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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사이버펑크
70년대는 아이디어의 고갈과 장르 판타지--상업화된 환상소설--의 팽창으로 인해 SF의 실험 정신이 위축되어 있었던 시기였고, 그 연장선상에 있던 1980년대 초의 상황은 60년대 초의 그것과 놀랄만큼 닮아 있었다. 폭주라고 밖에는 형용할 길이 없는 테크놀러지의 급격한 발달은 인류 역사상 일찍이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변화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었고, 변화의 문학을 자처하는 ‘과학소설’ 또한 새로운 방법론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보급에 의한 PC 혁명이 몇년 후 현실로 다가왔을 때, 윌리엄 깁슨과 브루스 스털링을 위시한 젊은 작가들은 이런 시대상황에 걸맞는 SF상(像)을 재정립하기 위해 상호 연대를 모색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미국 전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각종 SF 컨벤션이 접촉의 장을 제공해주었지만, 뉴웨이브의 유산인 창작 워크샵 및 컴퓨터 네트워크를 이용한 의견 교환이 활성화되면서 이들의 활동은 점점 뚜렷한 방향성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사이버펑크(Cyberpunk)는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사이버펑크 SF는 1984년 윌리엄 깁슨의 장편 ‘뉴로맨서(Neuromancer)’의 출간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의 처녀 장편이자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3부작의 1부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주요 SF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비롯, 최우수 신인에게 주어지는 P. K. 딕 기념상 등을 석권했고, SF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사이버스페이스와 사이버펑크라는 단어를 회자시켰다. 80년대의 SF를 주도했던 사이버펑크 운동은 바로 이 장편에서 시작되서 이 장편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이버펑크는 사이버네틱스와 무질서, 혼란를 뜻하는 펑크를 결합한 조어이며, 컴퓨터 공학, 인공지능, 유전 공학, 전자 공학 등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SF 소설을 가리킨다. 사이버스페이스란 전세계의 수천만의 컴퓨터가 결합된 인공적 우주를 의미하고, 깁슨의 주인공들은 매트릭스 시뮬레이터(Matrix Simulator)라는 일종의 변환 장치를 통해 각종 데이터가 기하학적 도형으로 시각화된 가상 현실내로 몰입(jack in)한다. 개개의 아이디어 자체는 특별히 새롭다고 할 수 없지만, 아이디어와 현실 사회를 결합하는 수법의 참신함과, 현란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파격적 문체의 매력은 깁슨을 거장의 대열로 끌어올렸다. 원래 깁슨의 작풍을 묘사하기 위해 쓰여졌던 사이버펑크란 용어가 SF의 하위 장르가 되고, 나아가서는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까지 발전하는 데는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경우에는 <매트릭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10여 년이 더 걸렸다.) LDG가 지향했지만 결코 성공시키지는 못했던 ‘SF의 생활화’를 사이버펑크 운동이 완전히 이루었다면 과장이 되겠지만, 사이버펑크가 뉴웨이브에 필적하는 80년대 SF의 경향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90년 하드SF 르네상스
21세기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1990년대의 SF를 규정하는 키워드는 하드 SF이다. 저명한 앤솔러지스트이자 평론가인 데이빗 G. 하트웰이 ‘혁명’으로까지 지칭하고 있는 기술주의적 SF의 부활은 멀게는 70년대에 데뷔한 과학자 출신 작가들의 꾸준한 작품활동이 결실을 맺은 결과이기도 하고, 가깝게는 80년대 사이버펑크 운동의 기반을 이룬 정보 및 생명공학의 눈부신 발달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할 정도로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특히 1980년대에 영국 잡지 『인터존』 등을 통해 데뷔한 후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개시하고, 1990년대 들어 전문 작가로 변신한 영연방의 작가들--영국의 폴 J. 맥컬리, 이언 맥클라우드, 스티븐 박스터, 에릭 브라운,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렉 이건--의 작품은 기존의 하드 SF 개념을 일신하고도 남을 만한 파괴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현대 SF의 최첨단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현대 SF를 규정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작가 그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한글로 읽을 수 있는 1990년대의 하드 SF소설은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므로, SF팬들을 위해서도 체계적인 소개가 절실한 시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출처:www.gehealthcare.com/krko/webzine/2003_fourth/human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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