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고장원'님 글입니다.
http://www.pyroshot.pe.kr/sf/arc/980423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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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과학소설은 더 이상 우주탐사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
How SF lost the Space Race
글쓴이: Keith Brooke (초고는1995년, 수정판은1997년)
우리말 옮긴이: 고 장원
자료원: Infinity Plus(운영자: Keith Brooke)
* 읽기 전에 (글쓴이의 서문)
이 글은 원래 영국의 과학소설 잡지 [저 너머 Beyond]의 창간호를 위해 씌여진 것이다. (이 잡지는 애석하게도 3호까지만 나오고는 휴간되어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이 글을 스티브 백스터 Steve Baxter, 피터 해밀튼 Peter Hamilton 등과 함께 다시 검토하면서 약간 손질을 가했다. 이 글은 95년 7월 '윈콘 Wincon'의 논쟁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던 내 입장을 글로 밝힌 것이다. 나는 늘 진작 했어야 할 말을 삼일쯤 뒤에나 가서 뒷북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대신 나는 내 입장을 글로 썼다. 이 글은 그 당시 과학소설에 대해 내가 느꼈던 바를 담은 것이자 지금도 변치않는 내 입장이다.
* 본문
나는 십대 시절 과학소설에 대해 지녔던 강박관념 때문에 이 문학 장르에 일종의 애증을 느낀다. 나는 우수한 과학소설이 보여주는 상상력의 스케치를 사랑하며 과학소설이 독자와 작가로 하여금 일정한 범위의 전망에서 도출되는 사상들과 문제점들을 논의하게 하는 방식을 사랑한다. 반면 나는 공식화되고 정형화된 수많은 안전빵 작품들을 증오한다.
우리의 인터넷 홈페이지 '인피니티 플러스 infinity plus'를 일종의 성명서로 볼 수 있다면 이렇게 제목을 지으면 어떨까. "왜 과학소설은 더 이상 우주탐사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 How Science Fiction lost the Space Race"
나는 작년에 모 SF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세명의 다른 작가들이 함께 자리를 했다. 화제는 우주탐험의 역사였다. 무엇을 이뤄냈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지에 관해서 논의를 나누었다. 이때 제기된 주장 하나는 지구 궤도 너머로 멀리 벗어나는 우주 프로그램은 거의 실패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또한 몇몇 유명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과학소설도 마찬가지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과학소설은 추진력을 영화에서 다시 진짜 우주로 옮겨놓을 긍정적이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 주장에 따르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대신 이십년 전에 우주에 대한 관심의 퇴조는 외계우주에서 내부 우주로 관심이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다. 즉 우리는 테크놀로지와 낙관주의에서 이 땅에 뿌리깊은 염세주의로 옮겨갔던것이다. 과학소설은 은하계 전체에 두루 걸친 미래사 시리즈가 인기를 끌던 황금기Golden Age(하인라인과 아시모프, 클라크 등 SF의 3대 거장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1950년대 전후의 미국 과학소설계를 일컫는 용어; 역자주)로부터 보다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뉴 웨이브 New Wave를 거쳐 사이버 펑크 cyberpunk 시대를 관통해왔다.
