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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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회를 다시 한번 민주주의적 소통과 참여의 장으로 이끌었던 촛불집회. 그에 대한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좀 더 이상적인 형태의 촛불집회는 무엇이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소설가가 내렸다. 한국을 휩쓸고 간 촛불의 에너지는 어디로 사라졌으며 다시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가? 촛불 집회가 내린 영향은 무엇인가? 또 지금의 현실은 과연 어느 곳에 위치해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학문이 아니라 소설적인 플롯을 통해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새롭다.  

  전체와 소통하는 사람 

  캐나다 벤쿠버의 어느 시골에서 자라 15살이 되어 한국을 정신적 자립의 첫 여행지로 선택한 지오, 그녀는 정규적인 학교교육을 받지는 않지만 읽고 싶은 책을 읽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하루하루 나무의 잎이 자라는 것을 느끼고 동물의 마음과 교감한다. 7살이 된 어느 날 뇌의 정전사고를 겪고 난 후 그녀의 인식의 세계는 바뀌었다. 뇌의 세계에서 가슴의 세계로...그녀는 동식물과 교감하게 되었고 전체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녀 뿐만이 아니다. 희영이도 연우도 개와 소통하는 인연으로 만난다. 그 소통의 비밀의 문은 '사랑'이다.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될 때에만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또 소통할 수 있다. 이지훈 기자에게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그에게 있는 내면적 장점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홍씨 노인도 이런 면에서 전체와 소통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진보와 보수라는 틀로만 나누지 않고 진보와 보수가 제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서로 교류하고 소통함을 통해 더욱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 또한 소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고 되찾고 싶어했던 숙자씨도 사과의 마음을 읽어주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쓰기에 따라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이 마음. 그것을 일러 소통의 마음이요 전체의 마음이라 부르면 어떨까?  

  아픔은 영혼을 성장시킨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나 자신만의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의 삶을 실패하고 고국을 떠나 세계의 각지를 떠도는 가족을 가진 희영이의 상처가 있고, 아버지의 폭력적인 그늘 하에서 불행하게 살다 결국엔 남편을 죽이게 되는 엄마의 삶을 가진 수아의 상처가 있다. 보수 기자인 아버지의 삶과 자신에 대한 보수적인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속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민기의 아픔이 있는가하면 아주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되어 그 아이를 출산하면서 동시에 어머니는 생명을 잃고 동갑의 아버지는 자살을 한다. 부모를 잃고 홀로 고아가 된 연우의 상처다. 하지만 이 깊은 상처를 가진 그들이 그 아픔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 아픔을 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어루만지고 그 아픔을 속으로 녹여내면서 더욱 단단하게 성장해간다. 지오가 보기엔 한국의 청계천은 야생성을 읽어버린 하천이다. 원래 지형의 생겨먹은 대로 흐르는 물의 흐름이 아니다. 어쩌면 한국의 아이들은 바로 자연성을 잃어버린 문명 속에서의 삶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청계천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이미 기형화되고 왜곡되어버린 물의 흐름이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시멘트 틈새에서 생명을 피워내고 또 물고기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며 그런대로 또 하나의 물의 흐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서 제 각각의 삶의 꽃을 피워내는 스스로의 물줄기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안의 괴물을 어떻게 다룰까? 

  촛불집회가 반복되면서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은 이제 반대의 폭력 속에 놓이게 된다. 정부는 교묘하고도 다양한 선전을 통해 그들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그것은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통보로 세상에 배포된다. 촛불집회의 규모도 커지면서 점차 집회는 국가권력과의 대면 양상을 띠게 되고 국민들의 안전한 먹을 거리와 물가 서민들의 삶, 교육문제 등 생생한 현실문제들에 대한 토론과 소통의 장이 투쟁과 갈등의 장으로 변하게 된다. 주어진 역할 속에서 서로 담배와 먹을 것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던 시민들과 전경들은 이제 물리적인 폭력과 대응 앞에서 마음을 닫고 적대시한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생겨났던 괴물...그것은 애초에 한국과 국민에 대한 사랑과 소통의 마음을 서서히 지배하며 삭트는 적대감과 서로에 대한 단절감이었다. 작가는 사회적인 갈등 속에 놓여진 개인의 마음과 심리의 변화를 통해 촛불집회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또 어떤 성격의 모임이 되는지도 보여주고 있었다. 놀랍다. 우리 안의 분노와 적대감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한편으로 이쪽과 저쪽의 싸움이 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의 세상과 소통하며 하나의 만남을 위한 소통이 될 수도 있었다.  

