선현들이 걸어간 길, 그 자취를 따라 곤이지지한 내가 미로처럼 미망을 헤치며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이렇게 많은 진리의 등불들이 곳곳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어리석음이 너무나 커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넘어지고 넘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확연하게 존재하는 진리를 가리키고 있기때문에 비록 더디고 느리지만 진리가 있음을 확신하며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어두워진 밤에 불빛으로 밝혀 읽어내는 진리의 글들이 마음으로 스며들어 가슴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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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2-26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충 책 구성이 짐작은 가는데요.
1999년도 책을 벌써 품절하는 알라딘의 책 보유 시스템은 간혹 황당합니다.
인기몰이에 연연해 하는 상업주의적 마켓팅에 화가 나지만
달팽이님의 '길' 리뷰에 마음에 순한 촛불을 밝히는 것처럼 온순해지는군요.
덕분에 오늘밤은 온순한 짐승으로 잠들 것 같습니다.

달팽이 2006-02-26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마음 닿는 책이 대중적인 취향에 맞지 않아 품절된 경우에
때로는 아쉽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쉬움을 넘어 우리 출판에 대한 안타까움이 들기도 합니다.
몇 일 동안 온우주를 헤매이었던 마음이 이 책으로 좀 더 차분해졌습니다.
고마운 책이었습니다.

이누아 2006-02-27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만이 목적은 아닌가 봅니다. 길을 찾기만 해도 환해지는군요. 닿기도 전에 이미 환해지는 마음. 그런 걸 초심이라고 하나 봅니다. 리뷰와는 관계 없는 얘긴가요? 읽고나니 엉뚱하게 초발심시변정각이 생각나서.^^

달팽이 2006-02-27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합니다.
중용에 보면 天命之謂性으로 시작합니다.
하늘이 명해준 것을 성이라 한다.
첫말부터 가슴이 환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목적지인줄 알았던 것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지금은 미망의 출발점이지만 돌아온 그 자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뻑차오르는 느낌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깨달음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우주의 중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술몽쇄언 - 꿈과 인생
김대현 지음, 남만성 옮김 / 을유문화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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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꾼다. 우리는 꿈 속에서 펼쳐진 상황이 진실인 듯 느낀다. 우리의 몸도 꿈 속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꿈 속에서 달리면 숨차오르고 꿈 속에서 어여쁜 여인을 만나면 가슴이 달아오른다. 꿈 속에 빠져 있을 때엔 그 꿈이 현실이다. 하지만 깨고 난 후에 꿈은 그저 한 때의 소일거리일 뿐 나의 하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가 깨었다고 하는 이 인생이 한 편의 꿈이라면 어찌할텐가?

  장자는 호접몽에서 꿈에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나는 꿈을 꾸다가 문득 깨어보니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돌이켜 생각하메 나비의 꿈에 장자라는 인간이 등장한 것인지 장자의 꿈에 나비가 등장한 것인지 헷갈리더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들이 육체로서 느끼는 오감각들이 진실을 파악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는 생각에서 보면 이 인생이라는 것도 진리를 접하기 전에는 한 편의 꿈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가끔 나도 꿈을 꾼다. 때로는 어떤 꿈이었는지도 기억되지 않는 것이 있는 반면, 때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기억되는 꿈이 있다. 처가 인천에 떨어져 살았을 때 나는 산아래에 집을 구해서 혼자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그 때 나의 공부에 도움이 되었던 시기였는데 한 때 나는 꿈 속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내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한 여자가 자연스러운 속옷차림으로 내 옆에 눕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지만 처가 아니었다. 순간 깜짝 놀라서 등을 돌렸는데 그녀는 뒤에서 길고도 검은(정말 새까만 머리가 얼마나 생생한 느낌을 주던지...)머리칼로 내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를 뒤에서 껴안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꿈에서 깨었다.

  친구들에게 가끔 이 이야기를 했더니 나보고 '바보'란다. 꿈에서 왜 굴러온 떡을 차버리냐.하는 것이었다. ㅎㅎㅎ...그러나 꿈 속에서 여인의 속살이 비치는 젊은 몸을 보고도 마음이 전혀 흥분되지 않았고 이상한 느낌만이 가슴을 가득 채운 나는 그 꿈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내 속에 있던 낯선 모습의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 곁에 늘 있어왔던 그것이었다고...그것이 무엇이냐고? 그 때 난 나름대로 마음공부에 몰두하고 있었으니 내가 늘 바라마지 않던 그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할 따름이다.

