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박물지 - 이어령의 이미지 + 생각
이어령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위, 갓, 거문고, 계란꾸러미, 고봉, 골무, 나전칠기, 낫과 호미, 논길, 다듬이, 담, 담뱃대, 돗자리, 뒤주, 떡, ㄹ, 매듭, 맷돌, 무덤, 문, 물레방아, 미륵, 바구니, 바지, 박, 버선, 베갯모, 병풍, 보자기, 부채, 붓, 비녀, 사물놀이, 상, 서까래, 수저, 신발, 씨름, 연, 엽전, 윷, 이불과 방석, 장롱, 장독대, 장승, 종, 지게, 창호지, 처마, 초롱, 치마, 칼, 키, 탈, 태권, 태극, 팔각정, 팔만대장경, 풍경, 한글, 한약, 항아리, 호랑이, 화로. 이것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우리 나라의 문화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인공들..이 책은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적어도 내 짧은 독서의 경험에서 보면 우리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과 그것을 글로 옮겨놓은 것에는 이어령 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최순우 선생님이나 오주석 선생님(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버리셔서 안타깝다.)등 몇 몇 우리 문화예술의 우수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분들이 계시지만 일상적인 우리들의 옛 삶 속의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그것에 담긴 깊은 뜻을 포착하여 이렇듯 물흘러가듯 글로 옮겨다 놓은 것에는 그저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글은 글 이전에 마음이 작용하는 것이므로 일상적인 소재를 들여다보는 선생님의 내면의 눈이 특별한 것이다. 오랜 연륜에서 오는 삶을 꿰뚫어보는 지혜와 선생님만이 가진 언어에 대한 감각과 능력 또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과 기질적인 이해력의 깊이가 이런 책을 만든 인연이 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해본다. 

  한 편 한 편의 글은 길지 않다. 하지만 그 길지 않은 글들은 마치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흘러 들어온다. 또한 그 짧은 글에서 그 소재가 보여주는 깊은 통찰이 비유와 상징의 매체를 타고 자유롭게 노닌다. 엿장수 가위를 "절단작용을 청각작용으로 전환시킨 순간 악역에서 정겨운 주역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엿장수의 가위소리는 늘 현실을 넘어선 꿈결 속에서 들려 온다. 그리고 그 가위는 무엇을 잘라내는 공포, 프로이드가 말하는 거세콤플렉스의 불안이 아니라 오히려 듬뿍 덤을 주는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한다."라고 표현한 것이라든가,  "갓, 그것은 한국인의 이념이 물질 그 자체로 응집되어 있는 머리의 언어이다." "한국인이 만들어낸 계란꾸러미는 기술적 합리주의가 낳은 단순화와 협소화에서의 해방을 시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꿈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만 포장된 계란꾸러미야말로 기능성을 소통성으로 바꾸어가는 탈산업화 시대의 정신과 통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계란꾸러미는 형태와 구조를 노출시킨 아름다움, 깨지지 않게 내용물을 보호하는 합리적인 기능성, 그리고 포장 내용을 남에게 알려주는 정보성의 세 가지 특성을 동시적으로 만족시켜주고 있는 포장 문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등 무수한 주옥같은 압축의 묘미를 만나게 된다.

  책의 어느 장을 펼쳐보더라도 짧지만 하나의 완결되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수 있고 또한 그 글을 바탕으로 하여 생각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 수 있다. 특히 이 곳에 등장하는 소재는 산업화를 급속하게 겪어오던 시기에 자라서 산업화 이전의 삶의 모습의 흔적들을 유년시절의 삶의 일부로서 기억하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삶에 대한 향수가 이 글의 통찰과 멋스러움 위에 가미되어 책을 잡은 순간부터는 마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듯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듯 행복한 꿈결처럼 가물가물하고도 아스라한 마음으로 읽어내리게 하는 마법이 있다.  

  글 한 편 한 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소재를 드러내는 그림 또한 눈을 즐겁게 한다. 엿가락 가위와 거문고, 고봉, 골무, 장롱, 맷돌 등의 사진과 책의 표지로 사용된 검은 갓을 위에서 내려다본 사진...이것만으로도 또 하나의 사진집을 본 듯하다. 표지로 사용한 검은 갓은 아마 선생님의 단정하고도 고아한 분위기가 엄정하고도 바른 기세를 가진 우리의 선비와 닮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자연스럽게 굽은 논길 사진은 마치 포근하고도 정겨운 고향집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누런 논길을 생각하게 한다. 논길 어디선가 누렁소 한마리 주저앉아 긴 울음소리 하나 뽑아낼 듯 하고 반가운 손님이 온 것을 알리듯 멀리서 짖어대는 개소리 또한 고향집의 하늘 위에 울릴 것 같다. 그 고향집의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문고리 옆으로 창호지의 결과 무늬가 눈에 들어올 듯 할 것이고 그 창호지의 문을 침을 발라 뚫어내던 어린 날의 밤들이 그립다.  

  이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나의 유년시절을 다시 사는 시간이 되고 또한 우리의 옛 모습과 삶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어 이름모를 따뜻함과 정겨움이 작은 공간에 가득히 퍼지는 느낌이 든다. 책 한 권이 이런 것을 줄 수 있다면 그 책의 가치는 뒷면에 인쇄된 가격보다 더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 책 값이 아깝지 않은 책 하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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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1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어느 장을 펼쳐보더라도 짧지만 하나의 완결되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수 있고 또한 그 글을 바탕으로 하여 생각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 수 있다.

특히 이 곳에 등장하는 소재는 산업화를 급속하게 겪어오던 시기에 자라서 산업화 이전의 삶의 모습의 흔적들을 유년시절의 삶의 일부로서 기억하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삶에 대한 향수가 이 글의 통찰과 멋스러움 위에 가미되어 책을 잡은 순간부터는 마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듯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듯 행복한 꿈결처럼 가물가물하고도 아스라한 마음으로 읽어내리게 하는 마법이 있다."

이어령 선생님의 문장을 방불케 하는 글귀입니다. 달팽이님 글 좋습니다. 감동... 하하


달팽이 2010-02-12 20:36   좋아요 0 | URL
아마 한사님께선 이어령 선생님들의 글들이 저보다 더 마음깊이 와닿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공유할 수 있음에 자족합니다. ㅎㅎ

달팽이 2010-02-1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방면으로 지적 사유를 펼쳐가는 여우님의 여행길에 가끔은 동행할 때도 있어 기쁩니다. 공산품이 아니라면 어찌 동서고금의 사람들을 만날 것이며 또 음악을 그림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는 고마운 면이 있습니다. 제 기질은 아무래도 조금 그런 쪽에 인연이 있는 듯 합니다. 아주 조금요...그런데 기질을 바꾸는 것은 큰 공부라 했는데...가만히 생각해보니 일정한 기질을 갖지 않는 것이 바로 큰 공부인 듯 느껴집니다. 아직도 저는 느릿느릿 달팽이입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