나는 솔직히 이러한 논쟁에서 겉도는 느낌이었다. 나 이외의 다른 세 작가들은 내 아버지 세대였다. 그들이 아폴로 11호와 머큐리Mercury 그리고 제미니 Gemini 계획을 언급하는 것은 그들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1961년에 케네디의 우주탐사와 관련한 연설, 최초의 달 유인탐사 계획, 달착륙, 그리고 그 이후로는 미국과 미국의 정치체제가 고무될만한 새로운 탐사 목표를 설정하는데 실패한 이야기 등등. 이 세 작가들은 이 모든 것을 겪으며 살아왔다. 모든 영욕이 뉴스 안에 들어 있었고 그것들은 현대의 사건들이었다. 이 세 작가들은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역사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우주가 실제로 중요한 관심사로 여겨지던 시대로 되돌아가 살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아폴로 이후 세대에 속한다. 나는 미소간의 우주 경쟁이 최절정에 달할 무렵 태어났다. 마지막 아폴로호가 지구로 귀환했을 때는 여섯살이었다. 나는 우주가 이미 정복되어버린 시대에, 즉 인류가 달에 갔다온 시대에 성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주는 경이로운 광채를 잃어버렸고 그저 실제 세계의 확장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전 세대의 과학소설 작가들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그들은 당신에게 전파 송수신기와 배터리가 장착된 '스푸트닉' Sputnik이라는 이름의 쇠덩어리 공이 지구 궤도를 돌게 되었다는 뉴스를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얘기해줄 것이다. 그들은 미소 간에 치열한 우주탐험 경쟁이 벌어지던 오십년대 말과 육십년대의 흥분을 말해줄 것이다. 당시는 어느 쪽이 한발 더 앞서나갈지 시시각각으로 예상이 달라지던 때였고 뭐든 가능할 것만 같던 시대였다.
나는 스페이스 셔틀 Space Shuttle을 보며 자랐다. 스페이스 셔틀은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계획되었지만 여전히 (연료가 다시 채우면 되는) 100% 재사용과는 거리가 있다. 경제성을 표방한 이 우주선은 우주 정거장에 입항할 예정이었지만 우주 정거장 자체가 아직 건립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데다 효율적인 주엔진과 혁신적인 열저항 외피를 개발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스페이스 셔틀 개발은 계속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물론 초창기 개발계획들도 또한 한결같이 일정이 연기되고 때로는 사고를 겪기도 했지만 --- 아폴로 1호의 화재 사건과 아폴로 13호의 불운을 생각해보라. --- 그것은 위대한 모험이자 영웅적인 행위였다.
때때로 셔틀이 무척 멋져보이면서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 웬지 우스꽝스러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우주여행이 조만간 일상사가 되리라는 초기의 야심찬 선언들, 최초로 우주로 관광여행을 떠나리라던 명사들의 발언, 이와 상반되게 누적되는 실패와 연기,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투입된 어마어마한 비용. 우주여행은 더 이상 영웅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렇게 되길 기대했지만 현실은 계속 예외를 만들어냈고 일정은 미뤄지기만 했다.
이러한 희극은 마침내 86년 1월 비극으로 바뀌어버린다. 불운한 챌린저 계획 Challenger mission은 우주의 흥미로운 잠재력을 증명하려는 시도로 비중있게 추진되었다. 우리는 이 비행을 통해 보통사람도 저 높은 곳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게 되기를 바랐다. 교사 크리스타 매컬리피 Christa McAuliffe는 미국 전역의 초등학교에 직접 통신수업을 할 예정이었다. (그 챌린저호의 폭발참사로 인해) 잠시 동안 우주는 그간 잃어버렸던 경이감을 다소 되찾았다. 그리고는 모든 게 잘못 돌아가기 시작했다. 2년 반이 지나 셔틀 계획이 다시 재개되었지만 흥미로웠던 원래의 아이템들은 옆으로 밀려났다. 이는 스타 워즈 계획Star Wars programme (미국의 전략방위 구상)이 그 자리의 일부를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챌린저호 참사가 일어난지 다섯달 후에 나는 나의 첫 단편을 썼다. 그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고 다만 그 타이밍이 우연히 일치했을 뿐이다. 내가 하려 한 모든 일은 내가 집필하기 시작한 환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전의 다른 면은 당시 지구의 여기서 일어난 일이다. 내가 앞서 언급한 세 작가들은 세상이 2차세계대전의 폐허에서 복구되고 있을 무렵에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거의 안되는 일이 없어 보이던 시대에 성장했다. 테크놀로지의 경이로부터 물병자리 시대와 사랑의 힘을 꿰뚫면서 말이다. 나는 자라면서 펑크 문화와 미식축구 열풍, 경기불황 등을 겪었다. 경기침체는 내가 성인이 된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현재는 아프리카의 계속되는 기근에서 예견된 절박한 환경문제에 대한 자각이 사회적으로 무르익고 있는 중이다. 만약 사랑을 중히 여겼던 육십년대의 히피들이라면 세상을 바꿔 놓았을 것이다. 구십년대의 히피격인 뉴 에이지 여행자들 New Age Travellers은 사랑이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사랑에게 기회를 한번 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 동안의 이런 부침과 변화를 고려한다면 과학소설 작가들이 요즘에는 전보다 더 냉소적이 되고 진보의 북소리를 울리는데 심드렁해진 현상을 이상하게 여길 까닭이 있겠는가?
