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 1000명의 죽음을 지켜본 호스피스 전문의가 말하는
오츠 슈이치 지음, 황소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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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단 하루의 삶이 내게 남아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면서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 단 하루동안 하고 싶은 일을 지금 하고 산다면 아마 우리들의 삶은 보다 후회없는 삶이 될 것이다. 호스피스 정신과 의사인 오츠 슈이치는 수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들이 마지막 삶의 여정에서 가장 크게 후회하는 것을 간추려서 이 책으로 엮었다. 어떤 일반화로서의 삶의 의미보다 그 생생한 삶의 마지막 현장에서 가슴생생히 전달되는 삶의 중요한 가치로서 말이다. 고집불통의 노교수가 자신의 형님의 말에는 꼼짝못하고 들으면서 자신의 마지막 삶에 있어서의 가족간의 사랑을 확인해가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모습이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어떤 후회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지금의 삶에 어떤 메세지를 준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이야 두말할 필요없이 어떤 삶의 후회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위없는 깨달음을 갖지 못한 범부의 삶에 그런 것이 가능할 리 없다. 그래서 나의 죽음의 과정을 미리 맞아보는 가상체험을 해보았다. 나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며 더욱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을 후회로 삼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는 가족 간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세상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 등 등의 항목들을 떠올려보게 된다.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면 그 또한 괜찮은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하다가 죽어라"라는 어떤 스님의 말처럼 삶과 죽음의 중요한 순간을 늘 어떤 가치를 위해서 살 수 있다면 그 삶은 아주 행복하고 어떤 큰 후회도 남기지 않으리라... 

   그러나 일번적인 삶으로서의 우리들의 삶 속에 삶의 마지막 시간으로 주어지는 죽음의 과정 속에서는 그 주변을 둘러싼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오랫동안 가족관계, 친구관계, 연인관계를 맺어왔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죽음이 가장 잘 전달하는 메세지는 삶이기 때문에 지금 나의 모습에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연약안 기반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우리의 앞날을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루 하루 그 날이 삶의 마지막 날인 듯 후회없이 살고 후회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후회없이 주변을 정리해두는 습관도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루 하루 살면서 업을 쌓고 사는지 업을 풀면서 사는지가 중요한 관점이 된다. 

  이제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살아왔다. 뭔가 세상과 나의 삶을 들여다볼 여유가 이제야 조금씩 생겨가는 시점이다. 나머지 절반에 가까운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가 그래서 내겐 중요하다. 공부하고 살 수 만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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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
    from 한사의 서재 2010-01-25 12:44 
    담배는 끊었고, 10년쯤 후에는 상속과 부부묘역 문제를 동시에 매듭지어둘 생각이다.            하고 싶은 일은 세상 어딘가에 걸린, 내가 좋아하는 그림 보러 다니는 일이다. 하던 일 멈추고, 한 100일 시간을 내어 보고 싶은 그림이 있는 도시에 갈 것이다. 미술관 문 열면 들어가 문 닫을 때 나올 것이다. 온종일 그림만 볼 것이다. 미술관 문 닫은 후에는 그 도시
 
 
혜덕화 2010-01-25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보관함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 무엇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생을 보내고 가장 아쉬웠던 것은 언젠가 갈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 언젠가가 멀리 있을거라고만 생각하고 마음 편히 잘가라는 인사를 못한 것입니다.
죽음이란 말을 차마 병자 앞에서 입에 올리기가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차라리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서로 이야기 나누고 몸만 죽는 것이지 결국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동생이 죽어도 내 속에, 부모님 속에, 아이들 속에 살아있을거라는 것을 말해주지 못한 것이 가장 가슴 아픕니다.
올 여름, 지금 내가 당장 죽는다고 해도 후회할 일이 있을까를 참 많이 생각하며 보냈습니다. 당장 죽어도 뒷사람들 귀찮지 않게 내 것 미리미리 정리하며 살자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곁에 없을 사람들이지요.
一卽一切多卽一(일즉일체다즉일)과 世界一花(세계일화)를 가슴에 담습니다.
_()_

달팽이 2010-01-25 16:52   좋아요 0 | URL
네, 이미 세속의 인연들을 모두 끊어낸 스님들의 삶과 우리네들의 삶은 그런 면에서 다르겠지요. 그러니 가족들의 죽음과 그 과정을 지켜보며 가지는 마음아픔과 상실감을 어찌 말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그래도 혜덕화님은 공부하는 사람이라 그 방향은 공감되는 바가 많군요..._()_

비로그인 2010-01-25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저도 위 책 리뷰를 읽고 죽기 전에 뭘 해야 후회가 없을까 생각해봤답니다..
하하