  더 넓어진 세상인식은?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시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민주주의적 해결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에서 나아가 육식의 입맛을 채워주기 위해 잔인하게 자라고 도축되는 소들의 영혼도 위로해주고 빌어주는 마음, 인간의 쾌락과 욕망 속에 버려진 세상의 굶주린 사람들과 황폐해져만 가는 지구,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들의 마음 속의 괴물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그 에너지를 다시 생명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에너지로 변화시키려는 의지...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더 넓어진 세상인식이다. 어쩌면 문제의 촛점을 흐리는 것으로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 안에 들어온 것만을 문제라고 인식한다. 그러니 하나의 인식의 창 속에 가려진 많은 면들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소명이 아닌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과 소통의 문제를 소에서 사회문제에서 인간의 마음 내면으로 옮겨다 놓고 또 그것을 사회 전체로 우주전체로 존재의 층위 전체로 옮겨다 놓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새로운 면이라고 생각된다.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사회문제들, 그리고 촛불집회의 순수한 에너지와 그것을 분출했던 사람들은 결국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세상과 소통하고 동식물과 소통하고 사소한 일상 속에서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 에너지와 마음은 사람지지 않고 축적된다. 젊지만 인생을 사는데 있어 결코 어리지만은 않은 지오와 민기 태현과 희영 연우와 수아들 우리 사회의 젊은 층들이 바로 그 희망이다. 다만 그들의 마음 속에 생겨서 자라나는 괴물의 존재를 잘 다스릴 수 있는 고삐를 쥔 자들 말이다. 밖으로는 세상과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고 안으로는 자신의 마음 속의 분노를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당당한 시민들이 존재하는 한 그 사회의 희망은 늘 존재한다. 그 희망은 마치 촛불처럼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소리없이 옮겨가고 어느새 세상을 밝히는 횃불이 된다. 촛불은 그 빛의 반경이 작다. 널리 세상을 구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주위를 밝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성찰의 의미를 촛불은 갖고 있다. 자신의 마음이 밝혀진 후에야 비로소 주위를 넓혀 사회를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촛불의 지혜에서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이 모두 하나의 꽃처럼 피어날 수 있다면 희망은 바로 그 한 송이의 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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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0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1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대문도서관 2010-07-27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동대문도서관 입니다^^
『근대의 책 읽기』 저자 천정환 교수님의 강좌 <독자, 그들의 대한민국 - 근현대 문학과 독자의 문화사>가 9월 7일부터 매주 화요일 7시에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립니다.
4주차 강의에서 김선우 작가의 <캔들 플라워>에 대해 다룹니다.

강의에 관한 더욱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blog.daum.net/ddmlib/63
 
미학 오디세이 1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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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오래 전에 읽었어야 하는 책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 만남의 인연이 늦게 왔다. 대학교때에 읽었던 사회주의 예술로서의 미학에 관한 책 몇 권이 전부였고 제목에서 짐작하듯 사회주의 예술이론에서 미학이란 노동과 사회주의적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러니까 나에게 처음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상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노동'이라는 단어와 관계가 깊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을 살아오면서 나는 노동과는 다른 내 가슴을 직접 울리는 영역의 예술작품과 만났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음악의 세계와 그림의 세계에서 나는 인연이 닿는 몇 몇 곡과 그림들을 만났고 그것은 이전에 내가 처음 접했던 '노동'이라는 단어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세계의 경험이었다.  

