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퍼온글] 사진 한 장을 위해 목숨을 던진 기자 -로버트 카파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카파

1913~1954년, 41년의 생애를 산 남자.
어떤 위대한 역사가와 작가도 광포한 야만의 20세기를 이 남자처럼 사실적으로 그리지 못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이 남자가 찍은 사진 한 장만큼 전쟁의 참상을 극명하게 전달할 수는 없었다. 또 어떤 방대한 분량의 전쟁문학도 극한 상황에서의 휴머니티를 이 남자처럼 비극적으로 묘사하지는 못했다.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포토저널리즘의 신화(神話), 가장 위대한 종군기자, 보도사진 에이전시 매그넘의 창립자…. 그 이름 앞에 붙는 형용어들이다. 그가 전 생애를 던져 찍은 사진 140점이 지난 3월 말부터 5월 26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다.

모든 사진기자의 우상이자 영웅이 된 남자, 그의 이름은 로버트 카파(Robert Capa)다. 너무나 유명한 이름. 그러나 로버트 카파는 본명이 아니다. 엔드레 에르노 프리드먼(Endre Erno Friedmann)이 본명이다. 왜 그는 본명을 쓰지 못하고 영어 이름을 썼을까? 여기에 그의 생애를 규정짓는 운명적 역사성이 숨어 있다.

로 버트 카파는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는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때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중심부는 오스트리아 빈이었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그 주변부였다. 또한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럽에 살면서도 비(非)유럽인으로 아웃사이더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1914년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가 한 살 때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프로이센(독일)과 한편이 되어 프랑스·러시아 연합군과 전쟁을 벌인다. 그의 유년기 기억은 전쟁의 비참함과 굶주림으로 채워졌다.
1918년, 1차 대전이 끝났으나 그 후유증은 유럽 전역을 강타했다. 생필품 부족은 인플레이션을 낳았고 경제침체로 이어졌다. 경제난으로 인한 실업률 증가는 또다시 유럽 전역에 반(反)유대주의 기독교운동을 불러왔다. 반유대주의운동은 1930년대 들어 독일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그 는 1931년 좌익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헝가리에서 추방되어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간다. 베를린대학을 다니며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사진통신사 데포트(Dephot) 암실보조원으로 취직한다. 이것이 프리드먼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는 암실보조원으로 일하면서도 능력을 인정 받아 소소한 취재를 하게 된다.

1932년, 러시아의 레온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망명길에 오른다. 그 해 12월, 트로츠키가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마침 데포트 통신사에서는 트로츠키의 강연을 취재할 마땅한 사진기자가 없었다. 대신 취재를 나가게 된 프리드먼은 단 한 번의 기회에서 사진 특종을 건져 올렸고, 이로 인해 정식 사진기자로 채용된다.

1933년, 히틀러가 반유대주의 광풍(狂風)에 편승해 권력을 잡게 되자 유대인인 프리드먼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베를린을 떠난다. 프리드먼은 부다페스트를 거쳐 파리로 들어갔다. 파리는 반유대주의의 영향에서 비켜선 도시였다. 그는 파리에서 세 살 연상의 포르투갈 출신 사진작가 게르타 포호라일(Gerta Pohorylle)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1935년, 프리드먼은 돈을 벌기 위해 ‘로버트 카파’라는 가공의 미국인 사진작가 행세를 한다. 게르타는 프리드먼이 찍은 사진을 미국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가 찍은 것으로 꾸며 신문사에 비싸게 판매한다.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진작업을 하다 프리드먼은 로버트 카파로, 아내 게르타는 게르다 타로(Gerda Taro)로 아예 이름을 바꿔버린다.

로 버트 카파가 된 프리드먼을 세상에 알린 것은 스페인 내전이었다. 1936년 8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다. 카파 부부는 인민전선 진영에 서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카파의 생애를 결정짓는 첫 종군취재였다. 당시 세계의 지성들은 프랑코 정권에 맞서 싸우는 인민전선을 지지하면서 앞다투어 참전했다. 앙드레 말로, 어네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노먼 베순, 파블로 피카소 등이 인민전선 편에 선 지식인이다.

1936년 9월, 카파는 인민전선 진영의 코르도바 전투를 취재한다. 인민전선 병사가 참호에서 뛰쳐나와 돌격하는 순간 머리에 총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 이 찰나의 장면이 카파의 카메라에 잡혔다. 이 사진이 미국의 화보잡지 ‘라이프’에 실리면서 로버트 카파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로버트 카파는 전쟁 사진작가로 이름을 굳혔으며, 이 사진은 20세기의 전쟁기록 사진 중 가장 뛰어난 사진으로 평가 받게 된다.

