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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추리소설 창시 백주년기념으로 미국에서 출판된 하워드 헤이크래프트 Howard Haycraft(1905- )의 추리소설사의 책명은 『즐거운 살인 Murder for Pleasure』이었다. 이 책은 에드가 알란 포우가 1841년에 <모르그가의 살인>이라는 최초의 단편 추리소설을 쓴 이후 전전(戰前)까지 100년에 걸친 추리소설의 역사였다. <즐거운 살인>이라는 제호는 살인사건을 다룬 추리소설이 독자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뜻이지, 실제의 살인이 즐겁다는 뜻은 아니리라.
독자가 추리소설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이른바 명탐정의 명추리에 대한 매력이다. 난해한 범죄사건을 쾌도난마식으로 척척 풀어가는 탐정의 추리 과정이 독자의 손바닥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이리라.
전전까지 추리소설의 걸작은 대체로 명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이었다. 명탐정으로 말하면, 추리소설의 창시자 포우의 뒤팽, 추리소설의 완성자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추리소설 황금시대의 영미의 2대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에르뀔 뽀와로, 엘러리 퀸의 엘러리 퀸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작가의 비상한 두뇌가 만들어낸 초능력을 가진 천재들이다. 특히 셜록 홈즈와 같은 추리의 기계는 명탐정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그러므로 종전의 추리소설은 범인 찾기 게임처럼 되었고, 따라서 살인은 게임의 수단에 불과하여 현실의 살인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종전의 추리소설은 수수께끼 풀이의 소설, 곧 오락소설이었다. 포우가 창시하고 코난 도일이 완성한 이러한 추리소설의 패턴은 전전에 이미 굳어져, ‘ 본격 추리소설’이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전전에 벌써 본격 추리소설에 대한 반발로, 영국에서는 도서식(倒敍式) 추리소설이, 미국에서는 비정파 추리소설이 쓰여졌다. 도서식이라는 것은 범인이 미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초점이 범인의 심리나 행동에 모이게 되고, 따라서 명탐정의 추리가 불필요했다. 비정파 소설에서는 탐정이 악당들과 피투성이가 되어 혈투를 벌이고 있다. 명탐정이 안락의자에 앉아 천재적인 추리로 범인을 밝혀내는 것과는 달리 비정파 추리소설의 탐정은 악당들에 못지 않는 비정한 행동파들이다.
여기서 나오는 살인은 살인 게임이 아니라 피투성이의 살인이다. 그리고 탐정의 성격도 달라졌다. 더쉴 하미트, 레이먼드 챈들러와 같은 비정파 작가들의 활동은 전전의 추리소설에 대한 일대 혁명이었다. 본격파 추리소설은 비정파의 추리소설 때문에 몹시 흔들린 것이 사실이다.
1976년에 ‘ 미스터리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가 죽고, 죽기 전에 명탐정 에르뀔 뽀와로를 『커어튼』에서 죽이게 되었는데, 타임 Time지에 에르뀔 뽀와로가 실재인물인 양 부고까지 난 것은 소위 본격 추리소설의 퇴조의 신호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1974년에 출판된 줄리언 시몬즈 Julian Symons(1912- )의 『피나는 살인 Bloody Murder』은 -이것 역시 포우 이전부터 시작하는 추리소설의 역사이다- 추리소설이 전후에 탐정소설에서 범죄소설로 변한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제목부터가 헤이크래프트의 『즐거운 살인』에 대한 야유가 아닌가 한다. 소위 추리작가는 게임의 수단으로 살인을 다루었지만, 범죄작가는 피가 뚝뚝 흐르는 살인, 곧 현실에서 일어나는 범죄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범죄를 다룬다는 뜻이리라.
추리소설은 범죄를, 곧 범죄자와 피해자와 범죄수사관을 다루기 때문에 범죄소설이며, 범인을 쫓는 자가 경찰인 경우에 경찰소설이라는 명칭도 생기게 된 것이다. 줄리언 시몬즈는 추리소설과 범죄소설을 플롯, 탐정, 범죄방법, 단서, 성격, 배경, 사회적 태도, 수수께끼의 기치 등 여러 항목을 들어 차이점을 들고 있다.
요약한다면 추리소설에서는 범죄를 다루는 작가의 태도가 대중의 흥미를 위주로 하는 대중작가의 태도이지만 범죄소설에서는 범죄를 다루는 작가의 태도가 리얼리티를 존중하는 작가의 진지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범죄소설은 추리소설처럼 명탐정을 내세우지 않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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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각국의 사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전후 영국에서 맨 먼저 주목되는 것은 양산 작가 존 크리지 John Creasy(1908-1973)의 출현이다. 그는 전전부터 죽을 때까지 약 40년간에 걸쳐 스무 개의 필명을 사용하여 약 600편의 추리소설을 썼다. 그 중에서도 그가 본명으로 쓴 <앤소니 경감> 시리즈와, 필명 J.J. 마릭크 명의로 쓴 <기디엄 경감> 시리즈가 소위 경찰소설의 시작이 된다. 앤소니 웨스트나 기디언 경감은 명탐정이나 명경관처럼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 수사진의 지휘자 역할을 끈질기게 하고 있다.
