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 타이거! Tiger! Tiger! 알프레드 베스터 Alfred Bester
번역: 하경혜 /출판사: 꿈이 있는 집/ 1993.01.30/가격: 5000/ ISBN: , Pages: 365쪽


◆타이거,타이거] 작품해설
*** 펄프적 감수성의 한 극점 ***
- 이제부터 걸리버 포일을 만날 독자에게 -

SF의 90%는 쓰레기이다.하지만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이다.
- 테오도어 스터전
자기소외가 극에 달하면 파괴조차도 지고의 심미적 쾌락으로 경험할 수 있다.
- 발터 벤야민
알프레드 베스터의 [타이거, 타이거]를 참으로 오랫만에 다시 읽는 나의 뇌리에는 온통 지나간 나날들에 관한, 약간은 몽롱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나의 10대 후반과 정확히 겹쳐지는, 7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는 이른바 추리소설 번역붐이 불어닥쳤고 자부하건대 나는 그 번역 추리 소설의 성실한 독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이 일역판의 중역이었던 이 싸구려 번역소설들은 세상의 혼탁함을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하던 나의 혼란스러움을 어느 정도 위무시켜 주었던 소중한 동무였다. 아니 `어느 정도'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아주 많이'라고 표현해야 적절할 것이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회고하자면 당시 나의 삶을 바쳐주던 기둥들은 록음악과 추리소설, 그리고 [펜트하우스]류의 스킨매거진이 아니었던가. 어른들이 저급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이런 것들이 나에게는 꽉 막힌 듯한 삶을 조금은 누그러뜨리는, 말하자면 아주 쓸만한 환기창이었다. 밤새도록 고물 헤드폰으로 레드 제플린을 들으면서 `바로크적 허무주의' 운운하거나 아니면 챈들러를 읽으면서 필립 말로우가 배회하던 40년대의 로스앤젤레스 뒷골목을 몽상하는 것이 나만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어른이 되어 찾아가 본 로스앤젤레스라는 도시에 시적인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는 사실에 나는 얼마나 씁쓸해졌는지.)

[타이거, 타이거]는 당시 추리소설 번역을 주도했던 동서추리문고---이 문고는 비록 일본의 하야카와문고를 모방한 것이긴 하지만 국내 추리소설 독자층을 넓히는데 큰 기여를 한 것만은 틀림없다. 지금은 헌 책방에서도 좀체로 구하기 힘든 동서추리문고. 그래서 이제는 그리운 이름이다---의 한 권으로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당시 SF라는 장르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는, 기껏해야 그 전에 읽었던 반 보그트의 [우주선 비글호의 모험]정도의 작품이겠거니 하고 짐작하면서 차라리 추리소설이나 더 낼 일이지 하는 투정과 함께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벽두부터 펼치는 놀라운 상황설정과 박력있는 스토리 전개는 나로 하여금 단숨에 이 책을 읽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당시 나의 독후감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SF라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지적,정서적 흥분을 줄 수 있구나'하는 깨달음이었다. 그 이후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SF를 읽기 시작했고 그래서 필립 딕, 사무엘 델라니, J.G.발라드, 스타니스와프 렘 등을 알게 되면서 `SF중독증'은 서서히 온 몸으로 퍼지게 된다.

베스터의 [타이거, 타이거]가 갖는 중요성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나의 부족한 지식과 어휘력으로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이 작품에 대해 간결하게 의미부여를 한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이 소설은 미국 대중문화의 펄프 매거진적 감수성으로 표출될 수 있는 모든 긍정적인 가능성들이 극대화된 작품이다라고. 이 펄프 매거진적 감수성이란 물론 요즘으로 치면 광고 카피같은 이른바 상투구에 의해 철저하게 감염된 정신을 말한다.

