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짱꿀라 > 퇴계 이황- 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상)

한국 성리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큰 스승 이황의 관한 책을 이 기사와 함께 몇 가지 소개를 하려고 한다. 먼저 <퇴계 이황>(살림, 2007)은 ' 사단칠정론.성학십도.무진육조소'이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사단 칠정론과 성학십도는 어려워 그동안 전공자들 외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지만, 이번 이 책을 통해 좀더 퇴계 이황의 성리학 사상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퇴계 이황이 들려주는 경 이야기 - 초급, 중급, 고급>(자음과 모음, 2006)는 초, 중, 고등학생들 용으로 퇴황 이황의 성리학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출판했다. <활인심방 - 퇴계선생의 마음으로 하는 몸공부>(예문서원, 2006)은 퇴계의 생애와 활심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 책이다. <소설 퇴계 이황>(가람기획, 2005)은 문화관광부 우수 교양 도서로서 뽑힐 만큼 내용을 검증받은 작품이다. 이 책의 특징은 퇴계 이황의 생애를 기본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였기 때문에 읽기에는 무난 하리라 생각을 한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가장 널리 읽힌 서적을 세개만 더 꼽자면 <성학십도와 퇴계철학의 구조>(서울대학출판부, 2001), <퇴계선집>(현암사, 1982),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 2003)이다. 특히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기대승과 이황이 주고 받은 편지로 이 글들은 아직도 주옥같은 문장으로 평가를 받고 있어서 꼭 보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도서이다. 또한 문화관광부 우수 교양 도서로 선정되어 있는 도서이다. 아울러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100안에 퇴계선집이 들어있다. 읽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동아일보에서 난 기사를 그대로 옮겨본다. 


 

 

 

 

 

 

 

(2007. 4. 6. 경향신문) 퇴계 이황- 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상)

퇴계 이황 당대에 세워진 도산서원은 퇴계의 학문의 산실이자 조선 성리학의 고향이다. 오른쪽 사진은 퇴계 선생 묘소. /사진작가 황헌만 
 


공자가 창시하고 맹자가 확대하여 동양의 정통학문으로 발전된 유학, 이름하여 수사학(洙泗學)이라 일컬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사상과 학설이 첨가되며 발전도 했으나 때로는 침체에 빠지기도 했다. 마침내 송나라에 이르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와 끝내는 성리학이라는 철학사상으로 자리잡았다. 고려 말엽에 중국에서 전래된 성리학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의 학문적 업적이 더해지면서 조선왕조로 승계되었다.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조선, 성리학을 국가적 이념으로 삼아 정치와 학문의 기조로 여기면서 통치원리로 정착시켰다. 전국의 모든 고을에 향교를 세워 공자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짓고, 유학을 강(講)하는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세워 선비들을 양성해냈다. 그야말로 유교천국의 나라가 세워진 셈이다.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경상도 예안의 온계리에서 태어나고, 중종 31년인 1536년에 강원 강릉의 북평촌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양대 산맥을 줄기로 하여 참으로 혁혁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이른바 영남학파는 퇴계를 존숭하는 학파로, 기호학파는 율곡의 학통을 이으면서 조선 성리학의 두 큰 학맥을 형성하였다.

퇴계는 태어난 다음 해인 6월에 부친을 잃었으니 돌도 지나지 않아 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 박씨부인에게서 가정교육을, 숙부 송재 이우(李●)공으로부터 글을 배우며 학문의 기초는 모두 닦을 수 있었다. 12세에 숙부에게서 ‘논어’를 배웠다는 기록으로 보면 10세 전후에 벌써 학문이 크게 성취되었음을 알게 된다. 20세에 ‘주역’에 몰두하여 밥 먹고 잠자는 일까지 잊을 정도였다는 연보의 기록으로 보아도, 약관에 학문이 익었음을 알게 해준다. 28세에 진사가 되고 32세에야 어머니와 형의 강권으로 과거에 응시하였다. 34세에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가 시작되었다. 급제 직후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편찮으신 어머니를 뵈려고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왔으니 37세에 끝내 어머니가 타계하고 말았다. 39세에는 옥당벼슬에 오르니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받았다.

