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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학적 색깔인가_2005. 7. 9

소위 칼빈주의와 알마니안주의가 혼용되어있다.(오히려 칼빈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알마니안주의로 불려질 것이다.) 복음과 윤리의식은 청교도적이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에 있어 개인의 영향력을 인정함에 있어서는 소위 알마니안적 사고다. 특이점은 전 세대의 역사는 칼빈주의와 알마니안주의의 양극단으로 나뉘어져 대립되는 양상이 두드러졌는데 청교도를 비롯한 칼빈주의자들은 큰 부흥을 경험치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들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라 생각했기에 비신자들의 구원문제를 하나님의 행할 일로 남겨두는 다소의 경향 때문인 것 같다. 반면, 피니나 웨슬리는 큰 부흥을 체험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피니의 인간적인 능력을 인정하는 것을 크게 반박하고 그의 부흥을 인위적인 것이라 비난한다. 한편, 조지 휘트필드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고 하는데 그는 위대한 부흥을 체험했다. 무엇이 그를 부흥케 했을까? 과연, 그는 일반적인 칼빈주의자였을까? 나는 휘트필드를 연구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부흥은 칼빈주의에도 알마니안주의에도 있지 않다. 부흥은 주의를 뛰어넘어있다. 이는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해야할 점이다. 다소의 신학적 흠이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쓰셨다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능력이고 칼빈주의가 아닐까.

#교리적 이해차이로 인한 교회의 분리는 언뜻 보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 분리, 분열을 조장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는 마치 사단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측면에서 교회의 분열은 뜻하심이 아닐지라도 분열되지 않음이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할 때 교회의 분리가 오히려 더 유익한 무엇인가가 있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분리마저도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성공적인 사역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의 분열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피니는 보통 그의 저서에서 설교는 이해하기 쉽고 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의 책들이 어려운 것은 출판사나 번역자들이 지나치게 신학적인 성격을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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