  에셔의 그림을 이 책에서 몇 점을 보게 되었다. 그의 그림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책의 각 장 앞마다 모든 곳에 그려진 '뫼비우스의 띠'도 저자가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메세지로서 잘 보여준 것이라 생각하였다. 가상과 현실, 진리와 속세, 신과 인간, 주관과 객관 등등 예술을 생각할 때 흔히 다루어지는 범주 또는 개념의 카테고리에서 그가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은 현실에서는 구분되지 않고 모두 존재하는 양면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한 시대에서 한 시대로 넘어가면서 대립되는 듯 보이는 한 범주의 후퇴와 부족했던 반대범주의 등장이 시대를 갈랐다. 신을 죽임으로써 원시시대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로 넘어가고 다시 신을 살려서 중세로 넘어간다. 다시 신에게서 인간에게 중심이 넘어가면서 중세와 근대의 구분이 생기고 과학(경험)이냐 종교(직관)냐에 따라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시각이 구분된다. 초월적 세계냐 객관적으로 경험가능한 세계냐에 따라 예술의 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구분이 생기듯이 현재에 있어서도 아름다움은 객관적인 세계에 존재하느냐 또는 주관적인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냐에 대한 여전한 물음이 남아 있게 된다. 

  존재의 원천인 태극에서 음양이 생긴다는 주역에서와 같이 생명의 원천인 그 공간에서 무엇인가가 생겨나고 또 그것이 선명하게 음양의 세계로 나뉘다가 사멸의 공간에서는 다시 생명이 태어났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에셔의 작품들은 주역의 세계관과 닿아 있다. 설명으로서는 미의 보편성에 근거한 객관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할런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미추와 선악이 달리보이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비슷하다. 음과 양은 태극에서 나와서 서로 다른 성질을 갖는 보편적인 성질이지만 그래서 사괘 8괘로 펼쳐지지만 한 사람의 마음에서 그것은 서로 침범하고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오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은 불과 상극의 요소에 놓이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불 위에 올려진 냄비는 우리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데워주는 상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니 앞에서 나눈 범주들이야말로 인식을 위한 또는 미학사를 설명하는 편의를 위한 범주일뿐 사실은 미학사를 통틀어서 또는 한 시대 내에서도 서로 교류하고 대립하는 하나의 현실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통사적으로 다룬 글들이 가진 단점을 이 책도 또한 갖고 있다. 너무 개념이나 범주를 통해 설명하려고 하는 학문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마음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몫으로 남겨진다는 점이다. 분류해서 한 곳에 위치지우고 또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와 구분을 하는 것으로는 그 작품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책 한 권이 어찌 그런 것을 다 채워줄 수 있겠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중섭님의 소그림처럼 또는 최장조교수님의 지리의 이해처럼 우선은 깊이 몰입하여 사랑하는 것보다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말을 나침반 삼아서 보면 너무 논리적으로 교묘하게 잘 짜여진 배치 속에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의 범주와 개념으로서만 그림과 작품을 이해하게 되는 한정성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내린 미학에 대한 인식틀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에셔의 그림을 통해서 그가 미학의 역사를 통찰하면서 기본적인 인식틀로 사용했던 관점에 대해서는 박수를 쳐주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이 책이 나왔을 무렵 이 책을 읽었다면 저자의 카리스마넘치는 인식틀로서만 작품과 책을 따라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시류를 한참이나 놓쳐버린 지금에서야 이 책을 들게 되어 가끔은 그의 인식틀을 옆에 밀쳐두고서 그림에 몰입하는 시간도 갖게 되고 그의 세밀하고도 정연한 인식틀의 빈틈에서 놀 수 있었다는 점도 나름대로 이 책을 즐기는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계속해서 2,3 권을 읽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더 이상의 리뷰는 생각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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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박물지 - 이어령의 이미지 + 생각
이어령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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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위, 갓, 거문고, 계란꾸러미, 고봉, 골무, 나전칠기, 낫과 호미, 논길, 다듬이, 담, 담뱃대, 돗자리, 뒤주, 떡, ㄹ, 매듭, 맷돌, 무덤, 문, 물레방아, 미륵, 바구니, 바지, 박, 버선, 베갯모, 병풍, 보자기, 부채, 붓, 비녀, 사물놀이, 상, 서까래, 수저, 신발, 씨름, 연, 엽전, 윷, 이불과 방석, 장롱, 장독대, 장승, 종, 지게, 창호지, 처마, 초롱, 치마, 칼, 키, 탈, 태권, 태극, 팔각정, 팔만대장경, 풍경, 한글, 한약, 항아리, 호랑이, 화로. 이것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우리 나라의 문화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인공들..이 책은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적어도 내 짧은 독서의 경험에서 보면 우리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과 그것을 글로 옮겨놓은 것에는 이어령 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최순우 선생님이나 오주석 선생님(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버리셔서 안타깝다.)등 몇 몇 우리 문화예술의 우수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분들이 계시지만 일상적인 우리들의 옛 삶 속의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그것에 담긴 깊은 뜻을 포착하여 이렇듯 물흘러가듯 글로 옮겨다 놓은 것에는 그저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글은 글 이전에 마음이 작용하는 것이므로 일상적인 소재를 들여다보는 선생님의 내면의 눈이 특별한 것이다. 오랜 연륜에서 오는 삶을 꿰뚫어보는 지혜와 선생님만이 가진 언어에 대한 감각과 능력 또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과 기질적인 이해력의 깊이가 이런 책을 만든 인연이 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해본다. 