학자로서 벼슬살이도 살았던 퇴계는 자신이 해야 할 본령이 학문에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언제나 ‘난진이퇴(難進易退)’였다. 벼슬에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벼슬에서 물러나는 일은 쉽게 여겼다는 뜻이다. 마음이 항상 학문연구와 산림(山林)에 있었으나 선비로서 벼슬을 철저히 단념할 수가 없어 임금의 부름에 마지못해 응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퇴계는 43세 때 성균관 사성(司成)에 오르는데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오면서부터 이미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46세 때에 장인상을 당해 하향한 뒤 관직에서 해임되고는 고향에 은거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46세 이후부터는 벼슬을 받아도 나가는 경우보다는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50세부터 오늘의 도산서원 터에 하나씩 집을 지으면서 은거생활의 기반을 마련했으니 최초에 지은 집이 퇴계라는 개울의 서쪽에 있는 ‘한서암(寒棲菴)’이었다. 그 무렵 좌윤(左尹)벼슬에 있던 형인 이해(李瀣)가 억울하게 유배가다가 도중에 세상을 떠나자 벼슬할 생각은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

▲1558년 율곡과의 만남

나아가기를 그렇게 싫어했건만 조정에서 벼슬은 계속 내려졌다. 53세에는 대사성, 54세에는 형조참의, 56세에는 홍문관 부제학, 58세에는 공조참판, 66세에는 공조판서에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해서 내리기도 하였다. 69세에도 의정부 우찬성이라는 정승 다음의 벼슬을 내렸으나 출사하지 않고 상소를 올려 사직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대략의 벼슬살이 경력이다. 퇴계 연보를 보면, 50세의 2월에 처음으로 퇴계의 서쪽에 집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은거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의 선배인 농암 이현보를 찾아가 시를 짓고 함께 즐기던 생활의 기록이 있고, 이 무렵에 지은 시 한편은 바로 그 무렵 자신의 심경을 제대로 읊고 있다. 제목이 ‘퇴계(退溪)’라는 시다.

몸이 물러나오니 내 마음이야 편안하나                  身退安愚分
학문이 후퇴될까 늘그막이 걱정일세                      學退憂暮境       
시내 위에 처음으로 살 곳을 정하고보니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가에서 날마다 반성할 일이로세               臨流日有省


50세의 노숙한 학자 퇴계의 심경이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벼슬에서 물러나 경치 좋은 시냇가에 살 곳을 정해놓으니 몸이야 무척 편안하지만, 행여 학문연구에 등한할까 걱정이 많음을 토로하고 있다. 공자가 개울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면서, “가는 것이 저것들과 같구나”라고 탄식했다는 ‘논어’의 글귀가 있다. 당한 그 순간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경계의 뜻이어서, 퇴계도 흐르는 물가에 이르고 보니 허송세월해서는 안된다는 반성의 마음이 앞선다는 생각을 읊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해인 51세에 계상서당(溪上書堂)에 생활하면서 그 무렵 학자들이 글을 물으려고 찾아오는 수효가 늘어나자 도산서당을 영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던 어느날 조선의 천재로 조야에 이름을 날리던 젊은 학자 율곡 이이가 도산으로 퇴계선생을 찾아뵙는다. 퇴계와 율곡의 참으로 역사적인 만남이다. ‘퇴계집’에는 기록이 없으나 ‘율곡집’에는 그들의 만남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율곡의 연보 23세 조항에 나와 있다. ‘봄에 예안의 도산으로 퇴계 이황선생을 찾아뵙다’라는 대목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해는 율곡의 나이 23세이고 퇴계는 58세의 노숙한 당대의 대학자였다. 1558년의 봄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흠모하며 뵙고 싶던 퇴계,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도산으로 향했다. 그래서 ‘마침내 찾아뵙다’라는 표현을 썼으리라. 벼슬에서 물러나 제제다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던 계상서당에 은거하던 퇴계. 근엄한 노학자를 뵙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 율곡은 우선 시 한수를 올려 바친다.

시내는 공자 마을 시내에서 갈려나왔고                      溪分洙泗派
산봉우리는 주자 살던 무이산처럼 솟았네                   峯秀武夷山
생활하는 살림이야 경서가 천권인데                           活計經千卷
살림집이야 초옥 몇 칸이로다                                     行藏屋數間
품은 마음이야 구름 갠 달처럼 열렸고                         襟懷開霽月
점잖은 말씀과 웃음 미친 물결도 그치게 하네              談笑止狂瀾  
어린 제자는 도를 묻고 구하려 함이지                         小子求聞道
반나절인들 허비하려고 찾아옴 아니올씨다                 非偸半日閒


퇴계라는 시내는 그 근원이 공자가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을 했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에서 흘러나왔고, 산은 주자학이 완성된 무이산의 줄기에서 뻗어 나왔다면, 공자의 학문과 주자의 성리학이 모아진 곳이 바로 퇴계선생이 살고 있는 퇴계라는 시냇가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퇴계선생의 그런 높고 큰 학문을 듣고 배우려고 찾아왔지 그냥 시간을 보내며 놀다가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데에, 퇴계의 높은 학덕과 율곡의 구도정신이 함께 표현되었다고 보인다. 학문이 깊고 시를 잘하던 퇴계가 그냥 시를 받고만 말 것인가. 퇴계도 즉각 율곡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는다.