1937 년 7월, 카파는 잠시 파리에 가 있었고 게르다는 혼자 전선에 남아 사진취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게르다가 후퇴하던 공화파의 탱크에 치어 즉사한다. 이 소식을 듣고 카파는 보름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때 카파 나이 스물넷. 한창 젊은 나이였지만 이후 카파는 평생 독신을 고집했다. 카파는 수차례의 스페인 내전 취재를 통해 피카소와 헤밍웨이를 알게 되고 죽을 때까지 우정을 나누게 된다.

1938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카파는 중국 대륙으로 발길을 돌린다. 카파는 6개월간 중국 대륙을 누비며 중일전쟁을 취재해 일본군의 만행과 잔학상을 세계에 알렸다.
1939 년 9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카파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헝가리 국적을 갖고 있던 카파는 미국 입장에서 보면 적성국(敵性國) 시민이었다. 미국 당국에 의해 카메라를 압수당할 처지에 몰리기도 했다. 위기를 넘긴 카파는 1942년 미국 잡지 ‘콜리어스’와 계약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연합군에 종군하게 된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인… 1954년 베트남전서 지뢰 밟고 사망

카파는 1943년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탈환·시칠리아 탈환·나폴리 해방을 거쳐 이탈리
아 반도 전쟁을 취재한다. 2차 대전은 종군사진기자 카파의 명성을 또 한번 드날리게 했다. 연합군의 승리를 결정 지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해안 상륙작전 취재였다. 연합군의 상륙작전 동행취재에 선발된 기자는 20명이었다. 이 중 사진기자는 네 명이었고, 로버트 카파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카파는 2차 대전 종군기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필맥)를 남겼다. 카파는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 제1파 부대와 함께 상륙용 주정(舟艇)에서 뛰어내렸다. 카파는 총알이 쏟아지는 그 순간을 이 책에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바닷물은 너무 차가웠고, 해안까지의 거리는 아직 100m 이상 남아 있었다. 내 주위로 총탄이 날아들어 물을 튀겼다. 나는 제일 가까운 철제 장애물을 향해 내달렸다. 병사 한 명도 나와 동시에 그 장애물 뒤로 뛰어들었다. 몇 분간 우리 둘은 장애물을 나눠 썼다. 그는 소총에서 방수포를 떼어내고는 연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해안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 그제야 안전하다고 생각한 나는 나처럼 장애물 뒤로 움츠리고 숨어 있는 다른 병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기 때문에 선명한 사진을 찍기에는 좀 어두운 편이었다. 그러나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히틀러의 정책참모들이 디자인한 초현실주의 작품 같은 장애물 뒤에 작게 움츠린 병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 매우 효과적일 것 같았다.”

이때 카파가 찍은 사진은 모두 106장이었으나 ‘라이프’지 암실직원의 실수로 대부분 쓸 수 없게 되고 10장만 살아 남았다.
카파는 1945년 초 또 한번 목숨 건 취재를 감행한다. 미군 제17 공수단 대원과 함께 낙하산을 타고 독일로 침투한 것이다.
1945 년 6월, 카파는 파리에서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을 만나 2년간 연인으로 지낸다. 버그만은 딸을 둔 유부녀였으나 카파에 빠지고 만다. 종전 후인 1946년 카파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버그만의 권유로 잠시 할리우드에서 영화 일에 관여하기도 했으나 곧 회의를 느끼고 영화에서 손을 뗀다.

1947년 카파는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보도사진 통신사인 매그넘(Magnum)을 설립했다. 1948~1950년 중동전쟁을 취재했고, 1950년 파리로 돌아온 뒤로는 3년간 매그넘사 대표로 일했다. 1949년과 1951년에는 피카소의 사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는데, 이때가 카파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1954년 카파는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중 ‘라이프’지로부터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카파의 친구들은 베트남행(行)을 만류했다. 이미 낙하산 침투 취재까지 한 경험이 있는 카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삶과 죽음의 확률이 반반이라면 나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
카 파는 1954년 5월 24일 북베트남에서 프랑스전투 부대원을 따라 취재하던 중 타이빈에서 지뢰를 밟아 폭사한다. 1차 대전의 전운(戰雲)이 감돌던 1913년에 태어나 종군기자로 다섯 전장에서 10년 이상 최전선을 지켰던 카파. 그의 마지막은 그의 생애만큼 영웅적이었다. 카파는 전쟁 혐오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죽음으로 그 피날레를 장식했다.


/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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