  한 편 한 편의 글은 길지 않다. 하지만 그 길지 않은 글들은 마치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흘러 들어온다. 또한 그 짧은 글에서 그 소재가 보여주는 깊은 통찰이 비유와 상징의 매체를 타고 자유롭게 노닌다. 엿장수 가위를 "절단작용을 청각작용으로 전환시킨 순간 악역에서 정겨운 주역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엿장수의 가위소리는 늘 현실을 넘어선 꿈결 속에서 들려 온다. 그리고 그 가위는 무엇을 잘라내는 공포, 프로이드가 말하는 거세콤플렉스의 불안이 아니라 오히려 듬뿍 덤을 주는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한다."라고 표현한 것이라든가,  "갓, 그것은 한국인의 이념이 물질 그 자체로 응집되어 있는 머리의 언어이다." "한국인이 만들어낸 계란꾸러미는 기술적 합리주의가 낳은 단순화와 협소화에서의 해방을 시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꿈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만 포장된 계란꾸러미야말로 기능성을 소통성으로 바꾸어가는 탈산업화 시대의 정신과 통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계란꾸러미는 형태와 구조를 노출시킨 아름다움, 깨지지 않게 내용물을 보호하는 합리적인 기능성, 그리고 포장 내용을 남에게 알려주는 정보성의 세 가지 특성을 동시적으로 만족시켜주고 있는 포장 문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등 무수한 주옥같은 압축의 묘미를 만나게 된다.

  책의 어느 장을 펼쳐보더라도 짧지만 하나의 완결되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수 있고 또한 그 글을 바탕으로 하여 생각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 수 있다. 특히 이 곳에 등장하는 소재는 산업화를 급속하게 겪어오던 시기에 자라서 산업화 이전의 삶의 모습의 흔적들을 유년시절의 삶의 일부로서 기억하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삶에 대한 향수가 이 글의 통찰과 멋스러움 위에 가미되어 책을 잡은 순간부터는 마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듯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듯 행복한 꿈결처럼 가물가물하고도 아스라한 마음으로 읽어내리게 하는 마법이 있다.  

  글 한 편 한 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소재를 드러내는 그림 또한 눈을 즐겁게 한다. 엿가락 가위와 거문고, 고봉, 골무, 장롱, 맷돌 등의 사진과 책의 표지로 사용된 검은 갓을 위에서 내려다본 사진...이것만으로도 또 하나의 사진집을 본 듯하다. 표지로 사용한 검은 갓은 아마 선생님의 단정하고도 고아한 분위기가 엄정하고도 바른 기세를 가진 우리의 선비와 닮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자연스럽게 굽은 논길 사진은 마치 포근하고도 정겨운 고향집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누런 논길을 생각하게 한다. 논길 어디선가 누렁소 한마리 주저앉아 긴 울음소리 하나 뽑아낼 듯 하고 반가운 손님이 온 것을 알리듯 멀리서 짖어대는 개소리 또한 고향집의 하늘 위에 울릴 것 같다. 그 고향집의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문고리 옆으로 창호지의 결과 무늬가 눈에 들어올 듯 할 것이고 그 창호지의 문을 침을 발라 뚫어내던 어린 날의 밤들이 그립다.  