몸져 누워있어 문을 닫고 봄도 못 봤더니
그대 오시니 가슴 열려 정신이 깨는구려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없음 알겠으니
지난 세월에 몸 경건하게 하지 못함 부끄럽네
잘 자라는 곡식이야 잡초 잘 자람 허락하지 않으며
노니는 티끌은 잘 닦아진 거울 그냥 안두네
지나친 표현의 싯귀야 모름지기 깎아내고
노력하고 공부하며 절로 친하게 지내세

평생 공경스럽고 겸허하게 살았던 노학자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다. 기묘명현이던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외손자로 신사임당의 아들이던 율곡은 세상에서 천재로 소문이 파다하던 젊은이였기에 퇴계도 이미 그의 이름을 기억했나 보다. 그래서 율곡의 수작을 들어보고 올린 시를 읽어보자,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없음을 알겠네”라며 율곡의 재주를 칭찬해주고, 곧바로 23세의 젊은 천재에게 어른으로서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정학(正學)의 공부에 열심히 노력하여 학문이 제대로 익으면, 마치 잘 자라는 곡식에서 피가 자라지 못하듯이 잡된 학문은 끼어들지 못한다고 하여 한때 불교공부에 몰두했던 율곡에게 넌지시 정학에 분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흘러다니는 티끌이 있다면 아무리 거울을 닦고 갈아도 맑게 남아있지 않는 것이니 잡된 생각을 버려야만 맑은 마음이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면서 공자와 주자에 비긴 과장된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겸손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대단한 학자들의 대화였다.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서울대 권장도서 해제

(2005. 6. 18. 동아일보 -  책읽는 대한민국) 퇴계선집(퇴계문선) - 이황
 
유교 전도사로 자처하는 하버드대의 두웨이밍(杜維明) 교수는 항상 한국 지폐를 지니고 다닌다. 1000원권과 5000원권에 있는 퇴계와 율곡의 초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유학자가 화폐에 등장하는 예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하면서 조선이야말로 유학의 이념을 구현한 유일한 나라이며 그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은 유교가 아직 살아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라고 치켜세운다. 이러한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지극한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가 퇴계와 퇴계사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퇴계가 한국 성리학의 주춧돌을 놓은 훌륭한 유학자이고 중국의 성리학자보다 더욱 정밀하게 주자를 연구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흔히 퇴계사상의 핵심은 이기론(理氣論)보다 도덕적 마음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데 있다고 한다. 퇴계는 욕망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된 순수한 영혼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덕적 직관이 가능하며, 성인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일반적인 마음은 기의 드러남이지만 도덕적 정신은 원리 그 자체가 드러난 것’이라는 독창적인 주장이었다. 이러한 퇴계의 주장에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소위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라는 조선시대 최대의 성리학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퇴계는 자신의 학설을 약간 수정하여 ‘행위를 유발하는 일반적인 감성은 기의 드러남이나 양심의 규제를 받고, 도덕적 감성은 이가 드러난 것인데 기에 의해 현실화된다(七情氣發而理乘之 四端理發而氣隨之)’고 한다. 아마도 퇴계는 도덕을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퇴계는 도덕적 감성을 일반적인 감성과 분리하고 이를 기에서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하게 되고 지적인 훈련보다는 감성적 수양(敬)을 중시하게 된다고 한다.

거칠지만 쉽게 요약한다고 해 보았는데 현대의 한국인이 이해하기는 역시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퇴계선생문집’을 단지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적어도 한국의 지성인이라면, 그리고 참된 선비정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학문적 고집은 있지만 제자뻘인 후배와 격의 없이 토론을 벌이고, 고고한 선비이면서 매화가 피었다고 술에 취할 수 있는 인간 퇴계는 그의 글을 읽어야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퇴계 선생의 글을 직접 접할 필요가 있다.  ‘퇴계선생문집’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다 읽기 힘들다. 퇴계의 성리설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학문적 태도를 아울러 접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고봉과 주고받은 서신을 묶은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를, 퇴계의 사상을 두루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퇴계문집’(민족문화추진회)을 권하고 싶다. (허남진 서울대 철학과 교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