실작과 이론으로서 범죄소설을 주장한 것은 『피나는 살인』의 저자 줄리언 시몬즈이다. “ 우리들의 시대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건 훌륭한 얼굴들-유태인을 죽이는 방법을 강구하는 공무원, 사형 폐지를 반대하는 판사, 재미로 살인을 하는 온순한 소년 등의 얼굴- 뒤에 숨어 있는 폭력이다. 우리가 이 폭력을 제시하려면 범죄소설 이외의 어떠한 전달수단이 있단 말인가”하고 말하고 있다. 그의 실작 『2월 31일 The 31st of February』(1950)은 종래의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범죄가 있고 범인은 있으나 경찰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경찰은 참으로 음흉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범인을 죄의식 때문에 발광하게 만든다. 범인의 성격과 심리가 다루어져 있다. 이런 소설은 범인소설 또는 범죄심리소설이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다.
줄리언 시몬즈와 영국 추리문단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범죄작가는 영국 범죄작가협회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마이클 길버트 Michael Gilbert(1912- )이다. 그는 저명한 법률가이면서 범죄소설을 오랫동안 써왔다. 그는 사회의 모든 폭력배들을 법질서의 대행자인 경찰과 대결시키고 있다. 그의 추리소설은 시몬즈에 비하면 서스펜스 소설에 좀더 가깝다. 그의 역작 『열이틀째의 밤 The Night of the Twelfth』(1976)은 세 소년의 피랍사건을 다룬 서스펜스가 강한 스릴러이다.
시몬즈가 그의 범죄소설의 이론에 비추어 가장 우수하게 보는 범죄작가는 미국 출신의 페트리시아 하이 스미스 Patricia High Smith(1921- )이다. 그녀는 미국인이긴 하지만 여기서 영국작가로 취급한다면 그녀의 제3작 『재능있는 리플리 씨 The Talented Mr. Riply』(1955)는 <태양은 가득히>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프랑스 영화의 원작이다. 소설은 범인이 주인공인 완전 범죄소설이지만 영화는 범죄자의 꼬리가 잡히고 있다. 영화의 경우보다는 덜 할지 모르지만 범인이 경찰의 수사망을 빠져나가는 것은 관객이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불안하다. 그러나 완전범죄소설이라고 해서 독자가 범죄의 유혹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시몬즈나 길버트보다 한 세대 늦은 영국의 두 중견 작가는 <반 데르 발크 경감> 시리즈를 쓰고 있는 니콜라스 프리링 Nicholas Freeling (1927- )과 <고트 경감> 시리즈를 쓰고 있는
H.R.F. 키이팅 Keeting (1926- )이다.
미국-전후 미국에서 거장의 위치를 차지한 추리작가는 로스 맥도날드 Ross Macdonald(1915-1983)이다. 전세계를 휩쓴 미국 특유의 비정파 추리소설가 더쉴 하미트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후계자로서는 당연한 위치일 것이다. 맥도날드는 본명 케니스 밀러 명의로 쓴 네 편의 스릴러를 제외하고, 스무 편의 장편 추리소설을 썼는데, 열여덟 편에서 ‘ 루 아어처’라는 비정한, 그러나 멋있는 사립탐정이 등장한다. 『움직이는 표적 The Moving Target』(1949)을 위시한 <루 아어처> 시리즈의 열여섯번째 『지하 인간 The Underground Man』(1971)은 베스트 셀러의 미스터리이면서 소설로서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은 하미트의 주인공들이나 필립 마로우가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과 비슷하며, 결국은 우리가 기사도 로맨스를 읽을 때 느끼는 매력과 비슷한 것이다. 여기에 비정파 소설의 함정이 있지는 않을까. ‘ 루 아어처’는 작가 자신의, 아니면 미국인의 꿈의 화신이며, 현실적인 인물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몬즈의 범죄소설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맥도날드의 추리소설은 현대판 추리소설이지 범죄소설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결국 ‘ 루 아어처’는 모양을 바꾼 명탐정이 아니던가.
해난구조의 전문가를 탐정역으로 내세운 <트라비스 막기> 시리즈를 쓰고 있는 존 맥도날드 John Macdonald(1916- )도, 지나치게 비정한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 시리즈를 쓰고 있는 믹키 스필레인 Micky Spillane(1918- )의 매력도 로스 맥도날드의 매력과 상통한 데가 있다.
이상의 세 작가보다 한 세대 늦은 에드 맥벤 Ed McBan(1926- )은 경찰소설의 새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 작가이다. 본명 에반 헌터 Evan Hunter로 영화가 된 소년 비행소설 『폭력교실 Blackboard Jungle』(1954)을 쓴 에드 맥벤은 <87 파출소> 시리즈를 현재까지 30여권 쓰고 있다. 이는 ‘ 경찰대하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첫장편 『경관 증오자 Cop Hater』를 살피면, 87 파출소란 가공의 아이소라 시의 일개 파출소이다. 87 파출소에는 16명의 형사가 배속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형사가 116명이 있어도 부족할 정도의 우범지역이다. 이 소설의, 아니 이 ‘ 시리즈’의 모든 소설의 표지 뒤에는 “ 이 소설에 나타나는 도시는 가공의 도시이다. 등장인물도 장소도 모두가 허구이다. 단 경관들의 일과만은 실제의 수사방법에 의거하고 있다”는 단서가 쓰여 있다. 서장은 프릭크, 수사주임은 번즈, 2급 내지 3급 형사들 가운데는 스티브 카레라가 제일 유능하다.
