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짱꿀라 > 퇴계 이황 - 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下)

(2007. 4. 14. 경향신문)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下)

 

퇴계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퇴계집’을 읽어보며, 그의 학문의 본산인 도산서원 일대를 둘러보고 그가 태어난 마을인 안동 온계리(溫溪里)의 퇴실과 수백 년 동안 누워계시는 묘소를 돌아보고 종손(宗孫)들이 터를 지키며 살아오는 퇴계종택을 둘러보면서, 위대한 학자의 흔적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라는 큰 교훈을 느끼게 했다. 태어난 지 500년이 넘은 학자! 유적지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정돈되어 있었다. 역사를 외면하고 선현들의 업적을 소홀하게 여기는 현대인의 풍속에서, 그 정도로 퇴계유적지가 존재해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후손과 후학들의 노력으로 보아져 고마운 뜻을 전해드리고 싶다.

# 퇴계의 이기철학(理氣哲學)
 


퇴계 학문이 꽃을 피운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고택에 ‘도산서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사진작가 황헌만 

누가 뭐라 해도 퇴계야말로 조선 제일의 성리학자임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의 일급 제자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퇴계의 이기철학에 문제를 제기하며 7년 동안이나 편지를 통해 학술논쟁을 벌인 찬란한 전통이 있고, 까마득한 후배 율곡 이이가 ‘이발(理發)’이라는 두 글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높은 학술논쟁을 벌였지만, 퇴계학단의 끈질긴 변론과 세력의 힘으로 퇴계학설의 비중은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흔들림이 없었다.

퇴계는 천리의 공심(天理之公)에서 나오는 도심(道心)과 인욕의 사심(人慾之私)에서 나오는 인심(人心)으로 구별하여, 사단(四端)은 도심이고 칠정(七情)은 인심으로 여겨 “사단은 이가 발해서 기가 따라주고(四端理發而氣隨之)”, “칠정은 기가 발해서 이가 탄다(七情氣發而理乘之)”라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물론 이러한 논리가 확정되기까지에는 고봉 기대승의 학설이 첨가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율곡 이이는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가 “기가 발해서 이가 탄다”는 말이야 옳지만 ‘이발(理發)’은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분명한 반대를 표했다.

이런 논쟁이 학파의 분열만이 아니라, 당쟁으로 연계되어 그야말로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 지 200년, 다산 정약용은 두 학파의 논쟁을 종식시키는 훌륭한 답안이자, 자신의 철학으로 이기논쟁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냈다. 그의 ‘이발기발변(理發氣發辨)’이라는 짤막한 두 편의 논문은 ‘학자들이 이런 뜻을 살펴 깊이 실천하기’를 염원하면서 논쟁의 종결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퇴계가 말하는 이(理)와 기(氣)는 율곡이 말하는 이와 기와는 뜻이 다르다는 것이다. 퇴계는 ‘전취(專就)’하여 ‘이기’를 사용했고 율곡은 ‘총집(總執)’하여 ‘이기’를 사용했으니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할 수 없이 퇴계는 퇴계대로, 율곡은 율곡대로 ‘이기’를 사용하여 자기대로의 학설을 폈던 것이니, 여기서 시비를 가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다산은 오랫동안 전개되던 두 학자의 시비에 대한 결론을 맺어, 퇴계도 옳고 율곡도 옳다는 윈윈의 멋진 이론을 도출해내기에 이르렀다.

다산은 “퇴계는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기르는 공(功)에 일생동안의 힘을 기울였다(退溪一生用力於治心養性之功)”라고 하여 성리학자임을 분명히 하였다. 성호 이익(李瀷)은 ‘논경장(論更張)’이라는 글에서 ‘대체로 국조 이래 현실정치에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알았던 사람(蓋國朝以來識務之最)’은 바로 율곡 이이였다는 평을 내렸다. 퇴계는 성리학자의 최고봉이고 율곡은 성리학과 함께 통치원리까지 가장 잘 알았던 학자라던 다산과 성호의 평을 오늘의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런 실익 없는 논쟁은 끝나리라 믿어진다.

# 주자학 전파의 최고 공로자



퇴계 선생의 묘비문.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지었다. / 사진작가 황헌만 
퇴계는 충실한 주자학의 계승자였다. 선비라면 의당 학문을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택민(澤民)의 공(功)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니와 형들의 권유에 의해 과거에도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벼슬살이도 했던 퇴계, 그라고 택민의 공을 생각하지 않았으리오마는 허약한 몸으로 언제나 병고에 시달리면서, 그는 충실한 주자의 제자가 되어 ‘치심양성(治心養性)’의 성리학 논리를 후생들에게 가르쳐주는 공(功)도 만만찮은 일이라고 여기고 그런 논리의 개발과 연구에 일생을 바친 학자였음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도산서원 일대를 산책해보면, 퇴계가 얼마나 심신수양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건물 하나, 연못 하나, 자연 경관 하나하나를 설계하고 배치했는지를 알기에 어렵지 않다. 거기에서 퇴계의 이상(理想)이 무엇이었나를 짐작할 수도 있다. ‘수양에 의해 본성을 실현함으로써 도덕적 가치를 충분히 실천하는 인간상’이었다는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동의해도 될 것 같다.