달팽이 2010-01-25 16:54   좋아요 0 | URL
죽음을 거울삼아 삶의 모습을 한번 돌아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정말 소중한 가치대로 살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것...이 책이 제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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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보면서 1984년을 떠올린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빅브라더라는 시스템에 의한 인간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개인의 자유의지를 말살시키는 세상의 이야기였지. 내겐 이미 그 책을 읽은 시점이 1984년 이후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소설적 상상력으로만 읽혔지만, 적어도 그 책을 쓴 조지 오웰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그 세상이 또 달리보이게 된다. 마음에서 문제를 만들면 그 문제에 의해 세상이 눈 앞에 정렬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면 어떨까? 묻지 않는 자는 자유의지가 없는 시스템의 부속일 뿐이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하루키는 이 책에서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일상적으로 주어지는 모습과 풍경에 아무런 의미도 의문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삶들은 또 별다른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평범하게 주어지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의심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묻는 행위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현실을 다시 보게 하고 그 마음에 물음을 가지고 보는 세상은 이제 긴장감과 함께 떨리는 세상으로 다가온다. 그 물음이 스스로의 마음 속의 답을 찾을 때까지 나에게서는 이제 의미있는 과정이 시작된다. 하루키가 그린 IQ84의 풍경 또한 그렇다. 의심하는 자들에게만 보여지는 두 개의 달, 그것은 진리가 내포하고 있는 실체와 허상의 세계이다. 때로는 우리들도 진리와 허상의 세계에서 산다. 굳이 플라톤을 모셔오지 않더라도 실재의 세계와 동굴의 세계가 우리들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가 존재의 실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의 잠 속의 세계에서 나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말이다. 아침이 되어 나라는 의식이 돌아옴과 동시에 펼쳐지는 이 똑같은 우주와 내가 어디에 머무는지도 모르는 숙면 때의 우주의 모습 그것은 두 개의 달이 아닌가? 

  묻지 않는 자에겐 진리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선가의 말처럼 모든 우주는 마음에서 비롯된 산물이다.(일체유심조) 자신의 마음이 깊게 품은 것은 현실로 드러나 그 마음의 우주가 펼쳐지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의심을 가진 자는 이미 진리의 길을 걷는 자이다. 그것은 진리로 향하는 삶이다. 마찬가지로 권력과 돈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것의 어떠한 형태의 삶이건 권력과 돈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 된다. 개인의 마음과 의지까지도 통제해버리고 마는 전체주의적인 사회에서 아오마메와 덴고가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허상의 세계를 통제해내는 리틀피플의 세상에서도 그에 저항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뭔가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신비스러운 점들이 많이 나온다. 두 개의 달, (공기번데기에 의해 탄생하였울까?) 리틀 피플의 존재와 그들의 역할, 현실의 세계와 아오마메가 이름붙인 IQ84의 세계, 선구조직의 실체와 더 리더의 역할, 후카에리와 덴고의 역할에 대해 독자들로 하여금 어렴풋이 안개 낀 장면을 보는 듯하게 처리하였다. 어쩌면 지금의 삶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의심을 가져야 하듯...정확히 내릴 수 있는 해석을 피하여 될 수 있으면 많은 해석과 상상력의 여지를 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자 했던 그의 의도는 아닐까? 그래서인지 이 소설 속에 많은 의미들을 담아내려 했다는 생각도 든다. 진실한 사랑의 이야기, 가족관계에 대한 이야기 부정과 모정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그리고 직업적 신념적 종교적 동반자들의 이야기, 친구와의 관계 등 우리들이 살아가며 일반적으로 가지는 관계들을 통해 우리들의 삶 그 자체를 다시 보게끔 한다. 이것 역시 해변의 카프카 이후로 더욱 소설적으로 완성되는 듯한 하루키적인 것을 닮아 있다.  

