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미스터리 하우스에 실린 글로 저자는 '백휴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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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한국 추리문학의 탈출구는 없는가?
백휴(추리소설가)
‘열악한 한국 추리문학’이라는 문구는 일견 자명해 보이지만 ‘추리문학’이라는 개념의 포괄성과 애매성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한 문제의 초점이 흐려질 소지가 있다.
추리소설(推理小說)이라는 개념은 일본인들이 만든 것이다. 원래 탐정소설(探偵小說)이라고 부르던 것을 국가에서 정한 기초한자에서 정(偵)자가 빠지자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조어(造語)(이것은 포(Poe)의 ‘ratiocination’ 개념과 동아시아적 전통에 있어서 심문을 추핵(推覈)이라고 하던 것을 염두에 둔 조어인 듯하다)이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추리소설’이라는 용어를 함부로 사용할 때, 추리문학과 관련된 우리의 사고는 허점 투성이가 된다.
가령, 이렇게 물어보자. ‘우리에겐 왜 애거서 크리스티 같은 훌륭한 추리작가가 없는가?’
이것은 추리소설 독자로부터 흔히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이지만, 탐정소설(Detective Novel)(나는 여기서 탐정소설을 ‘수수께끼 풀이식의 추리소설’이라는 한정된 의미로 사용한다)이 영미(英美)적 특성을 가진다는 점을 망각하지 않고는 생겨날 수 없는 물음이기도 하다.
탐정소설은 그 기원과 역사적인 전개에 있어서 본디 영미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영국에서 ‘범죄를 무관심적으로 즐기려는 욕구’와 당대의 패러다임(고고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탐정소설은 철학자 퍼어스(Peirce)의 가추법(假推法)을 도구 - 징후(symptom)로부터 기호(sign)으로 나아간다는 점 - 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같은 패러다임에 속한다)이 결합하여 산출된 것이다.
추리소설의 역사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애거서 크리스티 같은 추리작가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여기서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에 의해 양식화된 탐정소설이 국내에는 왜 수입되어 꽃을 피우지 못하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범죄나 범죄자’를 대하는 우리의 보수적인 전통에 빗대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추리소설은 150여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국가마다 다양한 용어로 지칭되어 왔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영국이 과거에 주로 탐정소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프랑스에서는 경찰소설(Roman Policier)로, 그리고 최근의 국제적인 추세는 범죄소설(Crime Novel)이라는 용어를 가장 선호하고 있다.
과연, 한국에서 ‘추리소설’대신에 ‘범죄소설’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날이 올 수 있을까?(우리는 야구에서 포볼(four ball)이 일본식 용어라 하여 베이스 온 볼스(base on balls)로 바꿔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형식적인 문제 제기 같지만 그 함의(含意)는 훨씬 심원한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서 범인은 ‘사회에서 소외된’ 집단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범인은 존경받는 사회의 지도층이거나 부유한 상류층 사람, 즉 정치가, 변호사, 의사 같은 부류들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여기에는 ‘타자를 자기에게 동일화하려는’(범인을 반드시 찾아 처벌한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보면 자기동일화의 문제이다) 그리스 이래 서구의 오랜 철학적인 전통이 스며 있다. 그러나 더 관심 있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범죄성을 인간의 내부에서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이다.
거칠게 말해서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는 그것이 없는 듯이 보인다. 싸잡아 얘기하면 공맹(孔孟)의 사상적 전통 위에서 배태된 성선설(性善說)과 성인학(聖人學)은 누구든 인간의 심부에는 ‘잔혹한 범죄성’이 있다는 가설을 부정하거나 떨쳐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우리 추리소설의 범죄자가 흔히 이미 사회에서 추방된 존재, 즉 깡패나 조직폭력배로 등장하는 이유(특히 가족 내의 범죄는 독자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범죄는 눈을 돌리고 귀를 막아야 할 혐오의 대상이지 연구나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는 평화로워야 할 가정은 물론이고 특정 사회집단 내(종교계, 경찰과 같은 공권력 등등)로 들어올 여지가 없다(영화 [투캅스]같은 예외가 있었지만 여전히 편견 또는 문화적 장벽이 존재한다).
범죄에 대한 이러한 무조건적인 거부의 태도는 문학을 오락이나 쾌락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적 문단의 문학 엄숙주의와 결합하여 추리소설을 철저히 외면하는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이 일정 부분 제거되지 않는 한 한국의 추리소설이 발전해 나가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또 한가지 논의의 주제와 관련하여 반드시 덧붙여야 할 점은 ‘포르노’라는 장르가 독립하지 못함으로써 대중문학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는 섹스 남용의 폐해이다. 한국의 추리소설에 대하여 ‘추리소설인가 포르노인가?’라는 비난의 글이 통신에 올라온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작가 개인의 책임이 크지만, 모든 것이 자본과 상품이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후기 산업사회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외아들을 잃은 박완서의 ‘슬픔’마저 상품화되는 마당에 ‘성상품화’에 대한 피상적인 대응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 것인지 나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성상품화’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의 사회운동은 가상하지만. 그것은 마치 자동차를 없애지 않고 교통사고를 줄이려는 노력 - 우리가 과연 성상품화를 자본주의 작동 체계에서 따로 떼낼 수 있는가 - 인 것 같아 한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여전히 우리 의식을 소박했던 과거에 매어 두려는 사회의 위선적인 의식 또한 한몫(위선의식이 섹스 남용을 조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섹스 남용을 도덕적인 접근법으로 파악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다른 혼돈까지도 해결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을 하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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