  삶도 한 편의 꿈이다. 하지만 우리는 삶 속에서 환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여러 가지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 예쁜 얼굴의 여자에게도 마음이 뺏기고, 좋은 아파트에도 마음이 뺏긴다. 멋진 차에게도 마음이 뺏기고 자식의 교육과 성장에도 마음이 뺏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욕망에 마음이 빼앗긴다. 자아에 혼을 빼앗기고 만다. 그래서 없는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어 마음에 쌓고, 희노애락의 마음을 짓는다. 세상은 아무런 의도없이 나에게 주어지는대도 나의 마음이 망견을 지어 스스로 힘들어하고 괴로워한다. 이런 인생의 꿈을 깨면 모든 것이 달라보이는데도 말이다.

  이 책도 마음 속에서 큰 의심과 분심을 만들어내게 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과연 삶이 한 편의 꿈이라고 하는데 그럼 깨어난 세상은 어떠한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가? 아침에 눈을 뜨면서 시작되는 꿈이 또 다시 잠들면서 다른 꿈으로 이어진다. 하루 24시간을 꿈꾸면서 살고 있는 우리들, 언제 그 꿈 한 번 깨어보고 죽는가? 아니, 죽는다는 꿈도 깨어볼 것인가? 깨어있지 못하면 지금 이것이 꿈이라는 것은 알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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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4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2-24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른다는 의문은 놓치면 안됩니다.
그 의문 속에 온 세상을 담아내면 당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오직 모를 뿐입니다.
님께선 좀 더 읽기 수월한 책부터 접하는 것이 필요할 듯 합니다.
달라이라마님의 책들이나 틱낫한 스님의 책들을 읽어보심도 괜찮을 듯...

비로그인 2006-02-24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오직 모르뿐!^^;;
의식하면서 살아야 한다정도로 알아두겠습니다.
사실 저도 대충 이것 저것 책을 읽어보긴 했지만 삶에 녹아들게 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니 꾸준히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해야겠죠..
근데 달라이라마 책은 꼭 도덕책 같아요...

달팽이 2006-02-24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라이라마 님의 책은 아주 쉬운 것 같지만 깨달음의 원을 한바퀴 돌아온 분의 글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닦일수록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죠.
저도 잘 모르지만 인간의 몸으로써 닦아나가는 과정의 거의 끝에 세상 모든 사람들과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내는 단계로 나가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 분의 책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누구나가 쉽게 이해하기 위해 평이하게 서술한 글이지만 그 분의 마음으로 들어가면 성장의 과정에 따라 누구나가 읽을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누아 2006-02-24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장자처럼 꿈을 꾼 적이 있어요. 어느 절간의 작은 방에서 새벽에 깨어났어요. 이 작고 어두운 방에 왜 내가 있는 거지? 아, 나는 꿈을 꾸고 있구나. 대구에 있는 내가 충청도 절에서 자는 이런 꿈을 왜 꾸고 있지? 했는데 아이고, 이게 무슨 일입니까..전 정말로 그 절의 작은 방에서 잤던 겁니다. 근데 대구에 있던 내가 너무 익숙해서 절에서 새벽에 눈뜬 제가 꿈 속에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꿈. 근데 꿈 속에서도 놀라고 두려워하고 기쁘고 최선을 다해 달리기도 합니다. 지금처럼요. 전 이 책이 좋아요.

이누아 2006-02-24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 꿈 얘기 전에도 한 적 있나요? 꼭 두 번 말하는 것 같네요.^^

달팽이 2006-02-25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글쎄요. 그런가요?
마음이 좀 더 투명해진 어느날 다시 잡고 싶은 책입니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1
배병삼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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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학기 중에 들었다가 공야장편에서 이름도 잘 모르는 제자에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글들에서 중단된 좌절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학중이라 전편이라도 끝내리라라는 생각에 하루 한 편씩 한문을 중심으로 시작한 논어가 이제야 전편이 끝났다. 학이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의 인생의 단계를 담은 위정편과 공자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을 다룬 이인편이 아무래도 많이 기억에 남는다. 보수적인 유교공부의 대표격이 되어버린 논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공자의 사상이 시대를 앞질러가서 혁신적이고 계급타파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 많았다. 나아가 사회개혁을 주장하면서 은둔적인 노장사상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도 마음의 중심을 수기하는데 두어서 늘 그것을 잃지 않고 사회에 나아갔다. 또한 마음의 중심을 인에 두고 벗어나려하지 아니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위가 자신의 인격을 잡아먹는 현실의 위정자들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고 생각한다.

