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모프가 바라본 종교와 과학소설의 관계
Isaac Asimov: Religion and Science Fiction
글쓴이: 아이작 아시모프
우리말 옮긴이: 고장원
원문 작성년도: 1984년
자료원: 잡지 [Asimov's Science Fiction]의 인터넷 버전에서 발췌
[Asimov's Science Fiction]의 1983년 11월호 커버 스토리는 뛰어난 작가 마이클 비숍 Michael Bishop의 <가말리엘 십자가의 복음 The Gospel According to Gamaliel Crucis>이었다. 이 단편은 민감한 주제인, 구세주의 도래, 다시 말해서 결과적으로 예수의 두번째 강림을 다루었다.
이 작품이 과학소설로 더욱 힘을 발휘하게 한 요인은 그 구세주가 외계인이라는 설정이다. 그 구세주는 우리 눈에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데 그 생김새가 거대한 사마귀나 다름없는 탓이다. 이러한 설정은 내가 보기에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우주에 다른 생명체, 특히 그 중에서도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진정한 우주의 하느님은 우리나 그들이나 똑같이 배려해줄 것이고 중요한 것은 육신의 겉모습이 아니라 오로지 영혼, 즉 내면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정체성 identity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비숍은 이 단편이 더욱 실감나도록 하기 위해 작품의 외형을 성경 스타일로 만들어서 전체를 각 장(章)들과 싯구들로 나누고 성경의 문체를 빌려왔다.
그 결과는 우리가 예견했던 대로 놀라운 역작이 되었으나 우리는 이 작품의 게재를 앞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여전히 우리는 일부 독자들이 그 주제나 스타일 때문에 불쾌해 하거나 심지어는 자신들의 가치관이 침해 당했다고 여길까봐 불안했던 것이다.
어떤 독자의 편지는 진짜로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이 작가는 아주 불쾌한 작자로서 이 작품은 성서를 의도적으로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것이 분명하며, 그 외에는 어떤 가치도 찾아볼 수 없다는 투였다.
물론 이런 식의 창작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완전히 합의에 이를 수도 없다. 이 작품을 성경에 대한 조롱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과 건설적인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늘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며, 특히 예술작품의 경우에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바탕을 둔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일반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즉 과학소설이 종교, 특히 우리의(미국인들의;역자주) 종교를 어떻게 다루는가의 문제 말이다. (다른 이들의 종교야 어떻게 주무르든 신경쓰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단지 우리의 종교만이 진정한 종교라고 생각하는 종교 자체의 속성 탓에 말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픈 이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종교는 우리 모두가 아다시피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다. 앞서 말한 그 화난 독자는 편지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충고했다. "본류에 속하는 종교집단을 공격해서는 친구도 잃고 잡지의 판매에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겠소?" 그러나 그가 말한 대로 할 경우, 과연 과학소설을 쓰면서 단지 종교적인 시각을 피하려고만 들어서야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도 그 독자가 말한 우려를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 역시 친구를 얻고 싶고 (과학적인 내용이 담긴) 잡지들을 팔고 싶어 하므로, 설사 그 독자층이 비주류에 속한다 치더라도 우리가 고의로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거나 모욕을 주려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진지한 과학소설 잡지를 편집하고 있기에,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싣고자 하는 열의가 높으며, 인류 역사상 위대한 사상들과 관심사들을 고려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고 여긴다. 확실히 종교 앞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사상들의 콤플렉스는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러한 콤플렉스를 두고 일탈이라고 선언하는 행위 자체를 수치로 여겨야 할 것이다. 사실 잡지가 자체 검열을 하여 종교을 논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언론의 자유를 규정한 우리의 헌법상의 보장을 실제로 믿지 않는 힘 앞에 내팽개쳐버린 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는 제대로 된 미국인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가 이처럼 매우 민감한 주제를 피하려고만 든다면 대체 어디쯤에서 멈춰서야 한다는 말인가? 나 역시 내 자신의 작품들에서 종교를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꼭 그것을 넣어야만 말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에, 나는 일찌기 <파운데이션Foundation>시리즈 일부와 <나이트폴Nightfall>에서 종교를 꼭 집어넣어야만 했기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내가 종교적인 모티프를 끌어들일 때마다 그 종교는 모호하게나마 기독교적인 색채를 띤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내가 그나마 알고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그 믿음까지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내 작품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는 내가 기독교를 조롱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이러한 탓에 또한, 종교를 진짜 무시하는 과학소설을 쓰기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다른 세계들에서 지적인 존재들을 찾아낸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종교가 있다면? 우리의 하느님이 온 우주의 절대자라면 우리의 하느님이 또한 그들에게도 하느님인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전망은 거의 주목을 받은 적이 없지만, 실제로 그러한 존재가 발견된다면 그러한 문제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회피하거나 마치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양 처리하는 과학소설은 현실감을 잃게 된다.
