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인간의 경제학 - 경제 행위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 탐구
이준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마트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죽염 치약 하나 2000원짜리를 세 개 묶어서 5000원에 파는데다가 하나를 더 얹어서 준다는 광고가 있다. 애초에 나는 치약 하나만 사려고 갔다가 결국엔 머리를 굴려보다가(하나에 결국엔 125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산다는 생각을 하고서...)네 통짜리 치약묶음을 덥썩 주워들고 만다. 그러면서 잘 샀다고 뿌듯해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4개의 치약을 사도록 의도한 것이고 나는 그 속임수에 말려든 것일 뿐이다. “닻내림효과”라고 하는 것이 이것의 이름이다. 배가 어느 곳에 닻을 내리면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자 그 부근에서 맴돌게 된다. 이처럼 아무 의미없는 숫자가 제시된다 해도 어떤 것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이 그 숫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 때 닻내림효과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 경우에는 내가 애초에 하나의 치약에 닻내림을 하고 있었지만 매장에서 4개가 한 묶음에 싼 가격에 제시되어 4개를 사도록 닻내림시킨 판매자의 의도에 굴복한 경우이다.

  이 사례에서 보면 우리들의 전통경제학은 뭔가 석연치 않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이기성에 근거하여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가정 자체가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이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상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식능력과 정보의 한계와 지식의 현실적 한계로 말미암아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이 더욱 일반적인 경우이고 또한 합리적 선택을 하기 위한 과정 역시 비용의 지불을 요구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 비용과 귀찮음이 싫어서 그냥 눈앞의 선택에 닻내림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음 사례를 통하여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김영민 씨는 31세의 미혼청년이며 매우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대학에 재학할 때 철학을 전공했으며, 여러 가지 학생 활동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여름 휴가 때마다 농촌으로 봉사활동을 떠납니다.”라는 묘사가 있은 다음 아래와 같은 서술을 제시한다.

1)김영민 씨는 고리 대부업체의 사원이다.

2)김영민 씨는 환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3)김영민 씨는 고리 대부업체의 사원이며 환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이 세 가지 중에 김영민 씨에 대한 올바른 서술일 확률이 높은 것부터 순서를 매기게 한다. 이 때 (3)번이 문제가 된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2번이 70%의 확률이고 1번이 20%의 확률이라고 가정해보면 3번은 14%의 확률(1과2의 결합)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반응은 주로 3번을 두 번째로 많이 선택한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지성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말이다. 이를 대표성 휴리스틱의 모습을 띤다고 한다. 대표성 휴리스틱이란 어떤 사람에 대한 묘사를 두고 그 사람의 직업을 짐작해 볼 때, 그 묘사가 특정 직업의 전형적 특성을 얼마나 잘 대표하는지에 따라 판단을 하는 방법으로 때로는 심한 오판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선택은 일정한 조건이 조금만 가해지면 어긋나고 왜곡되어 버린다. 그래서 합리적인 선택에 가정하고 있는 전통경제학의 현실해결력이 떨어지고 수식과 그래프와 도표에 의존한 어려운 경제학은 사람들의 외면 대상이 되어 왔다. 최근에는 이러한 인간의 선택의 내면에 존재한 심리적인 면들에 대해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제학을 행태경제이론이라고 한다. 비록 경제학의 교과서체계를 바꾸어 쓸 정도는 아니라도 변해가는 현실에서 인간의 경제적인 판단과 행동에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벌금효과의 어긋난 예를 살펴보자.

  이스라엘의 한 탁아소는 약속한 시간에 맡겨 놓은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는 부모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생각 끝에 탁아소측은 늦게 나타나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늦게 나타나는 부모가 줄 것으로 기대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벌금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게 나타나는 부모는 결국 더욱 증가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예전에는 부모들이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찾으러 왔지만 이제는 벌금을 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자기 때문에 늦게 퇴근해야 하는 교사들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경제적 유인이 오히려 엉뚱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과급 제도와 같이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대한 어떤 시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성과급제도는 게을리 일하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유인을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개미처럼 일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정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겨 자신의 체면이나 자존심에 상처를 가지게 될 때에는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상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사람들은 단순한 경제적 유인의 관점보다는 심리적이고 마음의 요인에 의한 경제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그 사람의 가치관과 공정성의 문제에서는 경제학 교과서의 합리적인 선택은 이미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인생의 주된 가치가 돈과 물질적 욕망의 충족이라고 하는 전제가 만족된 후에야 비로소 고전경제학의 이론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보다 더욱 복잡한 존재이며 그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이 이 책의 설명이다. 비로소 딱딱하고 차가운 경제학에서 온기있고 사람다운 경제학의 느낌이 올라온다. 그래서 이준구 선생님은 이를 36.5도의 인간의 경제학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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