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으로 차츰 안정되면서 문화적 갈증이 시작되던 1980년대부터 한국 추리소설계는 상승기류를 타기 시작했다. 이 무렵 한국 추리소설 발전을 가져오는 두 가지 계기가 마련되는데, 하나는 한국 추리작가협회의 창설이며, 다른 하나는 신인들을 발굴한 현상공모전이다.

학자 출신 애호가들의 모임에 가까웠던 미스터리 클럽은 차츰 문호를 개방해 작가도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으며, 추리소설이 국내에서 차츰 인기를 얻게 되자 아마추어적인 모임으로는 한국 추리문학의 발전을 바라볼 수 없다고 판단, 미스터리 클럽을 발전적으로 해체한 후 1983년 2월 한국 추리작가협회가 창설되었다. 한국 추리작가협회는 추리문학 연구와 적극적 창작 활동을 통해 한국 추리문학의 질적 향상과 추리작가의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으로, 미스터리 클럽의 이가형 회장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한국 추리작가협회는 1984년 처음으로 [한국 우수 추리단편 모음집]을 발간한 이후 지금까지 해마다 추리소설 단편집을 발간하고 있으며, 1985년에는 추리 문학상을 제정해 대상과 신인상(1993년부터 신예상으로 변경)을 시상하고 있다. 수상 첫해인 1985년에는 대상에 현재훈의 [절벽], 신인상은 정규웅의 [그림자 놀이]가 차지했다. 이후 김성종, 이상우, 노원, 이원두, 한대희, 강형원, 유우제, 이수광, 이경재, 백휴, 김용상 등이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신인상 수상자로는 정현웅, 김상헌, 안광수, 장세연, 이태영, 강종필, 장근양, 황세연, 최철영, 최상규, 최혁곤 등이 있다.

또한 올림픽과 프로스포츠 등으로 성장해 오던 스포츠신문들은 일반 매체에서 거의 다루지 않던 추리소설들을 독자들에게 꾸준히 소개했다. 국내 최초의 스포츠신문인 <일간 스포츠>는 1970년대부터 김성종, 노원 등의 추리소설을 연재했으며, 후발 주자인 <스포츠 서울>은 추리소설 연재뿐만 아니라 창간 이듬해인 1986년부터 추리소설 신춘문예를 통해 신진 작가를 배출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창간한 <스포츠 투데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한국 추리작가협회의 이상우 회장은 여러 스포츠 신문의 대표 등 중진으로 활동하면서 후진 발굴 및 양성에 힘썼다. 류성희, 서미애, 정석화, 김상윤, 정가일, 이은 등이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들이다.

김성종, 이상우 등의 작품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자 명지사, 현대추리사, 추리문학사, 남도출판사 등 추리소설을 전문적으로 내는 출판사들도 등장하였으며 단행본뿐만 아니라 <계긴 추리문학>(1988년 창간), <미스터리 매거진>(1994년 창간) 등 추리 전문잡지가 창간될 정도였다.

1990년대 초반에는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다른 하나는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대형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들은 각각 역사 추리소설과 '애국적' 스릴러의 시발점이 된다. 공교롭게도 이들 두 작품이 히트한 해는 1993년으로 마침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독자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을 고비로 추리소설 시장은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IMF 등으로 위축된 국내 출판계에서 창작 추리소설은 설 자리가 줄어들고 말았다. 우선 장편 공모전이 사라졌으며 2000년대 접어들면서는 스포츠신문의 단편 공모마저 폐지되었다(현재는 유일한 추리문학 전문잡지인 <계간 미스터리>에서 작품을 공모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양대 PC 통신망(천리안/하이텔)을 작품의 발표 매체로 삼는 젊은 작가들이 있었지만 인터넷 확산을 통한 발표 지면 분산 등으로 과거와 같은 폭발적 인기를 끄는 작품은 사라졌다. 또한 국내 영화 시장의 확대, 인터넷의 대중화로 인해 추리소설은 차츰 매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고급 문화를 지향하는 우리나라에서 추리소설은 통속 소설의 위치를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탓에 국내 창작 추리소설이 1년에 채 열 권도 나오지 않는 암흑기를 맞이하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 사이 희망적인 조짐이 보이고 있다. 적어도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한 독자충이 늘어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 2006-2007년 사이 약 350여 종(재간 및 단편집 포함)의 추리소설이 나온 것에서 볼 수 있듯 독자와 출판계는 다시 추리소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과연 최근의 추리소설 출간 붐이 일과성이 될 것인지 아니면 단단히 뿌리를 내릴 것인지 조금 더 기다려 보아야 판단할 수 있겠지만, 잠재적인 독자의 수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추리소설의 미래가 장밋빛깔이라고 장담하긴 어렵다. 그 2년간 출간된 작품 중, 국내 창작물은 10%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데다가 추리소설에 매진하는 작가의 수도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외국 작품들과의 경쟁 및 눈이 높아진 독자들을 만족시켜야만 하는 과제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국 추리 문학계의 약점이라면, 어떤 작가나 작품이 성공을 거두더라도 그것이 곧 추리문학계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미국의 '하드보일드'나 일본의 '사회파' 혹은 '신본격' 등과 같은 자체적인 새로운 형태 창조가 없었다는 점이다.

추리소설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추리소설에 대한 일반 독자나 문인 자신의 선입견이 달라져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훈은 우리나라에서 그 동안 추리소설이 발전하지 못했던 까닭은 '순수문학 작품이 아니면 문학이 아니다'는 것이 통념처럼 되어 작가들이 의식적으로 추리소설을 기피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추리기법'을 사용하는 작가는 얼마든지 있지만 추리작가 이외에 '추리소설'을 쓴다고 밝히는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21세기 한국 추리소설 시장의 특징이라면 '지적'(知的) 추리소설의 표방이다. 속물적인 지적 허영심의 발로일까. 한때 순수한 오락물 내지는 범죄의 시발점으로까지 천대를 받았던 추리소설은 갑작스럽게 지성, 예술성을 간판으로 내걸고 뭔가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를 유혹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이중성이 한국 추리소설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1945년 이후 약 10년 단위로 반짝 활기를 보이곤 했지만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국내 추리소설 시장은 21세기에 들어와 미약하지만 소생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 추리소설이 과거의 크지 않았던 영광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아직 갈 길은 멀고 험난하지만 젊은 작가들의 넘치는 의욕, 그것이 기폭제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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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1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숨통이 튀일까 싶습니다. 통념에 대한 어떤 탈출구를 갈구했던 모양입니다. '영원한 제국' 등이 역사추리소설이군요.

카스피 2009-09-18 21:45   좋아요 0 | URL
역사 추리일수도 있지만 보통 팩션으로 분리하지요^^

무해한모리군 2009-09-18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아 제가 읽어본 것도 있군요!! 그것도 여러개..
그러나 전 뭔가 멋진 케릭터가 나오는 연작을 원해요..
더 욕심을 내자면 우리사회의 특징이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놈으로요~
점점더 가벼운 읽을거리가 대세니 어렵겠지요..

카스피 2009-09-18 21:44   좋아요 0 | URL
국내 추리 소설중 그나마 캐릭터가 연작으로 나오는 것은 김성종의 형사 오병호 시리즈나 단편인 이상우의 추경감이 있지만 그닥 인상에 남는 캐릭터는 아닙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9-1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우도 정조 독살설을 다룬 추리물이 있던 것 같은데 여하튼 이인화가 터놓은 길에 여러 사람이 함께 가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