  보여지는 것만이 세상의 진실한 모습은 아니다. 세상의 진실은 말로 표현할 수도 어떤 표현을 빌려서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한다면 어떠한 설명을 하더라도 알 수 없다는 덴고아버지의 말처럼 언어적 장벽 나아가 그 언어적 장벽을 만들어내는 마음의 장벽을 제거해야만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어떤 의지가 있다면 우리 눈 앞에 드러나는 세상은 그 마음이 품은 세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진실한 세상의 모습을 알기까지는 의심말고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다. 인간의 삶이라는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전체주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나는 어떤 의심을 가져야 하는가? 덴고가 그녀에 대한 사랑의 기억과 마음으로만 살아있듯이 오직 진리에 대한 열망만으로 나는 살아 있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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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 지향의 일본인
이어령 지음 / 문학사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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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에 일본에 있었다. 처가 무척 여행을 좋아한 탓이기도 하지만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던 데다가 여행이라는 매력을 나도 또한 바라고 있었다. 여행 전에 일본어까지는 배우지 못해도 일본인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겠다는 마음에 몇 권의 책을 보았다. 여행의 맛의 하나는 풍경이요 또 하나는 맛이요. 나머지는 그 사람과 문화에 있다. 그런데 풍경과 맛은 어차피 외국이니 어느 정도 새로움과 호기심이라는 위안으로 적응해야만 하는 면이 있음을 어쩔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과 문화인데 언어가 잘 안되니 책으로라도 허기짐을 조금 채우고 가려했다. 결론적으로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이 책을 읽지 않고서 갔다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일본이라는 나라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텐류지(천룡사)에서 본 용 그림은 훌륭했다. 구름 속인 듯 용은 그 뚜렷하게 살아있는 눈매와 발톱들 사이로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휘어진 몸의 부분부분은 구름 속에 묻혔으나 그의 눈앞에 펼쳐진 회오리가 만들어내는 허공은 마치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어떤 다른 존재의 공간을 상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 텐류지의 아주 정제되었으면서도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와 그 호수 위에 분재처럼 가지를 뻗은 소나무 그리고 별채로 이어지는 디딤돌의 의미를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청수사 입구에 도열된 가게에 놓여진 부채와 도예공품들 그리고 교토 거리의 다양한 도시락도 나는 이 책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축소지향"이라는 표현 속에 어쩌면 이렇게 일본의 특성을 일관되고 잘 캐치해내었는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이 책을 썼다는 자부심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책을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 첫번째 물음이었다. 경제대국이며 아시아의 유럽을 지향하는 일본인의 자존심에 어감부터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 책 제목부터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직하고 열린 일본인이라면 식민지시대에서 살아온 저자가 모국어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언어의 수인 처지를 겪어오고 난 후 그 지배자에게 대한 글을 썼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한국어의 아름다움에 대해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실테니까) 더구나 일본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일본인의 특성을 외부에서 바라보아서 제대로 정리된 일본론을 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면 그 가치는 결코 언어적 표현 몇 가지를 꼬투리삼아 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의 포용력 또한 일본인들의 오지랖이니까... 일본에서도 양심적인 학자들이 많아서인지 이 책은 그들에 의해 일본론의 고전처럼 소개되었고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서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현실은 늘 축소와 확대의 파동을 따라 등락한다. 때로는 어떤 영역에서는 축소의 성향이 강점을 가지기도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확대의 성향이 강점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축소지향의 일본인 특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의 강점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으며 나아가 어떻게 확대해야 하는가도 고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인들은 이어령 선생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일본론에 대한 이 책이 일본인의 21세기의 세계적 요구와 역할에 부응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소지향의 20세기의 일본에서 결여된 세계사적 요구와 세계적 공동체의식에의 참여 등의 일본적인 과제를 그들 앞에 시원하게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펴는 나는 처음에는 일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한국인의 우월성같은 것에 대한 시원함을 느낀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일본의 정원보다는 소쇄원같은 한국적인 자연스러움의 미가 좋았고 사찰의 종소리도 우리의 것이 훨씬 깊고 그윽한 맛이 있어 오랫동안 내 마음에 울려왔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과잉친절과 그 이면에 놓여진, 마음으로 교류할 수 없는 외부성이 나의 기질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내 오랜 삶의 습관처럼 일본보다는 한국적인 것이 끌리고 한국적인 것을 일본적인 것과 비교하여 나름대로의 우월감으로서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배의 삶을 직접 살아온 선생님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얼마나 더 클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적 객관성 이외에 사족같은 감정과 분노를 붙이지 않은 선생님의 마음의 평정심이 부러웠다. 이 제대로 된 책 하나로 이미 그의 자존심과 당당함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책을 덮을 때 쯤에는 오히려 이 책은 우리들을 다시 보게 하는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확대지향과 축소지향의 모든 면을 세상에 맞추어 함께 길러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세계 전자산업의 석권이라고 하는 축소지향적인 면과 세계의 것을 신속히 받아들여 세계시장에서 문화적 갈등없이 진출하고 나아가는 확대지향적인 면 모두가 우리들에게 있다. 또한 자연의 것을 우리들의 삶으로 그대로 축소시켜 끌어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미로서 느끼는 호연지기, 우리들의 고전문화에서 보이는 훌륭함들은 확대와 축소의 양면들에 통달했던 선현들의 지혜를 보게 한다.  그러나 세계공동체의식으로 세계사적 과제와 요구에 동참하고 세계인의 행복 실현으로 나아가려는 확대지향성은 이미 갖추어진 어느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과제로서 늘 앞에 놓여진 것이 아닐까? [작은 분재가 좁은 정원에 놓였을 때에는 아름다운 예술품이 되지만 그것을 넓은 대지에 옮겨놓으면 그 미와 특색을 상실하고 말 것이라는 비유]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안의 배타성과 타인과의 소통의 장벽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우리들로서도 일본이라는 거울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고 그것은 이어령 선생님이 이 책을 통해 한국에 전하는 메세지이기도 한 것이라고 생각드는 이유는 왜일까?  다시는 타국의 식민지배의 상처를 가져서는 안되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이 반성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하고 또한 타국을 식민 지배 하지 않기 위해 우리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타인과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준비가 우리에겐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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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09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읽는 달팽이님의 글이 단정합니다.
글 좋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은 천재의 반열이시지요..