그런 인간상의 실현을 위해 일생동안 가장 힘을 기울인 일이 다름 아닌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길이었다. 경에 살며 이치를 궁구함, 바로 그것에 퇴계는 생을 걸고, 도산서원 일대라는 아름답고 고적한 산천과 강산을 사랑하면서 70 평생의 세월을 보냈다. 도산서원 일대를 수도(修道)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세심한 배려 속에 모든 건물을 퇴계의 뜻대로 조성했다고 한다. 도산서당은 퇴계 생전의 강학(講學)하던 곳이요,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후학들이 맨 위에 상덕사(尙德祠)를 짓고 퇴계의 신주를 모시며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사당까지 합해진 전체의 이름이다.

도산서당의 명칭에서 퇴계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서당은 세 칸인데, ‘완락재(玩樂齋)’라 이름 했다. 주자의 글에서 인용했다. ‘중용’이나 ‘대학’의 오묘한 뜻을 즐기며 완상하겠노라는 글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쪽의 한 칸은 ‘암서헌(巖棲軒)’인데, 이것도 주자의 ‘운곡(雲谷)’이라는 시에서 얻어온 글귀다. 산속에 깃들어 살면서 조그마한 효험이라도 얻겠다는 의미였다. 지금도 덩실하게 서있는 건물의 이름도 모두 거경·궁리를 통한 수양의 길에 도움 되는 내용을 이름으로 삼았다.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가 그러하고, ‘관란헌(觀瀾軒)’이니 ‘농운정사(●雲精舍)’가 모두 그런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었다.

서당의 동쪽에는 연못을 만들어 ‘정우당(淨友塘)’이라 하고, 그 동쪽에 있는 우물에 ‘몽천(蒙泉)’이라 이름하고, 몽천 위쪽의 산기슭에 매화·소나무·대나무·국화를 심어 놓고 ‘절우사(節友社)’라 했으며, 사립문은 ‘유정문(幽貞門)’ 동네 어귀는 ‘곡구암(谷口巖)’이라 했다. 또 여기저기에 대(臺)를 만들어 ‘천연대(天然臺)’,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라 하고, 시내의 한 줄기는 ‘탁영담(濯纓潭)’이라, 그 가운데 있는 편편한 바위는 ‘반타석(盤陀石)’이라 이름 했으니, 모두가 수도·수양과 관계없는 것이 없고, 도학적 함의를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 수양의 도장 도산서당

1561년은 퇴계가 회갑을 맞은 해다. 모든 세상의 욕심은 다 버리고 오로지 학문연구, 거경·궁리에 생애를 바치기로 마음먹고, 도산서당 일원을 수양의 도장으로 꾸미고 7언 절구 18수의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짓고 겸하여 ‘도산기(陶山記)’라는 산문을 지어 자신의 입장을 넉넉하게 밝혔다. 품격 높은 시에 격조 높은 산문은 퇴계의 학문과 인품을 옴소롬히 보여주고 있다. ‘반타석(盤陀石)’이라는 시는 정말로 좋다.

도도히 흐르는 탁류에 살짝 숨더니                                                黃濁滔滔便隱形
물결 가라앉자 분명하게 형체 보이네                                             安流帖帖始分明
저처럼 치고받는 급물살 속에서도                                                 可憐如許奔衝裏  
천고의 편편한 바위는 구르지 않다니 참으로 사랑스럽네                 千古盤陀不轉傾

45세에 맞은 을사사화(乙巳士禍), 그런 어려운 난리 속에서도 학문을 향한 염원을 못 버리고 은거하면서 거경·궁리만 일삼았던 퇴계. 마치 개울 가운데의 편편한 바위가, 홍수가 질 때는 몸을 숨겼다가도 끝내 구르지 않다가 물이 가라앉아 개울에 평화가 오면 다시 분명한 모습으로 드러나듯, 숨어살면서도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살았던 자신의 생애를 읊은 시가 바로 그런 시가 아닐까. 지금도 반타석은 개울 가운데에 의젓이 버티고 있으며, 500년 동안 퇴계학문이 버티고 숨 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산기’도 세상이 알아주는 명문이다. 산림(山林)에 즐거움을 느끼고 살아가는 은자, 그러면서 그 즐거움은 도의를 즐기고 심성(心性)을 기르는 즐거움이었으니 역시 성리학자다운 글이었다.

선조 3년, 퇴계 나이 70세인 1570년의 12월에 계상서당에서 고요히 퇴계는 눈을 감았다. 23세의 청년으로 58세의 노선생을 찾아뵈었던 율곡 이이, 퇴계의 부음을 듣고 통곡하면서 만사를 짓고 제문을 올려 바쳤다. 그는 퇴계를 이렇게 평했다. “선생은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셨다. 정암 조광조 이후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재조(才調)와 기국(器局)은 혹 정암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의리를 탐구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한데 이르러서는 정암 또한 미칠 수 없는 정도였다”(‘퇴계유사’)라고 했다. 학자와 시인으로 유명하고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朴淳)은 “정학(正學)을 천명하고 후생을 인도해주어 공자·맹자·정자·주자의 도가 우리 조선에서 찬란하게 다시 밝혀지게 했던 분은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퇴계묘지명’)라는 평은 가장 고전적인 퇴계에 대한 찬양으로 정론(正論)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박석무|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책에 관한 정보는 저번주에 소개를 했다.  

참고 사이트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109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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