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미스테리 하우스의 추리 관련 글입니다.
http://www.mysteryhouse.co.kr/board/board_detail.asp?forum_id=131&search_type=&search_string=&pageno=4&msg_num=10588
하이퍼링크가 안되시면 불편하시더라도 복사하신후 인터넷 주소창에 붙인후 엔터치시면
본문으로 들어갑니다.ㅠ.ㅠ
혹 글이 안보이시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 접힌 부분 펼치기 >>
|
고발문학(告發文學)의 새 가치설정(價値設定)
추리소설에 대해서 운운하기 전에 대중문학 또는 대중소설에 대해서 따지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대중문학이란 필자가 알기로는 본격문학에 대응하는 용어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중문학이라고 하면 마치 통속문학 또는 불순문학의 대명사처럼 무조건 멸시하는 편견이 교육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지식인들 특히 본격문학을 한다는 작가들 사이에 확고히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문학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구별이 발생했는가 하면 사실상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이 대립하여 서로 경합하는 형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소견은, 솔직히 말한다면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에서 말하는 대중 문학이 과거에 발달하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왜냐 하면 그럴만한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중 문학이 발생하려면 프랑스의 대중 작가 삐에르 브노와가 지적했듯이 1. 인쇄술의 발달, 2. 저널리즘의 발달, 3. 소설의 유행, 4. 의무 교육의 보급, 5. 민중의 여가의 획득 등의 조건이 전제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여건이 미흡했기 때문에 대중문학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저속한 문학으로 떨어져 문학인의 빈축을 사게 되고, 따라서 본격문학 또는 순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재미도 문제점도 없는 무미건조한 문학이나 난삽하고 고답적인 편협한 문학으로 떨어져 비문학인 독자의 무관심을 사게 되었다.
우리가 대중문학이라 할 때 우리는 거의 대중소설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소설은 발생 과정을 따지지 않더라도, 독자에게 우선 재미 또는 흥미를 주어야 했다. 이건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과도 부합되는 일이다.
소설이란 장르는 발생 초부터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애당초 대중 소설이라든지 본격 소설이라든지의 구별이 있을 리가 없었다. 대중의 흥미를 끄는 소설은 많이 읽히게 되고 흥미를 끌지 못하는 소설은 전혀 읽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돈을 내고 소설을 사는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재미있는 소설이야말로 상품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대중소설의 발전은 직업적 작가의 출현으로부터 박차가 가해지는 건 당연한 노릇이다. 대중작가의 편에서 생각한다면 대중의 흥미를 끄는 소설을 써야만 그 소설을 상품으로서 많이 팔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대중소설의 고전적 예로 뒤마 뻬에르의 <삼총사>라든지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들 수 있다. 19세기는 ‘소설의 시대’라고 불려질 만큼 위대한 작가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우리는 영국의 차알즈 디킨즈를, 프랑스의 오노레 드 발작크를,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를 위대한 작가임과 동시에 위대한 대중 작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예를 든다면 영국의 여류 탐정 소설가 애거서 크리스티처럼 많은 소설을 판 대중작가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작금에 소설 독자가 무척 늘어나고 있고 우리나라의 규모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나오고 있다. 이 정도의 사태를 가지고서도 소설의 상업주의라고 운운하는 성급한 평론가도 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대중문학은 발전해야 한다. 문학이 대중을 잃으면 그 존재 가치는 격감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중 문학 발전의 기반이 생겨 있다.
근년의 경제 성장과 독자의 지적 향상은 독자에게 좋은 소설을 제공하는 직업 작가들을 배출시켰기 때문이다. 직업 작가들은 되도록 사회 각층의 많은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소설을 쓰려고 한다. 작가가 자기 본위의 소설, 자기 폐쇄의 소설에 집착하고 폭넓은 대중의 관심사를 도외시한다면 진정한 의미로서의 대중 문학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작금 몇몇 출판사는 외국의 추리소설들을 번역 출판하고 있다. 중복된 것까지 합치면 약 2백 권쯤 될 것이다. 추리 소설의 창시자 에드가 앨런 포우의 단편 탐정 소설을 위시하여 최근의 일본의 베스트셀러 추리 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찌(森村誠一)의 장편 추리소설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추리 소설이 상당수 망라되어 있다.