1920년대부터 시작되어 30, 40년대에 그 전성기를 맞게 되는 각종 펄프 매거진들은 말하자면 미국 장르소설의 산업적 토대였다. 추리소설, 서부소설, 공포소설등 각종 싸구려 소설들을 역시 싸구려 냄새가 물씬 나는 삽화들과 함께 싣고 있는 이 잡지들은 물론 치열한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도저히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그래서 어딘가로 도피하고 싶은 욕구로 충만해 있는 대중들에게 값싼 위안을 제공해준다는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온 매체였다. 그러므로 대공황기인 1930년대에 펄프 매거진들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장르소설에 대한 이런 사회학적 설명은---불행하게도 아니면 당연하게도---좋은 장르소설이 갖는 시공을 뛰어 넘어 우리를 매혹시키는 능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추리소설이면 추리소설대로, SF면 SF대로 각 장르에는 대다수의 졸작, 태작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1급품'이 존재한다. 이 `1급품'들이 갖는 매력은 그 장르의 전형적인 틀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도 그 장르의 인습적인 세계 이해를 현격하게 뛰어 넘는 높은 인식의 수준을 형식과 내용의 결합을 통해 달성한다는 점에 있다. 조금 딱딱한 교과서적인 표현이 되어버렸지만 쉽게 말하면 `분명히 장르소설인데도 장르라는 좁은 영역에 가두어 놓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 걸작들은 대중적인 장르소설들을 겨냥해 쏟아지는 수많은 상투형의 비판들에 질기게 버텨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클리셰로 이루어진 문화상품에 역시 클리셰로 욕을 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후기자본주의 최악의 문화적 딜레머인지도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힘의 근원은 장르소설들의 기저에 흐르는 도피주의적 상상력이 보여주는 어떤 전복적인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문화적 허구들이 사회세력들의 역학관계의 반영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좋은 장르소설들이 보여주는 도피주의적인 `낙원'들은 이 역학관계의 변모를 위한 대중적인 원망(願望)이라 이해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타이거, 타이거]는 전형적인 모험활극, SF의 형식을 차용해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모험과 성장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이건 분명 틀린 관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대체 모험이 가능할 턱이 있는가. 모험이 가능하다면 누가 싸구려 장르소설을 읽을 것인가. 그것은 모험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한 탐구라고 수정해야 할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25세기를 무대로 펼쳐지는, 걸리버 포일이라는 이름의 지적 성장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떤 무식한 노동자의 복수극이다. 필사적으로 구조 신호를 보내는 우주조난자인 자신을 무시한 채 사라져 간 우주선 보가호에 대한 증오는 이 빈민가 출신의 건달의 가슴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격렬한 복수심을 심어 준다. 그리하여 포일은 역사상 어느 누구도 성공한 적이 없는 우주간 조운트(공간 순간이동)를 할 정도의 수퍼맨으로 변모하고 오로지 복수심에 의해 서서히 지성을 익히게 된다. [몽테 크리스토 백작]을 오히려 능가한다고 해도 좋을만큼 색채감 넘치는 배경묘사와 빠른 장면전환은 가히 컬러 애니매이션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이 유례를 보기 드문 현란한 복수극에서 그러나 통쾌한 복수를 기대하는 독자들의 통속적인 욕구는 세계의 의미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포일의 자기 각성으로 인해 무참히 깨어진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타이거, 타이거]는 가히 파천황적인 파격을 보여준다. 특히 후반부에서 포일이 자신이 추구해 온 복수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하는 자기분열적인 심리에 빠지는 대목에서 그림과 문자 디자인을 이용한 공감각적인 묘사는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이 1956년이란 것을 감안하면 혁신적이라 할 만하다. 베스터가 세부묘사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퇴폐취미도 이 작품의 빼어난 매력중의 하나이다. 지극히 낡은 테크놀로지를 일종의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과학인'의 묘사랄지 대재벌 프레스타인의 이국적인 저택의 묘사등은 베스터 특유의 괴기취미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한 이 작품이 보여주는 묘한 박력은 등장인물간의 박진감 넘치는 다이얼로그에 의해 촉발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사무엘 풀러의 영화를 보는 듯한 이 야비한 박력의 매력은 각별하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감정은 숨김없이 드러내는 이 다이얼로그는 모험이나 행동의 순수성에 대한 베스터적인 집착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만화대본 작가로 활동해 온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소설가로 데뷰하기 전에 3년 정도 만화 대본을 써 본 경험탓인지 그는 박력넘치는 단문의 `달인'이다. 그러므로 그를 미국 장르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이자 스타일이었던 하드보일드 유파의 SF쪽의 후계자라 보아도 그리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하드보일드 특유의 함축이 풍부한 단문은 미국문화 특유의 반지성주의의 문학적 드러남이기도 하겠지만 자본주의적 전문화에 대한 깊은 좌절감의 표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좋은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고나면 나는 묘하게 우울해진다.)

냉전이 한참 고조되던 1950년대에 미국의 대중문화는 뛰어난 분열증적인 영웅 두 명을 배출해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 두 명이란 존 포드의 영화 [수색자]의 이산 에드워드와 이 소설의 걸리버 포일이다. 형의 가족을 몰살하고 조카를 납치해 간 인디언 추장 스카를 찾아 황야를 누비는 이산 에드워드가 자기의 적인 스카에게서 바로 자기 자신을 보듯이 우리의 영웅 걸리버 포일도 막막한 우주 공간을 횡단하면서 복수의 무의미함을 배운다. 그래서 결말에는 두 사람 모두 성자로 등극한다. 이산 에드워드가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닫는 패배주의적인 성자라면 걸리버 포일은 인류의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을 꿈꾸는 윤리적인 성자라는 차이는 있지만, 약간의 무리는 있지만 이 두 작품은 50년대 미국문화가 만들어 낸 최고의 `교양소설'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그리고 이 비뚤어진 두 영웅들은 60년대 이후에 쏟아진 수많은 안티히어로들의 원형이라고 할 만 하다.

눈치빠른 독자들이라면 이즈음에서 [타이거,타이거]에 대한 나의 평가가 지나치게 편견에 찬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심은 타당하다. 이 소설에 대해 나는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 애정은 분명히 이 작품의 탁월함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변호하기 위해 한마디 더 붙인다면 중증의 대중문화 소비자치고 편견이 없는 인물이 있을까라고 반문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편견을 없애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편견을 체계화하는 것이 아닐런지.

독자들 중 SF라는 영역에 새로이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있다면 이 작품을 읽고 별로 재미를 못 느꼈다고 해서 자신의 문화적 감수성이 낮다고 속단하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미국의 장르소설들은 흔히들 순수문학이라 칭하는 주류문학보다는 오히려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B급 장르영화와 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개인의 문학적 감식력으로 작품의 우열을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은 장르 자체가 전제하는 최소한의 상호 텍스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드보일드 사립탐정소설을 읽으면서 왜 탐정들은 하나같이 LA나 샌프란시스코에만 몰려 있을까 하는 질문을 떠올리는 것은 우문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장르의 관습]을 제대로 파악하기까지는 장르소설의 묘미를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니 한 두 작품 읽어보고 재미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당신의 권리이자 자유이지만 별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제부터 이 책을 읽게 될 당신을 나는 무척 질투한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책처럼 그 뜨거운 열기로 독자들에게 화상을 입히는 소설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러니 이 책이 내뿜는 열기에 취해 본 경험을 이미 겪어버린 나로서 어찌 당신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출처:임재철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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