달팽이 2010-01-09 22:56   좋아요 0 | URL
이어령 교수님의 책이 이게 제겐 세번째입니다. 아직 사놓고 못 본 몇 권의 책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재의 반열이라는 표현처럼 타고난 석학이시라는 생각입니다. ㅎㅎ

2010-01-09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막의 꽃
와리스 디리 지음, 이다희 옮김 / 섬앤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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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길을 걷노라면 우리는 때때로 폭풍을 맞기도 하고 때로는 햇살을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연이어 찾아오는 태풍의 눈 속에 버티고 서기도 한다. 이 때 생사는 오직 의지에 달려 있다."는 어머니에 대한 그녀의 편지글을 먼저 인용해야겠다. 그녀의 삶이란 아무것도 없는 사막 위에서 피어난 하나의 꽃과도 같다. 그것은 생사의 경계를 오가며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강한 의지의 씨앗에서 핀 꽃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나의 삶, 그와 대조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몸뚱이 하나와 하루하루 주어진 자연과의 사이에서 극한 노력을 통해서만 지나갈 수 있는 아프리카의 하루. 시간으로서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비슷해보이는 하루이지만 그 하루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이 보내는 우리의 하루가 삶의 성숙함으로는 그들의 하루보다 더욱 초라해보이는 것은 왜일까? 부질없는 갖가지 고민들로 채워진 시간보다는 몸과 자연에 대한 직관과 정직해지고 맑은 정신으로 채워진 시간들이 바로 우리들의 삶에서 결핍된 것이기 때문이겠지.

  다 늙은 노인에게 시집가던 어느 밤, 그는 집을 뛰쳐나와 사막의 한 가운데로 걸어간다. 자신의 알 수 없는 삶을 찾아가며 그녀가 겪었던 많은 일들....때로는 술 취한 남성에게 성폭행당할 뻔하고 때로는 삼촌의 집 앞에서 한 남자에게 속아 몸을 빼앗기고 때로는 맹수의 눈 앞에서 삶을 포기하고 그의 한 끼 식사가 되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리카라는 소말리아 사회라는 전통과 관습이 부과한 어린 여성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하고 큰 고통인 [여성할례]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일이 이 어린 소녀에게 지나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더욱 강하게 성장하였다. 물 한 줌 없는 사막 위에 피는 꽃은 자신이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 지를 그냥 알아지는 듯...

  런던과 파리 그리고 뉴욕의 모델 생활 속에서도 아프리카적인 삶의 정신을 놓지 않았고 또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가슴 깊숙이 새겨진 삶의 태도는 무엇이기에 그녀를 물질문명의 한가운데에서도 마음만은 오염되지 않게 하였던 것일까? 삶의 모순성은 늘 삶의 비밀처럼 우리에게 주어진다. 가장 더럽고 오염된 곳에서도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듯이 수많은 고통과 좌절과 폭력의 한가운데서도 그것을 극복하며 더욱 큰 의지와 정신이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 모든 고통들을 겪게 하면서도 살아남게 하여 그녀의 운명을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한 소말리아 나아가 아프리카 소녀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것이 그녀를 그 깊은 위험과 좌절에서 운명처럼 벗어나서 앞에 놓여진 길로 뚜벅 내딛게 만드는 힘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삶을 적나라하게 카메라 앞에 내어 놓고 자신의 [여성할례]라는 깊은 상처를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용기는 바로 더 큰 사랑 앞에서 하나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삶의 어떤 모습보다 그 일들이 지향하는 마음을 바로 세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새해에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글쓰는 행위가 나의 마음에서 어떻게 방향지워지는지를 내 마음이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를 바란다. 허공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사막 속에서 집을 지을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그녀에게서 배운다. 아프리카 대륙의 뿔처럼 자리잡은 소말리아의 한 여성이 세상의 모든 편견과 욕심과 차별에 대해 그녀의 작은 뿔을 치켜세우고 들이받을 듯한 형세처럼 내 안의 게으름과 집착에 대해서도 나의 녹슬은 칼을 갈아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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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04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달팽이님 반갑습니다.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기를..
복도 많이 오시기를. 하하