  이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나의 유년시절을 다시 사는 시간이 되고 또한 우리의 옛 모습과 삶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어 이름모를 따뜻함과 정겨움이 작은 공간에 가득히 퍼지는 느낌이 든다. 책 한 권이 이런 것을 줄 수 있다면 그 책의 가치는 뒷면에 인쇄된 가격보다 더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 책 값이 아깝지 않은 책 하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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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1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어느 장을 펼쳐보더라도 짧지만 하나의 완결되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수 있고 또한 그 글을 바탕으로 하여 생각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 수 있다.

특히 이 곳에 등장하는 소재는 산업화를 급속하게 겪어오던 시기에 자라서 산업화 이전의 삶의 모습의 흔적들을 유년시절의 삶의 일부로서 기억하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삶에 대한 향수가 이 글의 통찰과 멋스러움 위에 가미되어 책을 잡은 순간부터는 마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듯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듯 행복한 꿈결처럼 가물가물하고도 아스라한 마음으로 읽어내리게 하는 마법이 있다."

이어령 선생님의 문장을 방불케 하는 글귀입니다. 달팽이님 글 좋습니다. 감동... 하하


달팽이 2010-02-12 20:36   좋아요 0 | URL
아마 한사님께선 이어령 선생님들의 글들이 저보다 더 마음깊이 와닿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공유할 수 있음에 자족합니다. ㅎㅎ

달팽이 2010-02-1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방면으로 지적 사유를 펼쳐가는 여우님의 여행길에 가끔은 동행할 때도 있어 기쁩니다. 공산품이 아니라면 어찌 동서고금의 사람들을 만날 것이며 또 음악을 그림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는 고마운 면이 있습니다. 제 기질은 아무래도 조금 그런 쪽에 인연이 있는 듯 합니다. 아주 조금요...그런데 기질을 바꾸는 것은 큰 공부라 했는데...가만히 생각해보니 일정한 기질을 갖지 않는 것이 바로 큰 공부인 듯 느껴집니다. 아직도 저는 느릿느릿 달팽이입니다. 하하.
 
나는 걷는다 붓다와 함께 - 지리산에서 히말라야까지, 청전 스님의 만행
청전 지음 / 휴(休)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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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종교는 민중입니다." 이 말은 청전스님 삶의 좌우명같은 것이다. 요즈음 종교를 불문하고 거대사원과 교회 성당이 지어지고 유명세와 권위를 빌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종교인과 종교단체가 늘고 있다. 수행과 민중이라는 것 외의 일체의 장식에 대한 거부감이 아주 강한 스님이 인도로 건너가서 티베트불교를 배우기 시작한 동기에도 이가 어느 정도의 작용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체의 도그마로부터 벗어나 가장 소외되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민중 속에서의 불교"가 스님이 지향하는 바다. 그러니 수천리의 길을 마다않고 오직 수행에의 의지 하나로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도 스님의 수행기엔 한국과 다름없는 그만의 소신이 묻어 있는 것이다.  