이제는 냉소주의의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조차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의 작가들이 인류의 태양계 진출을 통한 진보라는 주제를 아무리 새롭게 손보아 내놓은들 어느 누가 그 내용을 참신하다고 보겠는가?
집필 형식으로 보건대 과학소설은 일종의 게토(유태인 거주구역, 여기서는 특정 애호가들만의 폐쇄구역을 의미함;역자주)다. 집필형식을 띤 것은 어떤 것이나 게토같은 측면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점에 대해 생각해보라. "업 리프트 Uplift"시리즈의 단편 한두개는 이미 그러한 기본설정에 공감하고 있는 수천의 독자들에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장편은 좀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대부분의 과학소설은 의견을 예리하게 다듬는 도구가 아니라 이미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단순한 거울일 뿐이다.
내가 너무 지나치게 염세적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살아온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일까? 긍정적인 시각의 과학소설들이 범람한다고 해서 다시 우주탐사 경쟁에 불이 붙으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내 입장은 다소 애매모호하다. 다른 이들은 이를 두고 위선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나는 과학소설이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고 보지 않으면서도, 나는 늘 힘있는 문학이 사람들을 움직여야 하고 그들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상반된 주장을 해왔다. 내가 보기에 그처럼 강력한 문학이란 바로 과학소설이다. 그것은 우리의 선입견을 뛰어넘도록 해주는 새로운 경로 일체를 제공해준다. 과학소설이 특정분야의 소수 중요인물들만 자극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그래서도 안되지만 말이다.
나는 최근 미항공 우주국 NASA에서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던 직원들이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심리학 연구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단일 프로젝트에만 25년간 매달려왔지만 일한 결과에 대한 피드백은 전무하거나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항상 예산상의 위협이 그들의 머리 주변을 맴돈다. 그래서 그들의 과업이 종료되고 나면 그들은 별안간 남은 여생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보고서는 특별한 메달이나 표창장 또는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하는 행위조차 그러한 상황의 사람들에게는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제언한다. 우리는 과학자들, 특히 우주과학자들이 종종 열성적인 과학소설 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 과학소설의 긍정주의 학파라면 --- 과학소설이 얼마나 훌륭할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서 --- 이 무력해진 사람들에게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재확신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내가 회의적인 동시에 희망을 갖다니 말이 안된다고 여길 것이다. 아마 나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할 게다. 하지만 두가지 모순되는 관점을 함께 움켜쥘 수 있는 것이 또한 작가라는 직업 아닌가. 작가라는 직업은 특히 과학소설 작가라는 직업은 아이디어들을 개발해서 그 아이디어들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탐구하고 그 효과가 얼마나 훌륭한지 또는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과학소설 작가는 선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 직업이다.
(이 글에서) 처음에 나는 회의주의를 지지했다. 그리고는 낙관주의, 이어서 현실주의의 편을 들었고 이밖에 내가 글을 쓰는데 양식이 될만한 것이라면 그 어떤 사상에 대해서도 옹호를 했다. 근본적으로 볼 때, 우주탐사나 그 밖의 어떤 것을 촉진시키는 행위는 과학소설 본연의 과업이 분명히 아니다. 과학소설의 주목적은 훌륭한 주류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경험을 모든 범위에 걸쳐 탐구하는 것이다. 선악, 희망, 슬픔, 기쁨 등...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해 말이다. 과학소설은 아주 다양한 관점들을 무수히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장르의 문학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다.
과학소설은 좁은 범위의 관점들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탐구의 문학이다. 그것은 선전/선동 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논쟁의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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