추리 독자의 수효도 놀랄 만큼 늘어났고 독자층도 애거서 크리스티를 좋아하는 층, 엘러리 쿠인을 좋아하는 층, 조르즈 시므농을 좋아하는 층, 마쓰모도 세이쪼(松本淸張)을 좋아하는 층 등등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독자들의 기호와 안목도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국내 작가를 든다면 전전에 김내성(金來成)이 추리 소설을 시도한 바가 있었지만 근자에 와서는 현재훈(玄在勳), 허 문(許文), 유현종(劉賢鍾), 김성종(金聖鍾), 노 원(盧媛) 씨 등등이 한국의 추리소설의 개발에 이미 정진하고 있으며 이 이외에도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이 예상되며, 또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지만, 추리 문학에 관심을 갖는 본격 소설 작가들의 참여도 기대할 수 있다.
세계의 추리 소설계를 둘러볼 것 같으면 추리 소설은 수수께끼를 푸는 추리 위주의 전통이 아직 살아 있다. 이 시기에는 셜록 호움즈를 위시한 명탐정들이 숱하게 등장했다. 그들은 기괴한 사건을 수발한 두뇌로 쾌도난마식으로 해결한다. 이러한 패턴은 흥미진진하나 결국에 가서는 탐정 자신의 현실성이 희박해지는 흠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탐정 소설을 본격파(本格派)라고 했다 (<오락을 위한 살인>이라는 유명한 평론집의 제목은 이 파의 성격을 상징한다).
추리작가에도 유파가 있다. 도서파(到叙派)와 비정파(非情派)는 본격파에 반기를 든다. 도서파는 범죄 심리를 중시하고 비정파는 탐정의 두뇌보다는 행동을 중시한다.
근자에 추리소설 작가이며 평론가인 줄리언 시몬즈는 현대의 작품들을 추리소설이라고 부르지 말고 범죄소설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추리소설은 탐정소설로부터 범죄소설로 변했다는 것이다.
현대의 추리작가는 추리보다는 범죄 자체를 중시한다. 따라서 범인은 탐정에 못지않은 중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탐정 역을 경관이 맡는 경우 이 소설은 경찰 소설이라고 부른다. 사실상, 사회에서 발생하는 범죄는 경찰이 그 수사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경찰의 형사가 탐정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추리 소설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스파이 소설이라는 게 역시 추리소설에서 다루어진다. 미·소(美蘇) 냉전의 시대에 국제 스파이의 활동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스파이 소설은 현대인에게 어필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는 프레드릭 포사이드의 [악마의 선택]은 흥미롭기 짝이 없는 미래 예측의 정치 스릴러이다.
요컨대 추리소설은 정의 구현의 소설이다. 탐정은 정의의 사도이며 악행의 응징자이다. 이러한 사실은 소박한 권선징악적 면도 있지만 추리 소설에서는 기본적인 면이다.
따라서 추리소설은 사회 고발의 문학이 된다. 대중은 악인이 처형되기를 바란다. 대중은 부패가 일소되기를 바란다. 여기에 대중소설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현실에서는 악인은 시원스럽게 응징되지 않으며 부패는 좀처럼 일소되지 않는 것을 대중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본격 소설은 현실대로 악을 그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추리 소설에 있어서는 악인이 응징되고 부패가 일소되므로 대중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쉴 해미트의 [붉은 수확(收穫)]은 일개 탐정사의 사원인 한 도시의 악인들을 모조리 무찌른다. 물론 초인이 아닌 이상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악인들끼리 싸우게 하는 교묘한 수단으로 부패된 도시를 숙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수법은 007 시리이즈의 수법에 비하면 월등하게 리얼하다.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도 사회 고발의 문학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고발의 문학도 된다. 현대의 범인은 반드시 악인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의의 피해자이며 약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신병자이며 반항자이기도 하다. 사회를 그린다는 건 결국 인간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추리소설을 다룰 때 세 가지의 안목이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개인적 안목과 사회적 안목과 국제적 안목이다. 이 세 안목은 투철한 고발정신으로 일관되어 있어야 한다.
끝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한국의 추리 작가는 대중 작가를 열등시하는 풍조에 대해서 조금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독자 대중은 자기편이라는 긍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월간 소설문학 창간호 (1980년 5월)의 특집 ‘소설문학 80년대’중에서]
|
<< 펼친 부분 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