  스님의 책은 두번째다. "입보리행론" 번역된 것이 첫번째다. 입보리행론의 1장을 읽었을 때에는 ,우리나라 신부님인가 목사님인가 번역했던 "행복에 이르는 길"이 너무 번역이 잘못되어, 상대적으로 아주 시원하게 읽을 수 있어서 기억에 남았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소의경전으로 금강경을 많이 읽고 있지만 달라이라마님은 티베트불교에서 입보리행론을 아주 강조하신다. 그래서 소의경전처럼 읽히고 읽힌다고 한다. 입보리행론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역시 티베트에서 오래 생활하신 스님의 번역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입보리행론의 내용에도 큰 마음의 울림이 있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번역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시엄보살" 지리산 서쪽의 산동네에서 안상선 할아버지가 보낸 괴발개발 글씨속의 관시엄보살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말기암에 걸려 몇 달 남지않은 여생을 스님의 권유로 주야로 염불을 외면서 기도하시다가 생을 마쳐서 주위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울림을 남겼던 할아버지..죽는 순간까지 염주를 놓지 않고 기도하다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또 이런 인연으로 부처님을 만났으니 그 마지막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도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할아버지와의 동행이야기, 오대산 살둔골의 송로사 할머니 등등 삶의 마지막 마무리에 와계신 글자도 제대로 모르지만 순수하게 맑은 영혼을 지녔던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앞부분에 편안히 놓여져 있다. 

  이런 노인들과의 인연은 후반부의 티베트에서의 승려생활에서도 이어진다. 노스님들과의 특별한 인연(전생인연으로 알게 된 아빠스님과 엄마스님)으로 그들을 티베트의 성지순례를 해드리고 한국의 사찰을 순례시켜드리며 짓는 인연을 보며 스님의 말 그대로 민중 속에서 부처님을 모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과의 따뜻한 만남의 이야기를 적은 이 책은 나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달라이라마 스님을 모시고 그 아래서 티베트불교를 배우고 계신 스님이 한국 불교에 그리고 한국불자에게 더욱 잘 번역된 티베트 경전을 책으로 선물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입보리행론을 좀 더 수정하여 잘 된 번역으로 다시 작업해주셨으면 좋겠다. 더불어 날로 연로해지셔서 건강이 좋지 않은 달라이라마님의 말씀도 우리 글로 잘 옮겨주셨으면 한다. 그러면 먼 이국의 땅에서 공부하시는 스님의 덕을 보다 많은 한국의 불자들이 누릴 수 있고 스님에겐 또 경전스님으로서의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도리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으로 먼 곳 마다하지 않고 공부의 인연따라 다람살라에 계신 스님의 건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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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0-02-07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보관함에 넣어 두고 있는 중입니다. 이사하면 주문하려고.
내일부터 바빠지겠군요.
늘 건강하십시오.
아기들 많이 컸겠습니다.^^

달팽이 2010-02-08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지난 주에 이미 개학을 하였습니다. 혜덕화님. 올해엔 책 좀 보는 여유를 부려볼까 하는데요... 잘 될런지... 아이들 무럭무럭 잘 자랍니다. 시루의 콩나물처럼...몇 일 연수 갔다오면 몰라볼 정도로요..ㅎㅎ
혜덕화님도 올해엔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었으면...

글샘 2010-02-12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청전 스님 글도 인연이 되면 만날 일 있겠습니다.
또, 한 학년도가 마쳐집니다.
달팽이님도 마무리 잘 하시고, 또 좋은 아이들 많이 만나시길...
전 올해 3학년 부장을 하게 될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기만 하네요. ^^

달팽이 2010-02-12 13: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글샘님. 가끔씩 들러서 손님많은 글샘님의 서재를 기웃거리기도 하였습니다. 올해엔 중책을 맡으셨네요. 바쁘시겠습니다. 그래도 마음 잘 쓰시기를...저는 올해엔 좀 한가롭습니다. 책이나 읽으며 소일할 생각입니다.
 
36.5℃ 인간의 경제학 - 경제 행위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 탐구
이준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마트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죽염 치약 하나 2000원짜리를 세 개 묶어서 5000원에 파는데다가 하나를 더 얹어서 준다는 광고가 있다. 애초에 나는 치약 하나만 사려고 갔다가 결국엔 머리를 굴려보다가(하나에 결국엔 125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산다는 생각을 하고서...)네 통짜리 치약묶음을 덥썩 주워들고 만다. 그러면서 잘 샀다고 뿌듯해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4개의 치약을 사도록 의도한 것이고 나는 그 속임수에 말려든 것일 뿐이다. “닻내림효과”라고 하는 것이 이것의 이름이다. 배가 어느 곳에 닻을 내리면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자 그 부근에서 맴돌게 된다. 이처럼 아무 의미없는 숫자가 제시된다 해도 어떤 것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이 그 숫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 때 닻내림효과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 경우에는 내가 애초에 하나의 치약에 닻내림을 하고 있었지만 매장에서 4개가 한 묶음에 싼 가격에 제시되어 4개를 사도록 닻내림시킨 판매자의 의도에 굴복한 경우이다.

