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부질없는 짓이 연휴 기간동안 뭘 하겠다고 계획을 짜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그 주에 난 비장했었다. 아주 콕 쳐박혀서 일도 다 끝내고 책도 많이 읽고 그래야지, 으샤으샤. 그래, 이럴 때가 좋은 거였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면서 나의 생활은 늘어진 엿가락 그자체가 되어...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침 먹고 두서없이 이것저것 하다가 아 배고파 점심 먹고.. 먹으니 졸리네? 자자.. 하며 낮잠 길게 자고 일어나 또 아 배고파 저녁 먹고.. 오늘은 그냥 쉴까? 하고는 또 쉬고... 결국 연휴는 끝났으나 손에 쥔 것은 없다. 뭐 이런 비극적이면서도 슬픈 결말이... 으흑.
그래서인지, 어제 꿈자리가 정말 뒤숭숭했다. 요즘엔 꿈을 잘 꾸지 않는 나인데, 어젠 정말 괴로운 꿈을 꾸느라 일어나서까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근데 아침에 눈을 뜨니, 뭔가 전반적인 서늘함이 엄습. 메세지 확인해보니 다들, 춥다 조심해라, 감기 조심 하면서 안부를 전해온 것이다. 일어나 창문을 여니 으악. 차다. 바람이 차다. 아니 추석 끝났다고 바로 겨울이야? 올해는 가을이 유난히 짧다. 찬란했지만 짧다. 원래 찬란한 것은 짧은 것인가... 안 찬란하고 길게 가는 게 좋은 건 절대 아니지만, 찬란이 좀더 머물기를 희망했는데. 이제 겨울 코트를 꺼내입어야 할 시기가 온 모양이다.
연휴에는 그냥 머리 식힌다고 소설만 읽었다.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건 <사랑의 역사>. 난 내가 이제 발견해서 최근에 나온 책인줄 알았는데 알라디너 한 분이 알려 주셨다. 개정판이라고. 이런. 빨간책(오른쪽)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14년 전 2006년에 나온.. 내가 이 책을 이제야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암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사실 재미있다고 하기엔 주인공의 삶이 너무 꿀꿀하지만. 그래서 꿈이 뒤숭숭했나?
내 부고가 쓰일 때, 내일, 혹은 그다음날. 거기에는 이렇게 적힐 것이다. 레오 거스키는 허섭스레기로 가득찬 아파트를 남기고 죽었다. 내가 아직 산 채로 파묻히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이 집은 넓지 않다. 나는 침대와 변기, 변기와 식탁, 식탁과 현관문 사이에 길이 막히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변기에서 현관문으로 가고 싶다면, 불가능. 식탁 쪽을 거쳐서 가야만 한다. 나는 침대가 홈 플레이트, 변기가 일루, 식탁이 이루, 현관문이 삼루라고 상상하기를 즐긴다. (p9)
시작이 이렇다. 혼자 사는 할아버지, 레오 거스키의 이야기다.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는. 좋은 부모 아래에서 잘 살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은 지나가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동생과 살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아 미국에서 열쇠공으로 살아가던 남자.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나, 그 와중에 헤어지고 자신의 아들이 남의 손에 크는데 그냥 그렇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남자. 유명한 작가가 된 아들 앞에 아버지라 당당히 나서지 못하는 남자. 외롭고, 외로운 남자.
살아 있는 내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사람이 누굴까 자주 궁금해진다. 굳이 내기를 한다면, 중국 음식점 배달부에게 돈을 걸겠다. 일주일에 나흘 밤을 그곳에서 음식을 주문한다. 배달부 청년이 올 때마다 나는 지갑을 찾는다고 야단법석을 떤다. 그가 기름기 붇은 봉투를 들고 문간에 서 있을 때면, 내가 춘권을 먹어치우고 침대로 올라간 뒤 자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날이 오늘밤은 아닐까 자문해본다. (p9-10)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 눈에 띄는 일을 계속 하는 사람. 누군가에 눈에 띄지 않는 날 죽기 싫어서 계속 눈에 띄는 일을 하는 사람. 우연히 만난 옛친구 브루노와 살았는지 죽었는지 매일 아침 확인하며 사는 사람. 외롭고, 외로운 사람.
혼자 살고 그렇게 늙어가면 저런 걱정이 들겠다 라는 동병상련이 들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데 혼자면, 나의 마지막을 누가 얘기해줄까. 누가 나의 죽은 모습을 발견하게 될까. 가능한 한 빨리 발견하게 해야 할텐데, 누가 내가 없다고 궁금해할까. 쓸쓸하지만 현실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가족을 만드는 걸까. 그런 걸 두려워하며 사는 노년이 싫어서... 나이들어서도 혼자인 사람들은 그래서 모여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생존신고는 하며 살게.
연휴가 끝나 살짝 우울한 날이지만(비연무룩), 햇살은 아직 밝으니 위로하며 하루를 잘 지내보자... 소심하게 홧팅.