  논어 전체를 꿰뚫는 그의 정신은 호학에 있다. '호학' 얼마나 멋진 말인가? 어느 정도의 학위만 따면 이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격적 성장이 멈추는 것인데도 그것을 자랑삼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면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의 호학하는 정신을 높이 사고 싶다. 배움의 길을 가는 사람들과 벗을 삼아 속으로는 자신의 공부를 부추키고 밖으로는 배움을 교류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또 벗의 모습에서 자신을 비추어 면학하면 인생을 사는데 있어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학이편의 첫구절의 내용이 논어 전체를 통과하는 정신이라고 보기에 주저함이 없는 것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배우고 이것을 몸에 익혀 자기 삶으로 만들어가니 이것이 기쁨이 아닌가?

배움을 함께하는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것이 즐거움 아닌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으니 이것이 군자 아닌가?

 

그것은 배움이 자신의 내부를 성찰하고 닦는데 있는 공부이기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에 무관하게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이러한 배움은 막힘이 없어야 하겠는데...그것이 군자불기이다.

 

 君子不器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그 편협한 시각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가지겠지만, 사람이 사회에 나아가면 한 분야의 일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법, 나는 차라리 그 마음가짐을 드러난 세상에 두지 않고 수기하는 데 두었다라는 뜻으로 읽고 싶어진다. 마음 속의 진리와 그를 향한 배움에 뜻을 둔 호학인은 그릇 속에 제한된 편협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는 십오세에 지우학, 삼십에 이립, 사십에 불혹, 오십에 지천명, 육십에 이순, 칠십에 종심소욕 불유구라 했다. 

 

  從心所慾不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도 천성을 따르는 곱자 즉 구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했다. 그 곱자란 무엇일까? 논어공부를 한 후 그 곱자 하나를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다면 논어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이지 않은가 생각한다. 이러한 공부는 모든 공부와 모든 세상 살이를 하나로 꿰어내게 만들어주는 공부였을 것이다.

    吾道一以貫之

  논어를 읽으면서 나는 대학과 중용, 도덕경과 논어를 비롯한 동양고전을 하나로 꿰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관지하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때로는 불교의 화두가 되기도 하고 배움의 화두가 되기도 하고 삶의 화두가 되는 그것을 위해서는 삶을 버려도 좋을 공부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삶을 꿰어낸 공부는 이제 더 이상 삶의 목적을 향해 매진하는 삶을 살게 하지 않는다. 이제 삶은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되며 소요하는 것이 된다. '빈이락' '부이호례자'에서 빈이락은 가난해도 자신의 인품으로 남에게 부족한 것을 구해서 즐긴다는 뜻이 아니라 가난 그 자체를 즐긴다는 뜻이다. 즉, 가난은 삶을 즐기는 데 장애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장자의 소요유와 경계를 같이한다.

 

朝聞道 夕死可矣

 

한 시대를 학문으로 배움으로 풍미하면서도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가 없음을 안타까워했지만 그것으로 자신이 상하지 아니하고 배움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갔던 공자의 길, 조선 시대 수많은 유학자들이 수기하는 학문으로 삼아 따라갔던 그 길에는 이미 많은 발자국들이 나 있지만, 공자의 마음을 따라 바른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은 얼마였을 것인가? 외부의 흔적을 찾으면 많은 사람들이 걸어갔던 패인 길이지만 마음으로 들어가면 혼자만이 묵묵하게 걸어가야 하는 외로운 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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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1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2-11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왜 바뀌었는지...모르겠군요...
호학은 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님과도 상관없는 말은 아닐터..
이현주님의 시집으로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호학은..ㅎㅎㅎ

이누아 2006-02-11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어를 읽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두 구절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종심소욕불유구"고, 나머지 하나가 "불천노불이과"(不遷怒不二過)입니다. 누가 와서 묻지요. "선생 제자 중에 호학하는 자가 있습니까"하고. 공자께서 "안회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두 번 하지 않는다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단명하였다네. 해서 지금은 내 제자 중에 호학하는 사람이 없네"라고 하시지요. 책을 안 보고 기억으로 적은 것이라 오류가 있나 모르겠습니다만 3천 명 제자 중에 호학하는 제자가 단 한 명이었다고 하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불천노, 불이과...