  이 사례에서 보면 우리들의 전통경제학은 뭔가 석연치 않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이기성에 근거하여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가정 자체가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이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상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식능력과 정보의 한계와 지식의 현실적 한계로 말미암아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이 더욱 일반적인 경우이고 또한 합리적 선택을 하기 위한 과정 역시 비용의 지불을 요구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 비용과 귀찮음이 싫어서 그냥 눈앞의 선택에 닻내림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음 사례를 통하여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김영민 씨는 31세의 미혼청년이며 매우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대학에 재학할 때 철학을 전공했으며, 여러 가지 학생 활동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여름 휴가 때마다 농촌으로 봉사활동을 떠납니다.”라는 묘사가 있은 다음 아래와 같은 서술을 제시한다.

1)김영민 씨는 고리 대부업체의 사원이다.

2)김영민 씨는 환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3)김영민 씨는 고리 대부업체의 사원이며 환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이 세 가지 중에 김영민 씨에 대한 올바른 서술일 확률이 높은 것부터 순서를 매기게 한다. 이 때 (3)번이 문제가 된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2번이 70%의 확률이고 1번이 20%의 확률이라고 가정해보면 3번은 14%의 확률(1과2의 결합)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반응은 주로 3번을 두 번째로 많이 선택한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지성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말이다. 이를 대표성 휴리스틱의 모습을 띤다고 한다. 대표성 휴리스틱이란 어떤 사람에 대한 묘사를 두고 그 사람의 직업을 짐작해 볼 때, 그 묘사가 특정 직업의 전형적 특성을 얼마나 잘 대표하는지에 따라 판단을 하는 방법으로 때로는 심한 오판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선택은 일정한 조건이 조금만 가해지면 어긋나고 왜곡되어 버린다. 그래서 합리적인 선택에 가정하고 있는 전통경제학의 현실해결력이 떨어지고 수식과 그래프와 도표에 의존한 어려운 경제학은 사람들의 외면 대상이 되어 왔다. 최근에는 이러한 인간의 선택의 내면에 존재한 심리적인 면들에 대해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제학을 행태경제이론이라고 한다. 비록 경제학의 교과서체계를 바꾸어 쓸 정도는 아니라도 변해가는 현실에서 인간의 경제적인 판단과 행동에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벌금효과의 어긋난 예를 살펴보자.

  이스라엘의 한 탁아소는 약속한 시간에 맡겨 놓은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는 부모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생각 끝에 탁아소측은 늦게 나타나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늦게 나타나는 부모가 줄 것으로 기대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벌금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게 나타나는 부모는 결국 더욱 증가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예전에는 부모들이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찾으러 왔지만 이제는 벌금을 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자기 때문에 늦게 퇴근해야 하는 교사들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경제적 유인이 오히려 엉뚱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과급 제도와 같이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대한 어떤 시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성과급제도는 게을리 일하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유인을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개미처럼 일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정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겨 자신의 체면이나 자존심에 상처를 가지게 될 때에는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상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사람들은 단순한 경제적 유인의 관점보다는 심리적이고 마음의 요인에 의한 경제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그 사람의 가치관과 공정성의 문제에서는 경제학 교과서의 합리적인 선택은 이미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인생의 주된 가치가 돈과 물질적 욕망의 충족이라고 하는 전제가 만족된 후에야 비로소 고전경제학의 이론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보다 더욱 복잡한 존재이며 그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이 이 책의 설명이다. 비로소 딱딱하고 차가운 경제학에서 온기있고 사람다운 경제학의 느낌이 올라온다. 그래서 이준구 선생님은 이를 36.5도의 인간의 경제학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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