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1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 오래 전에 읽었어야 하는 책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 만남의 인연이 늦게 왔다. 대학교때에 읽었던 사회주의 예술로서의 미학에 관한 책 몇 권이 전부였고 제목에서 짐작하듯 사회주의 예술이론에서 미학이란 노동과 사회주의적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러니까 나에게 처음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상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노동'이라는 단어와 관계가 깊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을 살아오면서 나는 노동과는 다른 내 가슴을 직접 울리는 영역의 예술작품과 만났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음악의 세계와 그림의 세계에서 나는 인연이 닿는 몇 몇 곡과 그림들을 만났고 그것은 이전에 내가 처음 접했던 '노동'이라는 단어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세계의 경험이었다.  

  에셔의 그림을 이 책에서 몇 점을 보게 되었다. 그의 그림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책의 각 장 앞마다 모든 곳에 그려진 '뫼비우스의 띠'도 저자가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메세지로서 잘 보여준 것이라 생각하였다. 가상과 현실, 진리와 속세, 신과 인간, 주관과 객관 등등 예술을 생각할 때 흔히 다루어지는 범주 또는 개념의 카테고리에서 그가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은 현실에서는 구분되지 않고 모두 존재하는 양면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한 시대에서 한 시대로 넘어가면서 대립되는 듯 보이는 한 범주의 후퇴와 부족했던 반대범주의 등장이 시대를 갈랐다. 신을 죽임으로써 원시시대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로 넘어가고 다시 신을 살려서 중세로 넘어간다. 다시 신에게서 인간에게 중심이 넘어가면서 중세와 근대의 구분이 생기고 과학(경험)이냐 종교(직관)냐에 따라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시각이 구분된다. 초월적 세계냐 객관적으로 경험가능한 세계냐에 따라 예술의 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구분이 생기듯이 현재에 있어서도 아름다움은 객관적인 세계에 존재하느냐 또는 주관적인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냐에 대한 여전한 물음이 남아 있게 된다. 

  존재의 원천인 태극에서 음양이 생긴다는 주역에서와 같이 생명의 원천인 그 공간에서 무엇인가가 생겨나고 또 그것이 선명하게 음양의 세계로 나뉘다가 사멸의 공간에서는 다시 생명이 태어났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에셔의 작품들은 주역의 세계관과 닿아 있다. 설명으로서는 미의 보편성에 근거한 객관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할런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미추와 선악이 달리보이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비슷하다. 음과 양은 태극에서 나와서 서로 다른 성질을 갖는 보편적인 성질이지만 그래서 사괘 8괘로 펼쳐지지만 한 사람의 마음에서 그것은 서로 침범하고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오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은 불과 상극의 요소에 놓이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불 위에 올려진 냄비는 우리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데워주는 상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니 앞에서 나눈 범주들이야말로 인식을 위한 또는 미학사를 설명하는 편의를 위한 범주일뿐 사실은 미학사를 통틀어서 또는 한 시대 내에서도 서로 교류하고 대립하는 하나의 현실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통사적으로 다룬 글들이 가진 단점을 이 책도 또한 갖고 있다. 너무 개념이나 범주를 통해 설명하려고 하는 학문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마음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몫으로 남겨진다는 점이다. 분류해서 한 곳에 위치지우고 또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와 구분을 하는 것으로는 그 작품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책 한 권이 어찌 그런 것을 다 채워줄 수 있겠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중섭님의 소그림처럼 또는 최장조교수님의 지리의 이해처럼 우선은 깊이 몰입하여 사랑하는 것보다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말을 나침반 삼아서 보면 너무 논리적으로 교묘하게 잘 짜여진 배치 속에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의 범주와 개념으로서만 그림과 작품을 이해하게 되는 한정성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내린 미학에 대한 인식틀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에셔의 그림을 통해서 그가 미학의 역사를 통찰하면서 기본적인 인식틀로 사용했던 관점에 대해서는 박수를 쳐주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이 책이 나왔을 무렵 이 책을 읽었다면 저자의 카리스마넘치는 인식틀로서만 작품과 책을 따라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시류를 한참이나 놓쳐버린 지금에서야 이 책을 들게 되어 가끔은 그의 인식틀을 옆에 밀쳐두고서 그림에 몰입하는 시간도 갖게 되고 그의 세밀하고도 정연한 인식틀의 빈틈에서 놀 수 있었다는 점도 나름대로 이 책을 즐기는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계속해서 2,3 권을 읽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더 이상의 리뷰는 생각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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