달팽이 2006-02-1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를 옮기지 않고 잘못은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노여움을 마음으로 녹여내는 인격과 품성이 필요하겠고,
잘못을 두 번 범하지 않기 위해선
한 번의 잘못에서 칼끝을 대하듯 내면으로 성찰하는 마음이 필요하겠지요..
님 덕분에 빠뜨릴 뻔 했던 좋은 말을 다시 떠올리는군요..
연암 선생님도...
뜻을 얻은 곳에는 두 번 가지 않으며, 만족한 줄 안다면 위태롭지 않다고 해서 불이과에 대한 교훈의 말의 남겼지요..

어둔이 2006-02-13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자불기...'모름지기 삶의 주인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진리에 뜻을 두지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을 따지지는 않는다.'라고 어둔이가 이 즈음 깨달은 의미입니다.

달팽이 2006-02-1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릴 것이 하나도 없군요...ㅎㅎ
 
마음을 바꾸면 인생이 변한다
달라이 라마 지음, 공경희 옮김 / 문이당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논어공부의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한 외유가 많다. 호학하는 자세로 지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가는 공부 속에서 뭔가 하나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일상에서 잡다한 생각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공부의 힘이 생활로까지 뻗어나가지 못하는 끈기의 부족을 질책하는 의미로 이 책을 들게 되었다. 작은 마음 하나가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었고 그것은 나에게는 좋지 못한 체험이었다. 불현듯 그 생각의 계기가 되었던 일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그 생각의 뿌리가 보이기도 했을 때에 조금 안정이 되었다.

  분노와 미움을 성숙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사람들 중에 이 분만한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그것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국민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비롯된 미움과 분노를 사랑과 자비로 해결했던 그의 성숙한 방법은 전세계인들에게 새로운 씨앗으로 가슴에 심어지고 있다. 이 책은 달라이라마께서 인생을 보람있고 가치있게 살기위해 신도들과 대중들에게 한 연설의 내용이다. 때로는 불자들의 궁금증에 대한 답을 통해서 마음을 변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몸이 그동안 많이 편했다. 그만큼 자유로워야 할텐데 몸이 갇힌듯 잡다한 생각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어디 마음내키는 대로 돌아다니고 놀러다닐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이것을 기회삼아 글공부나 좀 해야겠다는 생각은 방학이 끝나갈 무렵에는 잡다한 생각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공부가 머리로만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연스레 손이 간 것이 이 책이다. 두꺼운 책을 읽기에는 외유가 길어질 것만 같았고 소설이나 시집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전 전교조 연수 때 연수집의 어느 페이지에서 한면을 온통 차지했던 그 분이 흑백사진이 마음에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음 속의 좋지 않은 생각들이 생길 때에는 그것을 분석적으로 쳐다보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것은 외부의 현상이나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뿌리는 언제나 자아이다. 무지하고 아는 것이 없어 게으르고 게을리 공부하는 나에게도 이 자아의 뿌리가 깊어서 언제든 불현듯 솟구쳐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때면 호흡을 고르거나 그것을 바라보는 방법으로 넘길 때도 있지만 집중의 틈새로 올라와서 어느듯 나를 상하게 하는 생각들을 보고 있으면 좀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표면의식 속에서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는 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섬세해져야만 한다. 거친 의식을 물리치기 위해서 격물이 필요한 것이다. 오온에 의해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을 피하고 그 속에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마음의 밑바닥에 정신을 집중하려는 생각들이 우리를 앎으로 이끈다. 이것이 화두일수도 있고 깨어있음이기도 하다. 짧고 짧은 인생길에서 느닷없이 부딪히게 되는 죽음앞에서 우리가 진실로 가져갈 수 있는 보물이 있는데도 우리는 마치 이 인생이 영원한 것인양 느낀다. 영원한 보물에 대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현상이 좀 더 순순해진다. 

  이제 술이나 한 잔 하러 일어나야겠다. 조금 차가워진 날씨가 술맛을 더 좋게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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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2-09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암이 열하를 건너면서 죽도록 고생하고도 '술'을 잊을 수 없던 것처럼
술은 문객들의 진정한 벗인가 봅니다.
이왕이면 달빛이 고고한 밤이 되셨기를^^

달팽이 2006-02-09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빛은 어디두고 상투만 풀어헤쳤군요...
오늘은 햇살 너무 눈부신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