사람이 태어난 환경이 그 사람의 삶의 양상(행, 불행 등)을 좌지우지 하는 듯합니다.
개개인의 삶의 토대가 미약함이 늘 안타깝답니다.
저같은 개인지상주의자에게는 특히..

달팽이님 새해에는 좀 더 자주 뵈요. 하하


달팽이 2010-01-04 17:40   좋아요 0 | URL
오랜 시간을 비어 두었던 자리에... 그래도 한 때 나누었던 정을 간직하여 이렇게 환대하여 주시니 시간이 지난 이 자리에 또 즐거운 마음으로 찾게 됩니다. 한사님도 올해 건강하시고 가끔씩 저에게 좋은 정보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경쾌한 웃음 그대로십니다. 하하

혜덕화 2010-01-0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돌아오셨군요.
환영합니다.^^

달팽이 2010-01-0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안녕하세요.. 소박하지만 마음담은 인사..여전합니다.
 
미래를 여는 금강경 독송
정천구 지음 / 이경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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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 방학이 다가온다. 미뤄두었던 금강경 공부를 이번 방학엔 해볼 요량이다. 자신의 마음 공부가 되어있지 않으면 어느 자리에 서든지 사람들과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럴 때 때로는 자신의 마음을 거두어 들이고 무관심한듯 응대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감정만 부풀려서 서로 찔러대고 베어내고 하는 불필요한 싸움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인가 내가 해야되겠다고 생각할 때 그 마음이 올라오는 자리를 보아서 '아상'인지 알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궁리는 백선생님의 말씀대로 쓸데없는 것에 불과하고 버림만 같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어디 이 공부에 일상에 부딪히는 것이 한 두번이랴! 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인데 무엇을 탓할까!

  백선생님의 아래서 공부한 숨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참 많다. 한 때 한 아주머니가 도올 선생의 도덕경을 비판하며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써서 관심을 가졌던 경우가 있는 데 그 역시 소사에서 백 선생님의 지도 아래 공부한 이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전 공부는 아무리 논리적이어도 사리분별을 내어도 내면 낼수록 공부는 그르친다. 자신의 마음이 투명하게 비워지지 않는 한 거꾸로 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자기가 좀 알게 되면 치심이 생겨서 되레 공부의 길을 가로막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요즘 더욱 반성이 많이 된다. 뭐, 참된 삶의 현장도 아닌 바에야 내가 옳니 니가 옳니 싸워서 뭐 하겠는가? 다 시간낭비다. 그 시간에 몸이나 움직이는 것만 못하다. 요즘 알라딘 활동이 재미없는 이유도 사회과학 책이 손에 덜 잡히는 이유도 그것이다.

  삶은 늘 내가 의식을 세우는 순간 그 결과는 내게 삶의 공허함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이 공부를 알게 된 것이 나로 하여금 젊은 날의 탐, 진, 치를 닦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것을 닦아 내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함을 알지만 이 길이 있다는 사실이 내 삶의 가장 큰 위안이다. 특히나 백성욱 선생님 같은 분을 책으로서라도 기연있게 만난 것에 대해 감사한다. 세상에 몸으로 만난 그 어떤 만남 못지 않게 그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가끔은 글을 보지 않고 그 글의 뜻이 먼저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그 때에는 글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 그 뜻을 간직한 것이야말로 진짜 그를 아는 것이기에...백선생님 아래서 공부한 사람들의 글은 하나같이 투명하고 경건하다. 아는 티를 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글에 실린 공력이 작지 않다. "서양인의 영적인 서술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쉽게 풀어서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특징이라면 동양의 깊은 진리는 자신의 수준에서 깨달은 바대로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그 사람의 마음의 경지를 모르고서는 알 수 없다."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그래서 서양사람이 쓴 영성서는 머리를 시원하게 해주는 측면은 있지만 가슴 깊숙히 스며드는 맛이 적은 것이다. 내가 동양에 살면서 인연되어 만나는 책들, 그 중에서도 백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그것이 마음에 착 달라붙는 맛이 있어 읽으면 읽을수록 의미가 새로워진다.

  나같이 못난 사람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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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1 16: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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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5 0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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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2 2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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