“ 거한이지만 우둔해 보이지 않는다. 단련된 근육과 뼈다귀의 힘이 풍기는 인물이다. 다갈색 머리는 짧게 깎아올렸다. 눈도 다갈색이고 눈꼬리가 묘하게 돌아간 눈에서는 수염없는 동양인과 같은 표정이 엿보인다. 어깨가 넓고 허리가 가늘어서 몸맵시가 보통이 아니다. 부둣가 인부의 가죽점퍼를 입혀 놓아도 잘 어울리는 사나이다.”
카레라 2급 형사에게는 테리 프랭클린이라는 벙어리 애인이 있다. 시리즈의 진전에 따라 둘은 결혼하는데, 카레라 부인에게는 기묘한 매력이 있다. 결국 그들은 이 시리즈의 히어로요 히로인이다.
경찰수사소설이란 단조로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 <87 파출소> 시리즈의 매력은 <피나는 살인>을 <즐거운 살인>으로 느끼게 한다. 이런 점이 현대 추리소설의 매력이 아닌가 한다.
프랑스-유럽의 사정은 영미와는 좀 다르지만 추리소설에 관한 한 영미권의 영향을 면할 수 없다. 르꼭끄 명탐정과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과 메그레 명경감의 나라 프랑스의 전후에 혜성처럼 나타난 작가는 삐에르 보왈로 Pierre Boileau(1906-1989)와 또마 나르스작 Thomas Narcjac (1908- )이다.
1938년에 『박카스의 휴식 Repos de Bacchus』으로 모험소설 대상을 탔던 보왈로는 10년 후인 1948년에 『사자는 여행중 La mort est du voyage』으로 모험소설 대상을 타게 된 나르스작을 시상식에서 만나자 그들은 당장 의기투합하여 합작하기로 합의했다. 보왈로-나르스작은 1954년부터 매년 장편 하나씩 괴기스런 서스펜스 소설을 내기 시작했다. 제3작 『사자들 사이에서 D'Entre les morts⌋는 히치콕크에 의해서 영화화되었고, 그들의 명성을 프랑스의 국경을 넘어 전세계에 퍼지게 했다. 그들은 추리평론 『추리소설 Le Roman policier』(1975)도 합작하였고, 미국 서그펜스 소설의 거장 윌리엄 아이리쉬를 논하는 대목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평하고 있다.
“ ...그들(보왈로-나르스작)은 서스펜스 속에서 진정한 추리소설에 알맞는 플롯을 짜넣어, 피해자가 단지 자기 자신의 사건을 수사할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추리하려고 하는 만큼 한층 깊은 착란상태에 빠져가는, 그러한 효과를 노리고 있다. 그 경우, 그들은 등장인물이 빠지는 불안을 논리적 수사의 파탄에서 끌어내려고 애쓴다....”
보왈로-나르스작은 바로 프랑스의 추리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웨덴, 네덜란드-여기서 필자는 미국의 맥벤의 <87 파출소> 시리즈를 본따서 <마르틴 벡크> 시리즈 열 권을 완성한 스웨덴의 부부작가 페에르 왈로 Per Wahlöö(1926-75)와 마이 쉐와르 Maj Sjöwall(1935- ) 및 중국 당나라의 명판관 적인걸을 수사관으로 하는 <적판관> 시리즈로 중국의 공안소설을 현대화한 R.H. 반 글릭 Van Gulik(1910-1967)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최근에 추리소설의 왕국으로 올라선 일본은 종전 후 본격적인 추리소설이 나올 때까지 괴기 탐정소설의 수준에서 답보하고 있었다.
종전 후 요꼬미조 세이시(橫溝正史, 1902- )는 본격적 추리소설의 붐을 일으켰고, 마쓰모또 세이오(松本淸張, 1933- )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붐을 일으켰다. 그들보다 두 세대 늦은 모리무라 세이이지찌(森村誠一, 1933- )도 본격파와 사회파의 융합을 시도한 <증명> 시리즈로 그 자신의 붐을 일으켰다.
한국-한국에서는 추리소설이 최근에야 독자의 인정을 받고 있다. 김내성(金來成)은 해방 전에 추리문학에 관심을 표명한 유일한 작가였다. 해방 후 추리소설의 명맥을 유지한 작가는 현재훈, 김성종, 노원, 박민규, 이상우 등이었고, 그 중에서도 김성종, 이상우는 한국에서도 추리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소설의 장르가 싹을 티우기에는 뜸을 들여야 한다. 상당수의 신인 작가들이 대기하고 있는 만큼 한국의 추리소설이 국제적 수준에 도달할 날이 머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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