아니면 시간여행을 생각해보자. 과거로 돌아가 링컨 대통령의 암살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이 씌여졌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과거로 돌아가 예수의 순교를 막으려는 사람들을 다룬 이야기들은 단 하나라도 읽어본 적 있는가? 시간여행이 가능해지기만 한다면, 훨씬 더 위대한 위업을 달성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시간여행이 가능할 경우) 위에서 언급한 주제들에 미칠 변화들을 생각해보라. 예수가 순교를 하러 가는 길에 구조를 받게 된다면, 더군다나 그 구조방식이 현대 기술을 동원한 형태로 이뤄지고(예를 들면 헬리콥터 등을 동원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적어도 최신 소총들을 발사해 로마 병사들을 오도가도 못하게 만든다면, 상대적으로 원시적인 당시 사람들에게는 초자연적인 힘이 예수를 구원하는 것으로 비치지 않을까? 진정한 구세주를 돕기 위해 천사들이 강림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아울러 그 때문에 실제 종교인 기독교 자체가 생겨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래도 기독교가 태동했을까? 분명한 것은 예수의 순교는 아담의 원죄를 인간들 대신 예수가 속죄하도록 하려는 하느님의 신성한 의도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사건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이것은 생각해볼 수록 멋진 딜레마이며 이것은 정통 과학소설이 다루는 범위 안에 속한다. 그러나 이처럼 대다수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역사적 사건을 다룰 기회가 온다해도 과연 누가 감히 그러한 이야기를 쓰려 나설까? 이러한 이야기는 쓰기가 무척 어려우며 나 자신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그러한 주제를 소설화하지 못하는 까닭은 주로 내 자신의 자기검열 탓이란 생각이 든다.
더 더구나, 만약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서 성서의 예수란 인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간여행이란 개념은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은 시간여행 주제들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면서 불경스럽다고 매도하기 쉽다. 단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말이다.
그 편지의 독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시모프 박사, 나는 당신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리고는 그는 이 때문에 내가 종교인들의 감정을 묵살한 채 오히려 이러한 믿음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려 한다고 암시했다.
사실 나는 틈만 나면 나의 이런 저런 글들을 통해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어떤 확정적인 증거도 본 적이 없으며 단지 믿음만으로 그 존재를 믿기는 곤란하다고 단언해왔다. 이러한 정황이 나를 무신론자로 만들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놀라는 미국인들이 일부 있을지 모르지만, 미국 헌법은 나 개인의 권리와 내가 내 생각을 말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무신론자라서, 종교인들의 믿음을 버리게 하려고 애쓴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나는 무신론을 포교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무신론을 기성 종교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믿도록 강요해야 하는 일종의 또다른 믿음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나는 누구보다 많은 책과 글을 썼고 (지금까지만 따져도 약 이천만 단어가 넘는 분량이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들을 놓고 수도 없이 씨름했다. 종교와 무신론에 대한 내 입장이 못믿긴다면, 내 글들을 꼼꼼히 읽어 나가면서 내가 종교를 그런 식으로 비꼰 흔적이 있는지 얼마든지 찾아보아도 좋다. 다만 나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타당성있는 과학적인 발견들(예를 들면, 진화론 같은)을 공격하는 사람들에 맞설 뿐이다. 그들은 증거로 없이 그렇게 하거나 심지어는 거짓 증거를 가지고 진실을 왜곡하려고까지 든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보지 않는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종교의 격을 떨어뜨리며 과학보다는 종교 그 자체에 더 큰 해를 입힐 것이라는 점을 조심스게 지적해두고 싶다.
게다가 내가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가정해보자. 내 부모님은 유태인이었으니까 나는 (부모님 뜻대로) 정통파 유태교도로 자라거나 나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우롱하는 이야기들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경건한 감리교도라고 해보자. 그럼 나는 유태교나 천주교 또는 무신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이야기들만을 찾아 헤맸을까?
내가 '주류 종교집단들'을 공격할 의도로 이 잡지를 운영하고 있다면, 나는 굳이 무신론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내가 다른 어떤 사람이어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고집불통이거나 바보 멍청이거나 아니면 둘 다에 속한다고 할 경우에도...
사실을 따져보면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두 말할 나위없이, 나로서는 <가말리엘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작품이 우리의 독자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니 유감이다. 우리가 이상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면, 어느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 소지가 있는 이야기는 결코 게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는 우리는 양자 택일을 해야만 했다. 한편에서 보면, 우리는 중요한 사상을 아주 과감하게 다룬 훌륭한 작품을 갖게 되었으며 우리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점을 인식하리라고 본다. 바로는 납득이 어려워도 조금만 더 생각을 깊이있게 해본다면 말이다. 또다른 한편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의 독자들 가운데 일부를 몰아세워 불쾌하게 만든 작품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두가지 대안 중에서 선택을 했다. 우리는 일부가 불쾌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감수하는 대신 작품의 질과 비중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우리는 우리의 화난 독자가 이 문제를 재고해서 결코 이 작품의 의도가 기성 종교를 조롱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길 희망한다. 오히려 비숍의 재능과 용기에 격려를 보내주었으면 한다.
후기:
이 에세이는 내가 이제까지 씌여진 온 세상의 과학소설들을 전부 읽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탄로나게 만들었다. 일부 독자들이 내게 마이클 무어콕 Michael Moorcock의 <이 사람을 보라 Behold the Man>가 바로 예수를 조사하기 위해 과거로 시간여행하는 이야기라고 지적해주었다. 나는 이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그 작품을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한 가지 더, 1986년 마이클 비숍은 자신의 단편들을 골라 모은 선집을 한 권 간행했는데, 주로 종교적인 주제를 담은 것들이었다. 그는 나의 허락을 얻어 이 에세이를 (약간 수정을 거쳐서) 그 책의 머리말로 실었다. 내가 그에게 그런 허락을 해주다니 나야말로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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